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권학교 책읽기

 


  제도권학교는 아이들을 나이에 따라 줄을 세운 다음, 똑같이 생긴 교실에 넣고, 똑같이 생긴 걸상에 앉혀, 똑같은 교과서를 펼치고, 똑같은 지식을 머리에 담도록 이끕니다. 제도권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삶을 배우지 못하고, 제도권학교에서 일하는 어른들은 삶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밥짓기·옷짓기·집짓기 어느 하나 배우지 못하고, 어른들은 밥짓기도 옷짓기도 집짓기도 가르치지 못하는데, 이를 배우거나 가르쳐야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톱니바퀴 가운데 하나가 되어 똑같이 움직이도록 내모는 제도권학교에서는, 아이도 어른도 쳇바퀴를 돌 뿐입니다. 삶을 누리거나 사랑을 나누는 길을 걷지 못합니다. 삶하고도 동떨어지고, 사랑하고도 등질 뿐더러, 꿈을 빛내는 길하고도 멀어집니다. 제도권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돈을 벌 일자리’를 ‘도시에서 몇 가지’ 찾지만, 정작 아이 스스로 무엇을 아끼고 좋아하는지를 느끼거나 헤아리지 못합니다. 삶을 누리는 일이나 사랑을 나누는 놀이를 살피거나 돌아보지 못합니다. 어른도 이와 같아, 어른 스스로 ‘교과서 지식 알려주는 몫’은 하지만, 어른이자 어버이로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참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즐기지 못합니다.


  제도권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책을 못 읽습니다. 오직 ‘학습’을 하고 ‘독서’를 하며 ‘독후 활동’이나 ‘독후감’이나 ‘논술’에 얽매입니다. 아이들 손에 책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책 아닌 종이꾸러미일 뿐, ‘삶을 밝히고 사랑을 깨달으며 꿈을 북돋우는 이야기’ 깃든 슬기꾸러미로 스며들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어른(교사)이 손에 책을 쥐더라도 이와 비슷해요. 어른 또한 사랑을 깨달으려고 책을 펼치지 않습니다. 어른부터 삶을 밝히려고 책을 읽으면서 어른다이 살아가는 꿈을 북돋울 수 있어야 아름다울 텐데, 제도권학교에 길든 어른 가운데 이녁 넋을 곱게 돌보려고 책을 쥐는 이는 너무 적어요. 어쩌면 제도권학교에서 달삯쟁이로 일하면 ‘삶·사랑·꿈’하고는 고개를 돌려야 할는지 모르지요.


  다 다른 아이들은 잠을 자도 다 다르게 잡니다. 몇 분 더 자는 아이가 있고, 몇 분 덜 자는 아이가 있습니다. 밥을 먹건 물을 마시건, 먹고 마시는 부피가 다르고, 먹고 마시는 빠르기가 다릅니다. 풀과 꽃을 쓰다듬을 때에 손끝에서 가슴으로 스미는 느낌이 다르고, 별과 무지개를 바라보는 느낌이 달라요.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삶·사랑·꿈을 찾아 다 다른 책을 손에 쥐면서 다 다른 얼을 빛내야 할 테지만, 제도권학교에 깃들고 나면 ‘모두 같은 책’을 읽으면서 ‘모두 같은 줄거리’를 훑으며 ‘모두 같은 느낌글’을 쓰도록 내몰립니다.


  시 하나를 읽힐 때에 다 다른 아이가 다 같이 느껴야 할까요. 시 하나를 쓸 적에 ‘하늘’이 글감이든 ‘흙’이 글감이든 다 다른 아이가 다 같은 이야기와 모양새로 시를 써야 할까요.


  학교에 다녀야 한다면, 그야말로 ‘가르치고 배우는 터’인 ‘배움터’에 다녀야 올바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학교 아닌 사랑을 나누는 곳에서 자라고 놀며 살아야 맞습니다. 어른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몫을 할 일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무럭무럭 자라고 씩씩하게 놀며 예쁘게 살아야 맞습니다.


  삶을 누리는 사람만 책을 읽을 줄 압니다. 사랑을 나누는 사람만 책을 아낄 줄 압니다. 꿈을 빛내는 사람만 책을 쓸 줄 압니다. (4345.1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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