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투브 알고리즘은 나의 감정보다 훨씬 빠르게 내 앞에 설때가 있다. 하지만 오늘은 나의 기분에 맞는 음악을 내게 보내왔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절룩거리네>가 수줍게 떠 있었다. 출근길 빡빡한 지하철 안에서 듣게 된 노래에 눈물이 맺혀서 천장을 한동안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속수무책이었다. 왜 하필, 이런 순간에 나를 울리는 것일까.
2018년 여름을 보내고 겨울이 왔을 때 내 20년 지기 대학 후배는 종적을 감췄다.
매년 1월 1일 아침이 되면 산에 올라 일출을 찍어 문자를 보냈던 녀석인데 왜 무슨일로 연락이 없을까. 원래 자주 연락을 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연락을 안 받거나 소통이 부재된 경우는 20년 동안 한번도 없었다. 그러니 후배의 부재가 이상했지만 현실은 그 이상함을 잊게 했다. 주변에 후배와 친한 후배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아침해가 뜨면 아침이구나, 해가 지면 저녁이라는걸 느끼며 살던 시간은 후배를 또 잊게 했다. 새해가 되면 생각가는 그런, 녀석이었는데. 아니 생각해보니 나는 후배를 그냥 남자로도 좋아했던것 같다. 아마 결혼하자고 했으면 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나에게 특별했지만 그 특별함이 나의 하루를 다 가져가진 못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SNS에도 18년 9월 이후부터 포스팅은 멈춰져 있었다. 카톡도 확인이 없었다. 문자며 전화도 모두 단절된 상태. 그래, 부고 문자만 안온다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연락이 오겠지. 무소식이 정말로 희소식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보자고. 그래도 그렇지. 왜 무엇 때문에 생존 반응이 하나도 없는 건가.
그렇게 6년이 흐른 어느 날 아침, 새로운 친구가 있다고 카톡이 알려줬다. 후배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후배의 이름 뒤에 부동산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아 후배의 번호가 바뀌었구나 생각했다. 확인해 봐야 했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20년 지기인 후배를 놓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우리의 20년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렇게 멀어져 가고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됐구나. 어떤 이유를 안다고 한듯 그것이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했다. 다만 한때 나의 가슴을 울렸던 그 목소리와 얼굴은 추억으로 남겨 두기엔 안타까웠다.
인연이 끊긴 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시간의 흔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이렇게도 관계가 정리되기도 하는 것 아닌가. 때로는 나도 누군가를 이렇게 잊히게 했을 수 있다. 그리고 나도 또 이렇게 잊히는 것이라고
그런 생각의 정리가 되어 갈 즈음. 후배의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 무슨 부동산으로 되어 있는 그 번호.
나는 이름을 물었고, 핸드폰의 주인이 당사자가 맞는지 묻고 학교와 동아리 이름까지 물었다. 맞다고 했다. 내가 찾았던 그 녀석.
6년 만에 들은 후배의 목소리가 어색했다. 6년 동안 우리는 긴 시간동안 늙고 있었고 그 시간의 간극은 어색함과 당황스러움을 안고 있다고 할까.
그렇게 3주 만에 만나 후배의 6년간 소식이 끊긴 이유를 듣고 한동안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고 술을 한잔 하는 순간 화장실에서 혼자 울고 나왔다. 앞에서 눈물을 살짝 보였다가 이내 걷어두었지만 울고 온 나를 알고 있는 후배는 그렇게 담담하게 나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더니 오늘은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울어버린 노래에도 가슴이 아련했다.
노래 가사가 어쩜 이렇게 후배의 상황이랑 딱 맞을까 생각이 들었다. 후배가 이렇게 절룩거리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울지 말고 아침을 맞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잘 살아나가는 시간을 만들어 놓기를 바랄뿐. 간혹 바람처럼 후배에게 찾아가 또 맛있는 와인을 홀짝 거려야겠다. 사랑하는 내 후배, 잘 걸어가길. 잃어버린 그 6년의 시간을 잘 만들어가길 그렇게 뒤에서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