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다가 본문에 있는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혹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책 55쪽을 펴보시라. 여성의 강간을 옹호하는 미국 공화당 정치인 다섯 명의 망언을 소개하는 내용이 나올 것이다. 이 다섯 명의 공화당 정치인들은 2012년 선거에서 모두 낙선되었다. 몰상식한 발언을 한 다섯 명의 공화당 정치인의 이름을 소개해보겠다. 토드 어킨, 리처드 머독, 린다 맥머혼, 톰 스미스, 존 코스터. 이 다섯 명 중에 한 사람만은 누군지 잘 알고 있다.

 

 

 

 

린다 맥머혼. 놀랍게도 다섯 명의 공화당 정치인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다섯 명이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몰라도 이름만 봐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역자는 ‘린다 맥머혼’이라고 썼지만, 원어민의 발음대로 하면 ‘린다 맥마흔(Linda McMahon)’으로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린다 맥마흔’으로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하다. 네이버 검색창에 ‘린다 맥마흔’이라고 치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WWE를 즐겨 본 사람이라면 린다 맥마흔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그녀의 남편은 현재 미국 최대 프로레슬링 단체 WWE의 회장 겸 CEO인 빈스 맥마흔이다. 필자는 WWE라는 이름으로 변경하기 전이었던 WWF 시절부터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를 즐겨 봤다. (WWE는 ‘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의 약칭이며 WWF는 ‘World Wrestling Federation’의 약칭이다. 2002년에 세계자연기금(World Wide Fund for Nature)의 명칭 관계로 소송에 휘말려 패소하는 바람에 지금의 WWE로 단체명이 변경되었다.) WWE는 프로레슬링에 오락적인 요소가 더해진 세계 최대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단체이다. WWE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화려한 기술을 역동적으로 구사하는 레슬러들의 경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레슬러 간의 신경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흥미로운 스토리라인은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1970년대 한국레슬링의 에이스였던 장영철이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외친 이후로 국내 레슬링의 위상은 한순간에 떨어졌지만, WWE는 여전히 건재하다. 마치 생방송 드라마처럼, 때로는 돌발 상황마저 그다음 주의 스토리라인에 이용할 정도로 치밀하게 각본을 진행한다. 실제로 WWE에 스토리라인을 만드는 각본진이 따로 있으며 종종 선수들도 각본을 만드는 일에 개입하기도 한다.

 

어쩌다가 WWE에 관한 부연 설명이 조금 길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린다 맥마흔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녀와 WWE의 관계를 지나치면 안 된다. 내용이 너무 길다고 느껴진다거나 현재 북플로 글을 읽고 있다면 안 읽어도 된다.

 

 

 

 

 

 

WWE가 WWF였던 시절, 그러니까 1990년 중반에 TV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극단적인 스토리라인이 나왔다. 빈스 맥마흔은 당시 CNN 창립자 테드 터너가 운영하는 또 다른 레슬링 단체 WCW와의 시청률 경쟁에서 이기려고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자신의 가족을 링 위에 등장시킨다. 아들 셰인 맥마흔, 딸 스테파니 맥마흔 그리고 아내 린다까지 각본에 투입되었다. 빈스는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틈만 나면 가운뎃손가락(‘Fuck you’)을 들어 올리는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을 괴롭히다가 끝내 불쌍하게 얻어터지는 악덕 회장으로 링 위에 등장했다. 또한 빈스와 셰인 간의 대결 구도를 설정하여 아버지와 아들 간의 레슬링 경기가 실제로 펼쳐지기도 했다. 린다는 섹시한 여성 레슬러를 애첩으로 둔 바람기 많은 남편을 철저히 응징하는 사모님으로 등장했다. 이제 곧 손자, 손녀를 봐야 할 황혼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도 린다는 레슬러의 위험천만한 기술들을 온몸으로 맞아주는 살신성인의 연기를 보여줬다. 이렇듯, 진정한 막장 스토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과거 WWF를 보면 된다.

 

