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인화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





걸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다분히 화가의 사회비판적 의도가 작용한다.
빈곤을 퇴치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걸인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걸인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보통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중세에는 바보를 배에 태워서 먼 곳으로 격리시키거나 도시 성 밖으로 내쫓아 성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했다.
중세의 바보 개념은 불분명했는데, 저능아와 정신분열자뿐만 아니라 게으르거나 알코올 중독자, 불구자들도 사회로부터 격리했다.
따라서 이들은 성 밖 산과 들을 떠돌며 행인들의 짐을 빼앗고 떼를 지어 민가를 습격했다.
산적 혹은 갱이 되는 것이다.


일찍이 북유럽 화가들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와 피테르 브뢰헬(1525?-69)의 작품에서 바보, 걸인, 불구자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풍속화에서 이들이 빠지면 진정한 풍속화가 될 수 없다.
사회 하층 사람들이 부자들의 공간을 장식하는 그림에 등장한 것은 네덜란드 풍속화에서 기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을 화면 가득 채우는 전신인물화는 벨라스케스에 와서야 가능했다.
전통적으로 인물화는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전신인물화의 경우 왕에게만 국한되고 귀족에게는 반신인물화가 허용되다가 나중에는 권력을 가진 귀족도 전신인물화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인물의 권위를 과장하는 수단이 일반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시민 그것도 사회에서 천대받는 걸인의 전신을 그리는 것은 벨라스케스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걸인화는 과장이 없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관람자에게 감동을 준다.


벨라스케스(1599-1660)는 열아홉 살 때 보데곤bodegone 시리즈를 그렸는데, 보데곤이란 정물화적 모티프로 일상의 주제를 다룬 회화를 말한다.
이런 유형은 네덜란드의 떠들썩한 풍속화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보편화되지 않을 때였다.
벨라스케스는 남루한 옷차림의 <시빌의 물장수>(1620년경)에 진지함과 위엄을 불어넣었다.
그는 대상을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다루면서 냉정한 사실적 태도로 재현했으며 나중에는 인물 묘사에까지 확장하면서 전체 구성을 일관성과 기념비성으로 했다.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걸인화는 1638년경에 그린 두 점의 <애솝>(메트로 211)과 <메니프>(메트로 211-1)이다.
두 작품은 배경을 단순화시켜 전신인물화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단순한 배경으로 모델은 더욱 두드러지며 관람자 앞으로 나온 모습이다.
비애, 유머와 인간적 이해를 담은 그의 걸인화는 후세 화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같은 에스파냐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82)와 호세 데 리베라(1591-1652)도 걸인화를 그렸는데, 무리요는 <걸인 소년>(1650)(메트로 6)을 리베라는 <걸인>(1642)(메트로 81)을 각각 그렸다.
무리요는 걸인 소년을 작품에 도입하여 새로운 순수 풍속화의 유형을 만들었다.
<걸인 소년>은 초기 사실주의를 보여주는 예이며, 그 후에는 좀더 이상화한 아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프랑수아 봉빈이 1845년에 그린 <꼬마 굴뚝청소자>는 무리요의 <걸인 소년>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벨라스케스에서 고야에 이르는 에스파냐 미술 전통에서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개인의 존엄에 대한 경의에 기반을 둔 그림을 그린 리베라는 <술병을 들고 웃는 주정꾼>(1638)을 그렸다.
리베라는 걸인과 부랑자의 모습으로 그린 철학자 연작을 통해 바로크 회화의 주제를 확장했는데, 이런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아카데미의 인문주의적인 현학적 태도를 비웃기 위함이었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1746-1828)는 삼십대 초에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주로 모사하면서 대가의 기법을 익혔으며, 고야가 1778년에 그린 <눈먼 기타 연주자>는 <메니프>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고야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걸인에게 느낀 매력을 처음 표현한 작품으로 머리를 뒤로 젖힌 눈먼 걸인의 모습은 뒤틀린 이목구비의 융합체를 이룬다.
괴상하게 생긴 눈먼 기타 연주자는 풍자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고야의 어린 자식들이 연달아 죽은 것은 얄궂은 운명이었다.
고야의 자식 중 7명이 요절했다.
인생의 즐거움을 그리라는 주문과 함께 자식들의 잇따른 죽음을 견뎌야 했던 정신적 부담이 젊은 그에게 무엇인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 1770년대 말과 1780년대에 그린 작품에는 대부분 비타협적 양식이 나타나 있다.
<눈먼 기타 연주자>는 그의 작품 중 가장 크고 야심적이며 독창적인 작품이다.
관행에서 벗어난 이 작품은 고야의 회화가 동시대인의 회화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220년이 지난 후에도 에두아르 마네(1832-83)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그로 하여금 <메니프>에서 영감을 받아 <철학자 (망토를 걸친 걸인)>(메트로 238)와 <철학자 (굴과 걸인)>를 각각 그리게 했다.
마네는 걸인을 철학자의 모습으로 그렸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델로 변형된 진지한 모습의 <넝마주의>(1869)를 그렸다.
바닥에 술병을 놓아 모델이 독한 압생트에 중독이어 있음을 강조했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과 <늙은 음악가>(마네 53)도 그렸는데, 모델은 마네의 작업실 부근에 살던 바이올린 연주자 집시 장 라렌느로 그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경찰들로부터 몹시 천대를 받았다.
마네는 라렌느를 화면 중앙에 고대 철학자의 모습으로 앉히고 아이들의 호기심과 사랑을 받는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크리스포스를 묘사한 헬레니즘 조각을 변형한 것이다.
피에로처럼 생긴 아이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고 놀라운 시선으로 늙은 음악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늙은 걸인을 바라보는데 라렌느는 마치 기념촬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옆에 걸터앉아 라렌느를 바라보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와 두 소년도 따로 그려서 하나의 그림으로 합성시켰는데 이는 당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마네는 처음으로 레몬껍질과도 같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들뜰게 만든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살롱전에 출품했고, 심사위원 중 한 사람 낭만주의의 대가 들라크루아가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반대로 낙선되었다.
이 작품은 6년 이상 마네를 가르쳐온 쿠튀르에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쿠튀르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바로 이 작품을 그린 장본인이다”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마네에게는 첫 성공작이다.
주정뱅이 걸인을 그린 그림은 교육적 목적을 중시하는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렸겠지만 대충 문지른 듯한 붓질과 자유로운 소묘는 갈고 닦은 솜씨임이 분명했다.
마네는 특별히 사회비판적인 의도를 갖고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걸인을 주제로 선택한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 걸인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현대도시의 모습 중 하나이고 도시의 삶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화가의 의무라면 마네가 걸인을 그린 것은 모던 회화의 모티프로 당연하다.
그는 그런 의도로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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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앙리 로베르 마르셀 뒤샹Henri-Robert-Marcel Duchamp(1887-1968)




