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시대 창비시선 495
장이지 지음 / 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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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4.4.27.

노래책시렁 419


《편지의 시대》

 장이지

 창비

 2023.12.22.



  손으로 밥을 지어서, 손으로 수저를 쥐고서 먹습니다. 손으로 씨앗을 심고서, 손으로 호미나 낫을 쥐고서 거두거나 캡니다. 손으로 아이를 씻기고 돌보노라면, 어느새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손을 맞잡고서 거닐다가, 어느새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저만치 앞서 달려갑니다.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손수 짓는 살림을 말로 담았습니다. 말을 담는 그림은 글이 태어난 뒤에도 아주 오래도록 손으로 글을 적었습니다. 이제는 손으로 글을 쓰거나 적는 일이 확 줄었는데, 어떻게 옮기는 글이어도 ‘마음을 담은 글’일 적에라야 비로소 마음이 만나거나 흐릅니다. 《편지의 시대》는 글월과 나래꽃 사이에서 오간 마음을 적는 듯싶습니다만, 어쩐지 “편지의 시대”라는 이름부터 일본스럽습니다. 우리나라 웬만한 자리마다 일본말에 일본빛이니 어쩔 길이 없다고 할 테지만, 조금씩 마음을 기울이면 하나씩 씻거나 털면서, 우리 이야기를 도란도란 펼 만합니다. 글월을 주고받는 ‘글월철’입니다. ‘글날’입니다. ‘글빛나날’에 ‘글길’이에요. 글을 글로 여기는 눈길일 적에 마음을 마음으로 나누는 마음길을 열어요. 억지스레 짜거나 맞추는 글로는 어떤 마음도 못 움직여요. 더 멋지거나 드문 나래꽃을 얻으려는 마음으로는, 그저 시늉이었겠지요.


ㅅㄴㄹ


누가 먼저였는지 잊었지만 편지와 함께 외국의 멋진 우표도 동봉하게 되었는데 진귀한 우표를 찾으려고 발품깨나 팔았지요 우리의 편지는 차츰 우표를 교환하기 위한 것이 되더니 어떤 일로 영영 끊어지게 되었어요 (우표수집―삼총사/65쪽)


너는 그것을 몰라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너에게 주려던 편지를 흐르는 강물에 버린 것을 네가 알까 (졸업/75쪽)


+


《편지의 시대》(장이지, 창비, 2023)


사랑의 취기가, 도취의 파도가 소인으로 찍히는 것을 상상하면서

→ 거나한 사랑이, 반한 물결이 쿵 찍히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 비칠대는 사랑이, 기쁜 물결이 톡 찍히는 무늬를 그리면서

8쪽


은하의 실타래 위에 이미 있었네

→ 별밭 실타래에 이미 있네

→ 별숲 실타래에 이미 있네

→ 별떼 실타래에 이미 있네

12쪽


천변만화의 구름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 덩굴진 구름이 흩어졌다가

→ 물결치는 구름이 뿔뿔이 가다가

12쪽


대관람차의 형해(形骸)가 방치돼 있다

→ 큰바퀴 뼈대를 내버린다

→ 큰고리가 덩그러니 나뒹군다

→ 고리눈 부스러기가 구른다

18쪽


칠이 벗겨진 말들이 막사 안에서 선잠을 잔다

→ 겉이 벗겨진 말이 오두막에서 선잠이다

→ 옷이 벗겨진 말이 움막에서 선잠이다

18쪽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리는 햇빛의 무늬를, 초록색의 점자를 갑충이 더듬더듬 읽는다

→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리는 햇빛무늬를, 푸른글씨를 딱정벌레가 더듬더듬 읽는다

23쪽


너머에서 도시가 비의 부식(腐蝕)을 견딘다

→ 너머에서 마을이 비에 삭지 않으려 한다

→ 너머에서 서울이 비에 슬지 않으려 한다

25쪽


백지와 마주할 때 나는 역광을, 광배(光背)를 얻는다

→ 나는 흰종이와 마주할 때 뒷빛을 얻는다

→ 나는 빈종이와 마주할 때 빛살을 얻는다

25쪽


외국의 멋진 우표도 동봉하게 되었는데 진귀한 우표를 찾으려고

→ 이웃나라 멋진 나래꽃도 넣었는데 값진 나래꽃을 찾으려고

→ 옆나라 멋진 날개꽃도 담았는데 드문 날개꽃을 찾으려고

65쪽


너는 그것을 몰라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 너는 몰라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은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 너는 몰라 너를 보지 않겠다고 했는데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75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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