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글 바로 쓰기 1 우리 글 바로 쓰기 1
이오덕 지음 / 한길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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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길다 싶은 느낌글이니 느긋하게 읽어 주셔요.

후루룩 읽으려면... 굳이 안 읽어 주셔도 됩니다 ^^;;

차분하게 천천히

사랑 담아서 읽어 주실 분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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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을 읽는다 15

 


숲말에서 찾는 사랑·빛·꿈
― 우리 글 바로쓰기 1
 이오덕 글
 한길사 펴냄, 2007.9.10.

 

 

※ 책풀이 ※
1989년에 1쇄를 내고 1992년에 고침판을 내놓은 《우리 글 바로쓰기》. 이오덕 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 첫째 권이 나오기 앞서까지,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언제나 새롭게 배우고 돌아보면서 말을 하고 글을 써야겠다 하고 생각한 사람이 아주 드물었다. 책으로 읽고 신문으로 살피며 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될 뿐으로 여겼다. 어릴 적에 어느 만큼 어버이와 둘레 어른한테서 말을 배우면, 앞으로는 다시 말을 더 배울 일이 없다고 여겨 버릇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몇 가지 일본말을 고치자는 대목은 이야기했지만, 막상 이마저도 제대로 고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바로잡을 생각마저 안 하는 사람이 숱하게 있었다. 겉보기로는 모두 ‘한국말’이거나 ‘한국글’로 보이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한국말’도 아니요 ‘한국글’도 아닌 줄 깨달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 글 바로쓰기》가 나온 뒤에는 달라지거나 나아졌을까? 글쎄, 모를 노릇이다. 생각을 연 사람은 지난날에도 생각을 열었고 오늘날에도 생각을 연다. 생각을 안 연 사람은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생각을 안 연다. 게다가, 생각을 안 연 채 이러한 책을 읽으면 더더욱 스스로 삶과 넋과 말을 가다듬지 못한다. 어느 책을 읽더라도 생각을 열고 마음을 살찌우려고 해야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서 아름다운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리 글 바로쓰기》라는 책은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들이 슬기롭게 말하고 마음을 기울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비는 꿈을 담는다. 이 책 읽으려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여러 차례 되읽으려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 대목, 이 책에 담은 꿈과 사랑을 헤아려서 받아먹을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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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에 처음 나온 이오덕 님 《우리 글 바로쓰기》는 ‘우리 글(말) 바로쓰기’를 말합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 이 말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 = 우리 삶 바로쓰기”가 될 테지, 하고.


  이오덕 님이 쓴 다른 책을 살피면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늘 ‘삶을 가꾸는’이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글쓰기를 하든 교육을 하든 문학을 하든 문학비평을 하든, 언제나 ‘삶을 가꾸는’을 앞에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글 바로쓰기라 할 때에도 ‘삶을 가꾸는 우리 글 바로쓰기’입니다.


  그저 글만 바로써서는 글조차 바로쓰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만 바로쓰는 듯 시늉을 하더라도 속내까지 바로서지 못해요. 우리 글을 바로쓰자는 이야기는 겉으로 드러나는 한글로만 잘 쓰자는 소리가 아닌, 우리 삶을 바로세우면서 우리 넋을 바로잡자는 뜻입니다.


  삶과 넋과 말은 하나이거든요. 삶 따라 넋이 살고, 넋 따라 말이 흐릅니다. 삶을 가꾸는 사람은 언제나 넋을 가꿉니다. 그렇겠지요.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람이 넋을 아름답게 안 가꿀 까닭이 없어요. 사회운동을 하든 교육운동을 하든 정치운동을 하든, 삶을 바로세울 때에 넋이 바로서요. 그리고, 이 흐름이 고스란히 흐르고 또 흘러서 말을 바로세웁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을 바로세우지 않는 모든 운동은 거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과 넋을 바로세우지 않았기에 말을 바로세우지 못하거든요. 삶과 넋을 바로세우면 말은 저절로 바로섭니다. 말을 바로세우지 못한 매무새라면 아직 삶과 넋을 바로세우지 못했다는 뜻이요, 입으로는 이런 운동 저런 혁명을 외친다 하더라도, 몸과 마음과 속내로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이에요.


.. 우리는 누구든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부모로부터 평생을 쓰게 되는 일상의 말 대부분을 배웠다. 그러나 학교란 곳에 들어가고부터는 집에서 배운 말과는 바탕이 다른 체계의 말을 익혀야 했다. 그래서 부모한테서 배운 말을 부끄럽게 여기고 잊어버리게 하는 훈련을 오랫동안 받았던 것이다 … 이제 이 나라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일조차 아예 그만두었다. 날마다 텔레비전을 쳐다보면서 거기서 들려오는 온갖 잡탕의 어설픈 번역체 글말을 듣고 배우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외국말과 외국말법에서 벗어나 우리 말을 살리는 일이다 … 말이 아주 변질되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 남의 글로써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말로써 창조하고 우리 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 먹는 것·입는 것·신는 것·잠자는 것, 그리고 보는 것·읽는 것·듣는 것이 모조리 서양 것이요 남의 나라 것이니, 말인들 어찌 우리 것이 남아 있겠는가? 이것이 모두 학교교육을 받았다는 신사 숙녀들의 꼴이다 ..  (6, 7, 8, 252쪽)


  한국말을 슬기롭게 쓰는 일이란,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내 하루를 슬기롭게 가다듬는 일입니다. 한국말을 아름답게 쓰는 사람은 한국사람으로서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한국말을 사랑스레 쓰는 사람은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을 아름답게 가꿉니다. 오늘 이 나라가 아름답다면, 사람들이 말을 아름답게 쓰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나라가 아름답지 않다면, 사람들이 말을 아름답지 않은 모습 되도록 쓰기 때문입니다.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까지, 이 나라 찾아오는 나라밖 손님들은 이 나라를 아름답다고 말했고, 조용한 아침나라라고도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난날에는 이 나라 사람들 거의 모두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조용히 살아갔어요. 임금님이나 지식인이나 관리도 있었을 테지만, 이들 숫자는 겨우 한줌밖에 안 되었어요. 거의 모든 이 나라 사람들은 시골사람으로서 시골말 쓰고 시골살이 누리며 시골빛을 나누었습니다. 삶과 넋과 말이 오롯이 시골내음입니다.


  나라밖 사람들은 바로 이 나라 시골사람 시골빛과 시골넋을 읽으며 ‘아름답구나!’ 하고 노래했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날 한겨레는 어떤 빛일까요? 오늘날 한국은 어떤 삶과 넋과 빛일까요? 오늘날 이 나라는 아름다움하고 얼마나 가까울까요? 오늘날 우리들은 사랑스러움하고 얼마나 어깨동무를 하는가요?


  꼭 시골빛이라서 가장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제 이 나라 시골마을 가만히 돌아보면, 어느 시골에서나 농약과 화학비료 엄청나게 써요. 농약과 화학비료로 땅을 무너뜨리면서 더 많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쏟아부어요. 더 거두고 더 뽑아올리려 합니다. 흙을 살리거나 살찌우는 길을 안 걷습니다. 흙하고 등지고 흙빛을 잃습니다.