마르셀의 형 자크 비용과 뒤샹-비용은 화가, 조각가였다.
마르셀은 풍자만화를 그리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야수주의와 세잔의 영향을 잠시 받았고 미래주의를 통한 입체주의의 영향은 그에게 결정적이었다.
이는 1910년대에 미래주의와 입체주의가 얼마나 진보적인 양식으로 유행했는가를 말해주기도 한다.
두 양식의 영향으로 그린 것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로 스무 장면이 넘는 여인의 스타카토 같은 장면은 여인이라기보다는 로봇처럼 보이는 그림이이다.
뒤샹이 미래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은 운동이었다.
운동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1911년경이었다.
그러나 운동보다 더 그에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해학적 요소이며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1911)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때부터 유머는 그의 미술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는데, 제목을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라고 한 이유로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뒤샹이 회화에 즐겨 사용한 것들은 유머 외에 여인의 누드, 운동, 기계,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체스였다.
유머는 말장난이었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조차’ 벌거벗겨진 신부>(1915-23)

말장난으로 정한 이 제목의 드로잉을 그린 것은 1912년 7-8월이었다.
이것은 기계를 의인화하여 성별을 부여한 기계 디자인 같은 그림이다.
말장난은 그해에 그린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에서도 나타났으며, 이런 식의 유머는 평생 지속되었다.
모두 입체주의 양식으로 기계의 운동을 묘사한 그림들이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때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even’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그림과 무관하다. ...
좀더 벌거벗길 수 있는 가능성들 모두란 뜻은 당치도 않다.”


1913년 2월 17일 뉴욕의 제69 기병대의 병기창에서 아모리쇼Armory Show가 열렸고,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 그리고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와 함께 팔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는 각각 $324에 팔렸고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는 $162에 팔렸다.
이는 큰돈이 아니었는데, 세잔의 작품은 $6,700에 팔렸고 마티스의 작품은 팔리지는 않았지만 가격이 $4,050이었다.
아모리쇼를 계기로 뒤샹은 뉴욕으로 왔고 이후 주로 뉴욕에서 작업을 했다.



