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은 나이 서른다섯 살까지만 해도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일했다. 증권거래소에 다니면서 저축한 돈으로 경제적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했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주말 화가’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주식으로 흥한 자는 주식으로 망한다. 주식이 크게 폭락하고 증권거래소가 문을 닫으면서 고갱은 실직자가 되고 만다. 1882년의 주식 폭락은 1929년의 블랙 튜스데이(Black Tuesday)와 1987년 블랙 먼데이(Black Monday)에 비할 만큼 경제사의 암울한 날로 기억되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백수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나이 마흔둘에 남태평양의 타히티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렸다. 가족들과 주변 동료들은 고갱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전에 그림 한 점만 팔렸다는 반 고흐보다는 조금 더 나은 형편이었지만, 고갱의 그림 또한 생각보다 많이 팔리지 않았다. 생전에는 상업적으로도 실패면서 남들이 보기엔 말년에 꼬인 실패한 인생이라고 볼지 모르겠지만, 그는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병마와 고독 속에서 끝까지 붓을 놓지 않는 모습에 연민이 생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반 고흐에게는 ‘광기의 화가’, 고갱에게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그들의 삶을 총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중은 이 수식어만 믿고 그들의 그림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결과를 볼 뿐, 우여곡절 많은 삶의 과정을 아는 사람은 적다. 고갱에 대한 평가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를 원시의 화가로만 기억하는 것은 고갱의 삶 반쪽만 보는 것과 같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고갱의 진실을 아는 순간, 그동안 미디어가 부추긴 예술가를 향한 맹목적인 열광과 평가가 허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Scene #1  <아방 에 아프레>와 <노아 노아>

 

 

 

 

 

 

 

 

 

 

 

 

 

 

 

 

 

 

 

 

 

 

 

 

 

 

 

 

 

 

고갱은 생전에 글을 많이 남겼다. <아방 에 아프레(Avant et apres, 우리말로는 ‘전과 후’)>는 고갱이 사망한 후에 나왔다. 책 내용은 전반적으로 자서전에 가깝다. 여기에 반 고흐와 함께 살았던 일과 반 고흐가 귀를 자르기 전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고갱은 반 고흐가 면도날로 자신을 위협했다고 증언한다. <노아 노아(Noa Noa)>는 타히티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수기다. ‘노아 노아’는 ‘향기’ 를 의미하는 타히티 어다. 타히티 생활을 뒤로하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타히티의 풍속과 신화를 소개하는 <마오리의 고대 신앙>과 <노아 노아>를 펴낸다. <노아 노아>는 고갱이 생각하는 원시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하지만 이 책에 사실보다는 허구가 많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본 것은 태초의 원시성을 그대로 간직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문명의 손아귀에 들어간 식민지 섬의 모습이었다. <노아 노아>에서는 타히티 신화 일부를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 내용 또한 고갱이 조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프랑스 식민지가 된 타히티에서 기독교가 타히티 민간 신앙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타히티 신화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고갱은 타히티의 원시성을 강조하여 유럽 독자들의 입맛을 맞추려고 일부러 윤색했을 가능성이 있다. <노아 노아>에 나오는 일부 이야기는 피에르 로티의 소설 <로티의 결혼>과 거의 비슷하다. <로티의 결혼>은 타히티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이며 고갱은 이 소설을 읽었다.


 

 

 

 Scene #2  바느질하는 쉬잔

 

 

 

 

폴 고갱 누드 습작또는 바느질하는 쉬잔」 (1880년)

 

 

앞으로 이 그림을 소개할 땐 ‘「누드 습작」 또는 「바느질하는 쉬잔」’ 으로 불러야 한다. 그림 속 모델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고갱은 1881년 인상주의 전시회에 「누드 습작」을 출품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벌거벗은 모델은 고갱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쉬잔이다. 그런데 고갱의 아내 메테는 그림에 푹 빠진 남편에 못마땅했다. 당연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누드화를 그리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메테가 직업 모델을 부르지 못하게 하자, 고갱은 하녀를 누드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이 성공하자, 메테는 쉬잔을 해고했다.

 

 

 


 Scene #3  친구의 여동생을 사랑했네

 

 

 

 

 

폴 고갱 「마들렌 베르나르」 (1888년)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 메이에르 드 한 등과 함께 퐁타방 파를 결성한다. 이들은 퐁타방 지방에 거주하면서 함께 그림 작업을 했다. 에밀 베르나르의 여동생 마들렌은 퐁타방 파의 홍일점이었다. 그녀는 샤를 라발과 약혼한 사이였다. 고갱은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마들렌에 특별한 감정을 가졌다.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고갱은 노골적으로 그의 여동생에게 관심이 있다고 썼으며 심지어 그녀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행히 에밀의 부모의 반대로 고갱과 마들렌의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하지 않았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년)

 

 

고갱은 자신의 얼굴을 기괴한 형태로 변형해서 만든 도자기 병을 마들렌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었지만, 마들렌은 고갱의 선물을 거부했다. 당시 고갱은 그로테스크한 얼굴의 표정이 있는 도자기 병 제작에 열중했다. 마들렌의 눈에는 고갱이 만든 도자기가 예술 작품이 아닌 그냥 괴상망측한 물건으로 보였을 것이다. 고갱의 도자기는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오른쪽 상단에 등장한다.

 

 

 


 Scene #4  가족의 믿음을 저버리다

 

 

 

 

 

폴 고갱 「이브닝 드레스을 입은 메테」 (1884년)

 

 

 

고갱은 아내 메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꼭 파리에서 성공한 화가가 되면 예전처럼 같이 살자고 썼다. 고갱은 메테와 자식들을 아내의 고향이 있는 덴마크에 남겨두고, 아들 클로비스를 데리고 파리에 거주했다. 그러나 고갱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수중에 들어오는 돈만으로 고갱 혼자 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무척 버거웠다. 결국, 고갱은 아들을 아내가 있는 덴마크로 돌려보냈다.

