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7.19.

아무튼, 내멋대로 19 싸구려



  열여덟 살이던 1992년 8월 28일부터 ‘책다운 책’에 비로소 눈을 떴다. 이때까지는 ‘그냥 책’을 그저 읽었다면, 이날부터는 ‘모든 책을 새롭게 보는 눈’으로 나아가자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책’이 아닌 ‘책다운 책’을 찾아서 읽자니 주머니가 홀쭉했다. 우리 어버이는 아이한테 책값을 넉넉히 줄 만한 살림이 아니었고, 열일곱 살까지 살던 옛집에서는 마을 동생을 가르치고(과외 교사) 살림돈을 벌기도 했고, 어머니가 곁일을 삼던 새뜸나름(신문배달)을 거들기도 했으며 여름겨울에는 한두 달씩 따로 먼마을로 달려가서 새뜸나름을 더 하며 곁돈을 벌었으나, 열여덟 살에 아버지가 옮긴 새집에서는 아무 곁일거리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무렵 옮긴 새집은 인천 연수동이었고, 막 올린 잿빛집(아파트)만 우줄우줄 선 스산한 벌판이었다. 홀쭉한 주머니로 무슨 책을 살 수 있을까? 읽고픈 아름책이 눈앞에 가득하지만 느긋하게 집이나 길에서 읽을 수 없었다. 요새야 책숲(도서관)에 온갖 책을 두루 들이면서 느긋이 빌려읽을 수 있다지만, 1992년만 해도 인천에 있던 고을책숲(구립도서관·시립도서관)에는 ‘책다운 책’이 아예 없다시피 했기에, 빌릴 만한 책이 없었다. 이리하여 열여덟 살 푸름이는 “책집에 서서 얼른 100자락 읽기”를 했다. 한 자리에 오래 서서 책 한 자락만 읽으면 새책집 일꾼은 으레 눈치를 보내니, 책 한 자락을 3∼5분 사이에 얼른 읽어내려고 용을 썼다. 마치 “나 이 책 다 읽지 않았어요. 살 만한가 하고 좀 살폈어요.” 하고 시늉을 하는 꼴이었다. 이렇게 이 책시렁 저 책시렁을 옮기면서 “살짝 살피는 척하지만, 막상 처음부터 끝까지 얼른 읽어내기”를 했고, “100자락을 읽고서야 1자락을 사기”를 했다. 새책집에서는 한 자리에 서서 읽으면 등에 꽂히는 눈치로 고단했다면, 헌책집에서는 아무도 눈치를 등에 안 꽂더라. 놀랐다. 더구나 헌책집지기는 “요새는 학생처럼 책을 보는 사람이 없는데 반갑네.” 하면서 책값을 에누리해 주기까지 하셨다. 더 놀랐다. 왜냐하면, 새책집에서건 헌책집에서건 “100자락을 읽어야 겨우 1자락을 사는 살림”이었는데, 그곳에서 갖은 책을 신나게 읽고서 겨우 한두 자락을 사는 푸름이한테 에누리를 해주시니까. 그런데 나는 에누리를 받으면 이 몫으로 책을 더 샀다. 마음에는 두되 주머니가 홀쭉해서 못 산 책이 있으니까. “학생, 버스비 없다면서? 버스비 없는데 책을 또 사도 되나?” “네, 두 다리가 멀쩡하니, 집에는 걸어가면 됩니다.” “집이 어딘데?” “걸으면 두 시간이 넘는데, 걸으며 책을 읽으면 네 시간이 걸리더군요.” “아니, 그렇게 먼데 걸어간다고?” “오늘 산 책을 읽으면서 걸어가면 어느새 집에 닿아요.” 새책집에서는 온돈을 치르며 새책을 산다면, 헌책집에서는 ‘똑같은 책이 여럿’ 보이면 ‘더 낡고 지저분한 책’으로 골랐다. ‘더 깨끗하거나 말끔한 책’은 300원이나 500원, 때로는 1000원이나 2000원이 비싸게 마련. 일부러 후줄근한 책으로 사서 책값을 줄이려 했다. “책이 너무 낡은데, 다른 책으로 사지?” “아뇨. 껍데기를 보려고 사는 책이 아니라, 알맹이를 읽으려고 사는 책이니 걱정없습니다.” 열여덟 살부터 서른세 살에 이르도록 늘 ‘싸구려’인 책으로 골랐다. 서른네 살쯤 이르자 ‘책 겉그림(표지)’을 긁어서(스캔) 둘레에 보여주자니 ‘그동안 산 싸구려책’으로는 겉그림을 못 긁기도 할 뿐 아니라, 겉그림이 아예 없는 책도 수두룩하더라. 이리하여 예전에 사읽던 허름한 싸구려 책을 요즈막에는 ‘말끔하고 말짱한 헌책’으로 다시 산다. 오늘 새로 산 《돔 헬더 까마라》도 《네째 왕의 전설》도 푸릇푸릇하던 지난날 낡아떨어진 책으로 샀기에, 이제 깨끔한 책으로 되사면서 곰곰이 생각한다. 비록 싸구려란 길을 걸었어도, 싸구려였기에 더 신바람으로 책을 읽고 살피며 속빛을 헤아리고서 품는 눈빛을 가꾸는 살림을 새록새록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