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이오덕 지음 / 삼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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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는 누가 써서 누구한테 읽히는가
 [어린이책 읽는 삶 9] 이오덕,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삼인,2011)



- 책이름 :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
- 글 : 이오덕
- 펴낸곳 : 삼인 (2011.9.16.)
- 책값 : 15000원


 (1) 동화읽기


 어린이는 어른으로 자라고, 어른은 어린이를 낳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으로 크는 길을 걷고, 어른은 새로 빚는 어린이 목숨을 늘 몸속에 건사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어린이였던 나날을 잊는 사람이 많은데, 참말 뼛속까지 몽땅 잊는 사람이 많은데,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찾으려 마음을 바치고 땀을 흘릴 수 있다면, 언제라도 어린이 넋을 되찾으면서 사람다운 꿈을 길어올릴 수 있으리라 믿어요.

 내 아이들을 바라보며 노상 생각합니다. 내 아이들이 예쁘게 놀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잠드는 모습은 내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 두 사람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씨라고 느껴요. 이와 함께, 내 아이들이 미운 짓을 한다거나 소리만 꽥꽥 지르면서 뒷북놀이를 한다면, 이때에도 이 슬프거나 못난 몸가짐이란 저희 어버이 두 사람한테서 이어받은 아픔이나 생채기라고 느껴요.

 착한 넋으로 사랑스레 살아가는 어버이일 때에는 착한 넋으로 사랑스레 살아가는 아이들이에요. 샘 내는 몸가짐으로 안쓰러이 살아가는 어버이일 때에는 샘 내는 몸가짐으로 안쓰러이 살아가는 아이들이고요. 어버이는 어버이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울 길을 찾아야, 어버이인 나부터 즐거우면서 내 아이들 또한 즐겁습니다. 아이들만 예쁘게 자랄 수 없어요. 아이들만 숱한 학교를 다니며 똑똑해질 수 없어요. 아이들만 큰도시로 나아가 회사원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며 ‘잘살’ 수 없어요. 어버이와 아이가 나란히 잘살아야 해요. 어버이와 아이가 다 함께 예쁘게 살아야 해요. 어버이와 아이가 서로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해요.


.. 요즘은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다. 어머니고 할머니고 아버지고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면서 벙어리가 되었고,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보는 텔레비전을 함께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 우리 모두가 참되게 살아가기 위한 더욱 높은 자리에 서서 나날의 일들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나날의 일들이 결코 평범한 이야기로 처리될 수 없을 것이다 …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벌써 오래 전에 민간설화를 모아 정리하는 일을 끝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저마다 자기 나라의 풍토에 맞는 아동문학을 창조해 왔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아프리카·동남아의 여러 약소국가들도 모두 설화를 수집·정리·보존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 왔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사회에서는 거의 내버려둔 상태다 … 민중을 멸시하고 민족을 열등시하는 처지에 서 있는 사람은 민중의 전통을 멸시하고 옛이야기를 열등시할 것이 당연하다. 민중을 높이 보고 민족에 애정을 갖는 사람만이 민중들의 느낌과 말을 사랑하고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속속들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유산을 아끼고 가꾸려는 태도는 대단하며, 아이들도 그렇게 풍부하게 기록된 옛이야기를 즐겨 읽으면서 자라고 있다 ..  (11, 25, 59∼60, 66, 67쪽)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이원수 동시나 권태응 동시나 권정생 동시나 임길택 동시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현덕 동화라든지 이주홍 동화를 익히지 못했어요. 이원수라는 이름은 〈고향의 봄〉이나 몇 가지 동시 때문에 이름을 외워야 했지만, 막상 이원수라는 어른이 어떤 동시와 동화를 남겼는지는 하나도 모르는 채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사였으며 무척 똑똑하신 분이었으나, 당신 아들한테 아름다운 어린이문학을 물려주지 못했어요.