현재 WWE의 최고경영자는 빈스 맥마흔이지만, 원래는 린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린다는 정계 진출을 위해서 최고경영자 자리에 물러났다. 2009년, 그녀는 코네티컷 주 교육위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의 교육위원 임명 과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꽤 많았다. 반대자들은 그녀가 WWE에서 활동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WWE의 본사가 코네티컷에 있어서 린다 입장에서는 지지 세력을 많이 확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역시나 WWE에서의 활동은 그녀의 정계 입문에 제약되었다. 그러나 린다는 반대 여론에 개의치 않았고, 그해 9월에 코네티컷 주 상원의원으로 출마하겠다고 공식 발표를 했다. 아내의 상원의원 당선을 위해서 빈스 맥마흔은 WWE의 방송 등급을 14세 이상 연령이 시청 가능한 PG 등급으로 조정했다. 이로써 성인 시청자들이 좋아했던 자극적인 각본과 여성 레슬러들의 과도한 신체 노출 장면이 브라운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린다는 2010년, 2012년 상원의원 선거에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비록 각본에 따른 ‘쇼’의 일부였지만, 린다는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게 배신을 당하면서도, 결국에는 남편의 뺨을 날리고, 그의 급소를 향해 발로 차는 여장부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악덕 회장에게 복수하는 린다의 사이다 같은 퍼포먼스에 팬들은 통쾌했다. WWF 시절 여성 레슬러들은 남성 레슬러를 보조하는 매니저 역할로 국한되었고, 남성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성 상품에 불과했다. 린다 맥마흔은 남성 위주의 프로레슬링단체 속에서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가 과거에 WWE 최고경영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WWE 내 그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발언을 한 린다의 태도가 유감스럽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린다가 정치인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본심을 밝히자면, 절대로 정치인이 돼선 안 된다. 이 말이 여성 정치인의 한계를 겨냥하기 위한 것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둔다. 필자는 여성 정치인의 진출 기회가 많아져서 정치력 신장이 더 높아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필자가 정치인으로서의 린다를 반대하는 이유는 강간의 심각성을 모르는 무지한 발언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낙태를 반대해온 공화당 소속이라고 해도 보수적인 남성처럼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은 여성 유권자의 지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같은 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 후보로 나선 토드 어킨은 “진짜 성폭행(legitimate rape)을 당한 여성이 임신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막말을 하는 바람에 당 전체를 궁지로 몰아넣었고, 승리를 민주당 후보에게 헌납했다. 참고로 공화당 내 여성 의원들과 중도파 의원들도 낙태금지법에 반대하고 있다. 이쯤 되면 빈스 맥마흔은 아내의 꿈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내에게 대준 엄청난 금액의 정치 자금을 무척 아까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린다 맥마흔이 세 번째 상원 의원 출마 도전에 성공하더라도 제2의 힐러리 클린턴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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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7-2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화당 지지자치고 제대로 된 놈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정도 ?!

cyrus 2015-07-25 16:56   좋아요 0 | URL
공화당 의원 중에 정말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 의원이 많지 않습니다. 공화당 측에서는 린다 맥마흔을 적극적으로 밀어 줄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만병통치약 2015-07-25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시는 분야가 있으세요? 미국프로레슬링까지.....

cyrus 2015-07-25 16:57   좋아요 0 | URL
예전에 프로레슬링에 관한 역사를 다룬 글을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어서 레슬링에 종사했던 선수나 관계자 이름 정도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요즘은 레슬링 경기를 잘 보지 않습니다. ^^
 

 

 

 

 

 

 

 

 

 

 

 

폴 고갱은 나이 서른다섯 살까지만 해도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일했다. 증권거래소에 다니면서 저축한 돈으로 경제적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했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주말 화가’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주식으로 흥한 자는 주식으로 망한다. 주식이 크게 폭락하고 증권거래소가 문을 닫으면서 고갱은 실직자가 되고 만다. 1882년의 주식 폭락은 1929년의 블랙 튜스데이(Black Tuesday)와 1987년 블랙 먼데이(Black Monday)에 비할 만큼 경제사의 암울한 날로 기억되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백수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나이 마흔둘에 남태평양의 타히티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렸다. 가족들과 주변 동료들은 고갱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전에 그림 한 점만 팔렸다는 반 고흐보다는 조금 더 나은 형편이었지만, 고갱의 그림 또한 생각보다 많이 팔리지 않았다. 생전에는 상업적으로도 실패면서 남들이 보기엔 말년에 꼬인 실패한 인생이라고 볼지 모르겠지만, 그는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병마와 고독 속에서 끝까지 붓을 놓지 않는 모습에 연민이 생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반 고흐에게는 ‘광기의 화가’, 고갱에게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그들의 삶을 총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중은 이 수식어만 믿고 그들의 그림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결과를 볼 뿐, 우여곡절 많은 삶의 과정을 아는 사람은 적다. 고갱에 대한 평가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를 원시의 화가로만 기억하는 것은 고갱의 삶 반쪽만 보는 것과 같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고갱의 진실을 아는 순간, 그동안 미디어가 부추긴 예술가를 향한 맹목적인 열광과 평가가 허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Scene #1  <아방 에 아프레>와 <노아 노아>

 

 

 

 

 

 

 

 

 

 

 

 

 

 

 

 

 

 

 

 

 

 

 

 

 

 

 

 

 

 

고갱은 생전에 글을 많이 남겼다. <아방 에 아프레(Avant et apres, 우리말로는 ‘전과 후’)>는 고갱이 사망한 후에 나왔다. 책 내용은 전반적으로 자서전에 가깝다. 여기에 반 고흐와 함께 살았던 일과 반 고흐가 귀를 자르기 전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고갱은 반 고흐가 면도날로 자신을 위협했다고 증언한다. <노아 노아(Noa Noa)>는 타히티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수기다. ‘노아 노아’는 ‘향기’ 를 의미하는 타히티 어다. 타히티 생활을 뒤로하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타히티의 풍속과 신화를 소개하는 <마오리의 고대 신앙>과 <노아 노아>를 펴낸다. <노아 노아>는 고갱이 생각하는 원시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하지만 이 책에 사실보다는 허구가 많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본 것은 태초의 원시성을 그대로 간직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문명의 손아귀에 들어간 식민지 섬의 모습이었다. <노아 노아>에서는 타히티 신화 일부를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 내용 또한 고갱이 조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프랑스 식민지가 된 타히티에서 기독교가 타히티 민간 신앙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타히티 신화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고갱은 타히티의 원시성을 강조하여 유럽 독자들의 입맛을 맞추려고 일부러 윤색했을 가능성이 있다. <노아 노아>에 나오는 일부 이야기는 피에르 로티의 소설 <로티의 결혼>과 거의 비슷하다. <로티의 결혼>은 타히티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이며 고갱은 이 소설을 읽었다.


