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에서는 원시인처럼 살아야 한다 

 

 

서울은 거대한 정글이나 다름 없다.
경찰은 기동성이 없고, 과학적 수사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보니 범죄자들을 모두 잡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범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범죄는 더욱 더 늘어난다.
범죄자의 심리는 "나는 완전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으로 전범자들이 잡히지 않을 때는 더욱 더 완전범죄가 가능하다고 믿게 된다.

거리에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차들이 많다.
이들 차들의 사고가 연일 보도된다.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느니,
술 취한 운전사가 낸 사고,
브레이크가 파열해서 일어난 사고,
운전사가 졸다 낸 사고,
등등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다.

얼마 전 인사동에서 밤늦게 1시 30분경 택시를 탔다.
비가 내리는 데도 이놈의 운전사가 마구 달렸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정지하더니 앞차가 우회전을 하지 않는다고 빵빵 소리를 연거퍼 냈다.
앞차가 움직였지만 공간이 넉넉하지 않아 우회전을 할 수 없게 되자 또 빵빵 소리를 냈다.
앞차가 우회전이 가능한 만큼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런데 이놈의 운전사는 앞차 옆으로 바싹 가서는 유리창을 내리고 옆차 운전사에게 반말로 욕을 해댔다.
그리고 계속 노려보았다.
옆차 운전사가 대들었더라면 아마 이놈의 운전사는 차에서 내려 그 사람과 대판 싸웠을 것이다.

우회전을 한 후 이놈의 운전사는 질주했다.
경찰서 앞 신호등이 빨간색인 데도 잠깐 경찰서쪽을 보더니 그냥 냅다 곧바로 달렸다.
세 번이나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는 바람에 나는 문 위에 달린 손잡이를 꼭쥐고 여차해서 충돌사고가 날 경우를 예비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미친 놈을 만났구나. 정신차려야지."
그날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놈의 운전사가 창을 듣고 있었는데 전에 들어보지 못한 어쩌다 북소리가 나고 약간의 소리를 내는 창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컨템퍼러리 음악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모르는 음악인 것 같기도 하고 ...
여하튼 음악도 음산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전 같으면 당인리발전소 방향으로 좌회전하라고 말했겠지만 큰 길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그나마 무사히 도착한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서울은 정글이나 다름 없다.

서울이라는 정글에는 불도 잘 난다.
지방 정글에서도 불길은 잦다.
원시시대에도 아마 원시인들이 불을 잘못 관리하여 삼림을 태웠을 것이다.
불이 났는데 골목에 불법 주차한 차들 때문에 소방차가 진입하는 데 늦어 불길을 늦게 잡았다고 한다.
원시시대에는 골목길에 탈것을 주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길에서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흰색의 등치가 아주 큰 개에 관한 일이다.
이 개를 자주 길에서 봤는데 훈련이 된 개이지만 주인이 개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게 한다.
한 번은 우리집 마당에 들어왔는데 우리집의 쬐끄만 두 강아지들이 이 개를 향해 마구 짖었다.
창밖으로 이 광경을 보면서 내심 큰 개가 우리 개들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큰 개는 천천히 마당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
우리집 쬐끄만 두 개가 합세해서 짖어댔지만 한 번의 으름짱도 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점잖은 행동을 보이고 갔다.
그래서 그 놈은 참으로 훈련이 잘된 놈이구나 생각했다.

헌데 신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아마 8시경이었던 것 같다.
길이 어두웠다.
마을버스에서 막 내리는데 남자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그 흰색 큰 개가 무엇인가를 물고 우리 근처로 와서 입에 문 것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두 남자가 "저 개 죽여!" 하고 소리치면서 달려왔고 큰 개는 약간 걸음을 재촉하며 큰 길쪽으로 갔다.
남자들 뒤를 따라온 여자가 땅에 놓여진 것을 집어들었다.
난 그것이 여자의 지갑인 줄 알았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그야말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쥐보다 조금 큰 시커먼 색의 강아지였다.
큰 개가 쥐와 혼돈했든지 아니면 아주 작고 예쁜 강아지라서 본능적으로 물고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물고 오는 바람에 조그만 강아지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길건너 동물병원이 있고 우리집 강아지가 그곳에서 예방주사를 맞았으므로 여자에게 그곳으로 빨리 가라고 말해 주었다.
여자는 동물병원으로 향했지만,
두 남자는 큰 개를 쫒고 있었다.
한 남자는 허리띠를 풀더니 손에 이중으로 감고는 다른 남자에게 "죽여버려!" 하고 소리치며 큰 개가 간 방향으로 달려 갔다.
난 아내에게 빨리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큰 개는 내 허리에 닿을 만큼 덩치가 크다.
아무리 훈련된 개라지만 두 남자가 살의를 품고 덤벼들면 그들에게 공격하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 개가 이길 것이 뻔해 보였다.
아, 그날 난 서울이 꼭 정글이라고 생각되었다.
두 원시인들이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서울이란 정글에는 퍽치기도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어디서 둔기가 날라올지 모르니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시인이 정글을 지날 때 두리번거리며 지났다.
사방이 공격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울도 그렇다.

