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아침 열한 시 오십 분에 읍내에서 나오는 시골버스는 열두 시 오 분 무렵 광벌 큰길가 느티나무 버스역으로 들어오고, 네 식구 장마당 마실을 하고 난 다음 낮 한 시 사십 분 시골버스를 타고 한 시 오십오 분에 광벌 큰길사 느티나무 버스역에 닿아, 꾸벅꾸벅 조는 아이를 안고 걷다 보니, 아이는 어느새 잠이 조금씩 깬다.

 아이가 그대로 잠들어 아이를 안은 채 집으로 왔다면 아이는 낮잠을 조금 잤을 테고, 아버지도 낮잠을 조금 자고 나서 저녁을 먹었겠지. 그러나 아이가 졸립고 힘들면서 잠들지 않는 바람에 장마당에서 사온 딸기랑 아침에 남은 밥이랑 허둥지둥 주워먹고는 이내 곯아떨어진다. 오늘 몫 빨래는 이듬날로 미루기로 한다.

 저녁 열한 시가 가까워 잠에서 깬다. 아이도 잠에서 깬다. 아이한테 일어날래 하고 묻는데 그냥 눕는다. 쉬 마려우면 일어나라 하는데 그대로 눕더니 기저귀에 쉬를 하고서 일어난다. 그냥 일어나서 쉬를 하면 덧나니. 왜 기저귀에 쉬를 한 다음에 일어나니.

 곯아떨어지기 앞서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 넷째 권을 다 읽었다. 만화책 《피아노의 숲》 열아홉째 권도 다 읽었다. 만화책 《요츠바랑!》 열째 권은 읽다가 말았다. 몸이 꽤 무거워 눈이 게슴츠레 감길 때에는 만화책이 그럭저럭 읽힌다.

 그러나 몸이 힘들 때라 해서 모든 만화책이 잘 읽힐 수 없다. 만화책이라 잘 읽힌다기보다 여느 책으로서 훌륭하거나 여느 이야기로서 돋보일 때에 몸이 힘들면서도 눈에 더 힘을 주면서 읽는다. 《씨앗의 희망》이든 《숨겨진 풍경》이든 《초원의 집》이든, 언제나 저녁 무렵 온몸이 욱씬욱씬 쑤시며 고단하게 드러눕는 잠자리에서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잠을 미루며 읽었으니까.

 새벽에 맑은 넋으로 책을 읽는다. 저녁에 고단한 넋으로 책을 읽는다. 아침에 기쁜 넋으로 책을 읽는다. 낮에 어수선하고 바쁜 넋으로 책을 읽는다. (4344.4.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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