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라 팜 파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0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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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살갗
[시를 말하는 시 20] 김이듬, 《명랑하라 팜 파탈》

 


- 책이름 : 명랑하라 팜 파탈
- 글 : 김이듬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2007.11.30.)
- 책값 : 8000원

 


  삼월에 서울로 마실을 가니 아직 나뭇잎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사월에 서울로 마실을 가니 찬비와 찬바람 불며 나뭇잎 새로 돋기 벅차 보였습니다. 오월에 서울로 마실을 가니 비로소 앙증맞게 푸른 잎사귀 조물조물 돋으려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전남 고흥에서는 삼월 막 지나가면서 현호색 파란 꽃망울 맑게 노래했고, 사월 접어들며 현호색 꽃송이는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서울 도봉구 어느 뒷동산 한켠에서는 사월이 저물려 하는 때에 ‘현호색 새 잎사귀’ 돋으려고 애를 쓰더군요. 여느 도시사람은 저 풀잎이 현호색 새 잎사귀인지 그냥 ‘잡풀’인지 못 알아보겠구나 싶었어요.


  서울부터 전남 고흥 사이는 오백 킬로미터가 넘을 테니, 한 달 반 남짓 철이 벌어질 만하리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스산하고 차가우며 쓸쓸하다 느꼈어요. 오월이 다 되는데 들풀이나 들꽃을 흐드러지게 만날 수 없다면, 서울은 얼마나 사람이 살 만한 곳인지 궁금했어요.


.. 너와 나 오래 입 맞추게 ..  (세이렌의 노래)


  손가락으로 살며시 들꽃송이 쓰다듬습니다. 손가락으로 살포시 들풀 한 줄기 꺾습니다. 들꽃송이 달린 들풀을 물에 헹구어 날로 먹습니다. 짙은보라빛 환한 꽃망울 달린 갈퀴나물을 먹습니다. 옷자락에 척척 들러붙는 갈퀴덩굴을 먹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면 풀이요 꽃이고, 살짝살짝 뜯어서 입에 넣으면 반가운 밥이자 목숨입니다.


  매화나무 언저리에서 얼쩡거리면서 푸르게 돋은 잎사귀 사이사이 매화 열매 얼마나 달렸는가 살핍니다. 아직 푸르딩딩한 매화 열매는 여물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은 푸르딩딩한 매화 열매를 너무 일찍 따서 효소를 담근다느니 무얼 한다느니 하는데, 매화도 살구와 마찬가지로 누렇게 익은 뒤에 먹는 열매입니다. 우리 식구는 푸르딩딩하고 단단한 매화 열매가 노르스름 익으면서 말랑말랑할 때를 기다립니다.


  지난해 즐겁게 먹던 들딸기밭을 요즈음 거의 날마다 들여다봅니다. 하얀 꽃망울 거의 다 떨어졌으니 언제쯤 새빨간 알맹이 흐드러질까 하고 바랍니다. 여섯 살 큰아이는 “어제 딸기 먹었어.” 하고 말합니다. 여섯 살 아이한테는 지난해도 어제와 같을까요. 어제도 지난해와 같을까요.


.. 엄마는 떡을 썰고 나는 글씨를 쓴다 / 불을 끄고, 엄마는 떡을 썰고 나는 글씨를 쓰고 / 홈을 판다 등판에 쓰는 일이 가장 원만하다 / 나도 잘 모른다 뭐라고 써야 하는지 / 얼빠지게 재빨리 쓰는 게 중요하다 ..  (인도차이나)


  바야흐로 미나리풀이 좀 억세다 싶은 오월 한복판입니다. 새롭게 돋는 모시풀은 뜯어서 곧바로 먹지 않으면 푸석푸석 이내 시듭니다. 환삼덩굴도 이와 같은데, 웬만한 들풀은 그 자리에서 뜯어 그 자리에서 먹어야 제맛이 돕니다. 흙에 뿌리내리고 햇살을 바라며 빗물 마시는 들풀은 언제나 그때그때 뜯어서 먹으며 몸을 살찌웁니다.


  비닐집에서 키운 푸성귀는 비닐 씌우고 마트에 여러 날 두어도 푸른 빛깔 바래지 않습니다. 비닐집에서 키운 푸성귀는 차로 실어나르거나 택배 상자로 부쳐도, 또 여느 살림집 냉장고에서 다시 여러 날 묵어도 이럭저럭 먹을 만합니다. 비닐집에서 키울 때부터 더 오래 가도록 손을 썼겠지요.


  개구리는 그날그날 먹이를 찾아서 먹습니다. 제비와 까치와 직박구리와 참새와 까마귀와 누렁조롱이와 소쩍새와 꾀꼬리 들은 모두 그날그날 먹이를 찾아서 즐깁니다. 지렁이도 파리도 그날그날 먹이를 찾아서 누립니다. 사람을 뺀 모든 목숨붙이는 언제나 그때그때 그날그날 밥을 찾아서 나눕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두어 끼니 먹으면서도 으레 ‘묵은 밥’을 먹습니다.


.. 누가 봤을까요 나도 날 못 봤는데 / 그러나 나는 아름다워요 ..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


  조용한 시골집은 기계를 안 쓸 때에 조용합니다. 시골마을이라 하더라도 경운기를 몰거나 트랙터를 돌리거나 짐차를 부르릉 달릴 때면 시끄럽습니다.