  시골사람은 시골마을에서 시골노래 안 부릅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사람과 똑같이 텔레비전 연속극과 뉴스와 스포츠를 봅니다. 시골 아이도 도시 아이와 똑같이 컴퓨터게임을 합니다. 요즈음 시골은 시골빛이 없어요. 시골빛이 사라지고 시골노래 사그라들었으며 시골사랑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면 도시는? 오늘날 이 나라 도시에는 어떤 빛이 있을까요? 이 나라 도시에는 어떤 사랑과 꿈이 흐드러질까요?


  그러니까, 오늘날 이 나라 도시사람들은 어떤 ‘삶·넋·말’로 하루를 누리는가요. 어떤 ‘삶·넋·말’로 이웃을 사귀고 사랑을 속삭이며 아이들을 보살피는가요. 시골에서 도시로 아이들 보내는 어른들은 어떤 ‘삶·넋·말’을 아이들한테 물려주는가요. 도시와 시골에서 교사로 일하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대학입시 아닌 어떤 ‘삶·넋·말’을 가르치는가요.


.. 나도 어린아이들의 말과 글에서 우리 말의 순수함을 배웠다. 그래서 어른들이 쓰는 글과 말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내게 되었다 … 글을 써 놓고는 언제나 《쉬운 말 사전》을 옆에 두고 글이 쉽게 읽히도록 고치고 다듬지만 그래도 수십 년 동안 길이 든 글장이의 못된 버릇이 자꾸 나와 어렵게 쓰고 잘못 쓰고 한다. 어찌 나뿐이겠나 … 누구나 다 그런데 하고 잘못 쓰는 것을 그대로 보아 줄 것이 아니라 기회 있는 대로 서로 잘못을 알리고 충고하고, 그렇게 충고하면 또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중국글자말이라도 순수한 우리 말이 있으면 중국글자말을 피하고 순수한 우리 말을 써야 한다. 그 까닭은, 우리 말이 더욱 부드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로 들었을 때나 글자로 썼을 때 더 알기 쉽기 때문이다 … 일제시대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본말 ‘ほかならな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빤히 드러나는 일본말을 쓰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이런 괴상한 말을 써도 일본말인 줄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일본말을 잘못 직역한 글(‘다름이 아니다’)을 읽고는 그것이 우리 말인 줄 알고 그대로 또 받아 쓰니 이렇게 되는 것이다 ..  (9, 10, 55, 194쪽)


  삶이 일그러지면 넋이 일그러집니다. 넋이 일그러지니 말이 일그러집니다. 아이들 삶은 입시지옥에서 찌들고 다치고 아프고 시들어 괴롭습니다. 이 아이들 넋 또한 찌들고 다치고 아프고 시들어 괴로워요. 아이들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해요. 참 어처구니없어요. 푸르며 싱그러운 나이에 목숨을 끊다니요.


  삶이 없고 넋이 없으니 말이 없는 아이들이에요. 아이들 말이 왜 거친가요? 바로 어른들 말이 거칠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범죄가 왜 생기나요? 바로 어른들이 범죄를 저질러서 이 모습을 고스란히 배우기 때문입니다.


  어깨동무하는 마을 일구는 어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깨동무하는 꿈을 물려받습니다. 두레와 품앗이로 노래하는 마을 가꾸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라는 아이는 두레와 품앗이로 노래하는 사랑 이어받습니다.


  입시지옥에 갇힌 채 아이들 키우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칠까요. 이 아이들 자라 어른 되면 어떤 삶 누릴까요. 이 아이들 어른 되면 저희 어릴 때하고 똑같이 이녁 아이들을 입시지옥 쳇바퀴에 새삼스레 집어넣겠지요. 너무 뻔하고 너무 환하며 너무 마땅한 굴레입니다. 이런 쳇바퀴에서는 쳇바퀴와 똑같은 말이 흐릅니다. 이런 굴레에서는 꽉 막히거나 닫히거나 차갑거나 딱딱한 말이 흐릅니다.


  말만 예쁘게 쓰지 못해요. 넋이 예쁘지 않으니 말이 예쁘지 못해요. 말만 번드레하게 쓰지 못해요. 삶이 빛나지 않는데 말이 빛날 수 없어요.


  우리 글을 바로쓴다는 일이란, 우리 삶을 바로쓴다는 일입니다. 바르게 살고 바르게 생각하며 바르게 사랑할 때에 바르게 말합니다. 독재정권이 부르짖은 ‘바르게 살기’가 아닌 ‘참삶’ 가꾸는 바른 길이에요.


  참삶이란 참다운 삶입니다. 참다운 삶이란 착한 삶입니다. 착한 삶일 때에 고운 삶으로 이어요. 참다운 삶을 이으면서 참다운 넋 됩니다. 참다운 넋으로 참다운 말을 하지요. 참다운 말이란 참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며 나눌 말입니다. 이러한 말이 될 때에 착한 말이에요. 착한 말이란 착한 넋으로 주고받는 말이에요. 착하게 일하고 착하게 놀며 착하게 어깨동무하는 사람이 착한 말을 가꿉니다. 아이도 어른도 다 함께 착한 삶 되어 착한 넋 일구면서 착한 말 가다듬을 때에 즐겁게 웃어요. 착한 말에서 고운 말로 흐르면, 어느새 환하게 노래합니다. 고운 말이 고운 넋을 드러내고, 고운 넋으로 고운 삶 밝힙니다.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에서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삶을 찾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찾아서 들려줍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꾸미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겉치레만 그럴싸하게 씌우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죽은 말 섣불리 되살리려 힘쓰지 말고, 한국말 아닌 한자말(중국말)에 기대지 말며, 일제강점기 찌꺼기와 몸통을 말끔히 털어낼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자고 얘기합니다.


  한국사람이니 한국사람답게 살아갈 노릇이에요. 중국말에 기댈 까닭 없이 한국말을 살찌우면 됩니다. 한국사람이니 한국땅을 가꿀 노릇이에요. 미국에 기댈 까닭 없이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땅 가꾸면 됩니다.


.. 우리가 몰아내어야 할 중국글자말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글자로 썼을 때나 입으로 말했을 때 그 뜻을 알 수 없거나, 이내 알아차릴 수 없는 말이다 … 이 ‘燒死’란 중국글자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 글자로 ‘소사’라고 쓰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타 죽어’ 이렇게 알기 쉬운 우리 말을 쓰지 않는 까닭이 어디 있는가 … 입으로 말했을 때 그 뜻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중국글자말이 많다. 본래 중국글자말은 민중들이 일하는 삶 속에서 생겨나고 쓰인 것이 아니라, 양반이나 관리들·학자들이 읽고 있는 글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 상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모두 ‘수상’이니, 이런 말은 이제 안 쓰는 것이 옳다. ‘상을 주다’, ‘상을 받다’로 쓰면 쉽게 분명해진다 … 그렇다면 (‘준용하천’을) ‘작은 내’라고 적어 놓으면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알기 쉬운 말로 적어 놓으면 행정과 행정관리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가 … 이 ‘조황’이란 말은 낚시꾼들이 쓰는 말인지 모르지만, 어느 사전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이런 중국글자말은 안 쓰는 것이 좋겠다 ..  (19, 25, 30, 34, 49, 55쪽)


  우리가 이 나라에서 쓰는 모든 말은 맨 처음에는 시골사람이 지었습니다. ‘우리’라는 말도 ‘너’와 ‘나’라는 말도, ‘가다’와 ‘보다’와 ‘먹다’라는 말도 시골사람이 지었어요. 지식인은 ‘공동체’를 말하지만, 시골사람은 그저 ‘마을’을 말해요. 지식인은 ‘연대’를 말하지만, 시골사람은 그냥 ‘어깨동무’를 말해요.


