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것이다” 하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님의 글을 읽고 님의 고민이 깊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님이 회화를 독학으로 익혔다고 했는데,
그건 콤플렉스가 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마추어의 그림에서는 순진함이 발견되고, 프로의 그림에서는 교활함이 발견되어 아마추어의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님을 아마추어 화가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받고 작품을 팔아 생활한다면, 프로이지요.
제가 말하려는 건 그림 그리는 것이 생활이 되다 보니 화가들이 팔릴 그림을 그린답시고 남의 것을 마음대로 갖다 변형시키는 유치한 작품을 양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화가 스스로가 더 잘 알 줄 압니다.

미술학교에서 혹은 스승 화가가 제자에게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것이다” 하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미대 교수나 스승은 과연 그림을 잘 그립니까?
질문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과연 창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님은 “선조들이 고수한 일필휘지의 경지를 답습할 수 있다고 감히 말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선조들 양반 사대부정신을 표방하는 문인화의 일필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님은 ‘사대부정신’이란 말이 마음에 크게 와 닿을 줄 압니다.
저는 그게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사대부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송나라 시대의 문인화를 머리에 떠 올리며 님이 말하는 문인들의 맑은 정신을 말하는 것이려니 하고 공감을 표합니다.
송나라 시대 문인들은 오늘날 아마추어 화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마추어였으므로 그림에서 순진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순진함’이란 순수한 인간의 정신입니다.
자연에서 스스로 느낀 것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노력이 그림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매너리즘적으로 그린 형식만 문인화인 것에서는 프로의 냄새가 나서 교활하게 느껴집니다.

님은 “우리의 선조들은 물론 동양에서의 붓은 그림 그리는 도구 이전에 선비들 학문을 하는 분들의 정신을 담아내는 수단으로 붓의 역할이 쓰였던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정신’이란 말에 함정이 있기도 합니다.
정신도 순수한 정신이 있고, 남의 사상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오염된 정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정신을 표현했다’고 하면 대단한 것인 양 혹은 숭고한 것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님이 말하는 “학문을 하는 분들의 정신”이 다 맑고 순수합니까?
회화에서 정신적인 것을 말할 때 우리는 창의성을 두고 말해야 합니다.
‘정신’이란 단어보다는 ‘창의성’이란 단어를 삽입하여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정신이 있게 마련입니다.
제정신이 아니라거나 정신 나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정신병자를 가리킵니다.
그럼 학문을 하는 사람의 정신은 모두 규범적이란 말입니까?
오히려 학문을 한 사람의 교활한 정신은 정신 나간 사람의 정신보다 더 사회에 해를 기칩니다.
따라서 회화를 논할 때는 ‘창의성’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서로 오해가 없을 줄 압니다.

‘정신’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동양화의 특징을 말하는 건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수묵화 혹은 한지에 그리는 채색화는 이젤에 오일물감으로 그리는 서양화와 재료와 도구 그리고 표현방법에서 다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런 차이를 가지고 동양화와 서양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회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동양화와 서양화를 회화라는 공통점으로 같은 선상에 두고 공평하게 취급하기 위해서는 회화의 내용이어야 하고, 그것은 창의성에 기반을 두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정신을 표현했든 아니던 그것보다는 과연 화가 자신의 창의성이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나타났느냐 하는 것이 우선 논란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창의성이 우리 관람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논해야 할 것입니다.

각 나라마다 민족마다의 서로 다른 문화적 DNA가 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민족마다 오랜 전통을 통해 몸에 익혀진 문화의 배경이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 차이를 1980년대에 다원주의라는 말로 인정했습니다.
민족들의 문화는 다를 뿐 어느 민족의 문화가 다른 민족의 문화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님이 동양화를 그린다고 해서 그것이 서양화에 비해 열등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동양화를 그리는 사람이 동양화는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란 말로 서양화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인 짓입니다.
서양화에도 학문을 하는 사람의 정신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님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동양화, 서양화가 어떻게 다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 다 회화로서 거기에 어떤 창의성이 있으며,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냐 하는 걸 살피는 것이 관람자의 몫이란 뜻입니다.

님은 “동양화의 기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건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우리 문화의 특질임에는 틀림이 없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서양미술의 기원과 다름이라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시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석기시대의 암각화가 발견됩니다.
회화의 기원을 말하자면 석기시대 사람들의 암각화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굴에서 암각화가 발견되고, 아프리카에서도 암각화가 발견됩니다.
석기시대에는 동서가 문화적으로 교통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암각화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회화의 기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서 어느 곳에서도 회화의 기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님이 말하는 우리나라의 동양화는 중국에서 온 것입니다.
중국 문인들, 즉 아마추어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난 양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제가 우리나라 미대에 있는 동양화 교수들에게 “최초의 한국화 화가는 누구이며, 최초의 한국화가 어떤 것이냐?”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전 아직도 우리나라의 최초 한국화 화가가 누구라는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한국화’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그것을 처음 그린 화가가 있어야 하고, 그가 그린 회화가 중국의 회화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되어야 합니다.
이런저런 구별 없이 막연히 ‘동양화’를 운운하면서 유구한 역사를 말하는 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유구한 역사는 세계 도처에 있습니다.
암각화도 세계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회화는 기록이었고, 소통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후세에까지 알리기 위한 방식이었으며, 좀 더 자세히 소통하기 위한 묘사였습니다.
‘정신’을 운운한 건 퍽 후의 일이었습니다.
문인이 보통사람보다 생각이 깊고 모범이 될 만하여 문인의 정신을 높이 기리다보니 문인이 그린 회화, 즉 문인화의 가치를 인정한 것입니다.

