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을 선물하는 책읽기

 


  고흥을 나서면서 감 한 꾸러미를 장만한다. 지난해를 헤아리면 올해 감값은 살짝 올랐다 할 텐데, 서울에서 사람들이 사다 먹을 감값을 헤아리면 아주 싸다. 게다가 마을 감나무에서 딴 감이니,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길러서 딴’ 감인지 또렷하게 알 수 있기도 하다. 흔한 말로 ‘그냥 국내산’이 아니라 ‘우리 마을 예쁜 감’이다. 지난해에는 유자나 석류나 참다래를 들고 나와서 다른 고을 이웃한테 선물해 보곤 했는데, 유자나 석류나 참다래를 받은 분들 낯빛이 그닥 ‘반갑다’고 느끼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차를 달여 마시도록 잘게 썰어 말려서 달게 재운 유자가 아닌, 돌멩이처럼 단단한 울퉁불퉁 유자 열매일 때에는, ‘나더러 이를 어쩌라구?’ 하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면, 참다래쯤은 사람들이 가끔 사다 먹는다 하더라도, 석류를 애써 사다 먹는 사람은 드물다. 가게에서 ‘석류 이름을 갖다 붙인 어설픈 음료수’를 사다 마시는 사람은 있지만, 정작 ‘참 석류’를 사다가 손수 짜서 ‘참 석류맛’을 느끼려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고흥을 나서는 길에 감 한 꾸러미를 낑낑 짊어지면서 생각에 잠긴다. 내가 고흥으로 들어와 살기 앞서, 아직 인천에서 살던 때, 또 충북 음성에서 살던 때, 따로 ‘감을 사다 먹은’ 일은 드물다. 음성에서는 집 언저리 감나무에서 감을 따다 먹기는 했지만, 굳이 감을 틈틈이 한 꾸러미씩 사다가 섬돌에 올려놓고는 하루에 몇 알씩 우걱우걱 껍질째 씹어먹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인천에서든 음성에서든 바나나를 꽤 자주 사다 먹었고, 능금이라든지 배라든지 귤을 곧잘 사다 먹었구나 싶다.


  문득 돌아보면, 도시사람은 감을 잘 안 사다 먹는다. 마당을 두어 감나무를 키워 먹는 이도 아주 적다. 도시사람 가운데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프다 생각하는 사람이 가끔 있기는 있되, ‘마당 있는 집’을 장만해서 살자면 어떻게 해야 즐거울는지 찬찬히 살피며 이 삶길을 씩씩하게 걷는 사람은 참으로 적다. 그러니까, 집에 열매나무 한두 그루 심어서, 열매나무를 손수 거두는 사랑과 꿈을 키우지 못한다. 언제나 열매를 가게나 길거리에서 사다가 먹을 뿐이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일군 열매나무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시골에서 어떤 햇살과 바람과 빗물을 먹으면서 자란 열매나무에 맺힌 꽃이 지면서 돋는 열매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내 얘기부터 하자면, 나는 인천에서 살던 때, 석류꽃이든 감꽃이든 배꽃이든 능금꽃이든 거의 못 보았다. 골목마실을 하면서 이웃집 마당 한켠에서 자라나며 피는 석류꽃이랑 감꽃이랑 배꽃이랑 능금꽃이랑 호두꽃이랑 밤꽃이랑 탱자꽃이랑 대추꽃이랑 …… 애써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찍기는 했지만, 내 삶으로 살포시 스며들기는 못했다. 옆지기가 꿈꾸는 결을 살펴서 시골로 삶터를 옮겨 아이들과 시골살이를 누리는 동안 천천히 깨닫는다. 나 또한 마음속 깊이 시골살이를 바랐고, 시골에서 살아가며 내 넋이랑 눈이랑 빛이 차츰 환하게 트는구나 싶다. 이러면서 들꽃과 나무꽃을 예쁘게 들여다보는 눈썰미를 키운다. 들꽃과 나무꽃을 예쁘게 들여다보는 아버지 곁에서 아이들도 들꽃이랑 나무꽃을 예쁘게 들여다본다. 그래, 그렇구나, 아버지부터 스스로 예쁘게 살면, 아이들은 스스로 야물딱지게 예쁜 손길을 북돋우는구나. 예쁜 어버이와 예쁜 아이이지, 어버이는 못난 길을 거닐면서 아이들만 예쁘라 바랄 수 없구나.


  인천에서 지내는 이웃들을 한 사람씩 만나며 감을 열 알씩 선물한다. 감알 열을 찬찬히 내려놓으며 내 가방은 가벼워진다. 헌책방 일꾼들한테, 마을사진관 지기한테, 옛 단골 튀김닭집 아저씨한테, 우리 형한테, 감 열 알씩 선물한다. 우리 형은 감을 무척 좋아하고 잘 먹는단다. 그랬나? 그렇구나. 형과 동생 사이인데, 어쩜 처음 알았네. 고흥으로 돌아가면 형네 집에 감 한 꾸러미를 부쳐야겠네. 이제 스무 알 남은 감을 몇 사람한테 더 선물할 수 있을까. 그래, 화평동 그림할머니한테 찾아가 열 알을 드려야지. 그리고 열 알은? 음, 열 알은 고흥으로 돌아가기까지 마주칠 분들한테 한 알씩 나누어 줄까. 달콤한 감맛과 상큼한 감내음과 맑은 감빛을 두루 즐길 수 있기를 빈다. 4345.12.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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