  사람을 살리는 모든 말이 시골에서 태어나요. 밥과 옷과 집은 처음부터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흙에서 얻었습니다. 흙에서 자란 곡식과 열매를 먹지요. 흙에서 자란 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깁지요. 흙에서 자란 나무를 베어 집을 짓지요. 흙이 있어야 삶이 있고, 흙이 있기에 사람이 있어요. 흙에서 삶과 사람이 태어나니, 모든 말은 시골사람이 흙하고 사귀면서 지었어요.


  이와 달리 요즈음은 일본과 중국과 미국과 서양에서 들여오는 물질문명으로 삶이 바뀝니다. 이 흐름에 따라 말 또한 이러한 모습을 좇습니다. 삶과 넋과 말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꿈이 ‘도시로 가서 살기’입니다. 1960∼70년대뿐 아니라 2010년대에도 시골 아이는 시골에 남으려 하지 않아요. 도시로 가려 해요. 시골에서 지내도 도시사람과 똑같이 텔레비전 보고 자가용 타며 제도권학교 입시지옥 똑같아요. 시골 아이라 하지만, 요새는 시골일 거들지 않아요. 시골 아이 또한 나락을 언제 심고 돌보며 베는지 몰라요. 시골 아이 가운데 나락 말리기를 아는 아이 드물어요. 이삭이 무언지 아는 시골 아이가 아주 드물어요. 쑥꽃이나 부추꽃을 아는 시골 아이조차 드물어요. 이제 시골 아이한테는 시골삶도 시골넋도 시골빛도 없습니다. 시골말이 없습니다. 도시 아이와 똑같은 ‘도시말’ 씁니다.


  도시 아이도 도시말 쓸 테지만, 시골 아이건 도시 아이건, 스스로 어떤 말인 줄 깨닫지는 못해요. 뿌리가 없는 삶에 뿌리가 없는 넋이고 뿌리가 없는 말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어떤 말을 쓸까요?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어떤 말을 물려줄까요? 어쩔 수 없이, 뿌리가 없는 말을 물려주고, 뿌리가 없는 넋을 물려줄 테며, 뿌리가 없는 삶을 다시금 물려주고 말겠지요.


.. ‘위치하고 있다’에서 ‘위치하고’란 말은 전혀 소용이 없는 말이다. ‘있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위치한다’고 쓰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글을 유식하게 쓰려고 하는 헛된 몸가짐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바탕을 병들게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 ‘자유’란 말은 ‘-롭다’, ‘-스럽다’를 붙여 그림씨로 쓰지, ‘-한다’를 붙여 움직씨로 쓰지는 않고 쓸 수도 없다. 왜 이렇게 우리 말법에도 어긋난 말을 제멋대로 쓸까? 어쩌다 시인들이 ‘자유한다’를 쓰는 것을 보지만, 이 말이 우리 말로 될 수는 없다고 본다 … 이 ‘가열차게’는 쓰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이 말이 민중의 입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쓰기 시작한 말이기 때문이다 … 중국글자말 다음에 또 같은 뜻의 다른 중국글자말이나 우리 말이 붙는 것은, 중국글자말이란 것이 얼른 그 뜻을 알아내지 못하는 말이 되어 있어서, 저절로 그 다음에 알기 쉬운 말을 더 붙이고 싶어하는 심리에서 오는 현상이다 … ‘심도 깊은’은 ‘심도 있는’이라고 하면 되지만, ‘심도’란 말은 안 쓰는 것이 좋으니 ‘깊이 있는’이든지 ‘깊은’ 하면 될 것이다. 이런 잘못된 말들이 모두 중국글자말을 즐겨 쓰는 데서 온다 … 국민학생들이 ‘매일마다’를 많이 쓰고 있는데, 알고 보니 학교의 선생님들이 쓰는 것을 아이들이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 ‘날마다’ 하면 될 것을 왜 ‘매일’이라 쓰는가? 그러니까 ‘매일마다’가 생겨나는 것이다 ..  (84, 87, 88, 89, 90쪽)


  삶을 가꾸는 길을 걸어야 삶을 가꿉니다. 생각만 해서는 삶을 가꾸지 못합니다.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함께 쏟아야 합니다. 흙을 만지야 흙빛을 압니다. 나무를 돌보고 사랑해야 나무빛을 압니다. 풀을 쓰다듬고 즐겨 뜯어서 먹어야 풀빛을 압니다.


  고운 옆지기하고 마음으로 사귀어야 서로 ‘마음을 알’아요. 마음으로 사귀지 않으면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삶을 가꾸는 길은 그야말로 삶을 가꾸는 하루를 누리는 길입니다. 말을 가꾸는 길은 그야말로 말을 가꾸는 하루를 누리는 길입니다.


  생각해야지요. 생각했으면 움직여야지요. 움직였으면 거듭나야지요. 거듭났으면 새롭게 사랑해야지요. 새롭게 사랑했으면 활짝 웃으며 노래해야지요.


  지난날 시골사람이 처음 말을 지을 적에는 모든 말이 노래였습니다. 작곡가나 작사가나 가수 따로 없어도 모두 노래꾼인 시골사람이었습니다. 시골지기는 노래지기였으며 말지기였어요.


  마음속에서 샘솟는 노래가 시나브로 흐릅니다. 마음속에서 샘솟는 노래는 말로 태어나면서 새로운 웃음 터뜨립니다. 새로운 웃음 터뜨리는 말이 하나둘 태어나면서 아이들도 새로운 사랑을 깨닫고, 아이들이 자라며 꾸준하게 새로운 사랑으로 새로운 말을 빚습니다.


  과학으로 물질문명을 만드니, 학문으로 말을 만들기도 하는데, 과학이나 학문은 오래 버티지 못해요. 자꾸 바뀌지요. 그래서, 과학이나 학문으로는 말을 가꾸지 못하고 살찌우지 못합니다. 삶으로만 삶을 살찌우니, 이러한 삶 아니라면 새말을 지었어도 오래도록 쓰지 못합니다. ‘바람’과 ‘해’와 ‘흙’이라는 낱말을 얼마나 오래도록 썼을까요. ‘사랑’과 ‘꿈’과 ‘사람’이라는 낱말을 얼마나 오랜 나날 썼을까요. 그런데 이런 낱말은 앞으로 수억 해 더 써도 질리거나 물리지 않아요. 아름답게 삶을 일구며 저절로 지은 낱말이기 때문입니다. 과학도 아니고 학문도 아닌 오직 삶이기 때문에 오래오래 푸른 숨결 잇습니다.


