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만 질러대는 노래는 듣기 싫어

 


  나는 소리만 질러대는 노래를 참 싫어한다. 어릴 적부터 나이든 뒤까지, 소리만 질러대면 왱왱질이지 노래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시원하게 내지르는 목청은 때때로 시원할 수 있지만, 그저 내지르기만 할 때에는 귀가 따가우며 가슴이 답답하다. 곧, 더 높은 소리를 불러제낄 수 있다 해서 노래를 더 잘 부른다 할 수 없다. 이를테면, 2011∼2012년 텔레비전에 흐르는 〈나는 가수다〉나 〈불후의 명곡〉 같은 풀그림에 나오는 노래꾼들이 그저 목이 터져라 외쳐댈 때에는 참으로 뻘쭘하면서 갑갑하다. 노래는 그렇게 질러대어서는 노래가 아니거든. 노래방에서도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기만 하지는 않거든. 내 마음을 담아야 노래가 되거든. 내 사랑을 담고 내 이야기를 풀어내야 노래가 되거든.

  조용히 속삭이는 듯한 노래가 있고, 나즈막히 읊는 듯한 노래가 있다. 울먹이는 노래가 있고, 춤을 추며 웃는 노래가 있다. 왜냐하면, 노래란 삶이기 때문이다. 삶을 노래하니까, 어느 때에는 속삭이고 어느 때에는 외치며 어느 때에는 춤을 춘다.


  더 높은 소리를 내지른다 해서 점수를 잘 받을 수 없다. ‘오, 그래, 높이 지를 줄 아는구나.’ 하고 여길 뿐이다.


  나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기에 아주 잘 느낀다. 글재주가 빼어나대서 더 읽을 만한 글을 쓰지 않는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빈틈없이 맞추기에 좋다 할 만한 글이 태어날까. 초점이나 빛살을 잘 맞추어 찍는 사진일 때에 잘 찍은 사진이라 하는가.


  대학교를 나와야 그림쟁이나 만화쟁이가 되지 않는다. 그림결은 좀 서툴거나 어리숙해도 이야기가 묻어나면서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울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림이나 만화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진도 글도 이와 매한가지이다. 글솜씨가 무슨 대수랴. 목청이 노래에서 무슨 대수랴.


  목소리가 남다르지 않아도 된다. 높은 소리를 내지르지 못해도 된다. 나즈막히 속삭일 줄 몰라도 된다. 이야기를 담는 웃음과 눈물이 있을 때에 노래라고 한다.

 


  ‘블론디(blondie)라고 하는 서양사람이 부른 〈마리아〉라는 노래를 듣는다. 이 노래를 몇 해 앞서 옆지기가 수없이 틀었다고 하는데, 어인 일인지 나는 예전에 들은 노래를 잘 떠올리지 못한다. 왜 그러지?


  새롭게 이 노래를 들으며 생각한다. 옆지기는 옆에서 한 마디 거든다. 블론디라는 할머니는 소리를 질러야 하는 대목에서 속청(가성)으로 부른다고 말한다. 곰곰이 들어 보니 그렇다. 이 할머니는 속청 아닌 목청을 내지 못한단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이 속청이 되게 좋다. 시원시원 내지른다 할 때에도 좋겠지만, 속청으로 이 대목을 끝내고 앞뒤를 가만가만 목청으로 부르는 결이 좋다. 내가 영어를 잘 모르기는 하나, 가락이며 노랫말이며 느낌이며 결이며 골고루 어우러지겠지.

 


  사랑스러운 짝꿍한테 아파트를 선물해야 짝꿍이 좋아하지 않는다. 더 돈을 들인 선물보다는 더 마음을 들인 사랑스러운 선물일 때에 좋아한다. 더 높이 내지른대서 노래가 되지 않는다. 더 사랑스레 부르며 더 따사로이 즐길 때에 노래가 된다. 더 기쁘게 쓸 때에 글이 되고, 더 아름다이 여밀 때에 사진이 된다. 더 신나게 일굴 때에 만화가 되고, 더 빛나게 붓끝을 놀릴 때에 그림이 된다. 내 아이들은 더 값비싼 밥집에서 더 놀라운 밥을 사다 주어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을 담은 밥 한 그릇이면 배불리 먹으며 싱긋 웃는다. (4345.3.12.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