 

 

 

 Scene #2  바느질하는 쉬잔

 

 

 

 

폴 고갱 누드 습작또는 바느질하는 쉬잔」 (1880년)

 

 

앞으로 이 그림을 소개할 땐 ‘「누드 습작」 또는 「바느질하는 쉬잔」’ 으로 불러야 한다. 그림 속 모델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고갱은 1881년 인상주의 전시회에 「누드 습작」을 출품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벌거벗은 모델은 고갱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쉬잔이다. 그런데 고갱의 아내 메테는 그림에 푹 빠진 남편에 못마땅했다. 당연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누드화를 그리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메테가 직업 모델을 부르지 못하게 하자, 고갱은 하녀를 누드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이 성공하자, 메테는 쉬잔을 해고했다.

 

 

 


 Scene #3  친구의 여동생을 사랑했네

 

 

 

 

 

폴 고갱 「마들렌 베르나르」 (1888년)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 메이에르 드 한 등과 함께 퐁타방 파를 결성한다. 이들은 퐁타방 지방에 거주하면서 함께 그림 작업을 했다. 에밀 베르나르의 여동생 마들렌은 퐁타방 파의 홍일점이었다. 그녀는 샤를 라발과 약혼한 사이였다. 고갱은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마들렌에 특별한 감정을 가졌다.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고갱은 노골적으로 그의 여동생에게 관심이 있다고 썼으며 심지어 그녀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행히 에밀의 부모의 반대로 고갱과 마들렌의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하지 않았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년)

 

 

고갱은 자신의 얼굴을 기괴한 형태로 변형해서 만든 도자기 병을 마들렌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었지만, 마들렌은 고갱의 선물을 거부했다. 당시 고갱은 그로테스크한 얼굴의 표정이 있는 도자기 병 제작에 열중했다. 마들렌의 눈에는 고갱이 만든 도자기가 예술 작품이 아닌 그냥 괴상망측한 물건으로 보였을 것이다. 고갱의 도자기는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오른쪽 상단에 등장한다.

 

 

 


 Scene #4  가족의 믿음을 저버리다

 

 

 

 

 

폴 고갱 「이브닝 드레스을 입은 메테」 (1884년)

 

 

 

고갱은 아내 메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꼭 파리에서 성공한 화가가 되면 예전처럼 같이 살자고 썼다. 고갱은 메테와 자식들을 아내의 고향이 있는 덴마크에 남겨두고, 아들 클로비스를 데리고 파리에 거주했다. 그러나 고갱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수중에 들어오는 돈만으로 고갱 혼자 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무척 버거웠다. 결국, 고갱은 아들을 아내가 있는 덴마크로 돌려보냈다.

 

아내에게 보내는 고갱의 편지를 이중섭의 낭만적인 편지로 생각해선 안 된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했고, 닭살 돋는 애정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고갱은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처한 궁핍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아내에게 돈을 부쳐 달라고 부탁한다. 경제 형편이 어렵다고 호소하는 아내의 불만을 다그치기 위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낫다고 합리화한다. 한 번은 아내가 가슴에 종양이 생겼다는 소식을 편지로 접하자, 수술을 무조건 받으라고 썼다. 아내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태도에 서글펐을 것이다. 고갱은 편지로나마 아내와 아이들을 항상 생각한다고 썼지만, 몸과 마음이 멀어질수록 예전의 화목했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고갱은 화가로서의 성공에 눈이 먼 나머지, 가족의 믿음을 저버리는 태도로 돌변한다. 고갱은 삼촌으로부터 유산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삼촌의 유산을 양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고갱은 그 돈으로 자신의 새 작업실을 마련하는 데 써버렸다.


 

 

 

 Scene #5  고갱이 만난 여자들

 

고갱은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에 정착했을 때, 티티라는 이름의 여인을 정부로 삼았다. 그러나 고갱은 티티가 완전한 타히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른 섬으로 떠나면서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티티의 아버지는 영국인이었고, 티티는 서양식 생활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문명인이 되고 싶은 여자를 고갱은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원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처녀였다. 고갱은 외롭다는 핑계로 원주민 여자를 만났다. 그는 열세 살 혹은 열네 살로 추정되는 테하마나와 동거했다. 고갱은 테하마나와의 만남을 타히티의 전통 풍습이라고 둘러대면서 정당화했다.

 

 

 

 

폴 고갱 「자바 여인 안나」 (1893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화상 앙부르아즈 볼라르의 소개로 ‘자바 여인 안나’를 만났다. 그러나 안나와의 만남은 고갱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악연이 되었다. 안나와 함께 콩카르노 항구 주변에 산책하다가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었다. 고갱은 건달들과 맞서다가 그만 발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발목 부상은 고갱이 죽을 때까지 낫지 않았다. 고갱이 발목 부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사이에, 안나는 고갱의 작업실에 있는 귀중품만 훔치고 달아났다.