  시끄러운 도시는 자동차가 달리지 않으면 조용합니다. 깊은 밤이나 새벽, 찻길에 자동차 하나 다니지 않는 길에 서 봐요. 얼마나 고요하며 얼마나 애틋한지 느껴 봐요.


  나는 스무 살 갓 넘긴 앳된 젊은이였을 적, 새벽 두 시 즈음 일어나 새벽 배달부와 청소부 빼고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하고 호젓한 골목길을 자전거를 달려 신문을 돌리며 보낸 서울살이가 참 즐거웠습니다. 아니, 서울에서 살며 즐거웠던 일은 첫째, 헌책방마실, 둘째, 신문돌리기, 이렇게 두 가지였어요. 서울에 골목마다 무척 많던 헌책방으로 찾아가면 아름다운 책 하나 만나면서 모든 소리와 사물이 가라앉았어요. 아주 깊은 새벽나절 자전거 구르는 소리 하나만 골목을 가로지르며 던지는 신문 한 장은 내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려 주었어요. 새벽 두 시 반을 지나면 술에 전 사람 모조리 사라지고, 새벽 세 시 반 즈음이면 다른 배달부 하나둘 일어날 무렵이라, 꼭 이맘때, 두 시 반부터 세 시 반 사이 골목길은 새벽빛과 새벽별과 새벽소리를 고즈넉하게 누리는 한복판이었어요.


.. 어두워지면 개구리와 새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  (커다란 눈동자)


  동이 트면서 새 하루 열립니다. 달이 뜨면서 새 하루 저뭅니다. 해님이 머리 위에서 따사롭게 내리쬐는 동안 꽃망울 벌어지고 잎사귀 푸르게 빛납니다. 해님이 머리 위에서 포근하게 드리우는 동안 들도 숲도 바다도 냇물도 해맑은 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라 하더라도, 나무그늘은 시원합니다. 널따란 건물이 드리우는 그림자라 하더라도, 건물 그림자는 조금도 시원하지 않고 쌀쌀맞습니다. 푸른 숨결 일렁이는 나무는 그늘 한켠에도 고운 숨결 나누어 줍니다. 메마른 시멘트로 지은 높은 건물은 그림자 한 뼘에도 차가운 기운 내뿜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어떤 학교를 다니는가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나무 한 그루 못 누리는 시멘트 교실에 갇힌 채 시험공부 닦달에만 시달리지 않나 궁금합니다. 나무로 지은 집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고, 운동장 한쪽에 선 나무를 쓰다듬을 수 없는 아이들이며, 집이나 마을 어디에서도 싱그러운 나무하고 놀거나 인사할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나무하고 등졌어요. 어른들은 자가용을 모느라 나무 몽땅 베었어요. 어른들은 아파트 짓고 공원 세우며 공장과 발전소와 고속도로 닦느라 나무 자랄 숲 모조리 밀었어요.


.. 이것 좀 봐 놀라워 창문을 열어젖히고 노을을 바라봤다 ..  (일주일)


  살갗으로 느껴요. 살갗으로 바람을 느껴요. 살갗으로 만나요. 살갗으로 냇물과 도랑물과 바닷물을 만나요. 살갗으로 사랑해요. 살갗으로 풀과 나무와 숲을 사랑해요.


  책 한 권도 나무예요. 책을 이루는 종이는 나무한테서 왔어요. 책시렁도 나무예요. 책을 꽂는 책시렁도 나무로 짜요. 책을 쓴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연필로 글을 썼어요. 책을 읽는 사람은 나무를 읽는 사람이고, 책을 쓰는 사람은 나무를 쓰는 사람이에요.


  시를 쓰는 사람도, 시를 읽는 사람도, ‘시’라는 이름을 빌린 나무를 쓰거나 읽어요. 시를 누리는 사람도, 시를 나누는 사람도, ‘시’라는 옷을 입은 숲을 누리거나 나누는 삶이에요.


.. 과일을 사라며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행상인이 지나가고 / 얼떨결에 심드렁한 개처럼 남자는 내 치마 아래로 기어들어간다 ..  (여드름투성이 안장)


  김이듬 님이 빚은 싯노래 그러모은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2007)을 읽습니다. 김이듬 님은 김이듬 님이 삶을 누리는 터전에서 이녁 사랑을 노래하고 춤추겠지요. 다른 사람들 모습을 구경하면서 읊는 싯노래 아닌, 바로 김이듬 님 삶을 노래하고 들려주는 싯말이요 싯자락일 테지요.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살갗으로 만지며 느낄까요. 시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살갗으로 스치며 느낄까요. 눈을 살포시 감습니다. 눈을 감고 살갗으로만 바라봅니다. 내 살갗에 닿는 풀잎은 장미잎인지 동백잎인지 후박잎인지 부추잎인지 유채잎인지 갓잎인지 미나리잎인지 덩굴잎인지 찬찬히 가누어 봅니다. 내 살갗으로 스치는 나뭇줄기는 모과나무인지 매화나무인지 뽕나무인지 감나무인지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탱자나무인지 화살나무인지 가만히 곱씹어 봅니다.


  우리들은 두 눈으로 무엇을 바라볼까요. 우리들은 살결로 무엇을 느낄까요. 우리들은 귀로 무슨 소리를 듣나요. 우리들은 입으로 무슨 노래를 부르나요. 4346.5.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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