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기는 아련한 이야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545] 구룡성 탐험대(九龍城 探驗隊), 《大圖解 九龍城》(岩波書店,1997)

 


  《大圖解 九龍城》(岩波書店,1997)이라는 책을 보면서 홍콩에 있었다던 구룡성이라는 곳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햇볕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집이 한둘이 아닌 수십 수백 수천이 된다면, 이러한 집에서 수십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에 이르는 사람이 바글거리며 살아간다면, 이러한 삶터에서는 똥오줌을 어떻게 내보내고 물은 어떻게 끌어들이며 전기는 어떻게 얻어 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이라면 내내 집안에 있어야 할 텐데, 햇볕을 쬐지 못하고 어두운 방에서 전깃불에만 기대어 약을 먹으며 몸을 살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반지하나 지하에 깃든 집이 있는 한국인데, 홍콩 구룡성은 반지하나 지하가 아니더라도 햇볕은커녕 바람 한 점조차 마실 수 없는 데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사람은 살아갔고, 아이를 낳았으며, 사랑을 빚었어요.


  이제 사라진 구룡성이라는데, 홍콩사람은 이곳 발자취를 적바림했을까요. 중국사람은 이곳 삶터를 얼마나 아로새겼을까요. 홍콩도 중국도 아닌 일본에서 구룡성을 찾아간 사람들이 내놓은 책 《大圖解 九龍城》는 참 놀랍고 대단합니다. 아무래도 일본사람은 홍콩 구룡성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일을 안타깝다고 여겨, 이렇게 커다란 책 하나로 남기려 했겠지요. 좋다거나 멋지다거나 하는 삶터가 아닌, 어찌 되었든 사람이 살아가던 터전이라는 대목에서, 이 홍콩 구룡성을 찬찬히 뜯어 살피면서, 사람이 스스로 이룬 터전을 곰곰이 돌아보려고 했겠지요.

 

 


  한국땅 인천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있습니다. 인천 동구 송림1동과 송현1·2동 한켠에 있던 달동네 작은 집들을 싹 밀어붙인 주택공사에서 높직한 아파트를 올려세우면서, 예전 이 마을 자취가 어떠했는가를 몇 가지 남겨 지은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에 남은 집 모양은 거의 ‘모형’입니다. 달동네 집들에서 뜯거나 남긴 간판이라든지 문살이라든지 조금 있기는 하지만, 거의 모형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인천에서 살던 지난날 이곳 박물관을 드나들며 곰곰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박물관이라 한다면, 박물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달동네 살림집’ 몇 곳을 고스란히 남겨, 이 달동네 살림집을 드나들면서 돌아보도록 해야 비로소 박물관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하고. 벽도 지붕도 보일러도 부엌도 방도 온통 고스란히 남긴 골목집 몇 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그래도 박물관을 세웠으니 고맙다 여겨야 할는지 모르나, 남기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터가 아니라 모형을 따로 만들어 보여주는 터로 그친다면, 박물관을 짓는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요. 돌이키면, 박물관까지 짓는다 한다면, 예전 달동네 살림집과 마을 이야기를 찬찬히 아로새기는 책이라도 하나 있어야 옳습니다. 예전 달동네 사람들 모습을 담고, 달동네 살림집 모습을 담으며, 달동네 마을 한해살이를 찬찬히 보여주는 사진책과 글책과 그림책이 있어야 마땅해요. 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책을 갖추어 사람들한테 선보여야 옳습니다.

 

 


  다시금 《大圖解 九龍城》을 들춥니다. 《大圖解 九龍城》은 구룡성에 깃든 집을 모조리 훑었을까 궁금한데, 훑을 수 있는 만큼 샅샅이 훑으며 집 하나하나 어떠한 모양새요 살림새였는가를 그림으로 나란히 보여줍니다. 사진으로 보여줄 대목은 이곳저곳 사진으로 하나하나 담아서 보여주고, 그림으로 보여줄 대목은 ‘통 그림’을 써서 종이 두 쪽씩 펼치도록 하면서 보여줍니다.


  홍콩 구룡성에서 살던 사람들은 가난해서 이곳에서 살아야 했을까요. 이곳저곳에서 밀리고 쫓기며 구룡성으로 흘러들었을까요. 인천에 아직 곳곳에 많은 달동네처럼, 서울에 아직 곳곳에 남은 달동네처럼,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에 있을 달동네처럼, 이런 까닭 저런 까닭이 있어 사람들은 달동네로 천천히 스며들 테지요. 작은 집 작은 방을 얻어 조그마한 살림을 꾸릴 테지요. 목숨이 달린 동안 다시금 기운을 차려 살아가고자, 이 한 곳으로 시나브로 모여들 테지요.