 

 

 

 

폴 고갱 「테 타마리 노 아투아 : 그리스도의 탄생」 (1896년)

 

 

파리에서의 굴욕적인 기억을 뒤로하고, 다시 타히티로 돌아왔을 때도 고갱은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할 동반자가 필요했다. 열네 살의 파후라를 만나 부부처럼 생활했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비록 첫딸은 태어나고 며칠 만에 죽었지만, 고갱은 출산의 기쁨을 「테 타마리 노 아투아 :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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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7-23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그림 그리는 분이 달과 6펜스를 읽을때 고갱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이기주의의 절정을 달리는 사람이라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저런 횡포와 방종을 합리화해서는 안된다면서..
예술가는 저래도 되는 어떤걸 가지고 있어도 된다는 인식이 너무 불편하다고 열변을 토했었던 적이 있었어요..
한편에서는 예술가는 저런 면 이해해야되는거 아니냐고~ 본인이 예술가면서 저런것을 도덕적으로 매도해버리면 안 되는것 아니냐고~ 반론하고 ㅎㅎ
가치관의 차이이겠지만 글을 읽으면서 드는느낌은 고갱은 그림뿐 아니라 합리화의 천재이기도 하는군요 ㅎㅎ
초기 직업의 영향일까요? ㅎ

cyrus 2015-07-23 21:36   좋아요 0 | URL
고갱은 참 재미있는 화가예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데, 국내에서 고갱은 인기가 없어요. 고갱도 은근히 반 고흐 못지않게 자존심이 세고,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고집하는 성향이 있어요.

오후즈음 2015-07-2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갱의 삶을 보니 고흐의 삶이 왜 이렇게 더 슬프게 느껴지는걸까요?

cyrus 2015-07-23 22:12   좋아요 0 | URL
제가 몇 주 전부터 반 고흐와 고갱에 관한 책을 읽어보니까 고갱의 삶도 슬퍼요. 공교롭게도 반 고흐와 헤어지고, 그가 자살한 후부터 고갱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따랐던 동료 화가들은 고갱의 곁을 떠났고, 고갱은 죽을 때까지 매독에 시달렸어요. 자신이 사랑하는 둘째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자살을 시도했어요. 고갱은 말년이 좋지 않았어요.

syo 2015-07-23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그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갱의 그림은 그렇게 색채가 강렬한데도 어쩐지 슬퍼보여요. 슬픈 반 고흐가 무얼 그려도 자기 안의 것이 뛰쳐나와서 슬프다면, 고갱은 무얼 그려도 자기가 원하는 자기 밖의 것을 그릴 뿐 결국 가 닿지 못한다는 느낌이라 슬프고 막 그렇더라구요.

cyrus 2015-07-24 18:49   좋아요 0 | URL
고갱의 그림 중에 슬프게 느껴졌던 것이 <황색 그리스도>였습니다. 온 몸에 상처 하나 없이 단순하게 그린 예수인데도 표정만으로도 슬픈 감정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그림을 좋아합니다.

꽃핑키 2015-07-24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리뷰 보니 갑자기 <달과 6펜스> 다시 읽고 싶어져요!! ㅋㅋㅋ

cyrus 2015-07-24 18:4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안 읽어봤어요. ㅎㅎㅎ
 
사긴 사야 하는데...

 

 

 

 

 

 

붉은돼지님, 책의 두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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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7-22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야 뭐 책 두께에는 별 불만이 없습니다.....^^
어쩌면 크고 두꺼운 놈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죠~~ 호호호
중세는 992쪽인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1401쪽(54천원), 율리시스 1324쪽(45천원, 품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1236쪽(38천원), 나니아연대기 1080쪽(32천원), 예루살렘전기 964쪽(38천원), 빈서판 901쪽(40천원) 등등 두꺼운 놈들도 꽤 되는듯.....

저는 다만 가격이 왜 8만원 씩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두께만으로 비교할 때는 4~5만원 정도가 적당할 듯한데요..
가격에 대한 불만이나 문의도 많을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언급은 없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7-22 14:56   좋아요 1 | URL
가격 갑질하는 대표적 출판사가 새물결이죠. 가끔 욕나옴...

cyrus 2015-07-22 21:59   좋아요 2 | URL
이렇게 비싼 가격으로 책정해놓고, 안 팔린다고 품절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토머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 두 권 세트 정가가 99000원이었어요. 총 페이지 수가 1400쪽 넘습니다. 어문학사의 제임스 조이스 전집도 비싸죠. 정가 13만 원, 전자책은 78000원입니다. 곰발님 말씀처럼 새물결에서 나오는 좋은 책은 가격이 좀 비싸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도 그렇고요.