 나는 이 모든 어린이문학 일꾼을 스물네 살을 넘기고 나서야 스스로 찾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스스로 찾았다기보다 ‘집안에 이분들 책이 없으’니 ‘바깥에서 이분들 책을 찾을 수 있던’ 셈이라 할 만하지요. 다른 집에서는 예닐곱 살에 이원수 동요와 동시를 읽거나 듣고, 아홉열 살에 권정생 동시와 동화를 읽을 뿐 아니라, 열두어 살에 이주홍 동화를 읽지만, 나는 어느 한 가지도 가까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임길택이나 권태응이나 현덕 어린이문학은 1990년대가 지나서야 알려지고 책으로 나왔기에, 느즈막하게 어린이문학에 눈을 뜬 나로서는 몹시 반가이 이분들 책을 만났어요. 고맙게 사귀었어요.

 다시금 가만히 헤아리면, 나로서는 어린 나날 이원수이든 권정생이든 이주홍이든 알지 못하며 자랐으니까, 나중에 이런 이름을 찾아나서며 책읽기를 하고, 또 이 책읽기가 임길택이나 권태응이나 현덕으로도 이어질 수 있구나 싶어요. 곧, 내 어버이는 나한테 이원수를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못했지만, 나 스스로 이원수를 배우면서 찾아나설 씨앗을 물려주었다고 할까요. 어린 나날 더 좋거나 더 아름답거나 더 기쁘거나 더 빛나는 어린이문학을 만나지 못하고 사귈 수 없었으나, 집에서 어머니 일을 거들고 동네에서 동무들하고 뛰놀면서 내 가슴을 씩씩하게 일구는 길을 걸을 수 있었구나 싶어요.


..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에게 바르고 아름다운 우리 말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그 뜻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 문장이 어려운 것은 그 뜻이 깊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용은 아무것도 아닌데 글이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 일제시대에 슨 작품, 더구나 아동문학 작품에서는 이런 잘못 쓴 말을 그대로 두지 말고 마땅히 우리 말로 고쳐서 읽도록 하는 것이 옳고, 그렇게 해야 작품을 써서 남긴 분의 뜻도 바로 이어 주는 일이 된다고 본다 ..  (33, 36, 275쪽)


 두 아이를 옆지기와 함께 낳고 살아가면서 언제나 찬찬히 돌아봅니다. 이 아이들 나이 즈음에 나는 내 어버이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나는 어느 한 가지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나이가 좀 든 다음 일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그저, 우리 집 두 아이 모습에 기대면서 내 어린 나날 내 어버이가 나를 보살피며 사랑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땀과 품과 겨를과 꿈을 바쳤을까 하고 느낍니다. 나는 내 어버이가 나와 형한테 했듯이, 내 두 아이한테 내 모든 땀과 품과 겨를과 꿈을 바치면서 이 아이들이 사람다운 넋과 얼을 올바로 건사하는 예쁜 목숨으로 자라도록 어깨동무할 ‘어른’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어버이인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아이 또한 먹고 싶어 합니다. 어버이인 내가 즐겁게 차려서 맛나게 먹는 밥을 아이 또한 맛나게 먹어요. 어버이인 나부터 아이하고 옆지기한테 예쁘며 곱고 빛나는 말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아이들도 나와 옆지기한테 예쁘며 곱고 빛나는 말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지만, 이보다는 ‘흐르는 사랑’이에요. 나한테서 아이한테 흐르는 사랑이 있고, 아이한테서 나한테 흐르는 사랑이 있어요. 나한테서 옆지기한테 흐르는 사랑처럼, 옆지기한테서 나한테 흐르는 사랑이 있습니다.

 착한 길을 반가이 맞아들이면, 어버이요 어른인 나부터 기쁜 나날을 누립니다. 착한 길을 반가이 맞아들이는 어버이요 어른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이라면, 이 아이는 하루하루 씩씩하게 착한 길을 반가이 맞아들이면서 어여삐 자랄 수 있어요. 어버이 스스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아이들 삶이 달라져요. 이름나다는 학교나 훌륭하다는 학교에 보낸들 아이들 삶이 좋아지지 않아요. 아이들은 학교에 넣으면 안 돼요. 아이들은 어버이가 살아가는 곳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제 사랑꽃을 피울 수 있어야 해요.