개념미술의 선구자로서의 뒤샹

개념미술은 사상이나 개념을 미술품의 본질적 구성 요소로 간주하며 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솔 르윗Sol LeWitt(1928-)은 1967년 미술잡지 <아트포럼 Artforum>에 기고한 글에서 개념미술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개념미술에서 아이디어나 개념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술가가 미술의 개념적 형식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계획을 세우고 결정을 내리는 모든 것이 미리 행해지며 그 실행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수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개념은 작품을 만드는 기계이다.”


개념미술에 대한 르윗의 정의는 르윗의 작업과 같은 방법에만 가장 적절하다.
개념미술이 직접적으로 미니멀아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특히 미국에서는 공공연하게 논의되어왔다.
미니멀리즘은 분명히 미술을 제작하고 경험하는 데서 고도로 개념화된 방식이었다.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은 작품의 의미보다는 사물성 자체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면서 관람자가 보고 있는 것이 표현이나 상징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임을 주지시켰다.
그렇다면 아무리 최소한의 것이라고 해도 작품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토니 고드프리Tony Godfrey는 <개념미술 Conceptual Art>(1998)에서 개념미술의 네 가지 형식을 열거했다.


1. 레디메이드Readymde의 사용

2. 개입Intervention: 이미지, 텍스트, 사물 등을 미술관이나 거리 같은 예기치 않은 문맥 속에 갖다 놓아 그 문맥으로 관심을 끌어내는 것이다.

3. 자료: 실제 작품과 개념, 행동 등은 모두 증거와 기록, 지도, 차트,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는 사진이 제시된다. 조지프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세 의자 One and Three Chairs>(1965)를 예로 들 수 있다.

4. 언어: 개념과 진술, 조사 등이 언어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이상의 네 가지 구분은 편의를 위해서일뿐 개념미술 예술가들은 구분을 금기시한다.
따라서 네 가지 형식적 작업에 대한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개념미술이 처음 표명된 것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통해서였다.
뒤샹에 의해 사용된 용어 레디메이드는 외부세계에서 가져온 사물이 미술품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미술품의 독창성과 예술가의 손작업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독창성과 손작업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미술사상 처음으로 제기된 것으로 이는 ‘미술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미술은 자연의 모방으로 기술을 지닌 장인이 자연을 좇아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레디메이드는 바로 이런 미술품에 대한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뒤샹이 서양미술에 이룩한 업적은 바로 레디메이드, 즉 2,300년 동안 미술에 대한 개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전통을 무시하고 반기를 든 것이었다.


뉴욕으로 오기 전인 1913년 가을 뒤샹은 자전거 앞바퀴를 부엌에서 사용하는 등받이 없이 걸터앉는 원형의자 위에 거꾸로 세워 조립했다.
훗날 평론가들은 <자전거 바퀴>를 ‘20세기의 첫 레디메이드’ 작품이라고 했고 또는 움직이는 첫 조각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뒤샹은 평론가들이 말한 그런 의도를 갖고 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불필요한 것들이 자기 방에 있었기 때문에 장난삼아 조립한 것뿐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제작한 것이 아니므로 미술품으로 보관하지도 않아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전거 바퀴>는 첫 레디메이드일 수는 있으나 첫 개념미술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첫 개념미술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미술품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면서 제시한 소변기 <샘 Fountain>(1917)이다.
<샘>은 뒤샹에 의해 1917년 뉴욕에서 열린 독립미술가협회the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독립미술가협회는 1916년 뉴욕의 예술가들의 모임과 그에 동조한 콜렉터들이 연례 전시회를 조직하고자 설립한 단체였다.
이 전시회에는 심사위원이 없고 누구든지 6달러만 내면 전시할 수 있었다.
협회의 회장은 사실주의 화가 윌리엄 글래큰스William Glackens였고, 위원들 중에는 뒤샹과 뒤샹의 작품을 수집한 윌리엄 아렌스버그William Arensberg가 있었다.


1917년 4월 10일 첫 전시회 개막일 바로 직전 뒤샹은 철공소에서 소변기를 구입한 후 ‘R. Mutt’라고 서명하고 날짜를 적어 넣었다.
뒤샹은 훗날 R은 ‘벼락부자’를 뜻하는 프랑스어의 비속어 Richard의 약자이며, Mutt는 만화주인공들인 머트Mutt와 제프Jeff 및 모트J. L. Mott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특유의 말장난이 작용했다.
그는 그것을 2천여 점이 넘는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려고 협회에 제출했다. R. 머트가 뒤샹의 가명인 줄 모른 글래큰스는 그것이 너무 추해서 전시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아렌스버그는 6달러를 냈으므로 전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둘러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위원회는 “미술품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서양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미술품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은 미술품은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위원회는 과거의 미술품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미술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뒤샹은 위원회의 결정이 불합리함을 잡지 <맹인 The Blind Man>에 기고한 글에서 주장했다.