레삭매냐 2015-07-22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네 권 세트해서 8만원이라고 착각했었네요.

cyrus 2015-07-22 22:00   좋아요 1 | URL
네 권 세트 8만 원이라면 사볼만 합니다. ^^

페크pek0501 2015-07-2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격을 떠나서 두꺼운 책은 부담스럽더라고요. 분량 많을 땐 상,하 또는 상,중,하로 나눠
출판한 책이 좋더라고요. 첫 권을 읽고 나서 그 다음 권을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도 할 수 있고 말이에요. 또 책을 들었을 때 무거우면 읽을 때 불편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상중하로 읽고 세 권을 읽은 것으로 독서목록노트에 기록할 수 있는 장점이 있거든요. 이 세 권짜리 분량의 책을 한 권 읽은 것으로 기록하는 건 무척이나 억울한 노릇이에요. 한 권 추가될 때마다 얼마나 쾌감이 있는데요... (유치했나요? )ㅋㅋ

cyrus 2015-07-22 22:0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다가 그만둔 이유가 분량이 너무 두꺼워서 편안하게 읽을 수가 없어요. 안 그래도 더운데 두꺼운 책을 읽으니까 짜증만 늘어나요 ㅎㅎㅎ

[그장소] 2015-07-22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살며시, (c~ 손! 하고 )돈 없으면 책도 못사는 거지같은 세상~! 하고 물을 원샷 했더랬어요!
솔직히, 저게..옛날 목침 (머리받침해 주무시던 할아버지 꺼)용이지...사실..놓고 봐야 겠네요.
들고 다닐 생각은 하지말고..^^ 마포 김사장님이라면, 벽돌 보내드리니, 집짓는데 보태라고 좋아 웃을것이 분명한...그런 정도의 책..인것입니다..두께는 좋습니다..만, 어찌 가격이 7~8만원대인 것입니까? 금테 둘렀답니까? ^^:

cyrus 2015-07-22 22:05   좋아요 0 | URL
과연 도서관은 저 책을 구입할까요? 책값 때문에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하기 망설여집니다. ㅎㅎㅎ
 

 

 

 

 

 

 

이종격투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리스타 오브레임'을 절대로 모를 리 없다. K-1, 프라이드 FC, UFC 등 입식과 종합격투기를 오가면 종횡무진 활약하여 '육식 두더지'라는 별명으로 팬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창 절정기에 오르던 2011에 약물 복용이 적발되면서 '약물 두더지'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오브레임은 9개월 출장 정지 이후 UFC에 복귀전을 치렀으나 '육식 두더지'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근육질 몸매와 폭발적인 펀치력은 찾아볼 수 없었고, 상대를 힘으로 압도하는 모습은 사라졌다. 결국, 복귀전에서 상대 선수의 공격에 실신 당하는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다음 경기에서는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예전의 기량은 나오지 않았다. 속사포 펀치로 초반에 상대방을 압박하는 모습은 좋았으나 결국 체력이 떨어져서 일격을 당해 KO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예전보다 약해진 오브레임의 모습은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던 과거 라이트헤비급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오브레임의 체격은 헤비급 선수에 가까운 근육질 몸매가 아니었다. 원래는 헤비급 선수 옆에 서면 왜소하게 보이는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프라이드 FC 미들급(UFC 기준에서는 라이트헤비급) 디비전에 데뷔했는데, 이때 그가 상대한 선수들은 마우리시오 쇼군, 퀸튼 잭슨,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 등이었다. 당시 프라이드 FC 미들급 챔피언으로 군림하던 반더레이 실바의 호적수로 평가받았지만, 오브레임은 챔피언이 되기에 2%가 부족했다. 어떤 강자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초반 페이스와 달리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체력이 고갈되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그래서 다 이긴 경기를 놓친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상대의 펀치에 등을 돌리고 도망을 가는 장면을 연출한 적도 있다. 국내 이종격투기 팬들은 5분이면 바닥나는 오브레임의 저질 체력을 조롱하는 의미로 '5분의 힘', '5분계왕권'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5분의 힘'은 오브레임이라는 이름에서('오브레임'을 빠르게 발음해보라), '5분계왕권'은 만화 <드래곤볼>에서 따왔다. 계왕권의 위력은 강하지만 쓸수록 에너지를 과하게 소모하는 단점이 있다.

 

