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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평점 :
‘사랑’이란 단어는 식상하다. 브라운관에서, 스마트폰 화면까지 사랑은 넘쳐난다. 정치인은 국민을 사랑하고, TV는 시청자를 사랑하고, 기업은 소비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너무 흔해서 그런지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속이 빈껍데기처럼 느껴진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서일까. 그런데도 모두 부르르 떤다. 외로움과 이별에 치를 떤다. 저리도 많은 사랑이 넘쳐나는데 모두가 외롭다고 투정부린다.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어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여자들과 사내들’ 중에서, 18쪽)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은 그냥 읽기만 해도 가슴 찡한 시집이다. 사랑은, 영구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라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가는 변덕스러운 그 무엇이라고 시인은 간파한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 그것은 거짓말과 같다. 영원한 사랑은 언제나 낭만적 수식으로 가득하다. 만남은 이별을 잉태하였고, 그 날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사랑으로 인해서 맛보았던 모든 즐거움과 행복감은 그 사랑이 허물어지는 시간부터 갈등과 번민으로 변한다.
허연 외로움의 뇌수 흘리며
잊으려고 잊으려고 여자들은
바람을 향해 돌아서지만,
땅거미질 무렵
길고긴 울음 끝에
공복의 술 몇 잔,
불현듯 낄낄거리며 떠오르는 사람,
그리움의 아수라장.
흐르는 별 아래
이 도회의 더러운 지붕 위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
(‘여자들과 사내들’ 중에서, 19쪽)
사랑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세월이 흘러도 몸속에는 불꽃의 뜨거움이 식지 않는다. 사랑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언제 다시 만나자는 이별의 말을 내던졌지만, 지붕 위의 먼 허공을 누워서 바라보는 여자들과 사내들의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간다. 차가운 이성은 자꾸 잃으라고 말하지만, 마음의 공허는 채워지지 않고 아득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난다. 울컥울컥 눈물짓게 하는 그리움이 솟아오른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 넣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가여운 응시는 과거를 더 후줄근한 것으로 만든다.
하늘과 땅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무위를 마시고 있는 꽃 두 송이
누가 내 머리 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흙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 볼 수 없다.
젖은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비 오는 날의 재회’, 43쪽)
사랑을 피해도 어쩔 수 없이 그리운 얼굴들이 번들거리는 그 세상에 투영된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너의 얼굴. 살기 위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너의 얼굴. 아무리 해도 도망칠 수 없는 것은 그리운 얼굴이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내 청춘의 영원한’, 48쪽)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새삼 그 사랑이 그립다. 사랑하는 대상이 그립다. 연모하는 사람이 그립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늘 허허롭고 시리기만 하던 가슴이 누군가의 무게로 뻐근하고 묵직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은 더 이상 옛날의 그 길이 아닐지니. 시인은 그저 아플 뿐이다. 후회가 시인을 짓누른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그리웠을까. 아마도 시인의 가슴 한 자락은 그리움으로 물크러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