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숩게 껴안을 내 이웃과 벗과 살붙이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2] 《북한동포의 일생》(국제문화사,1987)


 사진책은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책으로 엮인 사진을 따스히 돌아보거나 사진이 묶인 책을 포근히 보듬을 고운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따사로이 감싸며 책은 책대로 넉넉히 헤아릴 맑은 사람을 바랍니다.

 아이는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사랑을 담아 따스히 돌보거나 어깨동무할 고마운 어버이를 기다립니다. 믿음을 실어 넉넉히 껴안거나 손잡고 놀 동무를 바랍니다.

 따순 손길은 따순 삶에서 비롯합니다. 입으로 벙긋벙긋한다고 따뜻할 수 있는 삶이나 손길이 아닙니다. 몸으로 부대끼며 따뜻할 삶입니다. 머리에 앎조각을 넣는다고 따스함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가슴에 애틋함을 품어야 비로소 따스한 넋을 북돋웁니다.

 우리 집 아이가 제 아버지하고 더 놀고 싶어 우산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아버지는 바삐 길을 나서야 하는데, 이모저모 짐을 챙긴 다음 집을 나설 무렵 우산을 함께 챙기려 하니 우산을 붙잡고 씨익씨익 웃습니다. 도시처럼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시골인 까닭에,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버스 타는 데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조금 실랑이를 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어 아이가 우산을 갖고 놀라고 해야겠다 생각하며 부랴부랴 집을 나섭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우산을 갖고 더 놀지 않고 나가 버리니 엉엉 웁니다. 엉엉 울며 우산 가져가라고 제법 멀리까지 좇아 나옵니다.

 누군가 ‘아이가 엉엉 우는 모습’만을 크게 잡아당겨 사진 한 장 찍었다면 이 사진만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아이랑 아빠가 우산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이 사진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무엇을 살피거나 헤아릴는지 궁금합니다. 치고박는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 어느 한쪽이 때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정작 때린 쪽은 딱 한 번 때렸을 뿐이고 숱하게 얻어맞아 나자빠졌다면, 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품을는지 궁금합니다.

 북녘사람은 남녘사람하고 견주어 무척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모든 북녘사람이 가난하거나 힘겹게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남녘사람은 북녘사람하고 대면 참 넉넉하며 즐겁게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모든 남녘사람이 넉넉하거나 즐겁게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관계기관에서 사진을 얻어’서 엮었다고 하는 사진책 《북한동포의 일생》은 1987년 9월에 나옵니다. 1987년 9월이라면 무척 어수선하다 싶은 때라 할 수 있지만, 다른 눈길로 바라보면 비로소 군사독재 울타리를 벗어내는 때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기득권과 정권이 아슬아슬한 때이며, 누군가한테는 숨통을 트며 꽁꽁 닫힌 입을 조금이나마 열 수 있는 때입니다.

 ‘관계기관 사진으로만 엮은’ 《북한동포의 일생》은 책이름 그대로 북녘사람이 보내는 한삶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사진책에 실린 사진으로 북녘사람을 바라보면 하나같이 불쌍하고 딱하며 안쓰럽습니다. 모두들 안타까우며 슬프고 고달픕니다.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그래요, 북녘사람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간다는데, 북녘사람 삶이 이렇다면 우리들 남녘사람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북녘사람 터전이 이토록 쪼들린다면 우리들 남녘사람은 어떡해야 하나요.

 남녘과 북녘이 손을 맞잡고 모든 총칼과 탱크와 전투기와 군함을 녹여 호미와 낫과 쟁기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군인들이 쳐 놓은 쇠가시울타리와 지뢰밭을 허물어 논밭으로 바꾸며, 오순도순 지낼 조촐한 살림터와 마을을 일굴 수는 없는가요.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공장이나 더 빨리 달릴 찻길과 기찻밀 말고, 스스로 조용하며 아름다이 살아갈 예쁜 마을을 온누리 곳곳에 마련할 수는 없을는지요.

 사진을 찍는 이라 한다면, 내 사진 한 장에 꽃씨 하나와 같은 마음을 심어 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이라 한다면, 내 그림 한 장에 열매 하나와 같은 가슴을 나누어 놓으면 무척 기쁘겠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이라 한다면, 내 글 한 줄에 구름 하나와 같은 넋을 실어 본다면 아주 예쁘겠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깎아내리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여 어깨동무할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로 거듭나면 반갑겠습니다. 서로 총칼을 겨누며 해코지하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은 털고, 나란히 어깨를 겯고 씩씩하며 튼튼하게 놀이와 일을 즐기는 이웃과 동무로 사귈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림에는 기운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찌우는 기운이 있습니다. 사진에는 꿈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아가도록 하는 꿈이 있습니다. (4343.9.15.물.ㅎㄲㅅㄱ)


― 북한동포의 일생 (관계기관 자료제공,국제문화사,1987.9.25./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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