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라면을 먹을 때 모두가 친구 12
하세가와 요시후미 지음, 장지현 옮김 / 고래이야기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빨래할 때에 이웃집도 빨래를 한다
 [그림책이 좋다 79] 하세가와 요시후미, 《내가 라면을 먹을 때》



- 책이름 : 내가 라면을 먹을 때
- 글ㆍ그림 : 하세가와 요시후미
- 옮긴이 : 장지현
- 펴낸곳 : 고래이야기 (2009.3.20.)
- 책값 : 9800원



 (1) 내가 손빨래를 할 때


 어제 하루 새벽부터 저녁나절까지 낮잠 한 번 없이 신나게 놀며 아빠를 힘들게 하던 아이는 밤 한 시 무렵 깨어났습니다.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혼자 신나게 놀다가 사탕 하나 집어물고 스르르 잠든 때가 저녁 일곱 시 조금 넘어서입니다. 그러니 배가 고파서 깼겠지요. 그나마 밥이라도 먹고 잠들었으면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여섯 시나 여섯 시 반쯤 일어났을 테지만, 배고프다고 밤 한 시부터 한 시간 반 남짓 칭얼칭얼거립니다. 밤나절에는 먹이지 않으려고 하기에 달래고 어르고 안고 업고 하지만 도무지 잠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밥을 조금 먹여야겠구나 싶습니다. 밤에 일어나 밥을 차려 놓습니다. 그렇지만 밥상을 차려 놓으니 잘 먹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네 시 가까이까지 아빠와 엄마 모두 힘들게 한 끝에 잠들고, 다시 아침 일곱 시 반쯤 일어납니다.

 스스로 말은 잘 안 하려 하지만 말귀는 모두 알아듣는 아이한테 하소연하듯 이야기합니다. “아이야, 제발 조금 더 자고 일어나 주라, 응? 힘들어 못살겠구나.”

 이런 말을 한다고 아이가 다시 잠드는 일이란 없습니다. 이 누리에 아이가 태어난 뒤부터 오늘까지 그야말로 잠 없고 기운 넘치게 놀아대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틀림없이 낮잠은 거뜬히 건너뛰고 저녁나절까지 낑낑 칭얼칭얼 하다가 까무룩 하고 잠이 들겠지요. 보나 마나 오늘도 밥은 잘 안 먹으려고 하겠지만 제발 밤에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밥을 조금이나마 먹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아이가 깨어 있는데 아빠는 드러누울 수 없습니다. 아이는 저 때문에 아빠와 엄마가 잠을 설칠 뿐 아니라 졸음이 가득한 줄을 헤아리지 않으니까요. 십 분 또는 이십 분쯤 엎드린 채 끙끙거리다가는 일어납니다. 더 누워 있다가 아이가 이부자리나 방바닥이나 책상맡에 오줌이라도 누면 큰일이니까요.

 게슴츠레 일어나서 씻는방으로 들어갑니다. 오늘은 낮 한 시부에 도서관 책손을 맞이해야 하기에 머리를 감고 씻고 빨래를 하기로 합니다. 지난밤 아이가 오줌을 눈 기저귀와 옷가지에다가 새로 잔뜩 쌓인 옆지기 옷가지를 씻는방 바닥에 펼쳐 놓고 머리를 감습니다. 아이 옷가지와 기저귀부터 빱니다.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작은 대야에 비빔질 마친 빨래를 하나씩 넣고는 다섯 벌로 나뉘어 차근차근 헹굼질을 합니다. 다섯 벌로 나눈 빨래이니 첫 벌로 헹군 빨래를 두 벌로 빤 빨래를 헹구고, 이렇게 다섯 가지 빨래를 착착 헹굽니다. 마지막 헹군 구정물로는 씻는방 바닥과 벽에 부어 물때를 벗깁니다. “아이구 허리야, 날마다 해도 해도 빨래는 날마다 잔뜩 쌓이는구나.” 하는 노래를 하며 빨래를 하는 동안 아이는 아빠가 빨래하는 양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물놀이를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아이가 양말을 챙겨 신은 채 씻는방에 들어왔기에, “벼리야, 양말 젖는다. 방으로 들어가.” 하는 말을 세 차례 해서 내보냅니다. 맨발로 들어왔으면 가만히 지켜봤을 테고, 맨발로 있던 아이를 아빠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면 아이는 살그머니 저 두 손을 헹굼물에 담그며 놀았을 테며, 이러는 가운데 아이는 옷이 젖었을 테고, 아이가 옷이 젖으면 ‘이 녀석, 또 옷을 버리네.’ 하고 한숨을 쉬며 아이 씻을 물을 따로 받아 아이를 씻기면서 빨래를 했겠지요. 어차피 거의 날마다 아이를 씻기지만 오늘 아침은 몹시 힘들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빕니다. ‘아이야, 오늘은 저녁에 씻자, 응? 오늘 아침은 너무 힘들다.’