필자는 2권 이상의 책을 완독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초반에 1권을 읽기 시작할 때는 좋다. 1권은 금방 다 읽을 수 있다. 그런데 2권을 읽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1권을 읽었을 때 속도가 잘 나지 않는다. 이야기에 몰입하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엉뚱하게 다른 책이 읽고 싶어진다.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도 마찬가지다. 300쪽 이상 읽고 난 다음부터 후달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필자가 속독 능력이 좋아서, 한 달에 십 권 정도는 거뜬히 읽는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한 달에 십 권 이상의 책을 덤비듯이 읽기 시작하지만, 정작 다 읽어본 책은 고작 두세 권에 불과하다. 2권을 읽기 시작하면 집중력이 저하되는 필자의 독서 패턴은 '2권계왕권'이다. 그래서 2권 이상의 대하소설이나 600쪽 이상의 책은 잘 읽지 않는다.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책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는 《삼국지》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필자가 초등학생 시절에 남자아이들은 이문열 삼국지를 즐겨 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필자는 《삼국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 《삼국지》를 정말 열심히 읽었던 녀석이 있었다. 입만 열면 삼국지 내용과 각종 인물을 줄줄이 소환해내는, 대단한 친구였다. 그런데 필자는 《삼국지》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친구가 하는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면 친구는 필자에게 삼국지 마니아라면 정말 질리게 들어본 말로 훈계했다. '삼국지를 세 번 읽지 않은 자와는 이야기하지 말고, 삼국지를 열 번 이상 읽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필자는 그 친구와 정말 친했지만, 삼국지를 읽지 않는 필자를 무시하면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삼국지》를 읽어야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그 거만한 자세. 정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삼국지 마니아 친구와 단 한 번도 주먹 다툼을 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삼국지》를 안 읽은 사실을 남들에게 드러내기를 꺼리게 되면서 필자에게 《삼국지》라는 책은 감히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산맥처럼 여겨졌다. 중학생 때 이문열 삼국지 1권을 읽어봤지만, 재미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삼국지》가 재미없다고 해서 책의 가치를 절대로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책을 읽을 때 별 재미를 느끼지 않는다면 억지로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삼국지》를 어린이 추천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은 단골 도서라서 그런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삼국지》를 무조건 읽으라고 권한다. 필자는 '아 몰랑, 사람들이 이 책이 좋다니까 너는 닥치고 읽기나 해!'라는 식으로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독서를 명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필자의 부모님도 책을 잔뜩 사서 필자에게 읽으라고 떠미는 스타일이었는데 다행히 《삼국지》를 읽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필자의 서재에는 이문열 삼국지가 없다. 삼국지에 관련된 책으로 이마니 리츠코의 《삼국지 깊이 읽기》(작가정신, 2007)만 소장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필자도 삼국지를 읽게 되는 날이 올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리츠코의 책을 구입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2권계왕권'을 극복했던 책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열린책들)가 유일하다. 이야기의 전개가 얼마나 흥미진진했으면 《개미》를 3주 만에 다 읽는 데 성공했다. 완독은 아니지만, 고등학생 때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구판)을 4권까지는 읽은 적이 있다. 이때 당시에 원작을 기반으로 만든 동명의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남학생들이 얼마나 《불멸의 이순신》을 즐겨 읽었느냐면 학교 도서실에서 빌린 《불멸의 이순신》을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읽을 정도였다. 1권을 다 읽고, 2권을 읽기 위해서 도서실에 가면 2권은 항상 '대출 중'이었다. 이 책을 고등학생 1학년 때 읽기 시작했다면 완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등학생 2년은 수능시험의 압박감이 본격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고등학생 1년처럼 느긋하게 책 읽을 여유가 없다. 한편으로는 《불멸의 이순신》을 완독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학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끝까지 다 읽었고, '2권계왕권'을 극복한 최고의 독서 경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다시 처음부터 《불멸의 이순신》을 읽으려고 해도 예전 그 느낌이 나지 않는다. 아, 슬프도다!

 

필자는 '2권 계왕권'을 극복하고 싶다. 《삼국지》뿐만 아니라 《수호지》, 《태백산맥》, 《토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대망》 등 죽기 전에 대하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죽을 때까지는 고질적인 편식 독서를 쉽게 고치지 못할 듯하다. 한 달 전에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라비안나이트》를 열심히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으니까. 집중력이 떨어진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고 일어나면 읽고 싶은 책이 필자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내 안에 있는 악마의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이 악마는 똑똑한 척 하고 싶어한다. 제목만 아는 책을 읽은 척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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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7-2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 그만 두셨어요?ㅠㅠ 제 주변 그 책 읽었다는 분 딱 한명라도 모시고 싶었는데ㅠㅠ 다시 도전 의향 정말 없으세요?

cyrus 2015-07-22 13:22   좋아요 0 | URL
다시 도전해야죠. 절반 정도 읽었는데 완전 포기하면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해요 ㅎㅎㅎ

소금창고 2015-07-21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삼국지 1권뿐이 못읽었어요
왜 좋은지 모르고 넘들이 좋다고하니까 읽어봐야지하고 시작하긴했는데
재미없어서 그만뒀어요
필독서라는건 의미없다고 생각해서 별 아쉬움은 안남았지요
태백산맥은 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우리집 여섯식구가 돌아가며 읽고 반납하면서 10권을 완독했었어요
그땐 한권 끝나고 다음권이 대출중이면 왜그렇게 다음이야기가 궁금하던지요
결국은 다 읽었는데 아버지가 이런책은 사놔야한다면서 사놓으셨지요
4남매중 누가 냉큼 가져가버려서
또 한질 사셨었는데 ㅎㅎ
cyrus님 글보면서 옛날일 생각해요
꼽아보니 30년전

cyrus 2015-07-22 13:24   좋아요 0 | URL
<태백산맥>을 도서관 책으로 읽는 소금창고님이 대단합니다. 저는 도서관 책으로는 대하소설을 끝까지 못 읽겠습니다.

단발머리 2015-07-21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국지> 1권에서 아웃됐어요. 근래 아롱이가 아빠 꾀임(?)에 빠져서 만화삼국지를 재미있게 읽고는 셋이서 삼국지 이야기하는데 저만 소외된다지요...

