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웅진 세계그림책 132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서애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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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외로우면 우리 집에 놀러 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 앤서니 브라운, 《나와 너》



 어떤 이들은 앤서니 브라운 님과 같은 그림쟁이를 두고 “그림책 독자라면 누구나 최고의 작가라고 손꼽는” 같은 꾸밈말을 달아 놓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웁니다. ‘최고’란 “가장 높음”이나 “가장 훌륭함”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그림쟁이보다 앤서니 브라운 님이 가장 돋보인다거나 높다거나 훌륭하다거나 거룩하다는 소리인 셈입니다.

 생각하거나 바라보거나 느끼기에 따라 다를 텐데, 누군가는 닥터 수스 님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테고, 아무개는 윌리엄 스타이그를 첫 손가락으로 삼을 테며, 어떤 이는 버지니아 리 버튼 님 같은 그림쟁이는 없다고 침을 튀기리라 봅니다. 마리 홀 엣츠 님을 으뜸으로 치는 분도 있을 테고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가 다르기에 그림책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다릅니다. 모두들 하는 일과 즐기는 놀이가 다른 까닭에 그림책을 받아들이는 가슴이 다릅니다. 누구나 서 있는 곳과 삶터와 마음밭과 살림돈과 가방끈이 다르니까 그림책을 읽는 눈높이와 눈결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한테는 그림책을 일군 그림쟁이 이름을 하나하나 들며 누구 그림은 어떠하고 아무개 그림은 저떠하다 말할는지 모르나(이를테면 논문이나 비평하는 글을 쓰면서), 아이들은 그림책 하나하나를 꾸밈없이 살피고 받아들이면서 생각합니다. 굳이 앤서니 브라운 님 그림책이라서 더 좋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딱히 닥터 수스 님 그림책이기에 더 재미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반드시 윌리엄 스타이그 님 그림책인 까닭에 한결 아름답다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꼭 마리 홀 엣츠 님 그림책이니까 훨씬 놀랍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림책 하나마다 다른 결을 살피고, 같은 그림쟁이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책마다 다른 손길과 마음길을 담았음을 읽습니다.

 서른 살 나이에 그리는 그림책에는 서른 살까지 살아오며 마주하고 부대끼며 보듬은 삶을 담습니다. 마흔 살 나이에 내놓는 그림책에는 마흔 살까지 사는 동안 만나고 복닥이며 어루만진 삶을 싣습니다. 쉰 살 나이에 선보이는 그림책에는 쉰 살까지 지내며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며 어깨동무한 삶자락을 아로새깁니다. 이리하여 서른 살 나이에 그린 그림책에는 서른 살 그림쟁이 숨결을 읽으며 즐겁습니다. 마흔 살 나이에 내놓은 그림책에는 마흔 살 그림쟁이 숨소리를 들으며 반갑습니다. 쉰 살 나이에 선보인 그림책에는 쉰 살 그림쟁이 숨넋을 곱씹으며 고맙습니다.

 우리는 그림책 하나를 장만하여 읽는 자리에서 ‘우와, 아무개 그림책이 새로 나왔네!’ 하고 놀랄 수 있을 터이나, 이렇게 놀라기 앞서 ‘이야, 이 그림책 참 좋구나!’ 하고 놀라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렇게 놀라움이 절로 터져나오는 그림책이 아니고서는 구태여 사들일 까닭이 없고, 펼쳐 볼 일이란 없으며, 둘레에 나누거나 보여줄 구석이 없다고 느낍니다.

 앤서니 브라운 님 새 그림책 《나와 너》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영국에서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새로운 틀로 꾸며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으로서 이런 줄거리를 알 턱이 없습니다. 또 이런 줄거리를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영국 옛이야기이든 노르웨이 옛이야기이든 포르투갈 옛이야기이든 크게 돌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피며 돌아볼 대목이란 ‘그림책 《나와 너》가 내 가슴을 얼마나 두근두근 쿵쾅쿵쾅 울리는가’라든지 ‘그림책 《나와 너》가 내 마음자리에 어떻게 스며들면서 웃음이나 울음을 길어올리는가’입니다.

 제 어린 날을 생각해 봅니다. 국민학생 때였는데 우산을 깜빡 잊은 채 학교에 갔고 공부를 마칠 즈음 비가 퍼붓습니다. 꽤 걱정이 됩니다. 수업하는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꾸자꾸 창밖을 내다 봅니다. 비가 언제 그치려나, 이 비가 그치지 않으면 누가 집에서 마중을 나오려나. 집에서 날 마중나올 사람이란 없을 텐데, 이 빗길을 어떻게 헤치고 가나. 빗길을 헤치려면 가방이 안 젖도록 어떻게 해야 하나. 비닐봉지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나한테는 봉지조차 하나 없는데.