 비비고 헹구고 털며 빨래를 하는 내내 허리를 톡톡 두들깁니다. 오늘 아침도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빨래로 여는데, 오늘날 여느 한국땅 살림집처럼 빨래기계를 키우고 있다면 이런 고단함이란 없을는지 모릅니다. 요사이는 집일이 부쩍 늘어 빨래를 다 마치고 널면서 어제 해 놓은 빨래가 다 말랐어도 곧바로 개지 못합니다. 자리에 드러누워 허리를 편 다음 개든지 한숨 크게 돌리고 나서 저녁에 개든지 이틀치를 쌓아 놓고 개든지 합니다.

 헌 빨래기계를 거저로 준다는 사람이 있고, 이제는 빨래기계 한 대쯤이야 돈으로 얼마 치지 않아 집안에 들이기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빨래기계를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냉장고며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빨래기계가 들어오는 일이란 하나도 반갑지 않고 달갑지 않으며 고맙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기계한테 맡기기 싫고, 괜히 빨래기계 냉장고 텔레비전을 키우며 애먼 전기를 더 쓰고 싶지 않아요. 글을 쓰는 셈틀하고 손전화에 밥 먹이는 데하고 밤에 등불 켤 때를 빼고는 전기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우리가 오늘날처럼 전기를 많이 쓰던 날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거든요. 지난날 여느 살림집은 어디나 전기를 얼마 안 쓰거나 없이 살았으며 등불 하나 켜면서 조마조마해 했습니다. 여느 살림집에는 셈틀이란 없던 우리들이요, 빨래기계를 집집마다 들인 지 수십 해가 된 우리 나라가 아닐 뿐더러, 냉장고가 여느 살림집에 들어온 햇수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어느 집이나 손으로 일을 하고 손으로 부대끼며 손으로 얼싸안으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기계를 쓴다든지 돈을 쓴다든지 하면서 내 살림살이를 남한테 맡기지 않은 우리들 발자취입니다. 아이를 키우든 아이를 가르치든 먹을거리를 마련하든 누구나 제 손으로 꾸리던 우리들 살림살이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손빨래를 하며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 이웃집 가운데 어느 집도 빨래기계 안 쓰는 집은 없을 테지만, 이 아침나절에 어느 이웃집이나 빨래를 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빨래를 마칠 무렵이면 아이한테 밥을 먹일 테고, 새벽바람으로 일 나가는 집식구가 있으면 새벽밥을 지어서 먹을 터이며, 집식구 모두 아침부터 바깥일을 나가야 한다면 지난밤에 아침을 미리 마련해 놓고 있었으리라고.

 이리하여 아침 예닐곱 시부터 낮 열두 시 무렵까지는 골목동네마다 빨래를 하는 때입니다. 이무렵에 집일을 모두 마치고 골목마실을 나서면 동네마다 막 마친 빨래를 햇볕 잘 드는 자리에 널어 놓으려고 부산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열두 시를 넘은 때에 골목마실을 하면 새로 빨래를 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햇볕과 바람으로 거의 다 마른 빨래가 팔랑팔랑 나부끼는 모습을 찾아봅니다. 때로는 바람에 날린 빨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이때에는 슬며시 빨래를 집어들고 탁탁 흙먼지를 털어 빨래줄이나 빨래대에 곱게 얹습니다. 빈 빨래집게가 있으면 집어 놓습니다. 빨래집게로 안 집어서 빨래가 날리는데,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 가운데에는 빨래집게가 어엿하게 있는데 깜빡 잊는다든지 집에서 전화가 울리면 그냥 널어 놓고 들어간 채 잊곤 하거든요.