.. 이러한 민중들의 소망과 지혜가 담긴 교훈성이 있기에 옛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문학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 어린이들은 어른들(더구나 글을 쓰는 사람들)같이 사색에 잠기거나 추상된 이론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직감으로 진리를 깨닫는다. 삶 속에 움직인다. 공상도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출발한다 … 저들을 잡아먹으러 올라오는 호랑이에게 도리어 올라오는 수를 가르쳐 주는 아이들이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고, 기적이 기적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의 말은 하늘과 땅의 모든 목숨에 가 닿는다. 하느님이 아이들의 소원을 어찌 모르겠는가 …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가 시인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친다고, 문학교육을 한다고 아이들을 방 안에 가두어 놓고 죽은 글만을 읽게 하고 외우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이다. 이래서 아이들과 교육은 교과서에 올려놓은 그 죽은 글과 함께 죽어 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그 모든 것이다. 자연을 잃은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자연을 빼앗긴 아이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언제나 포근하게 안아 주는 어머니가 된다 ..  (79, 80∼81, 131, 207쪽)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아름답고 푸르디푸른 자연과 벗삼으면서 흙을 사랑하는 나날을 일구는 터전이라면, 이러한 시골마을 학교는 ‘제도권 학교’가 아닌 ‘사랑스러운 터전이자 보금자리’예요. 이만 한 학교라면 옆지기도 나도 아이들을 학교에 넣고 싶어요. 그러나 자연을 예쁘게 품에 안은 시골마을이라 하더라도 어른이나 아이들 꿈이 ‘도시·돈·이름값·자가용·물질문명’이라 한다면, 이러한 터전에 둘러싸인 시골마을 학교는 도시와 똑같은 제도권 학교예요. 지식과 기능과 학벌과 점수로 움직이는 슬프며 안타까운 죽음터이고 말아요.


.. 가난하게 살아가는 노마네 아이들은 노마를 중심으로 해서 돈이나 책으로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놀이를 즐기는 가운데 서로 도우면서 사람다운 마음을 키우고, 슬기를 배우고, 몸을 단련하면서 자라난다 … 아이들의 놀이 속에는 교육, 문학, 철학, 정교, 그밖에 우리 어른들이 쌓아 놓은 모든 고귀한 것들의 알맹이가 되고 바탕이 되는 것, 근원이 되는 것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놀이가 없는 공부는 참 공부가 될 수 없다 … 사람은 누구든지 놀이로 된 어린아이들의 삶을 그대로 연장해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 어른들이 아이들을 억압해서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거나 비뚤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고 평화스러운 자리에서 놀게만 한다면, 이 아이들은 지금까지 어른들이 상상도 못했던 참으로 놀랍고 훌륭한 공부를 스스로 즐기면서 하게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  (186∼187, 195, 196, 200쪽)


 어른들부터 하루 빨리 다람쥐 쳇바퀴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시골에서도 다람쥐 쳇바퀴 물질문명을 붙잡으면 안 됩니다.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란 누구보다 어버이요 어른인 나부터 살리는 길입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살아나면서 어깨동무할 꿈누리를 이루는 길을 걸어가야 사랑과 믿음이 이루어져요. 예식장 하얀 면사포는 사랑이 아니에요. 높다란 뾰족탑 예배당은 믿음이 아니에요. 다이아반지와 아파트 열쇠꾸러미는 사랑일 수 없어요. 두툼한 성경책과 거룩한 미사로는 믿음이 살아나지 못해요.

 두 발로 흙을 디뎌야 합니다. 두 손으로 흙을 만져야 합니다. 흙에서 태어나는 아름다운 목숨인 내 삶을 깨닫고, 흙으로 돌아가는 아리따운 목숨인 내 죽음을 알아차려야 해요.