“머트 씨가 자신의 손으로 <샘>을 만들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일상적인 생활용품을 가져다가 새로운 명칭과 관점 하에서 그 유용성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즉 그 오브제를 위한 새로운 사고를 창출한 것이다.
단지 배관이라고 거부했다면 그 또한 불합리하다.
미국이 미술작품이라고 유일하게 만들어놓은 것이 배관공사와 다리공사 아닌가.”


<샘>이 출현하기 전에 사람들은 그런 기성품이 미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샘>은 소변기가 과연 미술품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것은 2,300년에 걸친 미술을 부정하는 것이다.
레디메이드는 미술을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는 미술품이 되었다.
뒤샹이 어떤 사물을 선정하든지 그것에는 특유의 아이러니와 유머가 있었고 미적 모호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레디메이드를 20개 이상 선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모순이며 그 자신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미술사학자 피에르 카반느가 훗날 뒤샹에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레디메이드 사물들 가운데 하나를 선정하게 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사물에 달렸지.
보통 나는 어떻게 보이는가에 관심이 있었네.
사물을 선정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보름만 지나면 그 사물을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하게 된단 말이야.
무관심한 마음으로 미학적 감성을 가지지 않은 채 사물을 보아야 하네.
레디메이드를 선정할 경우 시각적 무관심으로 그렇게 해야 하고 동시에 좋고 나쁘다는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선정해야 하네.”

감각이란 무엇입니까?

“습관이야.
이미 받아들인 어떤 것을 반복하는 것이지.
자네가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한다면 그것이 감각이 되는 것이지.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거나 같은 것일세. 감각일 뿐이지.”

무엇이 감각으로부터 선생님을 자유로워지게 했습니까?

“기계적인 드로잉이었어.
그것은 모든 회화적 전통 밖의 것으로 감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지.”

선생님은 반자연주의 태도를 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사물로 그렇게 하시는군요.

“그래,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늘 같았네.
내 책임이랄 수 없지.
그것은 그렇게 되어진 거야.
나 혼자 그렇게 만든 건 아니란 말일세.
책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나의 방어가 되겠지.”


뒤샹은 1916년 봄에 레디메이드를 세 개 더 선정했는데, <숨은 소리와 함께 With Hidden Noise>는 아렌스버그와 함께 집에서 사용하는 노끈뭉치를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판 사이에 삽입한 후 기다란 나사로 네 코너를 단단히 죈 것이다.
뒤샹이 시키는 대로 아렌스버그는 나사를 푼 후 뒤샹 모르게 불을 노끈뭉치 중앙 빈 공간에 넣고 다시 나사를 조였으므로 그것을 들고 흔들게 되면 소리가 났다.
그래서 제목이 <숨은 소리와 함께>가 된 것이다.
뒤샹은 청동판 위와 아래에 영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여 적었는데 더러 글자를 빠뜨리고 기술했다.
제목은 그가 즐기는 단어놀이였으며 변죽을 울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뒤샹의 영향은 46년 후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1931-)의 작품에서 나타났다.
모리스는 1962년에 첫 개인전을 열면서 두 가지 다른 유형의 작품들을 전시했는데, 하나가 뒤샹적인 작품으로 23cm 크기의 정육면체 상자였다.
그 작품은 그것을 만들 때의 망치소리와 톱질소리를 녹음하여 테이프를 넣은 <자체가 만들어지는 소리를 지닌 상자 Box with the Sound of its Own Making>였다.
모리스의 작품은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인 것으로 동의반복적이며 재귀적인 성질을 지녔으므로 종종 최초의 개념미술 작품으로 간주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자기지시적이다.
그 자체 미술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다이스트로서의 뒤샹