.. 이 말을 바로잡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일체’란 말도 쓰지 말고 순수한 우리 말로 쓰는 것이다. 모든 것, 온갖 것, 아주, 도무지, 전혀 들과 같이 그때그때 알맞은 우리 말을 골라 쓰면 얼마나 깨끗하고 분명하고 좋은가? 아름다운 우리 말을 두고 중국글자말을 쓰자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 말법이 비슷해서 그대로 직역해 놓아도 대강의 뜻은 짐작할 수 있다는, 게으르고 성의 없고 책임감 없는 태도가 화를 불러일으킨다. 일본글의 본뜻이 잘못 옮겨지는 것이야 우리로선 그 잘못이 거기에 그친다고 하겠지만, 우리 말이 일본글을 따라 괴상하게 씌어지는 것은 예사일이 아니다 … 중국글을 읽을 때도 우리는 이 ‘於’ 자를 ‘에’ ‘에서’ ‘에게’ ‘부터’로 읽지, ‘-에 있어서’라고 하지 않는다. 일본보다 우리가 중국글을 먼저 썼지만, 옛날 어디에도 ‘-에 있어서’는 없다. 또 지금도 글을 읽지 않는 시골사람들은 이 말을 결코 쓰지 않는다. 이 말은 일본제국이 이 땅에 들어온 뒤에 일본글 공부를 한 사람들이 쓴 글에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 것이다 ..  (97, 104, 118쪽)


  흙에서 자란 곡식과 열매를 먹고, 흙에서 자란 풀에서 실을 얻으며, 흙에서 큰 나무로 집을 짓습니다. 흙은 숲을 이루는 밑바탕입니다. 숲을 이루자면 흙이 있어야 합니다. 흙은 햇볕과 바람과 물이 있어 이루어집니다. 햇볕도 바람도 물도 없다면 흙이 없고, 흙이 없으면 숲이 없어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목숨은 해와 바람과 비와 흙이 있어 태어나 살아갑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질 수 없어요. 해가 바람을 낳고 바람이 비를 낳으며 비가 흙을 낳습니다. 흙은 풀을 낳고 풀은 나무를 낳으며 나무는 숲을 낳아요. 그리고, 숲이 태어나고서 사람이 태어납니다.


  시골말이란 숲말입니다. 왜냐하면, 시골이 이루어지자면 숲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거든요. 사람은 시골에서 흙을 일구어 밥과 옷과 집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이 일굴 만한 흙이란 푸르게 우거진 숲에 있어요. 숲에서 사람이 나고, 숲에서 짐승이 나며, 숲에서 벌레와 새가 나요. 숲에서 사랑이 나고, 숲에서 꿈이 나며, 숲에서 이야기가 나요.


  먼 옛날 어떤 사람이 ‘숲’이라는 낱말을 혀에 얹어 입으로 톡 내놓았을까요. 먼먼 옛날 어떤 시골사람이 ‘숲’이라는 낱말을 마음속 가득 넘실거리는 사랑으로 노래하며 지었을까요.


  시골에서 숲을 누리며 흙을 만지는 사람들이 짓는 낱말은 푸른 숨결 가득합니다. 이 낱말은 쓰면 쓸수록 아름답고 싱그럽습니다. 숲말을 누리는 사람은 숲넋을 누려요. 숲넋을 누리는 사람은 숲삶을 누리지요.


  숲에서는 쓰레기가 없어요. ‘쓰레기’라는 낱말조차 없습니다. 숲에서 빚은 숲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씨앗처럼 자라는 말입니다.


.. 우리 말의 특성을 없이 보고 남의 남의 나라 말에 따라가려고 할 때 우리 말은 죽는다 … 흔히 쓰는 쉬운 입말이나, 좀 논리를 세워서 쓰는 글이라도 입말체로 쉽게 써도 될 것을 공연히 남의 나라 말 번역한 글같이 함부로 ‘-의’를 넣어 쓰는 버릇은 우리 말을 죽이는 글쓰기라 아니할 수 없다 … 그래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을 남긴 분도 아이들에게 잘못된 말을 가르쳐 우리 말을 병들게 했을 경우 그 잘못을 드러내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 일본글에서나 우리 글에서 어찌씨(부사)로 쓰는 ‘보다(より)’란 말은 그 근원이 영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가 ‘세계어’처럼 되어 얼마나 많은 나라 말에 스며들고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같은 영어의 영향을 받아도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의 태도가 크게 다르다 … 남의 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을 옳다고 볼 경우란, 남의 것을 바르게 알려고 애쓰면서 우리 것을 지키는 노력을 힘껏 한 다음에 받은 것이라야 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제것은 다 내버리고 남의 것에만 홀려 따라가는 짓을 옳다고 볼 수는 결단코 없다  ..  (131, 132, 189∼190쪽)


  우리 글 바로쓰기가 나아가는 길은 ‘숲말 쓰기’입니다. 숲말을 쓰자면 숲에서 살아야 합니다. 숲말을 쓰며 아름답게 삶과 넋과 말을 가꾸자면, 숲이 있는 곳에서 살아야겠지요. 시골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 시골은 시골빛을 잃어요. 시골빛이 시골에 없어요. 애써 시골에 간다 한들 시골빛을 누리지 못하니 시골말로 다시 태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무 말이나 엉터리로 써도 될까요? 우리 아이들한테 엉터리 삶을 물려주어도 되나요?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엉터리 나라에서 엉터리 일을 하면서 엉터리 마음으로 바보짓을 일삼아도 되나요?


  숲이 사라진 시골이고, 도시에서도 숲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처럼 숲을 잃거나 잊은 오늘날이기에, 새로운 숲을 일구어야 해요. 새로운 숲을 찬찬히 가꾸고, 새로운 숲이 널리 퍼지도록 힘을 쏟아야 합니다.


  먼저 시골은 시골빛을 찾아야 합니다. 도시는 도시대로 곳곳에 조그맣게 풀숲 있어야 합니다. 빈터에 자가용 대 놓는 자리 늘리지 말고, 빈터에서 자가용 쫓아내어 나무를 심고 풀밭을 이루어야지요. 빈터를 차지하는 자가용 몰아내어 이 빈터에서 풀과 나무와 꽃이 자라면서, 어른들 쉬고 아이들 놀 자리가 되도록 해야지요.


  마을이 마을답게 다시 태어날 때에 삶이 삶답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삶을 가꾸면서 넋을 가꾸어야지요. 이렇게 삶과 넋을 가꾸며 말을 함께 가꾸어야지요. 학교에서 국어 수업 늘린들 말을 사랑하거나 가꾸거나 아끼지 못해요. 제도권학교 국어 수업이란 대학입시일 뿐이니까요. 대학입시 아닌 ‘삶을 가꾸는 말’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스스로 삶을 가꾸고 넋을 가꾸며 말을 가꾸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른들부터 아름답게 삶길·넋길·말길 되찾아야 아이들도 차근차근 아름다운 삶길·넋길·말길 찾을 수 있습니다.


