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표범 여인 - 제2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44
문혜진 지음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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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숨소리
[시를 말하는 시 35] 문혜진, 《검은 표범 여인》

 


― 검은 표범 여인
 문혜진
 민음사 펴냄, 2007.12.17. 7000원

 


  새벽밥을 짓습니다. 옆지기와 아이들 먹을 밥을 짓습니다. 세 식구 시골집에 두고 혼자 바깥일 보러 마실을 가는 날이면 언제나 새벽밥을 짓습니다. 옆지기도 얼마든지 밥을 지을 수 있지만, 아이들하고 혼자 복닥일 하루를 돌아보면, 밥 두 끼니 새벽에 바지런히 마련해 놓고 길을 나서야 마음이 가볍습니다. 아이들이 언제라도 옆지기를 불러 아침을 즐겁게 먹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깊은 새벽부터 짐을 꾸리고 밥을 다 차려 놓은 줄 모를 수 있지만, 살결로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먹는 밥을 어버이가 깊은 사랑으로 차리리라 생각 안 할는지 모르지만, 마음 깊이 느낄는지 모릅니다. 어떻든, 밥을 차리는 어버이는 즐겁게 차립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콧노래를 부릅니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은 옷을 흠뻑 적시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손발을 재게 놀립니다.


.. 눈발은 점점 거세졌다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소녀 자살 특공대처럼 고라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코뿔소처럼 내닫는 무쏘를 향해 순식간에 뛰어들었다 무쏘는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뒤집혔다 피가 뿌려지고 뼈와 창자가 더렵혀진 수술대 위의 신경처럼 예리하게 파닥인다 ..  (로드킬)


  밥을 차리다가도 아이들 자는 자리를 들여다봅니다. 아이들이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거나 뒹구르르 굴렀으면 이불깃 다시 여미고, 등허리 잘 펴고 자라며 다독입니다. 지난 하루 개구지게 놀며 쌓였을 고단함 모두 풀어내고, 오늘 아침 새롭게 일어나 새삼스럽게 뛰어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아이들 이마를 만지고 머리카락 쓸어넘기면서, 내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주었을 사랑이 어떤 빛깔이었을까 하고 떠올립니다. 내 어버이는 또 이녁 어버이한테서 어떤 무늬 사랑을 물려받았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자꾸자꾸 거슬러서 그분은 그분 어버이한테서, 또 그분 어버이는 그분 어버이한테서 먼먼 옛날부터 어떤 내음 사랑이 고이 흘렀을까 곱씹습니다.


  오늘 먹는 풀 한 포기는 오늘 뜯은 풀 한 포기입니다. 이 풀포기는 오늘 자란 풀포기이면서 지난해부터 씨를 뿌린 풀포기일 수 있고, 백 해 천 해 만 해 십만 해 이 둘레에서 씨를 새로 뿌리며 이은 풀포기일 수 있어요.


  오늘 마시는 바람은 오늘 들이켜는 숨결입니다. 이 바람은 오늘 나한테 찾아온 숨결이면서, 십만 해 백만 해 천만 해를 고스란히 흐르던 숨결입니다. 내가 마시는 숨은 내 먼먼 어버이도 마시던 숨입니다.


.. 너의 입술에 내 작은 앵초 빛 입술을 포갠다 달삭인다 떨고 있군 후후 애벌레 같은 혀가 들어와 내 입속을 휘젓는다 애호랑나비 애벌레 끈적한 타액이 입 언저리로 줄줄 흘러넘친다 ..  (발정)


  숨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 숨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어버이 숨소리를 듣습니다. 마당에 내려서면 풀밭에서 풀이 내뱉는 숨소리를 듣습니다. 후박나무 그늘에 서면 후박나무가 복복 뱉는 푸른 숨소리를 듣습니다.

  저 높은 하늘을 파랗게 빛내는 숨소리를 생각합니다. 파란 하늘에 하얗게 흐르는 구름에 깃든 숨소리를 생각합니다. 풀벌레와 개구리와 멧새가 어우러지며 들려주는 숨소리를 생각합니다.


  나는 풀과 나무와 하늘과 구름한테서 숨소리를 듣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구름은 나한테서 숨소리를 듣습니다. 서로서로 고운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듯이 숨소리를 내뱉고 마시며 내뱉고 마십니다.


.. 사람들이 우는 동안 그의 남자는 / 상여꾼들에게 줬던 운동화를 챙겼다 / 젊은 남자들은 울면서 산을 오르는 / 앞사람의 치맛자락을 밟아 대며 / 10억 만들기 펀드에 관해 떠들었다 / 늙은 여자들은 기독교식 장례를 욕하면서 / 돼지처럼 먹어 댔다 / 이웃 나라에 지진이 세 번 났고 / 사람들이 열차에 갇혔다 ..  (알을 주고 떠난 여자의 죽음)


  문혜진 님 시집 《검은 표범 여인》(민음사,2007)을 읽습니다. 문혜진 님은 어떤 숨소리를 어떤 이웃한테서 들었을까요. 문혜진 님 이웃은 문혜진 님한테서 어떤 숨소리를 들었을까요.


  문혜진 님이 들은 이웃사람 숨소리는 참말 이웃사람이 낸 숨소리가 맞을까요. 문혜진 님 이웃이 문혜진 님한테서 들을 숨소리는 참으로 문혜진 님이 낸 숨소리가 맞을까요.


  지구별 사람들은 모두 같은 숨을 마십니다. 지구별 이웃들은 모두 같은 물을 마십니다. 지구별 목숨들은 모두 같은 밥을 먹습니다.


  겨울을 맞이한 풀은 시들어 흙으로 가고, 짐승도 죽어서 흙으로 갑니다. 흙에서 새 곡식과 열매를 맺고, 이 땅 목숨들은 흙이 봄날 새롭게 베푼 숨결을 받아먹습니다.


.. 더위에 지친 가로수 잎들이 / 바람도 없는 거리에서 / 커다란 나방처럼 생기 없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군 / 게으르고 살찐 비둘기에게 / 표범약사가 다이어트 약을 리드미컬하게 뿌려 대고 있어 / 웃기고 있네 / 피곤해? // 나도 피곤해 ..  (울부짖지 못하는 육식동물을 위한 포효교본)


  더 가까이 이웃을 만나요. 쪼그려앉아 풀꽃 들여다보아요. 때로는 풀밭에 드러누워 온몸으로 풀내음 맡아요. 드러누운 채 하늘빛 올려다봐요.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들여요.


  내 이웃은 약국 일꾼만 이웃이 아닙니다. 귀뚜라미도 이웃이고, 나비도 이웃입니다. 거머리도 이웃이고, 잠자리도 이웃입니다. 제비와 비둘기와 까치와 참새도 한결같이 이웃입니다.


  우리 이웃 숨소리를 들어요. 우리 이웃 숨소리를 사랑해요. 우리 이웃 숨소리에 내 숨소리를 따사롭게 섞어 다 함께 활짝 웃을 사랑춤을 추어요. 4346.9.1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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