 어린 날,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학교로 찾아와 주신 적이 있는지 없는지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일로 바쁘셔서 나와 주실 수 없었겠지요. 동무들 가운데 몇몇 아이는 어머니나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학교 앞으로 나와 줍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아이는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아 비를 쫄딱 얻어맞으며 집으로 쭐래쭐래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를 흠뻑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끔가끔 어떤 어른이 “이런! 비를 맞고 가는구나!” 하면서 당신이 쓰던 우산을 저 같은 아이한테 씌워 주며 “어디까지 가니? 네가 가는 길까지는 우산을 같이 쓰자.”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외롭게 떨어진 채 비를 흠뻑 맞으며 걷는 아이는 있습니다. 요즈음이야 우산 하나 아주 흔하고 값싸다고 하지만, 이토록 값싸고 흔한 우산 하나 챙기지 못하는 아이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도 이 우산 하나 챙기지 못한 채 외로이 빗길을 걷는 아이한테 따숩게 말을 건네는 어른이란 얼마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오늘날 서울이나 부산이나 대구나 인천이나 광주나 …… 이런 큰도시뿐 아니라 시골마을에서 이와 같이 따숩게 말을 건네며 손수건이든 수건이든 건네며 비를 닦으라 한다든지, 아예 우산을 안기면서 “어른인 나는 우산을 하나 새로 사도 되거든.” 하고 말할 만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그림책 《나와 너》에 나오는 노랑머리 아이는 홀로 말없이 후미진 길을 걷다가 문이 빼꼼 열린 집으로 살며시 들어갑니다. 문이 빼꼼 열린 집에 차려진 밥상을 보며 왠지 모를 너그러움과 포근함을 맛보고는, 이내 ‘낯선 집에 사는 아이 몫’으로 주어진 밥그릇을 싹싹 비웁니다. 노랑머리 아이는 노랑머리 아이가 사는 집에서는 느끼지 못하지 않았느냐 싶은 즐거움을 실컷 느끼면서 ‘낯선 집에 사는 아이 잠자리’에까지 기어들어 달콤하게 잠이 듭니다. 그러나, 낯선 집 임자는 곧 집으로 돌아오고, 낯선 집 아버지와 어머니는 몹시 성이 났습니다. 노랑머리 아이는 깜짝 놀라 후다닥 내뺍니다. 노랑머리 아이한테 밥과 걸상과 잠자리마저 빼앗긴 낯선 집 아이는 제 엄마 아빠랑 달리 노랑머리 아이한테 성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크게 놀랐을 뿐입니다. 꽁지가 빠지게 내빼는 노랑머리 아이를 창문으로 내다 보던 낯선 집 아이는 홀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노랑머리가 바라보기에, 낯선 집에 살던 아이는 어머니랑 아버지랑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공원으로 마실도 다녀오는 걱정없고 즐거운 아이입니다. 언뜻 보기에 참 따사롭고 넉넉한 집에서 근심이든 슬픔이든 하나 없이 살아간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낯선 집 아이네 어머니나 아버지는 당신 아이한테 ‘당신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을 즐기는지’ 한 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함께 있기는 있으나 다른 누리를 생각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공원으로 세 식구가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빠는 아빠 회사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엄마 회사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그냥 딴청을 피웠지요.” 하는 모습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쓰고 누리고 즐기는 모든 물질문명과 학원과 학교와 장난감 따위를 골고루 잘 갖춘 아이는 외롭지 않으며 언제나 기쁨이 넘친다 할 수 있을까요. 어버이 두 분이 다 있고, 집에 자가용이 있으며 널찍한 아파트가 있는데다가, 학교에서 꽤 높은 성적을 받고 있으면, 이 아이는 즐거운 나날이라 할 만한가요.

 아이들을 생각하기 앞서, 우리 어른들부터 되새길 노릇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모든 물질문명을 다 누리는데다가 돈이 철철 흘러넘치면 즐거운 삶인가요. 남들이 알아주는 이름값을 얻고 있다면, 어마어마한 공직자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자리에 올라 있으면, 어른들 당신은 기쁘며 아름다운 나날이나요. 아우디를 몰거나 뚜껑 없는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있으면 짜릿하며 신나는 삶인지요.

 그림책 《나와 너》가 우리한테 얼마나 살가우며 따사로운 그림책인가를 헤아리자면, ‘앤서니 브라운’이 일군 그림책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털어내어 이 그림책만 그림책 그대로 들여다보며 아이랑 오붓하게 읽고 눈물 한 방울과 웃음 한 조각 나누면 됩니다. (4343.8.7.흙.ㅎㄲㅅㄱ)


- 나와 너 (앤서니 브라운,웅진주니어,2010/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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