.. 곧 ‘한테’ ‘한테서’란 말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알기 쉬운 말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민중의 말이요, 진짜 우리의 말 아닌가? 이른바 표준이 되어야 할 말이 아닌가 … 대관절 사전에서 낱말을 풀이하는데, 널리 쓰이는 민중의 말을 두고 ‘통속적’이란 딱지를 붙이다니 이래서 되겠는가? ‘통속’이란 말에는 두 사전의 풀이에는 없지만 내가 느끼기로 속되다, 곧 ‘고상하지 않고 천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한테’ ‘한테서’가 통속적으로 쓰이는 말이라고 한 것은 분명히 이런 ‘고상하지 못하고 천한 말’이란 뜻으로 한 말일 것이다 … 통속적이 아닌 말, 고상한 말을 표준말로 삼는다고 중류사회의 말을 쓰다 보니, 농민의 말·민중의 말은 ‘통속적인 말’로 버림받고, 사전에까지 ‘통속적’이라 풀이해 놓는 것 아닌가 … 이 말(‘입장’)은 해방 직후부터 문제가 되어, 한글학회에서도 일본말이니 쓰지 말자고 하였지만, 워낙 일본말 버릇에 굳어져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문화 전반에 걸쳐 남의 것을 흉내내고 따르는 병든 풍조가 수십 년 동안 사회를 휩쓸어 온 결과, 이제는 이 말이 일본말인 줄 아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쓰게 되는 데까지 와 버렸다. 모든 역사가 뒷걸음질을 쳐 온 자취가 이런 말 한 마디에도 엿보인다 ..  (182∼183, 201쪽)


  이오덕 님은 우리들한테 아름다운 선물 하나 남겼습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라는 책은 사람들마다 어떻게 ‘말과 넋과 삶을 찾느냐’ 하는 실마리를 풀어 줍니다. 과학이나 학문으로 밝히는 책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고 넋을 노래하며 말을 사랑하는 꿈을 보여줍니다.


  말마다 어떤 삶이 깃들었는지 알려줍니다. 말마다 어떤 넋이 배었는지 밝힙니다. 찬찬히 읽어 보셔요. 지식으로 읽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읽어 보셔요. 책에 나온 대로 이 말은 이렇게 고친다든지 저 말은 저렇게 고치려 하지 말아요. 스스로 말과 삶과 넋을 되돌아보셔요. 오늘까지 살아오며 스스로 쓰는 말이 어떠한 넋에 따라 어떠한 삶을 걸으며 쓰는 말이었는지 짚어요.


  내 삶이 아름다운지 돌아봐요. 내 넋이 아름다운지 돌아봐요. 이러고 나서 내 말이 아름다운지 돌아봐요. 삶과 넋과 말은 한 줄기예요. 한 줄기인 삶과 넋과 말이 한결같이 환하게 빛나며 맑고 고운 이야기 담도록 마음을 기울여요.


  딱딱하게 굳는 삶이라면 넋도 딱딱하게 굳어요. 지식이나 재산이나 계급이나 학력 따위로 이웃 사이에 울타리 세우는 삶이라면 말도 차갑고 어렵지요.


  어머니가 아기한테 어떤 말을 쓰는지 헤아려요. 어머니가 아기한테 젖을 어떻게 물리고 자장노래 어떻게 부르는지 헤아려요. 어머니가 아기 똥오줌 어떻게 치우고 아기를 어떻게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고 놀리면서 돌보는지 헤아려요.


  어머니 손길대로 흙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손길대로 숲을 바라보면서 얼싸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손길대로 지구별을 포근히 품으면서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소설이고 동화고 수필이고 할 것 없이, 지금 우리 글은 순수한 우리 말인 ‘웃는다’와 이 ‘웃는다’를 꾸미는 온갖 아름다운 어찌씨들을 다 쫓아내고, 대신 ‘미소짓다’ 한 가지만 쓰려고 하고 있다 … 일본제국은 이 땅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우리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문화와 전통까지도 강요했다. 또 어떤 것은 강요하지 않아도 일본말 일본글을 통해 지식을 얻고 생각을 이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의 문화를 아무 비판도 없이 그대로 우리 것으로 번역해 제것인 양 그 속에서 살고, 다시 이것을 자라나는 세대에 물려주었다 … 우리들에게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말을 할 줄 모르고 남의 흉내만 내는 버릇이 들어 그렇다 … 이 말(‘입구’)을 바로잡기에는 벌써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행정하는 사람이 마음만 바로 가지면 하루아침에 우리 말을 도로 찾을 수 있다 … 행정은 일제식민지 때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중국글말과 일본말을 퍼뜨리고 순수한 우리 말을 없애는 일을 앞장서 하고 있다 … 옛날 우리 백성들은 중국글자를 모르면 사람 대접을 못 받았고, 왜정 때는 일본말 일본글을 모르면 아주 못난 시골사람으로 천대받았다. 그런 잘못된 역사는 아직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 걸핏하면 외국손님 보기에 부끄럽다는 식으로 말하는 버릇도 우리가 마치 외국사람들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는 종살이본성에서 나온 말이다 ..  (203, 204, 211, 217쪽)


  숲말에서 찾는 사랑입니다. 살을 부빈대서 사랑이 아닙니다. 살을 부비면 ‘살부빔’입니다. 입을 맞춘대서 사랑이 아닙니다. 입을 맞추면 ‘입맞춤’입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


  숲사랑이라면 숲을 사랑하는 길이요 삶입니다. 숲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4대강 막삽질을 하면 숲을 사랑하는 길이 될까요? 항공방제라는 이름으로 숲에 헬리콥터로 농약 잔뜩 뿌리면 숲사랑이 되나요? 국립공원 이름표를 붙이거나 관광객 끌어모으면 숲사랑이라 할 만한가요?


  숲은 숲일 뿐, 국립공원도 관광지도 아닙니다. 숲은 숲일 뿐, 자원이 아닙니다. 정부에서는 교육부 이름을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꾸기도 해요. 교육을 하는 관청이 아닌 ‘자원’을 다스리는 관청이라고 밝힌 셈입니다. 그러면, 교육부는 무엇을 교육할까요? 이 나라에 이는 국립국어원은 어떤 ‘국어’를 돌보려 할까요? 국민학교에서 ‘국민’이 천황폐하 섬기는 식민지 백성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으나 2000년대에 가까워서야 비로소 이 이름을 겨우 떨쳤어요. 그런데, ‘국민이 쓰는 말’이라는 뜻인 ‘국어’를 정부에서 아직 버젓이 써요. 교과목 이름도 ‘국어’이고, 한국말 담는 사전조차 ‘한국말사전’ 아닌 ‘국어사전’이에요.


  ‘국기(깃발)·국가(노래)·국조(새)·국화(꽃)’ 모두 걷어치울 일제강점기 찌꺼기입니다. ‘국가’라는 한자말부터 싹 걷어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나라일 하는 사람 가운데 이런 말들 걷어내는 일꾼 없어요. 보수에서도 진보에서도 똑같습니다. 말을 말답게 바라보지 못해요.


  정치를 하거나 교육을 하거나 숲을 모릅니다. 정치를 하든 교육을 하든 숲하고 동떨어진 시멘트 건물에 갇혀서 합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가운데 텃밭 일구는 사람 없어요. 교사 가운데 스스로 나서서 아이들과 텃밭 일구는 이는 몇이나 될까요. 교장이나 교감 이름을 얻은 분들 가운데 학교에 주차장 아닌 텃밭을 마련하려는 이는 얼마나 있을까요.