뉴욕의 다다는 뒤샹을 중심으로 1915-23년에 행해졌으며, 취리히 다다와는 달리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예술가들이 그룹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레디메이드를 미술품이라고 주장한 데서 뒤샹의 다다적 요소는 이미 표출되었다.
그리고 그와 친구 화가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1879-1953)의 기계주의 드로잉을 통해 미술에 대한 허무주의는 충분히 시위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뉴욕 다다는 취리히 다다보다 한 해 먼저 진행되었다.
미술에 흥미를 잃은 뒤샹은 1918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그는 체스를 즐겼는데, 미술과 체스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952년에 “모든 예술가가 체스플레이어는 아니지만 모든 체스플레이어는 예술가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고 얼마 후 <체스알>을 레디메이드로 선정했다.
뒤샹의 다다적 행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제작한 <한 눈으로 가까이서 거의 한 시간 동안 (유리 뒤에서) 바라볼 것 To Be Looked at (from the Other Side of the Glass) with One Eye, Close to, for Almost an Hour>(1918)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그의 후원자 캐서린은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안한 균형 Disturbed Balance>으로 고쳤고, 뒤샹은 그녀의 정정한 제목을 받아들였다.
불평은 그의 기본 미학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뒤샹은 1919년 6월 배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에서 지내는 것이 무료하여 12월 말 뉴욕으로 향하는 배를 예약했다.
파리를 떠나기 전 그는 레디메이드를 선정했는데, <L.H.O.O.Q.>이다.
가을 어느 날 그는 리볼리 거리를 걷다가 레오나르도 다 빈친의 <모나리자>를 인쇄한 싸구려 그림엽서를 한 장 샀다.
그는 모나리자의 얼굴에 검정색 연필로 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에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었다.
그 글자를 프랑스어로 발음하면 elle a chaud au cul가 되어 ‘그 여자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라는 뜻이 된다.
르네상스 대가의 작품에 감히 수염을 그려 넣고 지독한 농담을 보탠 것은 극도의 다다적인 행위였다.
1919년은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지 400주면 되는 해라서 파리 시민은 새삼 그를 상기하며 서양미술에 끼친 영향을 높이 받들고 있었는데 뒤샹이 이 대가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다.
이는 상징적인 사건이며 뒤샹은 400년 동안 지속된 르네상스의 패러다임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는 <L.H.O.O.Q.>이 자체의 권리를 가진 혹은 자기지시적 미술품이라고 상상해보라고 주문한 것이었다.
이런 미술에 자체에 대한 질문이 1960년대 후반에 개념미술 예술가들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뒤샹이 50년 전에 이미 예시한 것이다.


뒤샹은 1918년 마지막 그림 <텀 Tu m'(You-Me)>을 그린 후 미술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타계하기 3년 전인 1965년 카반느와의 대화에서 말했다.


(1918년 이후)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입니까?

“결심한 것은 아니고 <큰 유리 The Large Glass>가 회화가 아니듯이 그냥 그리지 않게 되었네.
나는 붓과 팔레트를 사용하고 화화에 관해 토론하는 전통적인 개념의 화가로부터 멀리 있었고, 그런 개념은 더 이상 내게 의미가 없었네.”

그 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갈망이 전혀 생기지 않던가요?

“전혀.
뮤지엄에 가도 그림 앞에서 대경실색하거나 흥미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어.
전혀 그렇지 않았어.
내 말은 옛 대가들 말일세.
낡은 것들 ... 종교적인 말로 하면 난 성직을 빼앗긴 것이지.
그러나 스스로 성직을 버린 셈이지.
모든 것이 내게는 역겨웠어.”

붓이나 연필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까?

“그럼,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충동도 흥미도 없었어.
자네가 이해할려나. 회화는 죽는다네.
회화에 신선한 것이 사라지면서 40년이나 50년 후에는 회화가 죽네.
조각도 마찬가지로 죽어.
이것이 나의 작은 목마dada인데 아무도 동의하지 않지만 난 상관하지 않네.
내 생각에 회화는 그것을 그린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년 후에는 죽는다네.
결국 미술의 역사라고 부르게 되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시꺼멓게 된 오늘날의 모네의 그림과 60년 혹은 80년 전에 그린 밝은 색의 모네 그림은 대단히 다르다네.
이제 그것은 역사가 되어버렸지.
하지만 그것은 괜찮아. 회화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으니까.
인간은 유한하고 회화도 마찬가지야.
미술의 역사는 미학과는 매우 다르네.
내게 미술의 역사는 뮤지엄에 있는 한 시대인데, 가장 최고의 시대라고는 할 수 없고, 근본적으로 말하면 아마 시대의 평범함을 표현한 것일 게야.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지고 대중은 그것들을 보존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이것은 철학이지.”


