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손글씨 (2021.10.18.)

― 제주 〈동림당〉



  손으로 쓰는 글씨를 놓고서 한자말로는 ‘서명·수결·수기·필기’에 ‘필사·수인’을 쓰고, 영어로 ‘사인’에 ‘캘리그래프’를 씁니다. 정작 “손으로 쓰는 글”을 가리킬 우리말 ‘손글·손글씨’란 낱말을 쓰는 분은 드뭅니다. 책에 이름을 적는다고 할 적에 ‘서명본·사인본’이라 할 뿐, ‘손글책·손글씨책’이라 말하는 분은 없다시피 합니다.


  이제 남 이야기 아닌 우리 이야기를 손수 여미어 책을 내는 분이 부쩍 늘어요. 구경하거나 옮기는(인용) 책이 아닌, 수수하거나 투박한 우리 삶을 스스로 즐거이 엮는 손길이 늘어납니다. 구태여 ‘국립중앙도서관에 넣는 책’을 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 두루 나누면서 생각을 밝힐 뜻으로 글을 쓰고 책을 냅니다. 비록 요즈음은 삶뜻보다는 돈뜻·이름뜻이 높은 책이 제법 많더라도,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얻을 뜻으로 내려는 책이 아닙니다.


  제주 〈동림당〉에서 손글씨책을 한자리에 벌여놓습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울 만한 손글씨책이지만, 책집지기 손길을 받아 차곡차곡 모였기에 책손은 살며시 책집마실을 하면서 이 뭇숨결을 고루 누립니다.


  해남 시골내기 노래님인 김남주 님 손글이 투박하게 깃든 《이 좋은 세상에》를 보면서 망설입니다. ‘이 노래책을 품어도 되려나? 손글씨가 없는 책을 나중에 조금 눅은 값으로 찾는 길이 낫지 않을까? 김남주 님 책을 하나하나 모아 온 만큼, 이녁 손글씨책 하나를 품어도 될까?’ 살림돈이 넉넉했어도 헌책집을 찾아다녔으리라 생각합니다. 새책집에 안 들어가거나 못 들어가는 책이 헌책집에 가득하거든요.


  책은 새책집이나 책숲(도서관)에만 있지 않아요. 조용히 작게 펴내는 책이 무척 많습니다. ‘비매품’이란 책은 언제나 헌책집에서 만납니다. 배움글집(학급문집)이며 쇠붓(철필)으로 긁은 누런종이(갱지) 묶음도 헌책집에서 만나요. 헌종이로 버리는 새뜸(신문)도 헌책집에서 건사하지요. 우리 손자취가 깃든 모든 꾸러미는 헌책집에서 새빛을 품으며 다시 태어납니다.


  일본 오사카 야오(八尾)라는 작은고을 책집에서 쓰던 책싸개를 봅니다. 일본마실을 하던 분이 장만한 책을 싼 얇은 종이일 테지요. 1970년대에 일본마실을 하던 어느 분은 바쁜 틈에도 책집을 돌며 마음을 살찌웠구나 하고 돌아봅니다. 스치면 낡은 종이입니다. 지나치면 하나도 안 보입니다. 그렇지만 손을 뻗어 들여다보면 수수한 사람들이 조촐히 누리고 펴던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쏟아지는 헌책이요 헌종이입니다. 허름해 보일수록 하늘빛에 맞닿는 이야기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ㅅㄴㄹ


《이 좋은 세상에》(김남주 글, 한길사, 1992.3.25.)

《詩人의 눈》(조지훈 글, 고려대학교출판부, 1978.4.30.)

《파브르 평전》(마르틴 아우어 글/인성기 옮김, 청년사, 2003.7.14.)

《새학급 만들기》(하현철 글, 유일문화사, 1973.10.25.)

《韓國口碑文學大界 9-1 濟州道·北濟州郡 篇》(현용준·김영돈 엮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9.25.)

《英語の實力》(宮田峯一 글, 弘道閣, 1938.10.5.첫/1939.5.15.18벌)

《よまにゃノ-ト》(Noritake 그림, 集英社, 2019.6.30.)

《美術鑑賞入門》(이경성 글, 박영사, 1976.4.20.)

《紙の手藝》(エキグチクニオ, 保育社, 1970.5.1.)

《리카 자라이 자연식》(리카 자라이 글/편집부 옮김, 삶과꿈, 1992.11.15.)

《샘터 182호》(김재순 엮음, 샘터, 1985.4.1.)

《호적민원안내》(시민과 호적계 엮음, 제주시, 1997.5.)

《博物誌(外)》(J.르나르/손석린 옮김, 을유문화사, 1972.9.30.첫/1974.2.1.2벌)

《精神薄弱兒 指導》(이춘섭, 자유출판사, 1975.10.25.첫/1979.2.5.2벌)

《子女들의 性敎育》(石垣純二/강준상 옮김, 세흥문화사, 1964.11.10.)

《사랑의 길 자유의 길》(김동길, 주부생활사, 1980.5.5.)

* 八尾市(오사카 야오시) 梅忖書店 책싸개

《般若心經講義》(高神覺昇, 角川書店ㅡ, 1952.9.30.첫/198.5.30.68벌)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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