 

아내에게 보내는 고갱의 편지를 이중섭의 낭만적인 편지로 생각해선 안 된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했고, 닭살 돋는 애정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고갱은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처한 궁핍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아내에게 돈을 부쳐 달라고 부탁한다. 경제 형편이 어렵다고 호소하는 아내의 불만을 다그치기 위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낫다고 합리화한다. 한 번은 아내가 가슴에 종양이 생겼다는 소식을 편지로 접하자, 수술을 무조건 받으라고 썼다. 아내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태도에 서글펐을 것이다. 고갱은 편지로나마 아내와 아이들을 항상 생각한다고 썼지만, 몸과 마음이 멀어질수록 예전의 화목했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고갱은 화가로서의 성공에 눈이 먼 나머지, 가족의 믿음을 저버리는 태도로 돌변한다. 고갱은 삼촌으로부터 유산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삼촌의 유산을 양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고갱은 그 돈으로 자신의 새 작업실을 마련하는 데 써버렸다.


 

 

 

 Scene #5  고갱이 만난 여자들

 

고갱은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에 정착했을 때, 티티라는 이름의 여인을 정부로 삼았다. 그러나 고갱은 티티가 완전한 타히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른 섬으로 떠나면서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티티의 아버지는 영국인이었고, 티티는 서양식 생활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문명인이 되고 싶은 여자를 고갱은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원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처녀였다. 고갱은 외롭다는 핑계로 원주민 여자를 만났다. 그는 열세 살 혹은 열네 살로 추정되는 테하마나와 동거했다. 고갱은 테하마나와의 만남을 타히티의 전통 풍습이라고 둘러대면서 정당화했다.

 

 

 

 

폴 고갱 「자바 여인 안나」 (1893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화상 앙부르아즈 볼라르의 소개로 ‘자바 여인 안나’를 만났다. 그러나 안나와의 만남은 고갱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악연이 되었다. 안나와 함께 콩카르노 항구 주변에 산책하다가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었다. 고갱은 건달들과 맞서다가 그만 발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발목 부상은 고갱이 죽을 때까지 낫지 않았다. 고갱이 발목 부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사이에, 안나는 고갱의 작업실에 있는 귀중품만 훔치고 달아났다.

 

 

 

 

폴 고갱 「테 타마리 노 아투아 : 그리스도의 탄생」 (1896년)

 

 

파리에서의 굴욕적인 기억을 뒤로하고, 다시 타히티로 돌아왔을 때도 고갱은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할 동반자가 필요했다. 열네 살의 파후라를 만나 부부처럼 생활했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비록 첫딸은 태어나고 며칠 만에 죽었지만, 고갱은 출산의 기쁨을 「테 타마리 노 아투아 :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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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7-23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그림 그리는 분이 달과 6펜스를 읽을때 고갱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이기주의의 절정을 달리는 사람이라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저런 횡포와 방종을 합리화해서는 안된다면서..
예술가는 저래도 되는 어떤걸 가지고 있어도 된다는 인식이 너무 불편하다고 열변을 토했었던 적이 있었어요..
한편에서는 예술가는 저런 면 이해해야되는거 아니냐고~ 본인이 예술가면서 저런것을 도덕적으로 매도해버리면 안 되는것 아니냐고~ 반론하고 ㅎㅎ
가치관의 차이이겠지만 글을 읽으면서 드는느낌은 고갱은 그림뿐 아니라 합리화의 천재이기도 하는군요 ㅎㅎ
초기 직업의 영향일까요? ㅎ

cyrus 2015-07-23 21:36   좋아요 0 | URL
고갱은 참 재미있는 화가예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데, 국내에서 고갱은 인기가 없어요. 고갱도 은근히 반 고흐 못지않게 자존심이 세고,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고집하는 성향이 있어요.

오후즈음 2015-07-2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갱의 삶을 보니 고흐의 삶이 왜 이렇게 더 슬프게 느껴지는걸까요?

cyrus 2015-07-23 22:12   좋아요 0 | URL
제가 몇 주 전부터 반 고흐와 고갱에 관한 책을 읽어보니까 고갱의 삶도 슬퍼요. 공교롭게도 반 고흐와 헤어지고, 그가 자살한 후부터 고갱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따랐던 동료 화가들은 고갱의 곁을 떠났고, 고갱은 죽을 때까지 매독에 시달렸어요. 자신이 사랑하는 둘째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자살을 시도했어요. 고갱은 말년이 좋지 않았어요.

syo 2015-07-23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그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갱의 그림은 그렇게 색채가 강렬한데도 어쩐지 슬퍼보여요. 슬픈 반 고흐가 무얼 그려도 자기 안의 것이 뛰쳐나와서 슬프다면, 고갱은 무얼 그려도 자기가 원하는 자기 밖의 것을 그릴 뿐 결국 가 닿지 못한다는 느낌이라 슬프고 막 그렇더라구요.

cyrus 2015-07-24 18:49   좋아요 0 | URL
고갱의 그림 중에 슬프게 느껴졌던 것이 <황색 그리스도>였습니다. 온 몸에 상처 하나 없이 단순하게 그린 예수인데도 표정만으로도 슬픈 감정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그림을 좋아합니다.

꽃핑키 2015-07-24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리뷰 보니 갑자기 <달과 6펜스> 다시 읽고 싶어져요!! ㅋㅋㅋ

cyrus 2015-07-24 18:4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안 읽어봤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