 어제 낮에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있는 책쉼터 〈낮잠〉이라는 곳에서 만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젊은이가 제 골목 사진을 보고 사진을 이렇게 잘 찍으려면 어떡해야 하느냐고 묻기에 “제 사진은 잘 찍은 사진은 아니고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이에요. 다만 날마다 여러 시간을 여러 해 돌아다니면 누구나 찍을 수 있을 뿐이랍니다.” 하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느끼고,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내 삶과 이웃 삶을 살피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다른 사람 눈치가 아닌 내 눈썰미에 따라 좋은 이야기를 엮을 수 있습니다. 굳이 작품이 되기를 바라는 글이 아니라 한다면 언제나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어요. 애써 작품이 되기를 꿈꾸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노상 신나게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요.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마음과 즐기는 매무새인데, 우리들은 좋아하는 마음과 즐기는 매무새를 하루하루 잃고 있다고 느낍니다. 손빨래를 좋아하는 마음을 잃고, 손걸레질을 즐기는 매무새를 나날이 잃고 있구나 싶습니다. 두 다리로 마실하는 재미를 잃고, 아이를 안거나 걸리며 키우는 보람을 잊구나 싶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어른인 나부터 신나게 돌아보고 우리 딸아들한테 알뜰살뜰 보여주며 함께 나눌 책 하나 우리 눈길로 살피어 장만한 다음 같이 읽기란 어려운 노릇이겠지요.


 (2)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에 담은 삶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를 넘깁니다. 책이름 그대로 일본땅 여느 살림집에서 살아가는 어린이가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때부터 이야기를 엽니다. ‘뭐야, 라면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라면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인지 라면이 맛나다든지 뭐 그런 그림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모두)은 라면을 좋아하고 즐겨먹고 있어 이런 그림책마저 그리는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펼쳐 끝까지 보지 않고서야 무슨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겉그림이나 첫그림만 보고 섣불리 짚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방울이는 하품을 한다.
옆에서 방울이가 하품을 할 때
이웃집 미미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이웃집 미미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
이웃집의 이웃집 디디는 비데 단추를 누른다.



 그림책 첫머리는 라면 먹는 아이 모습이 나옵니다. 라면 먹는 아이는 일본땅에서는 ‘아주 잘사는 집’도 아니고 ‘아주 못사는 집’도 아닙니다. 그저 수수한 살림집 여느 아이입니다. 아이 곁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심심한 듯 하품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에는 고양이나 개를 기르는 집이 퍽 많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이웃집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고, 이 이웃집 옆에 사는 아이는 뒷간에서 비데 단추를 누릅니다. 오늘날 웬만한 살림집이란 모조리 아파트이거나 빌라입니다. 빌라는 차츰 줄며 아파트로 바뀌고 있으며, 잘사는 아파트이건 조금 못사는 아파트이건 시설이나 집 얼거리는 ‘현대화’나 ‘최신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비데 단추쯤이야 아무것 아닐 테지요.


그 이웃마을 여자아이가 달걀을 깰 때
이웃나라 남자아이는 자전거를 탄다.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아기를 본다.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에는 일본땅에서 문화와 물질을 듬뿍 누리는 아이들을 하나둘 보여줍니다. 말끔한 야구옷을 차려입고 야구놀이를 하는 아이를 보여주고, 바이올린을 개인 선생한테서 배우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부엌에서 손수 밥하기를 하며 노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림이 달라집니다. 이제 ‘아이들 이웃집’이 ‘아이들 이웃나라’로 옮깁니다. 먼저, 일본하고 맞붙은 이웃나라인 한국으로 와서 한국땅 ‘자전거 타는 어린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한국땅에서 이웃이라 할 나라인 아시아로 접어들어, 아시아에서 ‘아기 보는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처음에 라면 먹는 어린이라든지 비데 단추 누르는 어린이라든지 값나가는 바이올린을 여러 대 벽에 걸어 놓고 이쁘장하게 배우는 어린이라든지 나올 때에는 그예 흔하디흔한 싸구려 그림책이 아닌가 하고 여겼습니다. 아기(어린 동생)를 보는 어린이를 보여주는 그림을 보고서야 비로소 무릎을 치며 깨닫습니다. 아하, 이렇게 차근차근 내 눈길을 우리 옆으로 옆으로 돌리면서 우리 이웃과 동무와 둘레 삶자락을 느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설피 가르침을 베풀려는 그림책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아주 부드럽고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손길로 내 삶터와 이웃 삶터를 골고루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제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는 가슴이 시린 대목을 톡톡 건드립니다. 소를 부리며 농사일을 하는 어린이를 보여주고, 엄마 아빠 몫을 떠안아 길에서 장사를 하며 살림을 꾸리는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 모두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은 다음 어린이까지 싸움터에서 누군가 쏜 총에 맞아 길바닥에 널브러진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그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소를 몰 때
그 맞은편 나라 여자아이는 빵을 판다.
그 맞은편 나라 여자아이가 빵을 팔 때
그 맞은편 나라의 산 너머 나라 남자아이는 쓰러져 있다.