뒤샹의 또 다른 레디메이드는 <왜 로즈 셀라비는 재채기를 하지 않는가? Why Not Sneeze Rose Selavy?>(1921)이다.
이것은 그의 작품을 갖고 싶어 하는 캐서린의 여동생 도로시 드라이어를 위해 만든 것이다.
뒤샹은 조그만 새장을 사서 흰색으로 칠한 후 대리석을 자르는 상점에 가서 152개의 하얀 입방체 대리석을 주문했다.
대리석의 크기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각설탕만 했다.
그는 대리석을 새장에 넣고 체온계와 오징어뼈도 함께 넣었다.
그리고 새장 아래 부분에 제목을 적었다.
도로시는 약속대로 뒤샹에게 $300을 주고 그것을 받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언니에게 팔았고, 캐서린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아렌스버그에게 같은 금액에 넘겼다.
이것은 수정레디메이드라고 할 수 있다.



레디메이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가 되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19년 <기괴한 것 The Uncanny>에서 왜 오브제가 낯설고 불안함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에 관해 설명했다.
안정되어 보이고 익숙한 사물의 문맥에서 낯설게 만든다는 점에서 기괴함을 수행한 것이 뒤샹의 레디메이드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진지한 제자이자 추종자인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은 초현실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의식에 대한 체계적인 탐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서로 다른 사물들을 우연적으로 병렬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뒤샹을 존경한 브르통은 뒤샹의 말장난에 매료되었다.
그는 뒤샹의 말장난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인에게 말장난은 곧 천재적인 재능을 의미한다.
브르통은 다음과 같은 뒤샹의 말을 알고 있었다.


“말은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말장난은 위트의 수준 낮은 형태이지만 난 그것이 실제의 의미와 전혀 다른 말의 상대적인 관계에 내포된 예기치 않은 의미인 두 가지 자극의 근원임을 발견했다.
내게는 이것이 무한한 즐거움이다.”


브르통은 뒤샹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예언자로 보았다.


뒤샹은 1965년에 카반느에게 말했다.

“어떤 대작이라도 오락장처럼 관람자들이 불러주어야 할 걸세.
구경꾼들이 뮤지엄을 만들었고 그들이 뮤지엄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지.
뮤지엄이 최종적인 납득할 만한 형태나 판단이겠나?
뮤지엄이란 말도 지독한 것이지.
뮤지엄에 아주 많은 문제가 있어.
사회가 어떤 작품들을 받아들일 것을 결정하고 그것들이 루브르 뮤지엄을 만들었으며, 루브르는 수세기를 존속하지.
진실과 실제적인 것, 절대적인 판단에 관해서라면 난 뮤지엄을 전혀 신뢰하지 않네.”

선생님은 뮤지엄에 가십니까?

“거의 안 가.
루브르에 안 간 지 20년이나 되었어.
내가 그곳에 있는 작품들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그곳에 있는 것들에 대한 가치판단에 의심이 가기 때문이야.
그것들이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왜 다른 작품들에 관해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지, 그곳에 없어야 할 것들도 있다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네.
근원적으로 우리는 일시적인 감각에 근거한 양식에 잠깐 동안 심취할 만한 것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지.
이런 일시적인 감각은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들은 여전히 남게 되네.”

선생님은 여전히 선생님이 제작한 모든 작품이 뮤지엄에 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 작품에는 사람들이 중단할 수 없는 인생의 실질적인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네.
난 거부할 수 없었네.
난 그것들을 찢거나 부술 수 있었어.
그렇게 되면 백치 같은 짓이 되겠지.”

선생님은 미술학교에 가서 가르치실 생각은 없습니까?

“없어.
오, 정말이지 없어!
난 할 수 없어!
나말고라도 화가에게는 가르치는 일이란 별 의미가 없네!
미술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문학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나?”

선생님이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회화라는 개념을 부인했는데 ...

“그랬지.
이젤페인팅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페인팅도 부인했네.”

그렇다면 또 다른 2차원 공간이라도 찾았나요?

“난 400년 내지 5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유화를 더 이상 계속해서 그려야 할 이유가 없는 우리시대에 맞는 해결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네.
결론적으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찾았다면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이지.
음악에서 전자악기가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는 표적이 되었네.
회화는 더 이상 식당이나 거실에 거는 장식품이 아냐.
예술은 표적의 형상을 가지며 더 이상 장식적인 역할을 하지 않네.
난 평생 이런 느낌이었어.”