 가을바람이 불고 겨울바람이 다가옵니다. 가을햇살이 내리쬐니, 이윽고 가을걷이를 마치면 겨울햇살이 찾아오겠지요. 햇살은 봄부터 겨울까지 골고루 내리쬡니다.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는다 하더라도, 이 햇살이 있어 사람들은 누구나 밥을 얻고 옷을 얻으며 물이랑 바람뿐 아니라 집과 마을을 얻어요.

 누리며 나눌 사랑을 알아야 해요. 즐기며 꽃피울 믿음을 깨우쳐야 해요. 바로 이 때문에 아이들한테 좋은 동시와 동화를 읽힐 뿐 아니라, 어른부터 좋은 동시와 동화를 먼저 만나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이 사람한테 가장 고마운 마음밥이거든요.


 (2) 사랑읽기


 이오덕 님이 남긴 글을 그러모아 엮은 책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삼인,2011)를 읽습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이오덕 님이 1980년대 언저리에 여러 잡지에 실었던 글입니다. 이 글이 처음 잡지에 실렸을 때에 읽은 분이 있을 테지만, 이렇게 책으로 묶이고 나서야 처음으로 읽는 분이 훨씬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글을 2003∼2006년 사이에 수없이 되읽었습니다. 이무렵에 이오덕 님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으면서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책에 실린 글을 쉰 차례 넘게 읽었어요. 말마디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고, 글투 하나하나가 남다릅니다.

 같은 글을 어떻게 쉰 차례 넘게 되읽는가 할 수 있지만, 되읽을 만한 글이라면 쉰 차례뿐 아니라 백 차례나 이백 차례 넘게 되읽을 수 있습니다. 삶을 밝히는 글이라 한다면 오백 차례나 즈믄 차례를 못 읽을 까닭이 없어요. 다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오백 차례나 즈믄 차례를 거듭 읽을 만하다 싶은 글이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무척 잘 썼다 싶은 어느 글은 열 차례쯤 되읽을 만하구나 싶기도 하지만, 스무 차례를 되읽는다든지 서른 차례를 되읽을 만한가 하고 곱씹을 때에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습니다.


.. 동화문학이란 것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참모습을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쓰는 글”이다. 또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이야기로 쓰는 글”이다 …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동화를 쓸 수 있다 …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실성, 어린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 참으로 어린이를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만이 동화작가가 될 수 있다 … 이렇게 옷을 깁고 신을 삼으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것이 옛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전수되던 자리는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일을 하는 자리, 생산을 하는 자리였다는 것,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과 받아 누리는 사람, 어른과 아이가 온전히 하나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민중성의 본질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다 ..  (17, 20, 75쪽)


 오늘날 수많은 글쟁이와 지식쟁이는 그야말로 ‘글로 글을 쓰’고 ‘지식으로 지식을 다룹’니다. 글로 쓰는 글은 한 차례조차 읽고 싶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지식을 다룰 때에는 아예 거들떠보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글로 쓰는 글이나 지식으로 다루는 지식에는 사랑이 없거든요. 따뜻하지 않아요. 너그럽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음조차 없어요. 나는 내 삶에서 지식을 더 쌓고 싶지 않고, 내 마음밭에 글조각을 채우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삶을 알차게 일굴 나무 한 그루가 사랑스러워요. 나는 내 삶을 알뜰히 보듬을 풀 한 포기가 믿음직해요.

 이리하여, 내 어린 나날 이름조차 모르고 읽지도 못하던 이원수·권태응·권정생·현덕·임길택·이주홍 같은 분들 동시와 동화를 어른이 된 뒤부터 차근차근 읽습니다. 차근차근 한 차례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습니다. 여러 차례 되읽은 다음 내 아이들과 옆지기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책을 여러 권 갖춥니다. 내가 읽는 책 따로, 살붙이 읽을 책 따로 건사합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사랑으로 쓴 글에 서린 따스한 마음과 넉넉한 꿈이 고마우면서 좋으니까, 이분들 책을 즐거이 장만해서 수없이 되읽어요.


