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컷

1999.12.11.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녘에서는 ‘자아비판’을 시킨다면 남녘에서는 ‘자기검열’을 시킨다. 북녘에서는 멀쩡한 사람이 아무 잘못이 없는 일이야말로 잘못이라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면, 남녘에서는 멀쩡한 사람이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게끔 자기검열(또는 자체검열)을 해야 한다. 북녘에 언론자유가 없다지. 그렇다면 남녘에 언론자유가 있을까? 자본주의와 권력자가 판치는 막짓은 있되, 목소리를 마음껏 펴는 자유가 참답게 있을까?


2010. 3.2.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하면서 실을 수 없단다. 잘라야 한단다. 내가 그쪽을 흉보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지만, 한쪽 목소리만 담을 수 없으니 실을 수 없단다.


2019.5.29. 나는 1999년부터 열한 달을 다닌 보리출판사에서 건네준 ‘월급명세서’를 차곡차곡 모았다. 이곳에 사표를 던지고서 2001년부터 새롭게 일한 토박이출판사에서 내준 ‘월급명세서’도 차곡차곡 모았다. 1999년부터 한 해 동안 ‘달삯 62만 원에 열두 달 비정규직’으로 일했고, 사전 편집장이자 자료조사부장으로 일할 적에는 정규직이기는 하되 첫 달삯 100만 원을 받으며 일했다. 틀림없이 이렇게 살았던 일이요 겪은 일이라 꾸밈없이 글로 옮겼는데, 이 일을 믿을 수 없다면서 이 얘기를 쓴 대목을 잘라내야겠다는 얘기를 듣는다. 할 말을 잃었다.


2019.6.4. 한국은 피해자보다 가해자 인권을 어쩐지 더 헤아리는 나라이지 싶다. 피해자가 ‘언제 어디에서 누가 이렇게 괴롭히거나 들볶거나 짓밟았다’는 이야기를 밝히면, 몹쓸 짓을 일삼은 가해자를 나무라거나 꾸짖을 노릇일 텐데, 뜬금없이 ‘가해자 명예훼손’이란 잘못을 들씌우곤 한다. 피해자는 처음 시달리거나 짓밟힐 적에 한 판 괴롭고, ‘가해자 명예훼손’이란 잘못을 뒤집어쓰면서 두 판째 괴롭고, 또 이 두 가지 때문에 마음앓이를 하다가 더는 속에 묻을 수 없어서 이 일을 터뜨리면 ‘왜 이제 와서 뜬금없이 해묵은 일을 끄집어내느냐’ 하는 핀잔까지 들으면서 세 판째 괴롭기 마련이다. 참소리를 내려고 하면 ‘내부고발’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을 덮어씌운다. 참된 목소리를 낼 뿐인데 왜 이런 목소리를 ‘내부고발’이란 이름으로 뒤집어씌울까?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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