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천의 권 1
Buronson 글, 하라 테츠오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하늘처럼 파랗게 두 손 가득



《창천의 권 1》

 부론손 글

 하라 테츠오 그림

 조진숙 옮김

 학산문화사

 2002.5.25.



  중학교 2학년 무렵이라고 떠오르는데, ‘기술’이란 갈래에서 하는 ‘제도’를 배워야 해서 값비싼 ‘제도 참고서’를 사야 했고, 어머니한테서 돈을 받아 학교 앞 문방구로 걸어가다가 그만 주먹떼를 마주쳤습니다. 이들은 대여섯이었나 예닐곱이었는데, 저하고 동무를 두들겨패고서 돈을 빼앗습니다.


  돈을 빼앗긴 채 집으로 울면서 돌아오니 우리 형은 도리어 저를 나무랍니다. 얼간이 같은 놈들한테 돈을 빼앗기고도 모자라, 맞고 울면서 돌아오느냐고, 넌 안 되겠으니 바로 무술학원에 다녀야겠다면서 제 손목을 움켜쥐고 온갖 무술학원을 찾아갔어요.



“염왕을 잡아? 푸하하! 염왕이 폐하의 호위병이 되면 우린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되고 말 텐데! 당연히 찾는 즉시 없애버릴 거야!” (40쪽)



  태권도, 유도, 합기도 …… 이런 저런 무술학원을 찾아가서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지켜본 우리 형은 이도 저도 내키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특전무술을 가르치는 데에 저녁나절에 닿는데, 우리 형은 이곳이 마음에 든다며 대뜸 제 이름을 적어 넣고 이튿날부터 다니라고 얘기합니다.


  특전무술을 가르치는 그곳은 가장 어린 배움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고, 그나마 한 사람입니다. 이이하고 저를 뺀 모든 사람은 스무 살이 넘어요. 어쩜 이렇게 벅찬 곳에 집어넣는가 싶었으나, 무술학원 막내 가운데 그야말로 꼬꼬마라는 대목 때문에 오히려 이를 악물기로 했어요.



“왜 말하지 않았어요, 리! 나에 대해 다 말하지 그랬어요!” “우린 친구를 팔지 않아! 그게 청방이야!” (51쪽)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필요 없어.” “뭐라구?” “친구잖아?” (73쪽)



  우리 주먹은 왜 있을까요? 우리는 주먹으로 무엇을 할 만할까요? 주먹이란 다른 사람이나 짐승을 때리라고 있을까요? 푸른별 사람들이 걸어온 자취를 돌아보면, 아무래도 하나같이 싸움자취입니다. 어느 나라를 돌아보아도 이른바 ‘역사’란 이름으로 남기는 얘기는 한결같이 싸움박질입니다.


  《창천의 권 1》(부론손 글·하라 테츠오 그림/조진숙 옮김, 학산문화사, 2002)를 읽습니다. 이 만화에 앞서 《북두의 권》이 있어요. 두 만화는 어깨동무를 하는 줄거리입니다. 사람들이, 아니 사내들이 참다운 빛을 잃고서 오직 ‘돈·가시내·마약’에 사로잡혀 노닥질을 하고 쌈박질로 하루를 보내는 어지럼판을 오직 맨주먹으로 때려부수면서 “넌 이미 죽어 있다”라는 한 마디를 날리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오호! 북두의 별이 소원을 이루어준 건가? 짐을 위해 잘 와주었다!” (철썩!) “으아악! 아브브브브! 아파! 무슨 짓이냐! 부모한테도 맞은 적이 없는 짐을! 짐은, 짐은, 짐은, 황제다!” “거 참 되게 시끄럽군, 이 얼뜨기!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래? 인간 말종, 똥자루야!” (100∼101쪽)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늘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 눈은 왜 있을까요? 우리 이는 왜 있을까요? 우리 귀는 왜 있을까요? 우리 손발은 왜 있을까요? 우리 몸은 왜 있을까요? 스스로 묻고 생각합니다.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도 다시 묻고 자꾸 묻습니다.


  어느 날 문득 어디에선가 소리를 들려주는 빛덩이가 있어요. “얘야, 사람한테 주먹이란, 작은 씨앗을 든든히 감싸서 지켜 주려고 있단다. 그리고, 이 움켜쥐면서 생기는 주먹이란 눈물을 훔치라고 있고, 빗물을 떨구라고 있단다. 이 주먹은 어른이 된 몸으로 아이들을 두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해서 즐겁게 노는 구실이란다.”


  그래요. 그렇지요. 싸우라는 주먹이 아닌, 씨앗을 감싸면서 바깥 그 어느 얄궂거나 자질구레하거나 지저분한 것도 스미지 못하도록 돌보는 주먹일 테지요. 누가 주먹을 쥐어 때리려고 달려들면 손을 활짝 펴서 가볍게 톡톡 스치며 흘려보내라는 손일 테지요. 맞싸우는 주먹이 아닌, 안쓰럽거나 가엾거나 바보스러운 이웃을 보면 스스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 눈물을 씻으라는 주먹일 테고요.