근데, 죄송한데, 저 이 페이퍼에 위로받네요. cyrus님은 다방면의 어려운 책들을 엄청 많이 읽으시는데 위의 몇 가지 시리즈들은 아직 못 읽으셨구나~~~ 저는 <토지>, <태백산맥>을 다 읽었다지요. 크하핫!!*^^*

cyrus 2015-07-22 13:26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많이 읽은 책을 하나도 안 읽었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니까 기분이 홀가분해요. 죄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ㅎㅎㅎ

에이바 2015-07-21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러고보니 율리시스 글이 없었군요! 재도전해주세요 ㅠㅠ 저는 삼국지 읽으려고 김구용 삼국지 사놨는데 안 읽었답니다 1권보다 말았어요 ^^;;

단발머리 2015-07-21 21:24   좋아요 1 | URL
에이바님! 하이바이브요^^

에이바 2015-07-21 22:01   좋아요 0 | URL
하이파이브! 근데 만화삼국지 그림이 다 똑같지 않던가요ㅋㅋ 만화도 도전했는데 수염 때문에 실패.. 기억나는건 금마초인가 남매가 잘생기고 예쁘다는 것 밖에 없네요

단발머리 2015-07-21 22:11   좋아요 1 | URL
아롱이는 이문열, 이희재의 만화삼국지 10권짜리 독파하고 진유동의 만화삼국지 20권짜리 읽고 있어요. 그림이 쪼금은 다른 것 같구요. 금마초 남매는 잘 모르겠는데, 암튼 대체로 잘 생겼더라는... ㅋㅎㅎ

cyrus 2015-07-22 13:26   좋아요 0 | URL
만화 삼국지라도 읽을 걸 그랬어요. ㅠㅠ

fledgling 2015-07-22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삼국지 매니아입니다. 만화 버전, 컴퓨터 게임때문에 스토리를 줄줄 꿰고 있죠! 저는 어릴 때 책을 등한시하는 학생이었습니다만, 이문열 삼국지는 10권까지 어쩌다보니 읽었네요. 만화책빼고, 판타지 소설빼고, 10권이상의 장편소설을 읽은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네요. 줄거리를 이미 알았던 것과 삼국지를 사랑했기때문에 가능했던것 같아요.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고 있었는데 멈춰있다는... 그나마 쉽다는 더블린도 만만치않네요.ㅠ 종건 교수꺼 말고 다른 출판사로 볼까 생각중... 같이 보면 더 좋겠네요.

cyrus 2015-07-22 13:30   좋아요 0 | URL
책 안 읽는 남자도 삼국지의 이야기 전개에 제대로 꽂힌다면 삼국지 10권을 독파하더라고요. 또 게임으로 삼국지 줄거리와 인물을 아는 친구도 있었어요. ㅎㅎㅎ

김종건 교수가 국내 조이스 전문가 일순위로 꼽히지만, 번역 문체가 딱딱하게 사실이에요.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7-22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분의 힘이라...ㅎㅎㅎㅎㅎ 제가 그래서 대하소설을 못 읽습니다. 태백산맥 10권 집에 있으나 읽을 엄두가 안 나네요.. 이거 쪽팔려서리....

cyrus 2015-07-22 13:32   좋아요 0 | URL
대하소설을 사서 끝까지 읽으려고 해도 쉽지 않겠군요. 저도 책만 사놓고 안 읽는 성격입니다.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07-22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편 넘어가는 책 못 읽어요.. 유일한 작품이 태백산맥이에요~ 어떻게 읽었는지.. 지금은 어림도 없어요~
삼국지는 물론.. 혼불. 토지도 사놓고 장식용으로 모셔두고 있지요 ㅎ ㅎ

cyrus 2015-07-22 13:33   좋아요 0 | URL
역시 <태백산맥>을 완독하신 분이 많군요. 저도 행복하자님처럼 <삼국지>, <태백산맥>, <토지>, <혼불> 이렇게 세트로 장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은 독서 목적이 아닌 장식용으로요. ㅎㅎㅎ

해피북 2015-07-2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리 재밌는 시리즈 책을 읽어두 읽다보면 질리는 부분이 생겨서 한꺼번에 도전하지 않는편이예요 ㅋㅂㅋ, 시간도 많이 걸리구 앞부분이 생각나지 않을때도 있지만 한 달에 한 권정도로 계획해놓고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랍니다.

그리구 삼국지는 저역시도 5권 까지 읽다가 내팽게쳐버렸답니다 ㅠㅠ 5권 이후부터가 재밌다는데 그 산을 넘지 못했어요.ㅋㅂㅋ 저두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집니다~^^

cyrus 2015-07-22 13:35   좋아요 0 | URL
해피북님은 대하소설 읽기에 성공하실 겁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완독한 경험이 있으니 삼국지 독서도 끝까지 잘 하실 거예요. ^^