.. 우리 말로 쓰는 소설에 꼭 남의 나라 말같이 남녀를 구분해서 ‘그’ ‘그녀’로 해야 할까 … 농사꾼 할머니를 ‘그녀’라고 불러야 글이 씌어질까 … 사라져 가는 순수한 우리 말 대신에 어떤 말이 생겨나고 어떤 말이 남게 되는가? 도시 산업사회의 병든 소비문화는 판에 박힌 획일의 말과 삶에서 떠난 추상의 말에다가 천박한 기분을 나타내는 감각의 말만을 남겨 놓는다 … 아무리 아이들까지 입으로 말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잘못된 교육으로 퍼뜨려진 말이라면 쓰지 말아야 한다 … 우리는 남의 말과 글을 쳐다보고 따르기 때문에 우리 것이 보이지 않고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 말을 살려서 쓰고, 살아 있는 말을 써야 하는 것이지, 사전에서 말을 찾아 거기에 맞춰 쓰려니 ‘꼭 맞는 우리 말이 없다’고 하게 된다. 어느 나라 말이고 완전히 같은 말이 어디 있는가 … ‘캠퍼스’‘채플’ ‘오리엔테이션’ 같은 말을 꼭 써야 대학의 권위가 서는 것일까? 대학이 서양말을 퍼뜨리는 데 앞장설 것이 아니라 순수한 우리 말을 쓰고 겨레말을 이어가는 데 앞장서 주었으면 좋겠다 … 우리 말글을 학대하는 사람은 무식한 시골사람이 아니라, 문인·예술가·학자와 같은 지식인들임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 ‘아버지’ ‘어머니’ 이것이 우리 겨레의 말이지 ‘훤당’ ‘춘부장’ ‘대부인’ 같은 말이 우리의 모국어가 될 수 없다 ..  (213, 215, 221, 223, 225, 236, 238, 311쪽)


  숲말에서 찾는 빛입니다. 삶에는 빛이 있어야 밝습니다. 빛이 없는 삶은 어둡습니다. 빛이 들지 않는 집은 어둡습니다. 어두운 집에서는 삶뿐 아니라 넋도 어둡고 말아요. 그런데, 도시에서는 어두운 집을 자꾸 지어요. 어두운 집에 갇히도록 하고, 어두운 집에서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나 혼자 빠져나올 뿐 이 어두운 집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숲빛은 모두한테 골고루 드리웁니다. 누구한테는 안 주고 누구한테는 더 주는 빛이 아닙니다. 말은 모두한테 골고루 깃듭니다. 이 사람한테는 이 말이 안 깃들고 저 사람한테는 이 말이 더 깃들지 않습니다.


  숲을 누리면서 빛을 누립니다. 빛을 누리면서 삶을 누립니다. 빛이 있는 삶이기에 삶빛이 맑아요. 빛나는 삶을 누리면서 넋빛이 곱습니다. 빛으로 어깨동무하는 고운 넋을 나누면서 말빛이 싱그럽습니다.


  삶빛이 그대로 넋빛이며, 넋빛은 다시금 말빛입니다. 아이들이 배울 한 가지라면 사랑 어린 빛입니다. 사랑빛을 배울 아이들입니다. 아이들한테 가르칠 한 가지라면 사랑 담은 빛입니다. 사랑빛을 가르칠 어른들입니다.


  빛나지 않는 말이라면 가르치거나 배울 뜻이 없어요. 빛나지 않는 넋이라면 책으로 읽거나 알릴 뜻이 없어요. 빛나지 않는 삶이라면 돌아볼 값어치가 없어요. 전쟁에 미친 삶을 왜 돌아보겠어요. 이웃을 아끼지 않는 어두운 사람들 삶을 왜 돌아보겠어요. 아름답게 빛날 때에 ‘삶’이나 ‘넋’이나 ‘말’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 가을날 쳐다보이는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은 하늘에 있는 감이니, 이것은 땅에 붙어 있는 땅감이지. 본래 우리 겨레는 이렇게 좋은 말을 얼마든지 만들어 쓰고 있었던 것이다 … 농민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의 이름을 짓고, 산과 내의 이름을 짓고, 마을의 이름을 지었다. 풀과 나무의 이름도, 짐승이며 벌레의 이름도 물고기의 이름도 지었다. 농사를 짓는 데 쓰는 여러 가지 연모의 이름도 지었고, 일을 할 때 필요한 말, 일을 하면서 느끼는 괴롭고 즐겁고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말을 지어서 쓰고, 사랑과 미움, 소망과 절망 등 온갖 마음을 말로 나타내었다 … 삶의 주인인 농민들이 스스로 말을 창조하고 쓰면서 즐기고 전하던 시대에는, 그들의 말밖에 따로 인간을 겁주고 짓누르는 말이 거의 없었다 … 농민의 말이요 백성의 말인 우리 겨레의 말과 글은 남의 땅에서 들어온 중국글자말과 일본말과 서양말에 시달려 ‘삼중고’의 병신으로 앓고 있다. 우리 말글이 앓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 백성들이 앓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말을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우리 백성들을 어떻게 살리나 하는 문제가 된다. 나는 여기서 더구나 지식인들의 커다란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말을 살린다는 것은 바로 우리 말을 백성의 말로 한다는 것이고, 우리 말을 백성의 말로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백성의 사회로 만든다는 것이다 ..  (246, 253, 255쪽)


  숲말에서 찾는 꿈입니다. 꿈을 꾸면서 살아갈 기운을 찾습니다. 꿈을 꾸는 동안 사랑할 삶을 깨닫습니다. 꿈을 꾸고 찬찬히 이루면서 하루하루 얼마나 즐거운가 하고 느낍니다.


  말은 즐겁게 할 때에 빛납니다. 즐겁게 하지 않는 말은 빛나지 않습니다. 즐거움 없이 글다듬기만 한다면 재미없어요. 말은 사랑스럽게 할 때에 빛납니다. 사랑스럽게 하지 않는 말은 빛나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글쓰기만 한다면 따분해요. 따분한데다가 서늘하고 차가우며 매몰찹니다. 모든 글에는 사랑이 깃들어야 읽을 만합니다. 말은 아름답게 할 때에 빛납니다. 아름답게 하지 않는 말은 빛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 없는 글을 읽는 사람은 소금 아닌 염화나트륨 조합물 먹는 셈입니다. 사랑으로 키우지 않은 푸성귀나 곡식을 먹으면 영양분은 얻을 테지만 사랑을 얻지 못해요.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버이 품을 누리지 않은 아이는 몸은 클 테지만 마음이 깊지 못해요.


  숲말이란 푸른 숨결 깃든 말입니다. 꿈을 꾸는 숲말이란 푸른 숨결이 오물조물 흐르는 말입니다. 꿈을 사랑스레 담는 숲말이란 지구별에 푸른빛 감돌도록 이끄는 말입니다.


  지난날 세종임금은 ‘말을 담는 그릇’인 글을 빚었지만, 막상 이 글은 ‘시골사람이 주고받는 한국말’ 담는 그릇이 아닌 ‘중국글 모든 소리를 옮길 수 있는’ 그릇이었습니다. 시골사람은 글이 없어도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오직 관청사람과 임금과 신하와 지식인만 한자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의사소통). 그래서, 지난날 세종임금이 ‘우리 글’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막상 ‘우리 글’로 글을 쓰지 않았어요. 우리 글로 정치나 문화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글이 있어도 사람들이 영어를 더 즐겨씁니다. 영어를 써야 하는 자리라면 영어를 쓸 일이지만, 영어를 쓸 일이 없는 자리에 영어를 써요. 영어 모르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아요. 한자 모르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어려운 한자말 쓰는 지식인처럼, 영어 모르는 사람은 헤아리지 않고 영어를 마구 쓰는 오늘날 사회 흐름이에요.


