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04-05 19:04 

안녕하세요 작가님 사진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저의 부족한 이해로 작가님께 추가적인 질문을 남기고 싶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먼저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사진을 찍고 사진책을 낸다는 행위까지 이어지는 것이 어떤의미 이신지 궁금합니다. 둘째는 ... 마지막으로 ˝이제 ‘사진가 시대‘는 끝났습니다˝라는 문단 뒤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며 있어 보이는 듯한 글을 쓰는 경계해야 한다는 것인가요?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으시다면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숲노래 빛꽃 / 숲노래 사진비평 2023.4.6.



‘누’가 ‘말’을 하는가

― 사진길에 접어든 이웃님한테



  시골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시골을 모릅니다. 시골에서 안 살면서 시골을 안다고 할 수 없겠지요? 시골에서 안 살더라도 시골을 자주 오간다면 얼핏설핏 시골빛을 느끼거나 누리면서 헤아릴 만합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지만 시골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시골이라는 터전을 사랑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습니다. 또는 시골이라는 터전에서 돈·이름·힘을 거머쥐거나 돌라먹으려고 하는 뒷짓이며 검은짓이며 막짓을 일삼는 이도 시골을 모를밖에 없습니다.


  숲에서 안 살면 숲을 모르겠지요. 숲에서 살더라도 숲을 안 사랑하면 숲을 모를 테고요. 서울에서 안 살면 서울을 모릅니다. 서울에서 살더라도 서울을 안 사랑하면 서울을 모를 테고요.


  그런데, 시골이나 숲이나 서울에서 안 살더라도 시골이며 숲이며 서울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왜 ‘그곳에서 안 살아도 그곳을 알’ 수 있을까요?


  실마리는 매우 쉽습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시골을 안 사랑하면 시골을 모르게 마련이듯, 시골에서 안 살더라도 시골을 사랑하면 시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숲이나 서울에서 안 살더라도 숲이며 서울을 사랑하면 숲이며 서울을 알 수 있어요.


  다만, 살지 않는 몸으로는 속속들이 알지는 않습니다. 살지 않을 적에는 ‘기운·숨결·빛·마음’으로 압니다. 몸을 깃들여서 살아갈 적에는 ‘삶·살림·사람·터전’을 알게 마련입니다.


  사진을 누가 알까요? 사진기를 쥐기에 사진을 알까요? 사진을 찍기에 사진을 알까요? 사진찍기를 서른 해나 쉰 해쯤 해왔으면 사진을 알까요? 사진을 찍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사진을 알까요? 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기에 사진을 알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사진사랑’을 하는 분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사진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여럿 있으며, 사진강의·사진강좌도 꽤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야기가 오가는 사진은 ‘사진사랑’보다는 ‘사진기술·사진예술·사진문화’와 ‘사진계 학맥·인맥’하고 얽힙니다.


  ‘기술·예술·문화’가 나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술·예술·문화’만 한다면 ‘사랑’하고 동떨어지거나 등지게 마련이니, 사진을 오래 했다지만 오히려 사진을 모르고 맙니다. 시골에서 아흔 해를 살았어도 시골을 모르는 분이 숱하고, 서울에서 여든 해를 살았어도 서울을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차근차근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모두 꿰뚫어볼 수 있고, 알아차릴 수 있으며, 삶을 지을 수 있고, 사진은 사진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글은 글대로 한껏 빛내면서 꽃피우는 길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진 가운데 ‘노래하고 춤추면서 어깨동무하는 마음’이 깃든 ‘작품’은 몇이나 될까요? ‘기술·예술·문화’를 뽐내는 사진은 흘러넘칩니다만, ‘즐겁게(노래하고 춤추며) + 사랑을 스스로 짓고 나누면서’ 꿈을 씨앗으로 심는 홀가분한 사진은 뜻밖에도 거의 모두라 할 웬만한 그림밭(갤러리·전시관)에 안 걸리더군요. 그림밭에 걸리는 사진을 보셔요. 다들 ‘작품’이나 ‘예술’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수수하게 ‘사진’이라는 이름조차 붙이려 하지 않습니다. 수수하게 ‘삶’이란 말도 붙이지 않고, ‘살림’이나 ‘사랑’이나 ‘사람’이란 말도 못 붙입니다.


