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재미

 


  밥을 먹으면서 밥이 맛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밥맛이 어떠한가는 느낀다. 바람을 쐬면서 바람이 시원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바람맛이 어떠한가는 느낀다. 물을 마시면서 물이 싱그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물맛이 어떠한가는 느낀다.


  문득 돌아보면, 어느새 나는 ‘좋다 싫다’라든지 ‘반갑다 나쁘다’ 같은 말을 아예 안 하면서 살아간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왜 나는 이런 말을 안 할까. 참말 이런 말은 할 일이나 까닭이 없어서일까.


  글이 좋아서 글을 쓰지 않는다. 사진이 좋아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더 말하자면, 아이들이 좋아서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 한 걸음 나아가면 삶이 좋아 살아가지 않는다. 좋아서 하거나 나빠서 안 한다든지, 좋아서 찾아나서거나 싫어서 등돌린다든지 하는 적이 없다. 그저 누리면서 살아간다.


  글을 쓰는 재미란 무엇인가. 살아가는 재미가 글을 쓰는 재미가 될까. 삶을 누리는 재미가 글을 쓰는 재미라 할 만할까.


  여름 더위가 싫거나 겨울 추위가 싫지 않다. 모두 나한테 찾아오는 선물이자 꿈이다. 여름에는 겨울을 떠올리고 겨울에는 여름을 떠올리는가? 글쎄, 아니라고 본다. 여름에는 오직 여름을 떠올리고, 겨울에는 오로지 겨울을 떠올린다. 글을 쓸 적에는 오직 글을 생각한다. 밥을 지을 적에는 오직 밥을 생각한다. 아이들을 재우거나 아이들과 놀 적에는 오직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러네. 마실을 할 적에는 마실을 생각할 뿐이다. 자전거를 탈 적에는 자전거를 생각할 뿐이다. 아이들과 바다에 가면 ‘아이들과 바다에 가는 삶’만 생각한다. 다른 것을 생각할 일이나 까닭이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 뵈러 여러 날 마실을 하면서 ‘우리 집 마당에 풀이 얼마나 더 돋을까’를 생각할 일이 없다. 나는 오직 오늘 내 자리를 생각하며 누릴 뿐이다.


  그러면 내 삶은 아름다운가. 아름답다. 왜 아름다운가. 내가 누리는 삶이기에 아름답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아침을 느끼고 저녁을 느끼며 햇살을 받아먹고 물을 들이켜는 하루가 아름답다. 아이들이 예쁜가. 예쁘면 어떻게 예쁜가. 아이들은 저마다 저희 빛을 실컷 뽐내면서 뒹구는 삶이 예쁘다. 그러니까, 나는 이 모든 삶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글을 쓴다. 내가 쓰는 글은 오직 내 삶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오직 내가 누리며 즐기는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은 어떠한가를 알 까닭이 없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필 까닭이 없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샘솟는 꿈과 사랑을 읽는다. 내가 꽃피우는 꿈을 생각하고, 내가 즐기는 사랑을 헤아린다.


  코를 훌쩍이는 아이를 바라본다. 콧물이 주룩 흐른다. 천으로 톡톡 문지르며 닦는다. 작은아이는 코풀기를 아직 모르고, 큰아이는 혼자서 코풀기를 할 줄 안다. 아이들은 코가 흘러도 흐르는 대로 논다. 아이들은 놀이를 생각하지 콧물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아이들은 마음껏 뛰노는 삶을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떤 옷차림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구멍난 옷이면 어떻고 가시내 옷을 사내가 걸치면 어떠한가. 나는 나를 바라보고 느낄 뿐이다. 민들레가 부추를 흉내내는 일이란 없다. 후박나무가 동백나무를 흉내내는 일이란 없다. 비둘기가 까치를 흉내내는 일이란 없다. 사마귀가 개미를 흉내내는 일이란 없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눈치를 살피며 흉내를 내거나 따르는 일이란 얼마나 덧없고 형편없으며 바보스러운데다가 끔찍한 짓일까.