페크pek0501 2015-07-22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긴 게 싫어서 머리 써서 6권짜리 삼국지를 읽었어요 오래전에요...
정비석의 <삼국지>인데 요즘도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여섯 권을 다 읽었죠.
꼭 읽어야 하는 책으로 알고 읽었는데... 읽고 나서 생각은...
꼭 읽을 필요가 없다, 였어요. ㅋㅋ

cyrus 2015-07-30 20:47   좋아요 0 | URL
지금도 정비석 삼국지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삼국지를 다 안 읽어도 삼국지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이나 관련 일화 몇 개는 알고 있어요. 삼국지의 한 장면이나 고사를 인용하는 신문 칼럼을 읽어서 기억할 수 있어요. ^^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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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단어는 식상하다. 브라운관에서, 스마트폰 화면까지 사랑은 넘쳐난다. 정치인은 국민을 사랑하고, TV는 시청자를 사랑하고, 기업은 소비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너무 흔해서 그런지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속이 빈껍데기처럼 느껴진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서일까. 그런데도 모두 부르르 떤다. 외로움과 이별에 치를 떤다. 저리도 많은 사랑이 넘쳐나는데 모두가 외롭다고 투정부린다.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어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여자들과 사내들’ 중에서, 18쪽)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은 그냥 읽기만 해도 가슴 찡한 시집이다. 사랑은, 영구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라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가는 변덕스러운 그 무엇이라고 시인은 간파한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 그것은 거짓말과 같다. 영원한 사랑은 언제나 낭만적 수식으로 가득하다. 만남은 이별을 잉태하였고, 그 날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사랑으로 인해서 맛보았던 모든 즐거움과 행복감은 그 사랑이 허물어지는 시간부터 갈등과 번민으로 변한다.

 

 

허연 외로움의 뇌수 흘리며

잊으려고 잊으려고 여자들은

바람을 향해 돌아서지만,

땅거미질 무렵

길고긴 울음 끝에

공복의 술 몇 잔,

불현듯 낄낄거리며 떠오르는 사람,

그리움의 아수라장.

흐르는 별 아래

이 도회의 더러운 지붕 위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

 

(‘여자들과 사내들’ 중에서, 19쪽)

 

 

 

사랑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세월이 흘러도 몸속에는 불꽃의 뜨거움이 식지 않는다. 사랑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언제 다시 만나자는 이별의 말을 내던졌지만, 지붕 위의 먼 허공을 누워서 바라보는 여자들과 사내들의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간다. 차가운 이성은 자꾸 잃으라고 말하지만, 마음의 공허는 채워지지 않고 아득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난다. 울컥울컥 눈물짓게 하는 그리움이 솟아오른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 넣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가여운 응시는 과거를 더 후줄근한 것으로 만든다.

 

 

 

하늘과 땅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무위를 마시고 있는 꽃 두 송이

누가 내 머리 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흙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 볼 수 없다.

 

젖은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비 오는 날의 재회’, 43쪽)

 

 

 

사랑을 피해도 어쩔 수 없이 그리운 얼굴들이 번들거리는 그 세상에 투영된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너의 얼굴. 살기 위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너의 얼굴. 아무리 해도 도망칠 수 없는 것은 그리운 얼굴이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내 청춘의 영원한’, 48쪽)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새삼 그 사랑이 그립다. 사랑하는 대상이 그립다. 연모하는 사람이 그립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늘 허허롭고 시리기만 하던 가슴이 누군가의 무게로 뻐근하고 묵직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은 더 이상 옛날의 그 길이 아닐지니. 시인은 그저 아플 뿐이다. 후회가 시인을 짓누른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그리웠을까. 아마도 시인의 가슴 한 자락은 그리움으로 물크러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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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7-1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넘 좋아하는 시집... 반갑습니다. Cyrus 님 고맙습니다.

cyrus 2015-07-20 18:49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저는 이제야 이 시집의 진가를 알았습니다. 정말 좋은 문장의 시들이 많았습니다.

프레이야 2015-07-19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리해도 도망칠 수 없는 것은 그리운 너의 얼굴이다‥ 오늘 제 마음속 이글거리는 무엇을 심안으로 보신 노문우를 잠시 뵙고 울컥했어요. 시집만큼 독하게(!) 쓴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가슴에 불덩이 하나 품은 시인‥

cyrus 2015-07-20 18:50   좋아요 0 | URL
시인의 근황을 듣고 난 뒤에 이 시집을 읽게 되니까 더 마음이 짠했습니다.

바람향 2015-07-19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돌아오지 않죠... 돌아오더라도 그 사랑은 옛날의 그 사랑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불안정하고 예민하고 묘한 것 같습니다..ㅎㅎ

cyrus 2015-07-20 18:5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요물 같습니다. ㅎㅎㅎ

sslmo 2015-07-19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시집 싫어요, ㅋㅋㅋ~.
제친구의 소싯적 여친이 줄줄 외웠었대요.
시집은 무생물이니 미워할 수 없고 애먼 시인을 향해 눈을 흘킵니다~!

cyrus 2015-07-20 18:53   좋아요 1 | URL
저는 좋은 시집은 생각날 때마다 읽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랑>은 사랑을 노래하는 시집치고는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우울해서 자주 읽고 싶지 않습니다. ㅎㅎㅎ

돌궐 2015-07-19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서제에서 가끔 뇌수 운운하며 글을 쓰는 게 아무래도 최승자 시의 영향인 거 같습니다.ㅎㅎ

cyrus 2015-07-20 18:54   좋아요 1 | URL
돌궐님도 이 시집을 읽어보셨군요. ^^

:Dora 2015-07-20 2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승자선생님 건강하시길

표맥(漂麥) 2015-07-21 1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아고~ 옛 추억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