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젤리 삶창시선 36
김은경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시와 아이들
[시를 말하는 시 35] 김은경, 《불량 젤리》

 


- 책이름 : 불량 젤리
- 글 : 김은경
- 펴낸곳 : 삶창 (2013.3.8.)
- 책값 : 8000원

 


  아이들이 밥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차려서 먹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차려서 내주는 밥을 먹습니다. 어른들이 밥을 먹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차려서 내주는 밥을 함께 먹습니다. 아이들한테 아무것이나 먹이면, 어른들도 아무것이나 먹고, 아이들한테 맑으며 곱고 참된 밥을 차려서 내주면, 어른들도 맑으며 곱고 참된 밥을 즐겁게 먹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익힙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말을 지어서 익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 익힙니다. 어른들이 즐겁고 사랑스러우며 따사롭게 말을 주고받으면, 아이들은 시나브로 즐겁고 사랑스러우며 따사로운 말을 익힙니다. 어른들 스스로 즐겁지 않거나 사랑스럽지 않거나 따사롭지 않은 말을 주고받으면, 아이들은 아주 마땅히 즐겁지 않은데다가 사랑스럽지 않으며 따사롭지 않은 말을 하나둘 익혀요.


.. 사는 일에 욕심이 너무 많아 그런지 / 나는 / 놀이동산 따위엔 가지 않는다 ..  (바이킹)


  아름다운 나라를 바란다면, 우리 어른들은 아름답게 일하고 생각하며 어깨동무를 하면 됩니다. 즐거운 보금자리를 꿈꾼다면, 우리 어른들은 기쁘게 웃고 노래하며 삶을 지으면 됩니다. 어느 대단한 정치꾼 한 사람이 쑥 하고 나타나서 나라살림 알차게 일구어 주지 않습니다. 어느 놀라운 지도자 한 사람 짠 하고 나타나서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사회를 슬기롭게 가다듬어 주지 않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나 정치꾼 몇 사람이 나라살림 북돋우지 않아요. 이들은 바로 ‘여느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맡길 만한 ‘일꾼’을 찾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장관이 되고 비서가 됩니다. 여느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고 경찰이나 군인이 됩니다. 언제나 여느 사람들 스스로 나라살림을 꾸립니다. ‘남이 아닌 나’ 스스로 공무원이건 경찰이건 군인이건, 또 회사원이건 노동자이건 농사꾼이건 되어, 이 나라를 가꿉니다.


  여느 때 여느 자리 여느 삶을 스스로 어떻게 일구느냐에 따라 나라도 달라지고 겨레도 달라집니다. 여느 때 여느 자리 여느 삶 모습이 찬찬히 모여 ‘오늘 모습’이 이루어집니다. 곧, 바로 오늘부터 내 삶을 스스로 아름답게 일군다면, 이 나라는 시나브로 아름다운 길로 접어들어요.


  다만,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아요. 한 해 두 해 흐르고 보면 열 해나 스무 해조차 ‘하루아침’으로 느낄 수 있지만, 온누리 모든 일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씨앗 한 톨이 태어나 땅속에서 봄을 기다리며 천천히 몸을 가꾸어 씩씩하게 어린 싹 하나 내놓고 오랜 나날에 걸쳐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우고 떨구기를 되풀이한 끝에 쉰 해나 백 해쯤 지나 비로소 우람한 나무 되어요.


.. 열차는 수시로 병자 같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 억새는 그들의 바짓단에 정표 같은 자줏빛 풀씨 묻혀 보낸다 ..  (억새 군락지)


  천 해를 살고 만 해를 사는 나무한테 쉰 해는 아무것 아닙니다. 그러나, 이 아무것 아닌 쉰 해를 거쳐야 우람한 그늘 드리웁니다. 천 해를 살았고 만 해를 살아온 사람들한테 쉰 해는 아무것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이 아무것 아닌 쉰 해를 슬기롭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사람살이를 슬기롭거나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한테 기대는 쉰 해가 아닙니다. 수수한 여느 사람 손길로 가꾸는 쉰 해입니다. 씨앗 한 톨은 남을 쳐다보지 않아요. 생각해 보셔요. 대나무가 참나무를 기웃거리지 않아요. 참나무가 뽕나무를 얼씬거리지 않아요. 뽕나무가 감나무를 시샘하지 않아요. 감나무가 소나무를 미워하지 않아요. 소나무가 잣나무를 깎아내리지 않아요. 잣나무가 밤나무 앞에서 우쭐거리지 않아요. 나무들은 저마다 제 빛을 가슴속에 담습니다. 나무들은 저마다 제 빛을 곱게 보듬으면서 자랍니다.


