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7.29.

아무튼, 내멋대로 20 손수건


내가 손수건을 처음 챙긴 때라면 여덟 살이다. 어린배움터(국민학교)에 들어갈 적에 왼가슴에 손수건을 옷핀으로 집어 놓아야 했다. 우리 어머니가 처음으로 내 왼가슴에 손수건을 집어 주던 일이 떠오른다. 한 해 내내 이렇게 하고서 다녔으며, 두걸음(2학년)으로 들어선 뒤에는 비로소 떼었다. 배움터에서 ‘언니’가 되었으니, ‘첫걸음(1학년) 동생’들이 왼가슴에 옷핀을 잘 집지 못하면 도와주고, 이 손수건으로 콧물도 닦아 주었다. 이러고서 너덧걸음(4∼5학년)에 이르도록 손수건은 챙기기도 하고 잊기도 했는데, 열한두 살 무렵이던 어느 날, 동무가 책을 읽는 매무새가 낯설고 재미있어 한참 들여다보았다. 땀을 많이 흘리고 살짝 토실한 동무인데, 처음 책꽂이에서 오른손으로 빼내고는 왼손에 미리 챙긴 손수건에 책을 받쳐서 살살 넘기더라. “우와, 책을 저렇게 읽는 사람이 다 있네!” 하고 속으로 생각했고, 더 지켜보았다. 자리에 앉으려고 움직일 적에는 ‘손수건으로 책을 받쳐서 쥔 채 가슴에 붙여서 천천히 걷’더라. 자리에 앉은 뒤에는 왼쪽에 손수건을 놓고는 틈틈이 손을 닦는, 그러니까 손땀을 닦는 듯싶었고, 오른손 두어 손가락으로 책등 위쪽을 살며시 건드려서 가만히 밑으로 훑듯 가볍게 넘긴다. 이 아이가 책을 넘길 적에는 소리가 안난다. 더구나 책을 눌러서 펼쳐놓지 않는다. 책 가운데가 좁 씹히듯 좁아도 그대로 둔 채 읽는다. 한참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동무가 문득 고개를 들고는 “어? 왜? 너도 이 책 읽고 싶어? 재미있어. 그런데 나는 아직 다 읽으려면 좀 멀었는데 어떡하지?” 하고 말한다. “아니야. 난 그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아니고, 네가 손수건을 챙겨서 땀을 닦아 주고 읽는 모습이라든지, 책종이를 소리도 안 나게 살살 넘기는 모습을 지켜보느라 그랬어. 넌 늘 손수건을 챙겨서 읽니?” “내가 땀이 많이 나잖아. 게다가 손에도 땀이 많이 나니, 늘 손수건을 챙겨. 안 그러면 책에 내 땀하고 손때가 묻잖아.” “너보다 땀이 많이 나는 아이들도 그냥 읽던걸. 유난하게 구는 셈 아냐?” “유난하다고? 그렇지만 나 혼자 읽는 책이 아니잖아. 내가 산 내 책이더라도 집에서도 이렇게 읽어. 난 내가 좋아하는 책을 오래오래 깨끗하게 읽고 싶거든.” “어, 그렇구나. 그런데 책을 안 펼쳐서 그렇게 모아서 읽으면 읽기에 안 좋지 않아?” “응? 책을 눌러서 펴면 책이 다치고 구겨지잖아. 게다가 튿어질 수 있어. 책을 오래오래 읽으려면 가운데가 좀 좁더라도 고개를 움직이면서 읽으면 돼. 고개는 움직이면 그만이지만, 책을 눌러서 펼치면 책은 그날로 망가져.” “대단하다. 넌 어디에서 이런 길을 배웠어? 누가 가르쳐 줬어?” “어, 집에서 어른들이 안 가르쳐 주나? 우리 집에서는 다 그러는데?” “엥, 누가 집에서 가르쳐 주니? 책을 던지는 어른들도 많고, 냄비 받침으로도 잘만 쓰잖아?” “책을 어떻게 냄비 받침으로 쓰니? 냄비 받침은 신문종이로 써야지.” “아무튼 고마워. 너한테서 책을 쥐는 길을 배웠네. 나도 앞으로는 손수건을 챙겨서 읽어야겠다.” “그래, 너도 그렇게 해봐.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안 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책을 아껴서 돌보면, 책은 오래오래 가고, 무엇보다도 책이 우리들을 좋아해 주는 줄 느낄 수 있어.” “에? 설마?” “네가 책을 아끼고 돌봐주면 책이 기뻐하면서 반짝반짝 빛난다니까.” “음, 거짓말 같은데.” “나중에 너도 느낄 날이 있을 테지.” “그럴까?” “그럼.” 내가 어린배움터를 다니던 1982∼1987년에는 배움책숲(학교도서관)이 없었고, 낡은 칸에 ‘학급문고’ 비슷하게 있었고, 다 낡아빠진 책투성이였는데, 이런 데에서도 동무는 하나하나 아끼고 돌봐주었다. 이날 뒤로 ‘책쥠새’를 곰곰이 생각했고, 낮거나 높은 데에 꽂힌 책을 비롯해 빽빽하게 꽂히거나 느슨하게 놓은 책시렁마다 책을 안 다치도록 살피는 길을 스스로 하나하나 챙기는 매무새를 익혀 나갔다. 책숲(도서관)하고 책집(새책집·헌책집) 어디에서나 늘 한손에는 손수건을 쥔 차림새로 책을 만지고 살핀다. 나 혼자 읽거나 보는 책이 아니니.


ㅅㄴㄹ


‘책숲마실을 할 적마다 늘 챙기는 손수건’ 이야기를 글로 갈무리해야겠다고 여겨서 썼는데, 이럭저럭 쓰고 보니, 이 글을 나중에 동화로 바꾸어야겠구나 싶다. 책과 책집과 책숲을 아우르는 이야기로 삼으면 어울리겠구나.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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