빈집을 터는 좀도둑도 부쩍 늘었다.
작년 아내와 미국에 가서 보름을 지내다 왔는데 다행히도 우리집은 안전했지만 사 층 건물의 옆집에 좀도둑이 들었다고 했다.
그후 우리는 늦게 귀가할 일이 있으면 낮부터 방에 불을 켜놓고 외출한다.
좀도둑이 좀더 심해지면 창가에 허수아비라도 놓아야 할 것 같다.

서울은 정글이다.
얼마 전 노교수 내외가 집으로 와서 그들과 함께 식당으로 가면서 길을 건넜다.
파란색 불이 켜졌지만 양쪽 방향을 번갈아 보면서 확인한 후 길을 건넜다.
난 이 행동을 행여 기이하게 여길까봐 노교수에게 "서울에는 미친 놈들이 많아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몰라 언제든지 조심한답니다" 하고 말했다.
노교수도 "김 선생님 말이 맞습니다" 하고 말했다.

정글에서 살려면 원시인이 되어야 한다.
교통법이 있어도 두리번거리며 조심해야 한다.
경찰들이 있지만 그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내 몸은 내가 방어해야 한다.
늘 방어태세를 갖추고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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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글 

상징주의 화가 폴 고갱은 말년에 많은 산문을 썼다.
더러는 반항적인 태도로 썼지만 그의 지성의 깊이와 인생관을 파악하기에 적절한 산문도 있다.

산문 하나를 소개한다.


인생이란, 사람이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에 따라서,
아니, 최소한 그 사람이 가진 의지만큼만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
미덕, 선, 악 따위는 말뿐이다.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깊이 캐묻고 부서뜨려서 어떤 건물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실행할 방법을 모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창조주의 손에 일신을 맡기는 것,
그것은 소멸되는 것이며 죽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에 대치한 마니교도 포르투나투스(530~600, 이탈리아 시인으로 주교였다)는
둘 다 옳고 또한 둘 다 그르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의 힘과 악의 힘.
그것들 손에 일신을 맡긴다는 건,
중대하기는 하지만,
역시 무가치한 일이다.
회피일 뿐이다.