  오리나무는 오리나무대로 삶을 짓습니다. 대추나무는 대추나무대로 삶을 지어요. 후박나무는 후박나무대로 삶을 잇고, 배롱나무는 배롱나무대로 삶을 빛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삶을 저마다 스스로 가장 아름답게 가꿀 노릇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다 다른 이녁 삶을 사랑하며 아끼고 돌볼 노릇입니다.


.. 기울어진 모퉁이에 앉아 / 빗물을 잔으로 받아내며 /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리는 손들은 / 어째서 죄다 풀빛일까 ..  (한 잔의 가을)


  웃으며 어깨동무하던 어른들이 서로 만나 사랑을 속삭일 적에, 웃으며 어깨동무하는 사랑을 물려받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노래하며 품앗이하던 어른들이 함께 만나 꿈을 밝힐 적에, 노래하며 품앗이하는 꿈을 이어받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하는가요. 오늘날 이 나라 어른들은 무엇을 바라보는가요. 스스로 삶을 짓는 어른은 어디에 있는가요. 스스로 이녁 보금자리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어른은 몇이나 되는가요.


  스스로 지어서 나누기에 사랑입니다. 스스로 품으며 가꾸기에 꿈입니다. 남이 선물처럼 내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남이 벼락처럼 똑 떨어뜨려 내주는 꿈이 아닙니다. 언제나 스스로 지으면서 빛내는 사랑입니다. 언제나 스스로 일구면서 밝히는 꿈입니다.


.. 고등학교 졸업식 날 엄마는 부업해 번 돈으로 짜장면을 사주었다. 검붉은 짜장 속에서 나는 잘 비벼지지 못했다. 친구들은 모두 스냅사진처럼 예쁘게 웃었지만 메마른 하늘은 눈 한 점 뿌리지 않았다. 마름모꼴의 지하방도 그날로 졸업이었다 ..  (1995년 2월 14일)


  김은경 님 시집 《불량 젤리》(삶창,2013)를 읽습니다. 김은경 님은 이녁 삶이 어떤 모습·빛·결·무늬이기에 “불량 젤리”를 노래할까 궁금합니다. “불량 젤리”는 누가 빚은 모습일는지 궁금합니다. 남이 만들어 내려보낸 모습인가요. 김은경 님 스스로 빚어서 보여주는 모습인가요. 왜 “불량”이어야 하고, 왜 “젤리”여야 할까요.


.. 박하사탕 봉지를 열면 / 봉지 속엔 / 흰머리 쪽진 / 할머니 ..  (박하사탕)


  아이들이 웃습니다. 어른들이 웃으니 함께 웃습니다. 아이들이 노래합니다. 어른들이 노래하니 같이 노래합니다. 아이들이 놉니다. 어른들이 씩씩하게 일하니, 곁에서 신나게 놉니다. 아이들이 따사로운 말마디로 사랑을 속삭입니다. 어른들이 둘레에서 따사로운 말마디로 사랑을 속삭이며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일구니, 아이들은 언제나 새롭게 따순 사랑을 꾸준하게 일굽니다.


  사랑을 먹으며 자라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되어 사랑을 지어 아이들한테 밥·옷·집 모양으로 물려줍니다. 사랑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자라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들은 새롭게 사랑을 가꾸고 돌보며 푸른 꿈을 한껏 키웁니다.


.. 항아리는 옹기쟁이의 체온으로 아직 따뜻하고 / 신의 입김으로 인해 우물물은 아직 썩지 않았습니다 / 사과 속엔 벌레가 지나간 무수한 길들이 있고 / 단내 나는 그 길에는 / 발효의 시간을 기다리는 당신과 내가 있습니다 ..  (아름다운 진화)


  맛난 열매를 벌레가 잘 알아봅니다. 잘 익은 열매를 새가 잘 알아챕니다. 벌레도 새도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인걸요. 기름진 땅은 시골사람만 잘 알아보지 않습니다. 풀과 나무도 기름진 땅을 알아보고는 이곳에 씨를 퍼뜨리고 싶습니다. 맑은 냇물은 사람들만 즐겁게 떠서 마시지 않아요. 들짐승도 멧짐승도 들새도 멧새도 모두모두 맑은 냇물 둘레에서 목을 축여요. 풀과 나무도 맑은 냇물 함께 누리고 싶어 뿌리를 뻗습니다.


  바람이 상큼하게 흐르는 곳에서는 사람도 새도 짐승도 벌레도 상큼한 바람을 마십니다. 바람이 매캐하거나 지저분한 곳에서는 사람도 새도 짐승도 벌레도 매캐하거나 지저분한 바람을 마십니다.

  어떤 삶을 지을는지 스스로 찾아나섭니다. 어떤 시를 쓸는지 스스로 뒤돌아봅니다. 어떤 사랑을 나눌는지 스스로 빚습니다. 어떤 이야기로 생각을 빛낼는지 스스로 가꿉니다. 4346.9.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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