<가방 안에 있는 상자 Box in a Valise>

뒤샹이 과거에 제작한 작품들을 소형으로 상자에 담아 운반할 수 있는 ‘뮤지엄’으로 제작하려고 한 것은 1940년이었다.
독일군대가 파리를 점령한 1940년 6월 뒤샹은 전란을 피해 나치의 간섭을 받지 않는 프랑스 정부 통치지역 아르카총에 있었다.
<가방 안에 있는 상자>는 6년 전부터 구상해온 일이었다.
그는 20점으로 한정해 가죽가방 안에 담을 수 있도록 호화스럽게 만들기로 하고 첫 작품을 1941년 1월에 완성했다.
이 작품은 가죽손잡이가 달린 가죽가방 안에 나무로 제작한 상자가 들어있는 것으로 말 그대로 가방 안에 있는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뒤샹의 작품 69점이 소형사진으로 담겨 있고, 프랑스어로 뒤샹이 직접 쓴 글이 ‘of or Marcel Duchamp or Rrose Selavy’라고 적혀 있었다.
가죽가방을 열고 수직으로 선 나무상자 뚜껑을 양족 옆으로 잡아당기면 뒤샹의 중요한 그림들이 나타나는데 <큰 유리>의 이미지를 투명한 셀룰로이드에 인화한 사진이 중앙에 있고, 왼쪽에 <신부>와 <빠른 누드들에 의해 에워싸인 왕과 왕후>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텀>, <아홉 개 능금 주물>, 그리고 <글라이더>가 있었다.
<아홉 개 능금 주물>과 <글라이더>도 마찬가지로 셀룰로이드에 인화한 사진이었다.
<큰 유리>를 특별히 부각시킨 이 작품은 운반할 수 있는 소형 뮤지엄과 다름없었다.


1942년 뒤샹은 돈을 벌기 위해 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신을 다르는 조지프 코넬Joseph Cornell(1903-73)과 함께 <가방 안에 있는 상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코넬이 늘 그와 함께 그것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뒤샹은 존 케이지의 아내 시니아에게 의뢰했는데, 그런 일에 재능이 있는 시니아는 금새 60개를 만들었다.
뒤샹은 가죽가방에 넣은 호화판 상자도 20개 제작했는데 7개를 이내 팔았다.
잡지 <라이프>는 이 작품을 보도하면서 ‘가방 안에 있는 1인 쇼 One-Man Show in Suitcase’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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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서울아트가이드 5월호를 위해 기고한 글입니다.


미술교육의 문제




특강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강의가 얼마나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질문을 유도해보지만 거의 없다.
강의 후 토론을 이끌어보려 하지만 침묵주의가 더누 강해 실내는 고요할 뿐이다.
그래도 토론의 장을 마련할 심사로 고요 속에 질문을 던진다.
“최초의 모더니스트 예술가는 누구냐?”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의 유사성과 차이가 뭐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개념미술의 관계는?”
“해프닝과 퍼포먼스는 뭐가 다르지?”
이런 질문이 학생들의 침묵을 깨뜨리지 못한다.
질문도 하지 않고 답변도 거부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다그친다는 느낌을 줄까봐 부드러운 태도에 미소까지 지어보지만 학생들은 어서 자리를 뜨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만약 경제학, 정치학, 물리학, 생물학, 교육학, 국문학 등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전공 관련 질문을 하면 불충분하더라도 응답해올 것이다.
그런데 왜 미술 전공자들은 전공 관련 질문에 침묵하는 것일까.


1960년대에 미술이 미니멀리즘으로 치달을 때 이미 미래가 불투명했다.
논리적 귀결로 예술가들은 결국 비물질화 작업에 정진했고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는 언어를 소재로 한 개념미술이 성행했다.
개념미술에 의해서 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자아성찰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해답이 시급해졌다.
그 후 미술전공자들은 싫든 좋든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토론이 교육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술작품에 대한 정의를 재확립해야 하므로 미술작품은 스스로 미술작품임을 입증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미술작품의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에 관해 그것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
소위 말하는 자기지시성이 선명해야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시간에 왜 그것이 미술작품인지,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으며, 그렇게 표현하려는 의도에 관해 설명하라고 하면 매우 당혹해 한다.
언제,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만 장황하게 말한다.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그런 것에 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데도 그런 말 밖에 하지 못한다.
작품을 제작하게 된 동기와 그것을 물질화하는 표현의 과정에 관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못한다.
미술교육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 미술대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교재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이다.
원래 제목은 ‘미술 이야기 The Story of Art’이다. 제목에 Story란 말이 사용된 것은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을 위한 것임을 시사하며 그 점을 곰브리치가 서문에 밝혔다.
“This book is intended for all who feel in need of some first orientation in a strange and fascinating field."
미술에 호감을 가진 청소년이나 일반인에게 이 책은 훌륭한 가이드북이다.
그러나 <서양미술사>를 교재로 사용하면 모더니즘과 관련해서 불충분한 교육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우선 그의 모더니즘론이 많은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또한 그의 과오는 뒤샹과 워홀을 미술사의 고아로 만든 것이다.
그의 미술이론 혹은 편견에 의하면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미술작품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워홀이 주도한 1960년대의 팝아트는 퇴행적 운동으로 미술을 발전의 역사로 보는 그에게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미술을 발전의 역사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서양미술에 있어서 뒤샹과 워홀의 역할을 알지 못하면 1950년대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컨템퍼러리 아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미술이 삶과 분리될 수 없을진대 컨템퍼러리 아트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미술교육의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두 사람은 그리스인(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술론으로부터 현재까지 2400년, 바사리의 르네상스에 기초한 미술론으로부터는 현재까지 500년의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함을 밝혀낸 예술가들이며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요구했다.


