'-적' 없애야 말 된다
 (1522) 도시적 1 : 마닐라의 도시적 삶

 

또 1997년 밀어닥친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마닐라의 도시적 삶에서 지칠 대로 지친 로잘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던 어떤 눈이 떠지는 순간이었다
《이매진피스 임영신,이혜영-희망을 여행하라》(소나무,2009) 325쪽

 

  “글로벌(global) 경제위기 속에서”는 “세계 경제위기에서”나 “온누리 경제위기에서”로 다듬어 봅니다. “로잘리의 영혼(靈魂) 깊은 곳”은 “로잘리 넋 깊은 곳”이나 “로잘리한테 마음 깊은 곳”으로 손보고, “눈이 떠지는 순간(瞬間)이었다”는 “눈이 뜨는 때였다”나 “눈을 뜨는 때였다”로 손봅니다.


  한국말사전에도 오른 ‘도시적(都市的)’은 “도시에 어울리는”을 뜻한다고 합니다. 한국말사전 보기글로 “도시적 분위기”나 “도시적인 세련된 아가씨”가 나옵니다. ‘-적’을 붙여서 “-에 어울리는”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도시적 분위기”란 “도시 같은 분위기”를 말할 테고, “도시적인 세련된 아가씨”는 “도시스럽게 세련된 아가씨”를 말하는구나 싶어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착한 아가씨더러 ‘시골적’이라 하지 않아요. ‘시골스러운’이라 합니다. 그러니 “도시적인 아가씨” 아닌 “도시스러운 아가씨”처럼 말해야 올발라요.

 

 마닐라의 도시적 삶에서
→ 마닐라라는 도시 삶에서
→ 마닐라 같은 도시에서 살며
→ 마닐라 같은 도시에서
 …

 

  도시와 맞물리는 터전인 시골을 새삼스레 떠올려 봅니다. 도시라는 낱말 뒤에는 으레 ‘-적’을 붙여 ‘도시적’이라 쓰곤 하지만, 시골이라는 낱말 뒤에는 ‘-적’을 잘 붙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시골적’과 ‘시골틱’ 같은 말을 쓰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여러모로 헤아려 보는데, 시골이라는 낱말에는 ‘시골스럽다’나 ‘시골답다’가 잘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도시라는 낱말 또한 ‘도시스럽다’나 ‘도시답다’라 하면 되는데, 어쩐지 이런 말투보다는 ‘도시적이다’처럼 적을 때가 한결 알맞거나 어울린다고 여기는 분이 많구나 싶어요.


  사람들이 하도 이렇게 써서 어쩔 수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네 도시 삶이란 온통 ‘쓰고 버리는’ 흐름에 몸을 맡기기 때문에, 말 또한 이 흐름에서 벗어나기 어렵구나 싶기도 합니다. 수수하거나 조촐하게 살아가기보다는 겉을 꾸미거나 부풀리는 물결에 휩쓸리는 도시 매무새인 탓에, 글 또한 이 물결에 따라 떠돌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도시적 분위기
 → 도시에 어울리는 느낌 / 도시 같은 느낌 / 도시 느낌
 도시적인 세련된 아가씨
→ 도시에 걸맞는 말쑥한 아가씨 / 도시 느낌 나는 말끔한 아가씨
 도시적인 온갖 장치들
→ 도시다운 온갖 장치들 / 도시에 어울리는 온갖 장치들

 

  “도시적인 세련된 아가씨”란 도시 냄새가 나도록 잘 차려입은 아가씨를 가리키지 싶어요. 도시사람답게 잘 꾸민 아가씨라고 할까요. 이 보기글에서는 ‘도시사람답게’로 손볼 때에 한결 잘 어울리지 싶어요.


  조금 더 생각해 봅니다. ‘도시’ 아닌 ‘서울’이나 ‘부산’을 넣을 적에 어떤 말이 될까요. “서울적인 세련된 아가씨”나 “부산적인 세련된 아가씨”처럼 말하면 어떤 느낌이 될까요. 아무래도, 고장 이름을 넣으면 ‘-적’이 어설픕니다. ‘백두산’이나 ‘한라산’을 넣을 적에도, ‘제주도’나 ‘완도’를 넣을 적에도 ‘-적’은 어울리지 않아요. 고장 이름을 붙이자면 “서울내기다운 말쑥한 아가씨”나 “부산사람답게 말끔한 아가씨”나 “제주도 내음 물씬 풍기는 말쑥한 아가씨”처럼 써야 잘 어울려요.