  사진찍기란, 그림그리기나 글쓰기하고 똑같습니다. 그저 찰칵이(사진기)를 손에 쥔 모습이 다를 뿐입니다. 사진찍기란, 밥짓기나 빨래하기나 바느질하고 똑같습니다. 오직 찰칵이를 손에 잡은 몸짓이 다를 뿐입니다. 사진찍기란, 걷기나 자전거타기나 버스타기하고 똑같습니다. 오로지 찰칵이 하나가 다를 뿐입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오직 사랑이라는 마음이 흐를 적에 아이를 사랑으로 품으면서 함께 보금자리를 아름답고 아늑하게 짓는 살림빛을 키웁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모든 어버이는 ‘살림꾼(살림님·살림지기)’입니다. 예부터 우리말로는 ‘살림꾼’이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바람에 갑자기 들어온 뜬금없는 ‘주부·가정주부’는 우리말 아닌 일본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보금자리를 짓고 가꾸는 ‘살림꾼’이라는 자리와 이름과 말과 몸짓을 스스로 잊거나 잃으면서, 사진찍기라는 길에서도 엉뚱한 샛길로 쉽게 빠져버리고 맙니다.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어버이는 수수하게 밥을 짓습니다. ‘집밥(가정식 백반)’이 아닙니다. 그저 ‘밥’입니다. 찰칵이를 손에 쥐어 사랑으로 눈뜨는 우리는 수수하게 찰칵 누릅니다. ‘기술·예술·문화’가 아닙니다. ‘삶·살림·사랑’입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삶·살림·사랑’을 서울빛이 아닌 숲빛으로 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찰칵이를 손에 쥐어 스스로 새롭게 무언가 이야기를 짓고픈 마음을 일으킨다면, ‘숲빛으로 푸르게, 하늘빛으로 파랗게, 삶·살림·사랑을 그리는 꿈씨앗을 한 자락 심는 열매’를 문득 하나 옮겨내어 나눌 만합니다.


  후다닥 찍든 더디게 찍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루 만에 다 찍을 수 있고, 쉰 해에 걸쳐 찍을 수 있습니다. 어느 길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실타래를 읽고서 스스로 새록새록 여미어 본다면, ‘사진이란 무엇이고, 사진이란 어떻게 하고, 사진이란 누가 누구한테 이바지하고, 사진이란 스스로 어떻게 거듭나려는 몸짓이고, 사진이란 왜 하고, 사진은 어떤 삶인가’ 하는 아주 쉬우면서 즐거운 씨앗 한 톨을 손바닥에 얹을 만합니다.


  이제는 누구나 사진을 찍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에 안 들어가도 사진을 찍습니다. 세 살 아이도 사진을 찍습니다. 여든 살 시골 할매도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나 할매는 누가 안 가르쳤어도 어찌저찌 손전화를 눌러 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동안 글밭이나 그림밭은 몇몇 예술가만 차지하는 얼거리였고, 사진밭도 몇몇 예술가끼리 나눠먹기를 하는 얼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누구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지요. 그리고 누구나 글님이자 그림님이자 사진님인데, 기성 주류 기득권 집단은 ‘어깨동무하며 누구나 누리는 길’이 아니라, ‘그들이 거머쥔 돈·이름·힘을 안 빼앗기려는 마음’으로 더 단단히 틀어쥡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진밭은 하나도 안 발돋움합니다. 그나마 글밭은 조금 허물어졌으나 그래도 큰 출판사가 크게 거머쥔 틀은 안 바뀌었습니다.


  요새는 그야말로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내지요. 그런데 사진을 놓고 보면, ‘누구나 사진을 찍기’는 하는데 누구나 ‘사진책을 내지는 못하’고 ‘사진전시도 못합’니다. 사진은 찰칵이만 장만해서 스스로 찍어 보면 누구나 스스로 배웁니다. 그저 즐겁게 스스로 배우시기 바랍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사진계 인맥·학맥’을 얻기에는 좋습니다만, 대학교에 들어가는 젊은 분들이 하나같이 ‘윗사람(선배·교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를 못 하더군요. ‘내 빛’은 내가 나를 스스로 바라보고 사랑할 적에 가꿀 수 있습니다. 글쓰기도 그림그리기도 사진찍기도, 대학교나 외국유학으로는 못 배웁니다. 스스로 쓰고 그리고 찍기를 삶으로 녹이고 살림을 하면서 하고 사랑을 담아서 할 적에 누구나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펴고 나눕니다.


  “‘누’가 ‘말’을 하는가”를 헤아리시기를 바라요. 누구나 말을 하지 않나요? 그런데 누구나 말을 하도록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몇몇만 말할 자리일 뿐이고, 언제나 비슷비슷한 무리인 사람들끼리 말을 한다면, 그곳은 고인물조차 아닌 썩은물입니다.


  집에서 아버지 혼자만 말하거나 어머니 혼자만 말한다면, 이 집에는 사랑도 어깨동무(평화)도 없습니다. 집에서 모든 사람이 도란도란 떠들고 웃고 이야기를 할 적에 비로소 사랑이자 어깨동무입니다. ‘사진가’란 이름을 붙이려 하거나 내세우려 하는 분들만 끼리끼리 모인 곳에서 ‘누가 말을’ 하는지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왜 고이다가 썩어가는지를 헤아리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인물도 썩은물도 아닌, 샘물에 냇물에 바닷물에 빗물에 골짝물이라는 숨결로 다 다르게 빛나는 즐거운 물길로 노래하고 춤추면서 나아가면 넉넉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겨우내 시든 풀줄기에 앉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비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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