  홍콩 구룡성 사람들한테도 사진기는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홍콩 구룡성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사진을 구룡성에서 찍었을까 궁금합니다. ‘구룡성 탐험대’는 구룡성이 사라지기 앞서 이곳 발자취를 아로새기려는 사진을 찍었는데, 홍콩 구룡성 사람들은 제 보금자리였던 이곳에서 어떤 꿈 어떤 사랑 어떤 삶 어떤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았을까 궁금합니다.

 

 


  생일잔치 때에 사진을 찍었을까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 사진을 찍었을까요.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을까요. 사랑스러운 옆지기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을까요.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을까요. 어떤 모습 어떤 삶자락 어떤 눈물 어떤 웃음 어떤 하루를 사진으로 찍었을까요.


  사진으로 한 장 찍으며 아로새기는 오늘 하루가 됩니다. 사진으로 한 장 남기며 가만히 돌아보는 어제 하루가 됩니다. 사진으로 한 장 옮기며 이듬날 새롭게 살아낼 기운을 북돋우는 하루가 됩니다.


  사진으로는 무엇을 할 만할까요. 살림집을 옮기는 날, 짐차에 꾸역꾸역 짐을 다 싣고 나서 덩그러니 텅 빈 방이나 집을 둘러보다가는 사진 한 장 찍는다면, 이러한 사진으로는 무엇을 할 만할까요. 무엇을 돌이킬 만할까요. 무엇을 되새길 만할까요.


  백 마디 말이나 천 마디 글보다 사진 한 장으로 더 깊거나 더 넓거나 더 아련하거나 더 애틋한 이야기를 빚을 만한가요. 깨끗함도 지저분함도 아닌, 그예 덩그러니 텅 빈 모습을 사진으로 옮기면서 무엇을 느낄 만한가요.

 


  오늘날 한국 곳곳에 높직하게 아파트가 올라선 데마다, 조금 아련한 옛날을 되새기면, 어느 곳이든 달동네 살림집이 줄줄이 있었거나 논밭이 있었거나 멧등성이가 있었습니다. 높직한 아파트가 올라서기 앞서 예전 삶자락을 누군가 사진으로 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예전 삶자락을 누군가 사진으로 담았다면, 왜 사진으로 담았을까요. 나중에 이 사진을 어디엔가 팔 수 있으니까? 나중에 이 사진으로 옛이야기를 아스라이 떠올릴 수 있으니까? 이곳 예전 모습을 나는 안다고 자랑할 수 있으니까? 사진 한 장조차 남기지 않으면 너무 쓸쓸하니까?


  값져 보이는 사진기를 갖춘 사람들이 언젠가 골목동네를 휘 쏘다니면서 ‘이곳은 곧 재개발로 사라진대. 사진으로 찍어 놔야 해.’ 하고 흘리던 말을 얼결에 곁을 스쳐 지나가다 들은 적 있습니다. 사라지는 삶터라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면, 사라지는 사랑도 사진으로 남기고, 사라지는 삶도 사진으로 남길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오늘 즐겁게 살아가는 나날을 사진으로 담고 싶습니다. 나로서는, 오늘 사랑스레 어깨동무하는 이웃이랑 동무를 내 좋은 살붙이하고 얼크러지며 사진으로 담고 싶습니다. 나로서는, 오늘 고맙게 누리는 내 좋은 보금자리를 기쁘게 사진으로 담고 싶습니다.


  《大圖解 九龍城》을 덮습니다. 이 사진책은 틀림없이 놀랍고 대단합니다. 다만, 내 가슴을 촉촉히 적실 만큼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지는 않습니다. 아마 누군가 구룡성에 깃들며 누린 사랑스러운 삶을 떠올리면서 ‘아름다우며 사랑스럽던 구룡성 이야기’를 사진으로 갈무리한 발자국을 언젠가 조용히 내놓을 날이 있겠지요. “大圖解 九龍城”이 아닌 “보금자리 구룡성”이나 “구룡성 이야기”나 “구룡성”이라는 이름이 붙는 사진책을 기다립니다. (4345.3.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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