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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 읽은 동무 있나요? 진작에 읽었다구요? 읽으라는 소리는 자주 듣는데 아직 못 읽었다구요?

 저는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을 1998년 1월에 처음 읽었어요. 1984년에 나온 《몽실 언니》인데, 아저씨는 자그마치 스물네 살 나이에 이 동화책을 비로소 알아보았답니다. 아저씨는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에서 군대살이 스물여섯 달을 보냈어요. 1995년 11월에 눈바람 맞으며 군대에 가서, 1997년 12월에 똑같이 눈바람 맞으며 군대를 떠났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군대를 떠나 사회로 돌아온 1998년 1월은 새로운 대통령이 뽑힌 때이기도 하지만, 한창 국제통화기금이다 뭐다 하면서 편의점 알바이니 술집 알바이니 하는 일자리마저 없던 때예요. 군대에서 늘 하던 삽질 솜씨를 살려 막일꾼으로 일감을 찾아보고자 했지만, 이마저도 없었어요. 스물여섯 달 동안 산골짜기 깊은 데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사회로 돌아온 만큼 몸과 마음을 쉬고팠는데, 나라가 어수선하다 보니 여러모로 눈치밥을 먹어야 했어요. 군대에서 막 나온 몸으로 주머니에 돈이 있나, 집에서 돈 몇 푼 얻을 수 있나, 하는 수 없이 헌책방을 찾아가 여러 시간 조용히 책을 읽는데, 이때에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이 제 눈에 번쩍 뜨였습니다.

 우리 말사랑벗님들이라든지 말사랑벗님들 언니나 누나나 동생들은 《몽실 언니》를 초등학생 무렵에 처음 만나겠지요. 조금 늦으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나이에 만날 테고요. 그런데 저는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만났어요. 이무렵 《몽실 언니》를 처음 만나며 다른 어린이책을 하나하나 찾아 읽었어요. 그리고 더없이 슬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나는 내가 열두어 살 나이에 이 책을 만날 수 없었을까? 왜 나한테는 내 나이에 걸맞을 어린이책 하나 쥐어 주는 어른이 없었나?’ 생각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어린 날부터 학교에서 끝없는 베껴쓰기 숙제와 글짓기 숙제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몽실 언니》를 읽고 나서는 속에서 자꾸자꾸 무언가 터져나오더군요. 책을 다 읽고 맨 끝자리 빈 종이에 ‘책을 읽으며 북받친 느낌’을 깨알같은 글씨로 촘촘히 적바림했어요.

 누가 읽으라 건넨 책이 아니고, 누가 쓰라 한 글이 아니었습니다. 그예 눈길이 꽂혀 읽은 책이요, 그저 마음으로 우러나며 쓴 글이었어요. 바야흐로 ‘글쓰기’를 몸으로 깨달은 셈입니다.

 이제 거의 모든 학교에서는 ‘글짓기’라는 이름을 안 쓰고 ‘글쓰기’라는 이름을 써요. ‘글쓰기’라는 낱말은 ‘글짓기’라는 낱말과 함께 낱말책에 곱게 실려요. ‘글쓰기’라는 낱말이 낱말책에 실린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동네 조그마한 학원조차 “글쓰기 학원”이라 하지 “글짓기 학원”이라 하지 않아요. 글을 짓는 일이 얄궂거나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섣불리 ‘글짓기’라는 낱말은 안 쓰려 해요.