.. 이 생각(주제)을 그대로 바로 쓰면 설교가 되고 논문이 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감동으로 느껴지도록 쓰면 소설이 되고 동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주제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의 행동과 말과 사건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 있어서 독자들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그 생각에 따르고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주제는 지은이의 인격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으니 훌륭한 삶의 태도와 인생관,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라야 훌륭한 동화를 쓸 수 있는 것이다 … 동화를 어린애들에게 주는 장난감이나 과자 같은 것 정도로 보아 온 작가들에게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만, 어린이와 겨레가 살아가는 문제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모나 교사들이라면 철학이 있어야 동화를 쓸 수 있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 (28, 29쪽)


 이오덕 님은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어린이문학 비평책에서 동화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사랑’을 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어린이를 사랑해야 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 삶인 나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런 어린이문학을 펼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이 없을 때에는 어떠한 어른문학도 일굴 수 없다고 밝힙니다. 또한, 문학만이 아니라 정치이든 사회이든 교육이든 노동운동이든 환경운동이든, 늘 사랑으로 할 일이지, 지식이나 잔재주나 이름값이나 다른 바깥힘으로 할 수 없다고 밝혀요.

 사랑이 없는 교실에서는 무엇을 가르칠까요. 사랑이 없는 청와대에서는 무슨 정책이 나올까요. 사랑이 없는 대형할인마트에서는 무엇을 장만할까요. 사랑이 없는 신문이나 방송에는 어떤 기사가 실릴까요.


.. 농과대학을 나와도 농사지을 줄 모르고,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데가 없어 빈둥거리면서 놀고, 그러다가 그제야 무슨 기술을 배운다고 전문대학에 다시 입학하는 꼴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 그토록 알뜰히 배우고 널리 익혔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고, 그 모든 배움의 알맹이가 되고 밑바탕이 되는 것은 못 배웠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람의 목숨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기르고 가꾸고 해서 그것을 장만하는 일이다 ..  (153, 159쪽)


 동화는 어른이 써서 어린이한테 읽힙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동화책이든 동시책이든 스스로 돈을 치러 장만하지 못해요. 어린이가 읽는 동화책이나 동시책은 모두 어른이 책방에서 사서 선물해야 합니다. 독후감 숙제로 읽히는 동화책이든 마음밥 살찌우는 이야기꾸러미로 읽히든, 한결같이 어른이 사들인 다음에 어린이가 읽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화란 어른이 써서 어른이 읽는 글입니다. 어른이 써서 어른이 읽은 다음에 찬찬히 거르거나 가리거나 솎아서 내 아이한테 조금씩 베푸는 이야기예요. 어린이와 살아가는 어른이 온사랑을 기울여 쓴 동화와 동시를 어린이와 살아가는 또다른 어른이 온사랑을 기울여 알뜰살뜰 읽은 다음에 온사랑을 기울여 보살피는 내 아이한테 읽히는 책이 동화책입니다.


.. 잘못된 공부라는 짐에 짓눌려 그 몸과 마음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아이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곧 아이들에게 삶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겠는가? … 거의 모든 동요시인들이 겨레의 삶과 아이들의 현실을 등지고 방 안에서 읽은 글 속에 갇혀 머리로 고운 말만 꾸며 만들어 내어서 아이들에게 읽히고 노래 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어린이들의 참된 삶과 노래의 전통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다행히 아이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어 준 동요시인이 있었다. 권태응과 이원수 두 사람이다 ..  (307, 318쪽)


 동화가 이러하다면, ‘동화 비평’이나 ‘동시 비평’은 어떻게 해야 하는 일이 될까요. 동화나 동시 모두 사랑으로 쓰고 사랑으로 읽는다면, 동화와 동시를 비평하는 글은 어떻게 써야 참답게 비평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만할까요.

 오직 하나일 테지요. 글쓰기도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글읽기도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글나눔이든 글꽃이든 모두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내 삶도 사랑이며 내 아이들 삶도 사랑입니다. 내 이웃과 동무들 모두 사랑이에요. 풀과 꽃과 나무와 벌레와 짐승 모두 사랑입니다. 구름과 바람과 들판과 바다와 멧자락 모두 사랑이에요. (4344.10.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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