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살아온 발자취

 


  일본에서 대정 13년에 1쇄를 찍고 소화 11년에 수정8쇄를 찍은 영어 교과서를 전남 순천 헌책방 〈형설서점〉에서 만납니다. 퍽 낡은 교과서로구나 싶고, 또 일본에서는 지난날 영어 교과서를 어떻게 엮었나 살짝 궁금해서 구경합니다. 그런데, 책 안쪽에 깃든 꽤 오래되었구나 싶은 도장 하나 봅니다.

 

― 우리들의 冊房 全南順天 大衆文化社

 

  전라남도 순천에 있었다는 책방 ‘대중문화사’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이곳을 아는 분은 아직 있을까요. 1936년에 일본에서 나온 영어 교과서는 언제 ‘전남 순천 대중문화사’ 책시렁에 놓였을까요. 일제강점기에 있던 책방일는지요, 아니면 해방 뒤에 있던 책방일는지요.


  누군가 책을 한 권 장만합니다. 책 한 권은 새책방 책시렁에 놓여 누군가한테 팔립니다. 즐겁게 읽힌 책이 오랜 나날 조용히 묻히다가 어느 날 헌책방으로 흘러나옵니다. 책 한 권 건사한 이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간다든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떠난다든지, 살림을 줄인다든지, 집안청소를 한다든지, 책하고 멀어진다든지, 하면서 헌책방으로 들어옵니다. 서른 해 쉰 해 일흔 해 발자취가 헌책방에 살포시 남습니다.


  손으로 빚는 책을 손으로 갈무리합니다. 손으로 갈무리하는 책이 책방 책시렁에 놓여 책손을 기다립니다. 책손은 손으로 책을 쓰다담으며 책을 고르고, 고른 책을 주머니에서 손으로 돈을 꺼내어 책값을 치릅니다. 책값 치른 책을 손에 들고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손으로 책을 꼬옥 쥐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합니다.


  우리들 책방 대중문화사는 이제 없지만, 우리들 책방 대중문화사에서 다룬 책 하나는 정갈한 도장 자국과 함께 오래오래 이어집니다. 헌책방에서 책 하나 고른 뒤, 주머니에서 볼펜 한 자루 꺼내어 오늘 날짜를 또박또박 적습니다. 1936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이어온 여러 사람 발자국에 내 발자국 하나 보탭니다. 앞으로 서른 해나 쉰 해나 일흔 해쯤 지나면, 또 누군가 이 발자국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책삶을 더듬을 수 있겠지요. 4346.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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