 왜냐하면, 아저씨가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지겹도록 해야 했던 억지스러운 ‘글짓기’ 숙제하고 맞물리기 때문이랍니다. 글을 짓는 일은 “억지스레 머리로 쥐어짜듯 뱉어내는 글”이 되기에, 이 글을 쓰는 어린이나 푸름이나 어른이나, 제 꿈과 마음과 넋을 오롯이 담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글쓰기’는, 글을 쓰려는 사람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넋과 꿈과 마음을 차근차근 적바림하는 일이라고 해요. 이 낱말은 지난 2003년에 숨을 거둔 이오덕 선생님이 1960년대에 처음으로 쓰면서 퍼졌어요. 이오덕 선생님도 1950년대에는 ‘글짓기’라는 낱말을 똑같이 쓰셨지만, 학교에서 벌어지는 억지스럽고 모질며 틀에 박힌 수업으로 짓누르는 ‘글짓기’는 아이들 마음밭을 살찌우지 못한다고 여기셨어요. 아이들 마음밭을 살찌우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한결 씩씩하고 싱그러운 얼을 키우는 슬기를 빛내도록 돕고 싶어, 낱말부터 ‘글쓰기’라는 이름을 새로 일구어서 쓰셨습니다. 옳고 바른 마음가짐으로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이야기를 나누려는 글쓰기 나누기를 마흔 해 남짓 한 끝에 우리들은 오늘날 즐겁고 홀가분하게 ‘글쓰기’를 할 수 있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이름은 ‘글쓰기’로 고쳤지만, 예전과 똑같이 억지스러우면서 모질고 틀에 박힌 채 벌어지는 글쓰기 수업이나 교육이라 할 때에는 ‘옛날 글짓기’하고 마찬가지예요. 이름은 허울이 아니거든요. 이름이 제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알맹이가 엇나가거나 비뚤어지면 도루묵이 되고 말아요. 이름부터 제대로 쓰도록 힘써야 하는 가운데, 속살 또한 제대로 여물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글쓰기’와 함께 ‘글짓기’ 마음가짐을 새삼스레 헤아릴 줄 알아야 하지요. 글쓰기는 이오덕 선생님이 얘기하고 나누며 뿌리내리도록 했듯, 꾸밈없는 삶이 꾸밈없는 넋이 되어 꾸밈없는 말글로 태어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글짓기는 글을 짓는 일이라고 했지요? 글을 짓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짓는’ 일이란 또 어떤 일일까요?

 글쓰기와 함께 글짓기도 바른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느껴요. 우리들은 ‘마음쓰기’를 하듯이 ‘글쓰기’를 하고, ‘농사짓기’를 하듯 ‘글짓기’를 할 때에 더없이 알차며 아름다울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해요.

 한자말로는 ‘배려(配慮)’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마음쓰기’예요. 말사랑벗님, 낱말책에서 ‘배려’라는 한자말을 찾아보셨어요? 한번 찾아보셔요. 말풀이를 보면 “마음을 씀”이라고 적혔답니다. 남다른 뜻이나 느낌을 담은 낱말 ‘배려’가 아니에요. 누구나 쉽게 아는 말 ‘마음쓰기’를 한자로 옮겨적을 때에 바로 ‘배려’랍니다. 꾸밈없이 마음을 쏟아 이웃을 아끼거나 사랑한다 할 때에 ‘마음쓰기’예요. 이 매무새 그대로 글을 쓴다면 ‘글쓰기’예요.

 농사를 짓는 마음가짐을 곰곰이 헤아려 보셔요.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끼는 넋 그대로 몸소 땅을 일구고 갈며 씨를 뿌려 건사하고 갈무리합니다. 이렇게 갈무리한 곡식을 찧고 일고 씻고 냄비에 안쳐서 구수한 밥을 짓습니다. 농사를 지어 밥을 짓고 글을 짓습니다. 농사짓기란 밥짓기로 이어지고, 밥짓기는 다시 글짓기로 이어가요. 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글짓기’ 다음으로 ‘사랑짓기’로 이어 보곤 합니다. 다른 자리라면 ‘노래짓기’나 ‘옷짓기’, 또는 ‘책짓기’나 ‘마을짓기’로 이을 수 있어요.

 말을 살리는 길이란 넋을 살리는 길이고, 넋을 살리는 길이란 우리 삶을 살리는 길입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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