  ‘도시적’과 맞물려, ‘한국적’이나 ‘세계적’ 같은 말을 사람들이 곧잘 씁니다. 쓸 만하니까 쓴다고 할 테지만, 참말 쓸 만하니까 쓰는지 아리송해요. 깊이 살피지 않으면서 ‘-적’을 붙이는 셈 아닐까 싶어요. 널리 헤아리지 못하기에 ‘-적’을 붙이면서, 외려 제대로 나타내는 길과 멀어지지 싶어요. 사랑스레 나눌 말을 생각한다면 사랑스레 쓸 수 있지만, 두루뭉술하게 생각하며 두루뭉술한 글을 써요. 아름답게 주고받을 말을 그린다면 아름답게 쓸 수 있으나, 흐리멍덩하게 생각하며 흐리멍덩한 글을 써요.


  “도시적인 생활양식”이나 “도시적인 곳”이나 “세련미와 도시적인 심플함의 연출”이나 “도시적인 영화”나 “도시적이고 팜므파탈적인 모던한 신부의 모습”이나 “도시적 구성”이나 “도시적 이미지의 대표 배우”나 “도시적이면서 섹시한 파티 플래너 진 역”이나 “도시적 이미지의 축제의 거리” 같은 말을 언제까지 듣거나 써야 할는지 궁금해요. ‘-적’을 붙이면서 이 말투뿐 아니라 다른 얄궂은 말투까지 달라붙어 아주 어지러운 모습 되는구나 싶어요. 도무지 무슨 얘기를 하자는 소리인지 알기 어려운 글이 늘어나고, 스스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한국말은 그예 일그러지는구나 싶어요. 4342.12.10.나무/4346.12.1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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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97년 밀어닥친 세계 경제위기란 회오리바람 한복판을 지나며, 마닐라 같은 도시에서 지칠 대로 지친 로잘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어떤 눈을 뜨는 때였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670) 도시적 2 : 도시적 수다

 

몇 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오랜만에 무, 배추 얘기 아닌 도시적 수다로 만찬을 즐겼다
《박효신-바람이 흙이 가르쳐 주네》(여성신문사,2007) 83쪽

 

  “몇 년(年)”은 “몇 해”로 다듬습니다. “-에 보는 얼굴들을 만나”는 그대로 둘 만하지만, ‘보는’과 ‘만나’가 같은 뜻이에요. 한쪽을 덜어야 글이 매끄럽습니다. ‘만찬(晩餐)’은 ‘저녁’이나 ‘저녁밥’으로 손봅니다.

 

 도시적 수다로
→ 도시 이야기로
→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로
→ 도시에서 지내는 이야기로
 …

 

  “도시적 수다”가 있으면 “시골적 수다”가 있겠지요. 누군가 이렇게 말할는지 모르나, 시골사람더러 “시골적 수다”를 나누자고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할밖에 없습니다. 시골사람은 이런 말을 안 쓸 테니까요. 시골사람은 “시골 수다”를 나누자 할 테고, “시골 이야기”를 주고받자고 하겠지요. 또, “시골스러운 이야기”라든지 “시골내음 나는 이야기”라든지 “시골빛 그윽한 이야기”라고 할 만합니다.


  “도시스러운 이야기”란 무엇일까요. “도시빛 감도는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요. “도시내음 나는 이야기”일까요. 가만히 보면,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이들은 ‘-적’을 붙여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투를 쓸 일이 시골에는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며 외국말과 외국 문화를 꾸준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으레 ‘-적’을 붙여서 말해요. 도시에서 학문을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문학을 하는 이들이 언제나 ‘-적’을 입에 달고 살아요.


  도시에서도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골목 이야기”를 해요. “골목적 이야기”를 하는 사람 없어요. 시골에서도 마을에서 오순도순 지내는 사람은 “마을 이야기”를 할 뿐, “마을적 이야기”는 아무도 안 합니다.


  도시 티를 낸다거나 도시 물이 든 삶빛을 내는 일은 나쁘지 않아요. 도시사람은 도시스럽고, 시골사람은 시골스러울 뿐이에요. 어디에서 살아가든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면서, 아름답게 말을 다독일 수 있기를 빌어요. 수수하면서 맛깔스럽고, 투박하면서 어여쁜 말빛 가꾸기를 빌어요. 4346.12.18.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몇 해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과 오랜만에 무, 배추 얘기 아닌 도시 수다로 저녁을 즐겼다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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