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살리는 문학 - 일생동안 어린이 문학을 일구고 가꾼 이오덕의 유고 평론집
이오덕 지음 / 청년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이오덕 곁에서 / 이오덕 읽는 하루

― 쓴풀은 마음을 씻고



《삶·문학·교육》

 이오덕 글

 종로서적

 1987.8.20.



  《삶·문학·교육》(이오덕, 종로서적, 1987)은 얼핏 ‘쓴풀’ 같습니다. 그러나 풀을 알고 보면 어디에도 쓴풀은 없습니다. 온누리 모든 풀은 언제나 ‘풀’입니다. 우리 스스로 풀을 풀로 바라보지 않은 탓에 ‘잔풀(잡초)’이라 여기고, ‘몹쓸풀’이라 말하기도 하고, ‘쓴풀’이라고 내치다가 멀리할 뿐입니다.


  풀은 다 다릅니다. 똑같은 풀은 없습니다. 풀은 저마다 온누리를 푸르게 살리면서 품는 노릇입니다. 크고작은 숱한 풀이 돋아서 땅바닥을 덮기에 빗물이 흘러도 흙이 안 쓸려요. 풀이 흙바닥을 푸근히 덮기에 나무씨앗이 움트고 줄기를 올리면서 숲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모든 풀은 그저 풀입니다. 다 다른 풀을 나물로 삼아 보면, 다 다른 터라 다 다른 맛과 내음과 숨결과 기운을 우리한테 베풀어요. 그런데 오늘날 이 나라를 보면, 다 다르게 돋는 풀을 다 다르게 바라보거나 맞아들이지 않기 일쑤예요.


  가게에 놓는 나물이나 남새를 봐요. 모두 똑같이 생긴 ‘공산품’이지 않나요? 다 다른 땅에서 다 다르게 돋으면서 우리 몸에 다 다르게 이바지할 풀이 아닌, 비닐을 씌운 땅에서 풀죽임물(농약)에 죽음거름(화학비료)에 꼭짓물(수돗물)을 머금으면서 ‘똑같은 크기·빛깔·모습’으로 틀에 짜맞추고 맙니다.


  “몸을 살리는 풀은 입에 쓰다” 같은 옛말이 있습니다만, “살림풀이 입에 쓴 까닭”은 오직 하나예요. 여느때에 ‘살림풀’을 멀리한 터라, ‘살림풀맛’을 잊다가 잃었거든요.


  갓 태어나서 당근이나 배춧잎을 입에 물고서 놀던 아기는 어린이로 자라고 어른이 되면 당근이며 배추를 즐겁고 달게 누려요. 갓 태어나서 맨발에 맨손으로 흙바닥을 뒹굴고 풀밭에서 기어다니며 놀던 아이는 무럭무럭 크는 동안 모든 풀내음이 다 다른 풀빛으로 우리 곁에 있는 줄 온몸으로 알아채고 받아들여서 ‘푸른님’으로 노래하는 살림을 일굽니다.


  한때 ‘설탕수박’ 같은 이름으로 ‘더 달아야 맛난 수박’이라고 여기더니, 어느새 ‘꿀수박’처럼 ‘더더욱 달아야 맛나고 좋은 수박’이라고 여깁니다. 이제는 들딸기나 멧딸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드물어요. 모든 딸기는 첫봄인 3월에 ‘겨울을 난 덩굴줄기’가 새삼스레 옅푸르게 번지면서 한봄인 4월에 천천히 흰꽃을 피운 다음, 늦봄인 5월부터 꽃이 지며 빨갛게 영글어 열매를 맺습니다. 밭딸기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서울나라(도시문명사회)에서는 비닐집을 억지로 만들고 겨우내 기름을 때어 ‘2∼3월’이나 ‘11∼12월’에도 언제나 커다란 딸기알을 맺어서 사고파는 얼거리로 뒤틀렸어요.


  ‘가게딸기’를 딸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가게딸기’는 ‘기름 때는 비닐집’에서 ‘기름과 꼭짓물과 죽음거름과 풀죽임물을 옴팡 뒤집어쓴 공산품’일 뿐이라고 느낍니다. 허울은 딸기 같되, 막상 딸기라고 여길 수 없는 ‘죽음덩이’를 과일이나 열매나 낟알이나 남새라고 잘못 알면서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고 마음도 무너지는 얼거리인 서울나라예요.


  예부터 ‘살림’은 ‘집밥옷 손수짓기’였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살림’이란 우리말을 안 쓰기 일쑤입니다. 한자말 ‘생활(生活)’이 나쁠 수 없습니다. 우리말 ‘살림 = 살리는 일이자 길이나 뜻이자 하루’를 나타내기에, ‘살림’이란 낱말을 안 쓰는 동안, 누구나 스스로 ‘살리는 나’를 잊다가 잃을 뿐입니다.