“잠꼬대 하지 마! 개가 사람을 물면 그 책임은 주인한테 있어!” (106쪽)


“힘겨루기는 끝났어. 죽을 필요는 없어.”“경호원 생활에 열중하다가 내 권법은 녹슬어 버렸어. 아니, 나 자체가.” (159∼160쪽)



  무술학원이란 곳을 다니면서 날마다 담금질을 했습니다. 무술학원 사범은 날마다 저를 숱하게 집어던졌습니다. 집어던지면서 늘 말하지요. “바닥에 떨어질 적에 바로바로 낙법을 해서 몸이 안 다치게 해라.” 어리다고 봐주는 눈치가 하나도 없는 무술학원에서 이를 깨물고 살아남으려고 집하고 학교하고 무술학원 사이를 날마다 뜀박질로 오갔어요. 버스를 아예 안 탔고, 걷기조차 안 했어요. 등짐이 가볍건 무겁건 늘 달렸어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저 눈비를 맞으면서 달립니다. 건널목에 걸리면 제자리뛰기를 했고, 건널목이 푸른불로 바뀌면 이내 다시 달렸지요.


  무술학원 다른 사람들이 한 시간 동안 땀을 빼면 저는 두 시간 동안 땀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팔굽혀펴기를 백 판 하면 저는 이백 판을 했습니다. 무엇이든 곱빼기로 했고, 온힘을 다해 한 해 동안 무술학원을 버티어 냈어요.



“죽을 자리는, 어디든 상관 없어.” (174쪽)


“보답을 하고 싶네.” “됐습니다.” “그럼 이것밖에 없지만 이거라도 가지고 가게.” “라면 값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자넨, 내 딸의 생명을 구해 줬어.” “그럼 담배 한 개비, 그거면 됩니다.” “왜 구해 준 건가?” “후우, 맛있군. 당신은 여기서 죽기에는 아깝다, 그렇게 보였을 뿐.” (190∼191쪽)



  무술학원을 다닌 뒤로는 얻어맞은 일이 없을까요? 여느 삶터에서는 얻어맞은 일은 없습니다만, 군대에서는 노상 얻어맞습니다. 군대는 병장·상병·일병·이병으로 가른 자리뿐 아니라, 행정보급관·하사관하고 중대장이란 자리로 윽박지르면서 마구마구 두들겨패더군요.


  무술학원을 다니고서도 ‘주먹으로 남을 때리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했다지만, 무술학원을 다니면서 몸을 다스린 바탕이 생겼기에, 군대에서 그렇게 흠씬 맞는 나날이었어도 견딜 만하더군요. 그렇게 때려대는 사람을 보면서 ‘그대야말로 참 불쌍하네.’ 하고 마음으로 생각했어요. 주먹꾼이 군대를 마치는 마지막날 밤에 그 주먹꾼한테 조용히 찾아가서 “야, 오늘 저녁까지는 네가 고참인지 지랄인지 모르겠으나, 이튿날부터 넌 개×끼야. 내가 이 군대를 마치고 사회에 돌아가면, 넌 내가 없는 데로만 다녀. 길에서 나를 봤다가는 너 무슨 꼴이 날는지 모른다.” 하고 속삭였어요.


  《창천의 권》에 잘 나오는데요, 주먹질을 일삼는 이들은 저희보다 힘센 주먹이 눈앞에 있으면 깨갱하면서 꼬리를 내립니다. 아무 데서나 주먹을 휘두르는 이들은 얌전하거나 반듯하거나 착하거나 부드러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요. 그래서 그런 주먹꾼이 군대에서 저지른 주먹질을 뒤로 하고 사회로 돌아갈 적마다 흠씬 말벼락을 베풀어 주곤 했습니다. 그들하고 똑같이 되고 싶지 않아 그들을 주먹으로 건드리는 짓은 안 했고요.



“라몬, 많이 컸구나! 이제 안심이다!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네가 계승자다!” “무슨 소리야. 바보야! 형 맘대로 뭐야?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거 잘 알잖아!” “라몬! 만일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창공을 생각해라! 창공에 기원해라!” (206∼207쪽)


“아무리 구름이 끼어도 구름 위는 항상 창공이다! 너의 소망은 창공에 있다!” (208쪽)



  만화책을 덮고서 생각에 새삼스레 잠깁니다. 1995∼1997년에 군대에 있는 동안 저를 그렇게 때려댄 그 바보스러운 사내한테 말벼락을 퍼붓는다고 해서 그들이 사회에서 달려졌을는지 알 길이 없어요. 어쩌면 그들은 군대에서 무슨 짓을 일삼았는지 감쪽같이 숨기거나 꽁꽁 묻어두면서 오늘을 살아갈는지 모릅니다.


  뒤늦은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때 그들한테 말벼락이 아닌, 눈물어린 말을 들려주면 어떠했으랴 싶어요. 이를테면 “밤이라서 별빛이 가득한 까만하늘이야. 이 까만 밤하늘을, 또 낮에는 새파란 하늘을, 어디에 가서라도 생각하기를 바라. 그대가 주먹을 휘두른들 저 별빛이나 바람을 부술 수 있니? 건드리지도 못할걸. 부디 이다음에 가는 곳에서는 주먹에서 힘을 풀고서 별빛을 두 손에 담고 바람빛을 두 손으로 쓰다듬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 이제부터라도 착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겠어. 네가 앞으로 착하게 살아간다면, 뭐 그때엔 길에서 그대를 스칠 일이 있으면 빙긋 웃어 줄게.” 같은 말을.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