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맹호, 고은, 인문서점, 《聖·高銀 엣세이》

 


  헌책방 한켠에 놓인 낡은 책 하나 바라본다. 이제 책을 다 골랐다 싶어 책값을 치르려고 기다린다. 멀뚱멀뚱 있으면 재미없으니 두리번두리번 책탑과 책시렁을 살펴본다. 《聖·高銀 엣세이》라는 이름 붙은 책이 궁금해서 뒤적인다. 어떤 이가 이런 이름을 붙여서 책을 냈는가. 1933년에 태어난 고은 님은 이 책이 나올 무렵 아직 새파란 나이라 할 텐데, 이 책을 펴낸 출판사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책이름을 붙였을까.


  1967년에 첫 쇄를 찍은 《聖·高銀 엣세이》는 ‘人文書店’이라는 곳에서 나왔고, 인문서점이라는 출판사 대표는 ‘朴孟浩’라 나오며, ‘서울 종로 청진동 청진빌딩 32호실’이라는 주소가 보인다. 이 책을 처음 사서 읽은 분은 ‘1968.5.8.명동에서’ 샀다고 볼펜으로 적는다. 《聖·高銀 엣세이》를 펼치면 첫 글에 ‘젤소미나’ 이야기가 나온다. 아하, 고은 님도 영화 〈길(라 스트라다)〉을 보았구나. 1960년대 첫머리 한국 극장에 이 영화가 걸렸구나. 스님이라는 길을 그만둔 고은 님은 극장에서 〈길〉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구나.


  민음사라는 출판사를 만든 박맹호 님은 1966년 청진동 옥탑방에 출판사를 꾸렸다 말하는데, 그 출판사가 처음에는 ‘인문서점’이었구나. 옥탑방이라 하지만 32호실이라 나오는데, 옥탑방이 여럿 있었을까. 옥탑방이라 하더라도 32호실이라고 어엿하게 방 번호를 붙였을까.


  마흔여섯 해를 묵은 책 하나 내 손에 들어온다. 마흔여섯 해 앞서 ‘사람 고은’을 ‘거룩한 고은’이라고 이름을 붙인 책 하나 내 손바닥에 놓인다. 책을 쓴 사람도, 책을 낸 사람도, 마흔여섯 해를 잘 살아왔구나 싶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건대, ‘거룩한 고은’ 아닌 ‘사람 고은’이라고 책이름을 붙였으면 훨씬 더 물결을 일으키지 않았으랴 싶다. 사람들은 스스로 ‘사람’인 줄 못 느끼거나 생각 안 하는 채 살아가니까. 4346.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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