 싸움은 누가 일으켰을까요. 어린이들끼리 싸움이 붙었을까요. 어린이들은 까닭 모르며 집을 잃고 어버이를 잃으며 목숨마저 잃어야 하는가요. 무슨 잇속을 챙기려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앞세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 어른들은 왜 무기를 끝없이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만들고 있나요. 평화를 지키려는 무기인가요, 싸움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남보다 더 큰 잇속을 챙기려 하는 무기인가요. 나라를 지킨다는 이름을 앞세우는 어른들인데, 정작 제 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이웃나라 사람들 목숨은 아주 하찮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요.

 모르는 노릇이지만, 무기를 만들고 싸움을 일으키며 서로 죽이고 죽는 어른들은 이웃집을 들여다보거나 헤아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싸움터로 끌려나가야 하거나 스스로 싸움터로 뛰쳐나간 어른들 또한 당신 둘레 동무와 아이들을 살피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총을 든 어른들은 누군가를 죽이려는 사람이지 누군가를 살리려는 사람이지 않습니다. 적군을 죽이는 총이요 우리를 지키는 총이라지만, 우리한테 적군일 맞은편도 우리하고 똑같이 생각합니다. 우리들만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가 아닙니다. 적군인 나라도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입니다.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인 우리들 서로서로가 총을 맞대며 우락부락 다툴 까닭이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더 있는 돈과 자원이라면 우리보다 힘겨운 이웃나라한테 보태 주며 사랑을 나누면 됩니다. 우리한테 모자란 돈과 자원이라면 우리보다 넉넉한 이웃나라한테서 얻으며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억지로 힘을 써서 빼앗아야 할 까닭이 없고,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어거지로 옆사람을 밀어내거나 넘어뜨리며 나 홀로 1등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1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2등이 될 까닭 또한 없으며 3등과 4등 또한 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등수나 숫자나 돈셈이 아닌, 사랑과 웃음과 눈물과 즐거움과 보람과 땀방울로 어우러진 아름다움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괴롭힘과 죽임과 빼앗음입니다. 갖추어야 할 매무새는 착함과 올바름과 넉넉함과 따뜻함과 너그러움과 참됨입니다. 갖추지 않아야 할 매무새는 시샘과 따돌림과 미움과 못됨과 차가움과 메마름과 거짓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는 “바람이 불었다” 한 마디를 넣은 그림을 여러 쪽 잇달아 보여주면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라면을 먹던 어린이는 이웃집 동무들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가만히 헤아려 보다가 바람을 느꼈을 수 있고, 그냥 라면만 배불리 먹고 빈 그릇은 개수대에 던져 놓고 설거지는 엄마한테 떠넘긴 채 야구방망이와 장갑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 다른 동무들하고 신나게 공놀이를 즐겼을 수 있습니다.

 라면을 먹고 나서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고, 라면을 먹었으니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라면을 먹은 든든한 몸으로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읽을 수 있는 한편, 라면을 먹으면서 밀린 숙제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놀 때에 일하는 동무가 있고, 내가 잠잘 때에 싸우는 어버이 때문에 눈물로 지새우는 동무가 있으며, 내가 자가용을 타고 학교와 학원을 오갈 때에 썰렁한 집에서 라이타로 불장난을 하는 동무가 있습니다. 옆에 있다고 모두 동무가 아니며,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못한다고 동무 아닌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동무들과 이웃들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한편, 우리는 우리 둘레 사람이나 삶터를 하나도 모르거나 아예 등돌린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라면을 먹을 때에 바람이 붑니다. 아이 옷가지를 손빨래하고 있을 때에 이웃집에서도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4343.5.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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