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숲에서 짓는 글살림

46. 길을 찾는 글



  우리가 쓰는 말을 곰곰이 보면 ‘씨’라는 낱말이 곧잘 붙습니다. ‘씨나락·씨암탉·씨돼지’처럼 쓰고, ‘씨알·씨주머니·씨물’처럼 쓰며, ‘솜씨·마음씨’처럼 씁니다. ‘맵시’도 ‘씨’하고 얽히는 낱말이지만 글로는 ‘시’로 적되 말로는 ‘씨’로 소리를 냅니다.


  ‘씨’하고 ‘시’는 오가는 사이예요. ‘씨앗’하고 ‘시앗’은 말밑이 같습니다. 어느 고장에서는 겹닿소리를 쓰고, 어느 고을에서는 홀닿소리를 쓸 뿐입니다.


  이 ‘씨’라는 말을 넣어 ‘이름씨·그림씨·움직씨·어찌씨·셈씨’ 같은 낱말을 짓기도 합니다. 영어를 한자로 옮긴 일본 말씨인 ‘명사·형용사·동사·부사·수사’가 아닌, 우리 나름대로 이 삶자락을 헤아려서 우리말을 찬찬히 쓰자는 뜻으로 지은 낱말이에요.


  우리말로만 쓰자고 얘기하거나 외우도록 하는 일이든, 꽤 오래 익숙하게 쓰거나 자리잡은 일본 한자말을 그냥 쓰자고 뒷짐지는 일이든, 그리 알맞지 않다고 여깁니다. 말밑을 차근차근 짚으면서 우리 생각을 슬기롭고 사랑스레 가꾸는 징검다리가 될 만하도록 말길을 가르치고 글길을 여며야지 싶어요.


  왜 이름씨일까요? 이름 하나가 씨앗이 되거든요. 왜 그림씨일까요? 그리는 모습이나 느낌이나 결이나 마음이 언제나 씨앗이 돼요. 왜 움직씨일까요? 움직이는 몸짓이 고스란히 씨앗으로 뿌리내립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처럼 우리가 혀나 손에 어떤 낱말을 얹느냐에 따라서 생각도 삶도 달라집니다. 즐겁게 부를 이름인가요? 기쁘게 그릴 말인가요? 아름답게 움직이는 말인가요?


 명운을 좌우하다 → 삶을 가르다

 국가의 명운은 청년들에게 달려 있다 → 나라 앞길은 젊은이한테 달렸다

 책이란 출판사의 명운을 건 상품이 아닐까요 → 책에 출판사 목숨을 걸지 않을까요

 명운이 다한 것처럼 보였던 → 숨이 다한 듯 보인 / 삶이 다한 듯 보인 / 길이 다한 듯 보인


  한자말 ‘명운(命運)’은 “1.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 운명 2.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숨’이나 ‘숨결·목숨’이나 ‘삶·삶길’이나 ‘앞·앞길’이나 ‘길·가다’로 풀어낼 만합니다.


  씨앗 한 톨을 손바닥에 얹고 바라보다가 문득 길을 생각했습니다. 이 ‘길’하고 ‘글’은 참 닮은, 그렇지만 다른 낱말이구나 싶습니다. 닮았으나 다른, 다르지만 닮은, 두 낱말을 둘러싼 수수께끼란 무엇이려나 어림해 봅니다.


 하지만 운명의 상대를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서 → 그러나 꽃짝을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서 / 그런데 아름짝을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서

 어머니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갔습니다 → 어머니와 같은 삶길을 갔습니다 / 어머니와 같은 길을 갔습니다

 우리에게 남북관계는 운명입니다 → 우리는 남북사이를 타고났습니다 / 남북사이는 우리가 갈 길입니다


  앞뒤만 바꾼 다른 한자말 ‘운명(運命)’은 “1.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 명·명운 2.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를 가리킨다지요. ‘명운’이든 ‘운명’이든 ‘숨’이나 ‘숨결·목숨’이나 ‘삶·삶길’이나 ‘앞·앞길’이나 ‘길·가다’나 ‘둘도 없다·대단하다·놀랍다’나 ‘타고나다’로 고쳐쓸 만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이처럼 쓰면 됩니다.


  글을 쓰거나 다루는 숱한 어른은 한자말 ‘명운·운명’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그러나 글을 안 쓰거나 안 다루는 적잖은 어른은 ‘명운·운명’이 어떤 낱말인가를 어렴풋이 알더라도 제대로 모르기도 하고, 아예 모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한자말은 어린이한테 대단히 낯설고 어렵습니다.