.. 내가 걱정하는 것은 소설가고 시인이고 실제로 그 삶을 체험하지는 않고 다만 말만으로 온갖 근사한 이야기, 허망한 이야기들을 다 꾸며 보이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 말들이 모두 뿌리도 없이 생겨나고 피어난 꽃처럼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 옛날부터 언제나 백성들 위에 버티고 앉아 있는 몸가짐을 버리지 않는 벼슬아치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그 말을 유식하게 하려 하고 글을 어렵게 씀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 ‘나는’ 하고 말을 시작하면 그 다음 말도 사람다운 말로, 적어도 사람다운 말에 가까운 말로 나오게 된다. 그런데 관리들은 그것을 도리어 겁내고 꺼리는 것이다. 그렇게 쉬운 말로, 보통 사람들이 하는 말로 해서는 우선 자기의 권위가 떨어지고, 다음에는 자기가 지금부터 지시하고 명령하고, 혹은 겁주기까지 해야 하는 말을 도무지 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국민학생들은 1학년이고 6학년이고 그 말에 높낮음이 없고 평등하다. 그런데 중학교만 들어가면 한 학년만 달라도 한쪽은 높임말을 쓰고 한쪽은 낮춤말을 쓴다. 이런 말의 질서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꽉 짜여 요지부동으로 되어 있다. 학교교육의 군대식 체제가 얼마나 뿌리깊이 파고 들어가 있는가 … 우리 소설은 우리의 삶을 보여주고 이야기한 글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을 말하는 글이 삶의 말이 아닌 글말, 남의 나라 글을 따르고 옮겨 쓴 말이 되어서 어찌하겠는가 ..  (261, 265∼266, 309, 407쪽)


  사람한테는 글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말이 없더라도 서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따로 말이 없어도 될 테지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서로 마음읽기를 안 해요. 마음을 꽉 닫아 겁니다. 이녁 마음을 꾸밈없이 읽지 못하거나 않으며, 내 마음을 스스럼없이 열거나 틔우지 않아요.


  글이란 대수롭지 않습니다. 말이 없이는 글이 부질없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대단하지 않습니다. 말이 있기에 글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말을 가꿀 줄 아는 삶일 때에 글을 가꿀 줄 압니다. 말을 사랑할 수 있는 넋일 때에 글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이 밑바탕을 바라보았어요. 글쓰기와 교육과 문학에서 언제나 ‘삶’을 맨앞에 놓고 이야기한 까닭은 삶에서 비롯하는 말이요, 말을 글이라는 그릇에 담아 사랑을 널리 나누는 흐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이라면 삶말일 때에 말입니다. 글이라면 삶글일 때에 글입니다. 노래라면 삶노래일 때에 노래입니다. 춤이라면 삶춤이어야 하고, 사진이라면 삶사진이어야 해요. 일이라면 삶일이요, 교육이라면 삶교육입니다. 이 대목에서 이오덕 님은 ‘삶’이 무늬만 삶이 아닌 ‘참삶’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고, 참삶을 밝히는 교육을 하면서 아이들을 살려야 하니, 교육은 ‘참삶교육’ 또는 ‘참교육’ 또는 ‘삶교육’을 이야기합니다. 말이라면 ‘참삶말’이 되어야 할 테고, 또는 ‘참말’이나 ‘삶말’이 되어야 하겠지요.


.. 여기서 풀이름, 나무이름, 벌레이름 들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고 싶다. 산과 들에 나서 자라나고 있는 풀과 나무, 동물과 곤충의 이름들은 모두 농어민들이 지어 놓은 것이다. 그 이름들을 알고, 그 풀과 나무, 물고기와 새들을 가까이하며 산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곧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이 된다. 사실 우리 선조들은 여러 천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 풀이름을 말할 때 울리는 그 소리의 느낌만으로도 그 풀의 모양이 눈앞에 나타난다 … 우리 나라의 작가들은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는 풀이며 나무며 새들의 이름을 너무 모른다. 모를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 교사들이 제발 선생님이란 틀 속에 갇혀 있지 말라는 것이다. 길이 들여진 버릇, 길이 들여진 말과 행동, 거기서 빠져나와서 살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살아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의 자식을 키우는 교육이 된다 … 생각은 민주주의로 앞서가고 있는데 그 생각을 담은 그릇이 되는 말은 백성의 것이 아닙니다. 그 까닭은,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모두 책에서 지식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 백성들은 글로써 살지 않고 몸으로 일하면서 살고 있고, 그 일 속에서 배운 말로써 살고 있습니다 … 지식인들의 말과 글이 백성들의 말이 아니고 남의 말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남의 것, 즉 백성들 속에 살면서 그 삶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 책에서 얻은 지식이요 관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 지식이나 관념만으로 자기의 관점을 세워 나갈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책에서 얻은 사상은 자기의 삶에서 몸으로 가지게 된 생각과 하나로 될 때 비로소 그 사상은 제것으로 되지요. 제것은 없고 지식만 가지고 제것인 양 여긴다면 그것이 문젭니다. 말은 잘못되었는데 생각만은 바르게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 우리 말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비판하는 몸가짐이 없이는 옳은 생각을 가질 수가 없다고 봅니다 …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사상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남의 나라의 앞선 지식인들이 펼쳐놓은 사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앞선 지식인들은 모두 자기 나라 말로 자기 나라 글로 생각을 표현해 놓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272, 274, 275, 288, 328∼329쪽)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학교를 반드시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책은 종이책이나 교과서만 책이 아닙니다. 사람 하나가 책이고, 나무 한 그루가 책입니다. 들과 숲과 바다가 책입니다. 하늘과 구름과 해가 책입니다.


  해를 읽지 못하거나 날을 읽지 못하면서 종이책 줄줄 꿰면 무얼 하겠어요. 구름과 눈과 빗물을 읽지 못하고 졸업장만 거머쥔대서 무얼 할까요. 풀빛과 풀노래를 모르면서 문학상 탔대서 어떤 글을 쓸까요.