누구도 선하지 않으며 누구도 악하지 않다.
존재 방식은 다르더라도 모두가 같다.
지도자의 모사꾼들이 그 반대의 말을 했는지 어떤지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생애는 하잘것없이 짧더라도 위대한 일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참여하는 공동의 일에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과 문학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사상은 작품을 위해서만 눈을 갖고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신경을 쓰면 작품은 짜부러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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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영혼의 창문이다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는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들에 의한 향상을" 기억할 수는 없더라도 가능한 한 익히고 기억한다면 지식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새로운 오브제와 씨름할 때 어려움이 덜 하게 된다고 적었다.
그에게는 잠들기 전 기억한 것들을 드로잉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그렇게 할 것을 화가들에게 권했다.
그는 이런 습관을 스승 베로키오로부터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베로키오는 드로잉에서 탁월했고 이 점을 바사리가 지적했다.
바사리는 베로키오가 인내를 갖고 드로잉했으며 여인의 머리를 그린 것들은 매우 우아하며 이런 아름다움을 레오나르도가 평생 모방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어떤 글이라도 드로잉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면서 하나의 이미지는 한 권의 책과도 같다고 했다.
드로잉은 그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생각하는 카메라와도 같았다.
그는 오브제를 자신의 거울에 반사시켜 종이에 옮겨 담았으며 망막과 종이는 일체가 되었다.
그는 아주 빠른 속도로 오브제를 재현해냈다.
그는 눈이 마음보다 실수를 덜 한다고 했으며 회화와 음악과 비교해서 "음악은 회화의 누이동생 the younger sister of painting"이라면서 소리는 오래 가지 못하므로 음악은 표현하는 순간 죽게 되고 반복을 통해 표현된다고 했다.
회화와 조각에 견주어서는 그 어떤 작품도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뜬 작품보다 오래 갈 수 없고 회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것 miraculous thing"으로 좀더 지성적이며 열 가지 원리들 "빛, 어둠, 색, 부피, 모양, 위치, 거리, 근접, 운동, 조화"에 기초하므로 어떤 것도 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눈을 "영혼의 창문 the window of the soul"으로 보았다.
당시 사람들은 눈에서 발하는 미립자들spezie에 의해 영상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레오나르도는 눈이 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광선을 받아들일 뿐이라고 했다.
해부학적으로 눈을 관찰한 그는 렌즈를 발견했다.
당시에는 렌즈를 "수정의 유머 crystalline humor"로 불렀다.
그는 눈이 이미지를 거꾸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으며 처음으로 입체 영상의 원리, 즉 삼차원 릴리프의 지각에 관해 언급했다.
당시 사람들은 한 순간에 빛이 세상에 가득 차진다고 믿었는데, 그는 빛이 지나간다고 보고 빛의 속도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빛이 어떻게 발산하는가에 대해 그는 오늘 날 우리가 말하는 진동을 떨림tremore이란 말로 표현했다.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Fermat(1601~65)보다 한 세기 전에 그는 이런 근본적인 법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근거해서 "모든 자연적 현상들은 가장 짧은 가능한 수단에 의해 나타난다"고 적었다.
그의 이런 실험이 훗날 럼포드Rumford의 광도계photometer를 예고했다.
그는 왜 하늘이 청색인지에 관해서도 설명했으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공기가 우리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하늘의 색은 본래 색이 아니지만, 이 색이 빛에 의해 뚜껑처럼 덮이게 되는 강한 어둠의 불명료함 아래서 빛나는 아주 작고 인지할 수 없는 미립자 속으로 증발되는 따뜻하고 습도가 있는 공기로부터 온다.”

과학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심과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각각 조명되어야 하는데 그는 음향, 물 관련 도구와 설치, 운동, 격발장치, 힘, 무게 등에 관해서도 연구했으며 지질학, 식물학, 음성학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위상을 정확하게 정하는 일은 과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그는 굴절작용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삼각법trigonometry을 충분히 알지 못했으므로 굴절의 법칙을 정립하지는 못했다.
증기의 속성에 관심이 많았지만 증기기관차를 제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또한 갈릴레오보다 한 세기 앞서 일종의 망원경을 발명한 듯하다.
그는 "달을 확대해 보기 위해 유리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렌즈를 연결시켰지만 그것들로 망원경의 효시가 될 만한 기구를 만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가 고안한 것은 혁명적 천문학에 근간이 되었다.
그에게는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데 의심이 없었다.
당시 레오나르도가 과학에서 거둔 결실은 매우 크다.
과거 어느 누구도 질의를 일으키지 않는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그의 독학 태도는 놀라운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했는데 자신의 좌우명과도 같았던 말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재능으로 무엇을 했느냐 혹은 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칭찬을 받거나 책망을 받을 만하다.”

돌 두 개를 한꺼번에 연못에 던질 경우 잔잔한 물 위에 두 개의 동심원이 생길 것이며 두 개의 동심원이 서로 닿더라도 모두 부서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자연현상이지만 레오나르도는 이를 관찰하여 이는 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러 하지 않음을 발견해냈다.
이에 관해 그는 "물이 타격을 받자 갑자기 열고 닫히는 것으로 운동이라기보다는 좀더 진동에 가까운 반응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두 개의 동심원이 부딪쳐서 부서지지 않는 이유를 그는 "물은 미분자들로 구성된 동질이고 진동이 물 자체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미분자들을 전파시키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이런 원리를 파도에 적용시킨 그는 소리와 빛은 동일한 방법으로 공중을 나아간다고 했다.