  어른만 읽는 책이나 신문에 ‘명운·운명’ 같은 한자말이 나온들 대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어린이부터 읽는 그림책이나 동화책에 이런 한자말을 쓴다면 거추장스럽습니다. 어린이가 책을 읽는 길이나 배우는 길을 가로막지요. 어린이가 생각을 새롭게 짓거나 가꾸는 길하고 동떨어지고요.


  적기는 ‘운명’이라는 똑같은 한자말이지만, ‘운명(殞命)’은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을 가리킨답니다. 더 생각해 봐요. 어린이 곁에서 이런 한자말을 구태여 써야 할까요? 어린이 곁에서 구태여 안 쓰는 길이 낫다 싶은 말씨라면, 어른 사이에서도 되도록 꺼리거나 털어낼 적에 나은 말씨이지 않을까요?


  우리말로는 ‘죽다’가 있습니다. 높임말로 ‘가시다’가 있고, 에둘러 ‘떠나다’나 ‘돌아가다’나 ‘눈을 감다’라고도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부드러우면서 쉽고, 깊으면서 너른 말이 꽤 많습니다. 한자말을 써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한자말을 써도 되느냐 아니냐도 아닙니다. 어린이가 달달 외워야만 하는 말이라면 생각날개를 펴지 못하도록 꽁꽁 싸매고 말지요. 달달 외워야만 하는 입시지옥 시험문제 같은 낱말이라면, 스스로 생각하는 날개를 꺾고 말기에, 이런 낱말로는 틀에 맞추고 판에 박히며 길을 들이고 말아요.


 길을 찾다 ↔ 길을 들이다


  같은 낱말 ‘길’이지만 쓰임새가 갈립니다. “길을 찾다”라 할 적에는 새롭게 닦거나 내거나 짓는다는 몸짓이자 마음입니다. “길을 들이다”라 할 적에는 케케묵은 대로 물들이면서 틀에 박힌 채 그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종살이입니다.


  개나 고양이를 길들이듯 사람을 길들여도 되지 않습니다. 아니, 개나 고양이도 섣불리 길들이지 말아야 할 노릇입니다. 개는 개답게, 고양이는 고양이답게 살아야지요. 사람도 사람답게 생각을 펴고 꿈을 키우며 사랑을 나눌 노릇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란, 우리가 쓸 말이란, 우리가 쓰려는 말이란, 언제나 이 ‘길’을 헤아리는 마음에 심는 ‘씨앗’이어야지 싶습니다. 그저 착한 ‘마음씨’가 되라고만 외는 얘기가 아닌, 마음을 상냥하고 슬기로우면서 새롭게 사랑하는 씨앗을 품는 길인 ‘마음씨’가 되도록 어른하고 어린이가 어깨동무해야지 싶습니다.


 글씨. 말씨.


  이제 ‘길·글’하고 맞물려서 ‘씨·씨앗’을 짚겠습니다. 글로 옮겨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한 ‘글씨’일 테지만, 글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생각을 담아서 나누려고 하는 ‘글씨’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모습인 ‘말씨’일 텐데, 말이라는 소리로 나타나도록 생각이며 사랑이며 뜻이며 마음을 담아서 함께하려고 하는 ‘말씨’이기도 합니다.


  일본 말씨란, 일본사람이 즐겨쓰면 될 말씨입니다. 우리는 우리 말씨를 즐겨쓸 노릇입니다. 번역 말씨란, 일본사람이 서양말을 옮기면서 불거진 말씨입니다. 우리는 굳이 번역 말씨를 안 끌여들여도 돼요. 갖은 서양말이며 일본말이며 중국말을 옮길 적에는 차근차근 가다듬어 우리다운 말씨로 피어나도록 손보고 가꾸면 즐겁습니다. 부드러이 어루만지고 즐겁게 쓰다듬습니다. 따뜻하게 감싸고 아늑하게 돌봅니다. 글로 드러나는 마음이기에 글씨입니다. 말로 나타나는 마음이기에 말씨입니다.


  ‘손글씨’란 마음을 드러낼 적에 우리 손길을 더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마음이 되어 오늘 하루를 여는 길을 가면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봐요. 어떤 생각을 펼쳐 오늘 하루를 짓는 글을 쓰면 사랑스러울까 하고 꿈꾸어 봐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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