  아이하고 눈빛만으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풀벌레하고 가만히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습니다. 가랑잎에 아로새긴 가을노래 들을 수 있습니다. 구태여 종이책을 뒤적여야 하지 않아요. 종이책에까지 따로 더 담은 새로운 사랑노래 있을 때에 비로소 책을 손에 쥐면서 내 이웃들 삶을 읽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대 물질문명 사회가 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잃거나 놓습니다. 오랜 독재정권과 식민지 제국주의와 봉건제도에 짓밟히거나 짓눌리면서 ‘삶·넋·말’을 잊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말을 찾으면서 넋과 삶을 찾아야 아름다운 이 땅 다시 깨어날 텐데, 사람들은 톱니바퀴 되어 쳇바퀴질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 흐름이 너무 슬프고 아파서 이오덕 님이 쓴 책이 《우리 글 바로쓰기》입니다. 우리 말을 살리면서 우리 넋 살찌우고, 우리 넋 살찌우는 힘을 바탕으로 우리 삶 깨다는 길을 걸어가야 아름다울 테지만, 아직 이 대목까지 이르지 못하니, 적어도 ‘우리 글’이라도 바로쓰면서, 말을 바로잡고 바로찾으며 바로세우는 길을 걷자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뒷간’은 순수한 우리 말인데, 일본사람들이 와서는 일본말 ‘벤죠(便所)’, 곧 ‘변소’를 쓰게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는 ‘화장실’로 바뀌었다 … 옛날 높은 양반들이나 거의 모든 선비들은 ‘밥’을 먹고 살지 않았다. ‘조반’을 먹고 ‘석반’을 먹었던 것이다. 머슴이나 일꾼들, 부녀자들이 먹는 것만이 ‘밥’이요 ‘죽’이었다 … 옛날 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내고 등짐을 져서 둑을 쌓아 만든 것은 ‘못’이었지만, 기계의 힘을 빌려 크게 만든 ‘수리시설’은 ‘저수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농민들의 말은 ‘씨’요 ‘씨앗’이지 ‘종자’가 아니다. ‘씨를 뿌린다’ 하지 ‘종자 뿌린다’ ‘파종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 ‘어른’이라고 입으로 말하는 대로 쓰면 좋겠는데 왜 ‘성인’이라고 쓰는지 알 수 없다 … 참 얼마나 많은 말을 우리는 잃어버렸는가? 빼앗겨 버렸는가? 아니, 우리 스스로 짓밟아 버리고는 남의 나라 말 흉내내는 짓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가 … 일제시대에 학교 공부를 한 사람들은 사상전집이고 문학전집이고 종교 서적이고 과학 서적이고 모두 일본 책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쓴 글을 보면 순수한 우리 말로 쓴 글이 없고 죄다 일본말을 번역한 글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8·15 후의 세대들은 그 일제시대의 지식인들에게 배우고, 그들이 쓴 책을 읽어서 지식을 얻고 말과 글을 익히게 되었다 ..  (349, 351, 360, 361, 369, 391쪽)


  말을 바로세우면 글은 저절로 바로섭니다. 넋을 바로세우면 말은 시나브로 바로섭니다. 삶을 바로세우면 넋과 말은 차츰차츰 바로섭니다. 앞뒤를 따지면 삶부터 바로세울 노릇입니다. 시골에서 살든 도시에서 살든 맨 먼저 할 일은 ‘삶 바로쓰기’입니다. ‘말 바로쓰기’는 맨 나중일 뿐 아니라, 삶을 바로세우면서 스스로 씩씩하게 바로세울 수 있어요.


  스스로 붙잡는 일이 어떤 일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일하는 곳이 우리 땅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제도권 입시지옥 톱니바퀴를 그대로 달리는 내 모습이 이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는가를 읽어야 합니다. 자가용 모는 삶이, 전기 매판자본이, 신문·방송을 그득 채우는 정치 소식이, 온갖 스포츠와 관청 문화잔치 행사가, 이 모두가 무엇인가를 또렷하게 살펴야 합니다.


  휩쓸리는 삶이 되면, 휩쓸리는 넋이 되고 말아요. 휩쓸리는 넋인데, 《우리 글 바로쓰기》뿐 아니라 다른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휩쓸리지 않는 넋이어야 이 책을 바로 읽습니다. 휩쓸리지 않는 넋이어야 어느 책을 손에 쥐어 읽더라도 스스로 삶을 바로세웁니다. 휩쓸리는 넋이기에 대단하거나 훌륭하다는 어떤 인문책을 숱하게 읽었어도 삶이 달라지지 않아요. 휩쓸리기만 할 뿐이잖아요. 휩쓸리는 삶이니 스스로 삶길을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치에 휘둘려요.


  한겨레한테는 거울이 없어요. 이웃 다른 겨레한테도 거울이 없어요. 아무도 거울 안 보고 살았어요. 오직 권력자와 지식인만 거울을 보았어요. 스스로 얼굴과 몸을 가꾸려는 거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거울입니다. 스스로 삶을 짓고 밥과 옷과 집을 지으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거울이란 참 덧없습니다. 시골에서 흙 만지는 사람이 왜 거울 보겠어요. 시골에서 아이들 돌보며 물 만지는 사람이 언제 거울 보겠어요. 마음을 비추며 사랑을 밝히는 거울이라면 모르되, 겉모습 꾸미거나 매만지는 거울로는 삶을 빛내지 못합니다. 마음을 비추는 말을 살려야 비로소 ‘우리 글 바로쓰기’가 되고, 마음을 살찌우는 말을 사랑해야 바야흐로 ‘우리 말 살려쓰기’가 됩니다.


.. 저희가 하고 있는 글쓰기 교육이란, 아이들에게 자기의 삶을 바로 보고 정직하게 쓰는 가운데서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게 하고, 생각을 깊게 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는 교육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삶을 가꾸는 교육’이라고 합니다 … 아이들이 마치 풀이나 나무같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아이들은 모두 착하고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난다고 확신합니다 … 글을 말에 가깝게 하고, 살아 있는 말을 지키고 가꾸는 일을 글쓰기로 해야 합니다. 말을 지키는 일은 마음을 지키는 일, 혼을 지키는 일입니다 … 사회운동이 운동을 하는 사람을 위한 운동이 되어서는 안 되듯이, 글 또한 중국글자말과 번역투 문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을 위한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지식인도 사실은 민중이 쓰는 살아 있는 말을 쓸 줄 알아야 이 시대를 밝히는 진짜 지식인이 될 것이다 … 도시 아이들의 말과 글을 생각해 본다. 자연과 노동과 심지어 놀이까지도 잃어버린 아이들, 이 아이들은 교과서와 시험지만 가지고 살아간다. 그밖에 있다면 텔레비전과 만화책이다. 이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말이 있는가? 행위가 없고 삶이 없는 아이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추상과 관념의 말이요, 획일로 된 말, 머리에 주입된 교과서의 말이다 ..  (371, 372, 380, 416, 431쪽)


  이오덕 님이 1989년에 처음 쓰고, 1992년에 고침판을 낸 《우리 글 바로쓰기》인데, 이 책을 꼼꼼히 읽은 분이라면, 이오덕 님 스스로 ‘바로쓰기 제대로 못한 대목’을 곧잘 만날 수 있습니다. 이오덕 님 스스로 말을 새로 배우고 넋을 새로 가다듬으며 삶을 새로 지으려고 애썼어요. 그래서 이 자국이 이 책 곳곳에 드러납니다.


  이런 말은 쓰지 말자 하는 얘기란, 이제부터 새로운 넋이 되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자는 뜻입니다. ‘고루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제대로 삶을 밝히고 틔우는 아름다운 눈길이요 손길입니다. 스스로 새롭게 거듭날 때에 새롭게 쓰는 말이지, 지식으로 머리에 쑤셔넣는대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흙과 풀과 나무를 사랑하면서 꽃과 나비와 새를 아낄 줄 아는 땀방울을 흘린다면, 《우리 글 바로쓰기》를 안 읽어도 됩니다. 바람과 빗물과 해를 사랑하면서 들과 숲과 멧골을 얼싸안을 줄 아는 눈빛 밝힌다면, 《우리 글 바로쓰기》를 몰라도 됩니다.


  책은 삶으로 읽습니다. 책은 넋으로 아로새깁니다. 책은 말을 살찌우는 밑틀입니다. 숲말에서 찾는 사랑·빛·꿈이 있어 《우리 글 바로쓰기》가 태어났고, 이 빛노래 함께 부를 수 있다면,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아름답게 웃음꽃 피우리라 생각합니다. 4346.11.2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이오덕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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