  《삶·문학·교육》이라는 책은 ‘삶·글·집’을 하나로 마주하면서 바라보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삶을 담아야 글입니다만, 오늘날에는 ‘삶이라고 여길 삶’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에는 ‘딸기 흉내인 공산품’만 넘치듯 ‘삶 시늉인 공산품 사회’인 몰골이지 않을까요? 딸기가 아닌 ‘딸기 흉내’를 아무리 배불리 먹는들 참말로 넉넉하거나 즐겁거나 싱그러울 수 없습니다. ‘흉내’는 삶이 아닌 ‘허울’이요, ‘허물’이거든요.


  한 톨을 머금더라도, 들에서 들빛을 머금으면서 빗물을 마시고 햇볕과 별빛으로 자란 들딸기를 손바닥에 얹고서 바라보는 살림일 적에,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살아날 만합니다. 한 숟가락 밥이든, 한 포기 들나물이든, 숲에서 숲빛으로 어우러진 하루를 살아가는 들꽃과 들풀을 건사하는 살림일 적에, 비로소 누구나 저마다 사랑을 깨달을 만합니다.


  숲을 잊은 사람들이 쓰는 글에 숲내음이 날 턱이 없습니다. 서울나라에 스스로 가둔 사람들이 읽는 글에 숲빛이 흐를 까닭이 없습니다. 겉모습이 사람이기에 사람이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책이기에 책일 수 없습니다. 겉모습은 언제나 ‘허물·허울’이자 ‘시늉·흉내’인 ‘탈’입니다. 탈바꿈을 아무리 하더라도 바탕인 숨결은 고스란하게 마련입니다. 탈바꿈이나 허물벗기가 아니라, 날개돋이를 하는 살림길일 적에 서로서로 사람빛으로 만나서 환하게 웃을 만해요.


  섣불리 ‘어린이문학’을 안 하기를 바랍니다. 어린이한테 섣불리 ‘명작동화’나 ‘추천동화’를 안 읽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아이를 사랑하는 어른이라면, 서울에서 일하면서 살거나 시골에서 한갓지게 살거나 ‘살림 짓는 하루’를 펴면서 스스로 글을 써서 어린이하고 함께 읽을 수 있기를 바라요.


  ‘문학교육·동화교육’을 받아야 글을 잘 읽거나 쓰지 않습니다. ‘그림책테라피 자격증’이 있어야 그림책을 잘 읽어내거나 어린이한테 읽힐 수 있지 않습니다. ‘교육·자격증’이 아닌 ‘살림·사랑’을 오직 ‘숲·사람’이라는 넋으로 마주하고 품을 적에, 어린이랑 어른이 노래하고 춤추는 기쁘고 신나는 놀이누리를 이뤄요.


  스스로 삶을 짓는 살림을 모르거나 등지기 때문에 베낍(표절·도용·필사)니다. 스스로 사랑을 펴는 숲을 잊거나 멀리하기 때문에 감추고 거짓말을 하고 이웃을 따돌리거나 짓밟습니다. ‘무늬만 딸기인 공산품’을 손사래칠 줄 안다면, ‘무늬만 어린이문학·동화책·그림책인 공산품’을 가볍게 뿌리치면서 아이들하고 이 푸른별을 사랑하는 첫걸음을 내딛겠지요.


ㅅㄴㄹ


아이들이 자연을 몰라도 되는가? 자연을 모르고 자연에서 멀리 떨어져 살 때 사람은 병들고, 도덕적으로 타락한다 … 자연을 등지면 어떤 삶도 원천적으로 뒤틀리게 마련이다 … 우리 겨레가 살아남으려면 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쳐야 한다. (14쪽)


사람을 기계로 만들고, 사람의 생각을 없애는 세상이 될수록, 이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생각을 키워 가는 글쓰기 교육을 학교에서고 가정에서고 힘들여 해야겠읍니다. (23쪽)


어린이들에게는 참된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 삶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 애타게 구하고 찾도록 해야 한다. (86쪽)


어른들이 덮어씌우는 가르침에 병들지 않는다면 어린이의 눈과 마음은 언제나 명확하게 세상의 진리를 바로 보고 깨닫는다. (118쪽)


어떤 사람은 아동문학에서 교훈성을 경계하면서, 교훈적인 얘기는 동화가 될 수 없고, 아이들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거의 모든 옛이야기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가! (134쪽)


본디 인간의 일은 즐거운 놀이와 같은 것이었다고 본다. (일이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애들이 부모가 하는 일을 따라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곧 알 수 있다. 엄마가 빨래를 하는 것을 본 아기는 저도 손수건을 물에 담가 빨고 싶어하고, 아버지가 짐을 져 나르는 것을 보면 저도 지게를 지고 싶어한다. (269쪽)


마을 앞에 높이 달아 놓은 확성기와 일하는 논밭에까지 갖다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박한 노래소리가 새소리와 물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 풀잎 흔들리는 소리들을 압도해서 온통 마을을 울리고 골짜기를 뒤흔들고 있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28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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