이런 점을 예외로 하더라도 대학에서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또 다른 이유는 토론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강의를 의심 없이 받아들여서도 안 되며 불충분한 강의를 침묵으로 용인해서도 안 된다.
이는 학회에도 해당되는데,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공손한 태도는 발표자를 나태하게 혹은 무책임하거나 오류를 범하게 만들며 나아가서 그런 과오에 동참 내지는 협력하는 일이 된다.


미술교육 반드시 쇄신되어야 하고 보다 나은 우리나라 미술을 위해서는 서둘러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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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유




정대유(1852~1927)는 서예가이며 괴석과 난죽을 주로 그린 문인화가 정학교의 아들로 아버지와 같이 서화에서 탁월함을 보였다.
대한제국시대에 외부와 농상공부에서 국장을 역임했고 한일합방 후에는 서화가로 활동했다.
서화협회가 결성되자 13인의 발기인들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후진에게 서법과 문인화를 가르쳤으며, 1922년 선전이 시작되자 김규진, 김돈희와 함께 사군자가 포함된 서부의 심사위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그의 문인화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낙장으로 발견된 <괴석 怪石>은 1918년 누군가를 위해 조석진, 안중식을 비롯한 7명의 화가가 작은 크기로 한 폭씩 그려 화첩을 만든 것들 중 하나이다.
낙관에 “우연히 독필을 시험하였으나 잘 되지 못해 부끄럽다”고 적혀 있다.
소품이지만 묘취 있는 형상과 츨필 기법 및 담채의 표현이 고격하고 괴석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현대적 표현의 형상물로 보이면서도 짙은 청록색을 수반한 작은 태점들로 전통 화격을 유지한다.
곳곳에 찍은 세모꼴의 태점들이 작은 수묵점들과 조화를 이루고 돌틈의 난초잎 수묵선들이 괴석에 자연적인 정취를 보태준다.
화제 보천여흔補天餘痕은 “하늘의 이지러진 곳을 채운다”라는 뜻으로 여왜씨女蕃氏가 하늘의 이지러진 데를 기웠다는 중국 고사에서 인용한 글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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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만 그린 김응원




난초만 그린 김응원(1855~1921)이 화단에 등단한 배경에 관한 기록은 없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에 오르기 전에 득의의 묵란을 즐기며 은신할 때부터 어린 종복으로 따라다닌 김응원이 그 뒤에도 계속 개인 수종으로 대원군을 모시며 석파란법石坡蘭法을 스스로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석파는 대원군 이하응의 아호이다.
섭정기의 대원군이 주위의 묵란 앙청을 모두 응할 수 없어 김응원으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다고도 하는데, 김응원의 묵란은 석파란법을 충실히 추종한 바탕 위에 이루어졌으며 후년에는 김정희의 문인화 정신의 묵란법도 본받아 한층 자재로운 경지에서 도달했다.
1910년대에 서울 화단의 대표적인 묵란화가로 알려졌고 서화협회에서 후진에게 묵란법을 가르쳤다.
<석란 石蘭>은 대작으로 광대한 의상意想과 묵란 기량이 한껏 발휘된 대표적인 역작이다.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기암유곡奇岩幽谷의 경개에 청아한 난초들이 고결한 풍정으로 그려졌고 다른 초화는 일체 배제되었다.
암석의 몽상적 형상은 공간의 깊이와 유현한 분위기를 수반하며 수묵필치, 먹의 농담 변화, 태점의 표현 등이 궁중에 바쳐진 그림답게 필력과 기량을 다한 듯이 보인다.
왼편 상단에 예서체로 적힌 글귀는 “난의 기운은 맑고 돌의 바탕은 고요하다. 맑으면 오래 가고 고요하면 수를 누린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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