  내가 학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공무원 달삯쟁이 노릇이 부질없다고 여기는 까닭은 이런 생각에 밑뿌리를 둔다. 온갖 나무가 저마다 흐드러질 때에 숲이다. 온갖 아이들이 저마다 흐드러질 때에 배움터이다. 그런데, 오늘날 도시에 있는 ‘공원’은 어떠한가. 몇 가지 나무와 꽃과 풀만 돋도록 하고, 나머지 나무와 꽃과 풀은 무시무시하게 베어서 죽인다. 게다가 공원에 살아남은 나무는 끝없이 나뭇가지가 잘려야 한다. 오늘날 이 나라 학교는 어떠한가.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똑같은 차림새와 얼굴을 한다. 더군다나 다 다른 아이들 머릿속에 다 똑같은 시험공부 지식을 처넣고야 만다. 다 다른 아이들이라고 느끼기 어렵다. 다 똑같은 아이들이 가슴에 붙이는 이름표에만 다 달라 보이는 이름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학교에 보내는 어버이 가운데 이 끔찍한 굴레를 느끼는 이는 얼마나 되는가. 이녁 사랑스러운 아이가 노예처럼, 기계처럼, 붕어빵처럼, 네모반듯한 성냥갑처럼, 다람쥐 쳇바퀴처럼, 아주 판박이가 되어 생각날개가 꺾이는데, 이 슬프며 안쓰러운 모습을 알아보는 어버이는 몇이나 되는가.


  나는 내 글을 쓴다. 나는 내 글을 쓸 뿐, 옆지기 글이나 아이들 글조차 쓰지 못한다. 나는 내 글을 쓰지, 내가 박경리 글이나 황순원 글을 쓸 일이란 없다.


  글을 읽으면 글쓴이 삶을 읽는다. 어느 글이건 글쓴이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글을 읽으면서 글쓴이 삶을 읽지 못한다면, 이러한 글읽기로는 ‘내 삶읽기’도 못한다 할 만하다. 글 아닌 말을 읽기도 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뇌까리는 말을 들으며 이녁 삶을 읽을 만하다. 말 아닌 낯빛을 읽기도 한다. 낯빛으로도 저마다 어떤 삶인가 읽을 만하다. 누군가는 손금을 읽겠지. 누군가는 뼈마디를 읽겠지. 누군가는 눈빛을 읽겠지. 그리고, 누군가는 흙을 읽는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흙을 흘끔 쳐다보기만 해도 어떠한 흙인가를 곧장 알아챈다. 손으로 만지면 훨씬 더 많이 읽어낸다. 씨앗을 손으로 만지며 어떠한 씨앗인가를 느낀다.


  읽으려면 삶을 읽어야지, 껍데기를 읽을 노릇이 아니다. 꽃이름 풀이름 나무이름 몰라도 된다. 꽃 풀 나무가 저마다 어떤 삶이며 사랑인가를 읽으면 된다. 유적지나 관광지에 가서 ‘저것은 언제 지었고, 이것에는 어떤 옛이야기가 얽혔고’ 하는 말을 들을 까닭이 없다. 이른바 ‘문화유산답사’란 가장 못난 나들이요 가장 어리석은 톱니바퀴질이라 할 만하다. 이 땅 모든 곳이 문화유산인데, 굳이 문화유산답사를 할 일이 있을까. 문화유산 지식을 퍼뜨리거나 심을 까닭이 있는가. 아니, 나부터 스스로 내 삶을 읽어 내가 누리는 기쁨과 웃음과 사랑과 꿈을 곱게 펼치면 될 노릇인데, 왜 자꾸 딴 데를 쳐다보려고 할까.


  쓰려면 삶을 쓸 노릇이다. 글을 쓰려면 삶을 쓸 노릇이다. 나는 사진도 찍는 사람이라서, 내가 살아가는 나날을 사진으로 찍는다. 내 사진에는 아이들 모습이 곧잘 담기지만, ‘모습’은 아이들이로되, 바로 내가 누리는 삶이다.


  글을 쓰는 재미가 있을까. 글을 쓰는 즐거움이 있을까. 있고 없고 같은 금긋기부터 없는 셈일 텐데, 글은 글이기에 쓰고, 삶은 삶이기에 누린다. (4345.11.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글쓰기 삶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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