자연은 그에게 실험실과도 같았다.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고 했다.
침전으로 생긴 산에서 조개껍질과 해초 화석을 발견하고는 바다가 한때 지상을 덮은 적이 있었다고 추론했다.
유리 볼에 물을 넣어 한 점으로 집중하는 렌즈로 사용했으며, 작은 구멍을 낸 종이를 벽에 대어 광선의 운동 경로를 시위했고, 어둠 속에서 횃불을 빠르게 움직여 불의 선을 보여주었으며, 탁상에 칼을 꽂아놓고 탁상에 진동이 생기게 하여 칼이 두 개로 보이는 환영을 보여주면서 눈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오브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그는 류트의 줄이 진동할 때는 이중으로 보이는 것을 시위했다.
눈이 시각적 인상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함을 지적함으로써 눈이 거울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능을 할 뿐이며 빛이 빠른 속력으로 투사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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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절망에 빠진 폴 고갱은 1897년 12월 자살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비소를 먹었으나 다 토해내고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1898년 2월 고갱은 파리에 있는 친구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달에 편지를 쓰지 못한 데 대해 미안하다면서 그럴 용기가 없었다고 적었다.
그는 또한 몽프레에게 자살하려고 집을 나서 산으로 갔고 그곳에서 죽을까 했는데 그렇게 되면 개미들이 자신의 시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것이라고 했다.
독약을 많이 마셨지만 심하게 토하느라 독약이 도로 밖으로 나왔는지 그날 밤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고갱은 거의 4미터 가량 되는 커다란 캔버스에 인생의 불가사의함을 묘사했다.
그에게는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고갱은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은 1896년 12월부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죽기 전 구상하고 있는 큰 그림을 완성시키려고 하며 한 달 내내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밤낮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네.
오 하나님,
내가 그리고 있는 건 퓌비 드 샤반이 실재 삶으로부터 드로잉한 만화같은 그런 따위의 준비과정을 통해 그린 것과는 다르네.
매듭과 주름진 캔버스 바탕 위에 붓끝으로 직접 물감을 칠하는 것으로 대단히 거칠게 나타나는 그림이네.
사람들은 사려 깊지 못하고 미완성이라고 말할 걸세.
자신의 작품을 판단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간 내가 해온 것들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와 같거나 이보다 더 나은 그림을 난 그릴 수 없을 것 같네.
죽기 전에 나의 모든 에너지와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열정을 다 쏟으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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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별이 빛나는 밤>처럼 강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을 반 고흐가 과거에 그린 적이 없었다.
이 작품에 관해 그는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언제 그렸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성경의 창세기나 계시록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말하기도 하고 졸라와 도데로부터 디킨스, 위트만 혹은 롱펠로 등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구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도 있다.

반 고흐는 1889년 6월 초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1888년 아를에서 그린 <론느 너머 별이 빛나는 밤>을 곧 있게 될 앵데팡당전에 출품하라면서 "이 작품이 어떤 사람에게 내 것보다 나은 밤의 장면을 그리는 데 아이디어를 제공해줄 것이다"고 했다.
또한 "비록 고갱과 베르나르의 최근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 두 습작 <별이 빛나는 밤>과 <올리브 과수원>이 두 사람의 작품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1889년 6월 9일자)고 적었다.
테오는 <론느 너머 별이 빛나는 밤>과 <아이리시스> 두 점을 9월 3일부터 10월 4일까지 개최된 앵데팡당전에 출품했다.
6월 18일자 편지에는 "결국 난 올리브나무가 있는 풍경을 그렸으며 또한 별이 빛나는 하늘에 대한 새로운 습작을 했다"고 적었다.

<별이 빛나는 밤>은 높은 데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인데 실재가 아니라 상상의 풍경이다.
반 고흐는 근래에 그린 사이프러스를 하늘을 찌를 듯이 왼쪽에 그려넣었으며 오른쪽에는 과수원을 그렸다.
그는 하늘을 넓게 구성하고 별들의 드라마를 상상하여 묘사했다.

작품에 나타난 장소는 생레미의 어느 곳일 수도 있겠지만 반 고희 고향 누에넨의 풍경일 수도 있는 것이 네덜란드의 뾰족한 교회 지붕이 보이기 때문이다.
북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고딕 건물이 프랑스의 풍경에 삽입되었음을 본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별이 빛나는 밤>을 9월 19일에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9월 28일에야 보냈다.
테오는 이 작품을 "달빛 속의 동네"라고 부르면서 관심을 보였다.
테오는 이 작품을 1890년 4월에 열린 앵데팡당전에 출품했는데 카탈로그에는 "No. 832, Le Cypres"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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