님은 “대부분의 동양화, 특히 관념화란 본인이 생각하기에 수없이 많이 보아왔던 사물들의 이미지를 작가의 생각에 의해서 종합된 이미지들이 재구성되어 작가의 관념의 세계를 표현하는 그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관념화는 말 그대로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직접 보고 옮기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보았던 것을 기반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화면에 옮긴 것입니다.
상상의 장면을 그린 것이지요.
그렇다보니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이상향을 나타내게 되고, 많은 기술을 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수없는 연습을 통해 단번에 그리는 훈련을 합니다.
먹의 성질상 단번에 그려지지 않으면 망치게 됩니다.
관념화는 고도의 기술에 의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그 기술은 전수된 것입니다.
관념화가 신선한 느낌을 주지 않는 이유는 우선 그것이 실재를 옮겨놓은 것이 아니고, 둘째는 전통적 방식으로 답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의성으로 말하면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완전히 제로라고 말하지 않는 건 거기에도 나름대로 창작의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말하면 서양화에도 ‘추상표현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걸 추구하는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정신을 한데 집중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붓에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단번에 기분 내키는 대로 그립니다.
정신을 순식간에 옮기지 않으면 정신이 흩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렇게 그린 그림은 고상한 것이 될까요?
내면을 표현한 것은 맞지만, 회화로서 평가할 때는 창의성을 보아야 합니다.
즉흥적으로 그리더라도, 정신을 옮기더라도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익힌 건 다름 사람들의 회화를 통해서였기 때문에 그 자신도 모르게 남의 기교를 따라 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님이 요사이 소나무 그림을 많이 그린다니 어떻게 그리는지 궁금합니다.
그 소나무는 수없이 많은 소나무들의 이미지의 합성이기도 하고 나의 관념의 표상이기도합니다”라고 했는데, 소나무의 본질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는 말로 듣겠습니다.
소나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서 오랜 시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소나무를 오랫동안 그린 화가의 작품을 비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소나무가 아니라고 혹평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소나무가 주는 짚은 인상이 있습니다.
가지가 어깨춤을 추는 인간에 비견될 정도로 흥에 겹고 흥치가 납니다.
또한 사계절을 꿋꿋하게 견디는 것도 소나무입니다.
뱀처럼 유연하게 위로 솟는 소나무에서 자연선의 아름다움이 발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자는 소나무 그림에서 이런 요소들이 발견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혹평한 화가는 너무 왜소하고 인위적으로 춤을 추는 듯한 아름다운 모습의 소나무를 그렸습니다.
자연의 기운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소나무를 고대했는데, 그런 점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나무를 그리던 참나무를 그리던 오동나무를 그리던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 고유의 본질 내지는 기질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랜 관찰과 형태를 고민하며 성공하기 바랍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삼나무와 올리브나무 그림은 유명한데, 그가 정신병원에 갇힌 동안 줄곧 그것들을 관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보고 또 봐도 삼나무와 올리브나무의 본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동양화로 소나무를 그리려면 수없는 습작이 요구될 것입니다.
김홍도의 소나무가 실재감을 줍니다.
님은 제가 이론으로만 말하고 있어 실제로 그리는 행위를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도 그림을 발표한 적이 있다고 말한 대로 그리는 행위를 잘 압니다.
그리는 행위 자체는 이론과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관람자를 대표하는 평론가의 비평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유능한 축구해설자가 막상 필드에서 뛸 수는 없지만, 많은 게임들을 보고 분석한 지식으로 해설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님의 나이가 중년이라 생각과 달리 잘 그려지지 않을 때 많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나이보다는 창작에 대한 열망과 상상력의 문제입니다.
창작에는 많은 독서와 명상도 도움이 됩니다.
어느 차원에서 바라보고 느끼는지는 독서와 명상으로 한껏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론이 난무하여 화가의 정신이 어수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화가가 대상의 본질을 그림으로 보여준다면, 관람자는 그것을 알아보고 칭찬할 것입니다.
모조록 님의 소나무 회화에 큰 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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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창설자 플로티누스Plotinus(204~270)는 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는 아주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부터 로마 군인들의 힘이 하늘 옾은 줄 모르고 쑥쑥 자라더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황제를 선출했으며 나중에는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를 많은 권리금을 받고 팔았다.
중이 고기맛을 안 것처럼 군인들이 돈벌이에 전념했으니 자연히 국경을 지키는 일이 허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틈을 노린 독일군이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가해왔으며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공격을 감행하면서 잃어버린 그들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고 했다.
전쟁과 흑사병이 이탈리아 인구를 삼분의 일로 줄어들게 했으며 정부는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세금을 올렸으므로 과중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달아났고 군인들은 시민들이 달아나지 않도록 감시하기에 바빴다.
이런 어지러운 시기에 위대한 철학자 플로티누스가 태어난 것이다.

플로티누스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과 콘스탄티누스가 왕국을 재정비하면서 질서를 회복했는데 이런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지만 플로티투스의 글에는 시대에 관한 암울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선과 아름다움이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유했는데 아마 대단한 낙천주의자였거나 초현실주의자였던 것 같았다.
낙천주의자답게 그는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인들을 차별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잘 어울렸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가망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희망이 있는 정신세계에만 머무르려고 했다.

그가 추구한 정신세계란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망한 후에야 즐길 수 있는 하늘나라였지만 그에게는 환상과도 같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반대되는 관념의 이데아 세계였다.
딘 인제Dean Inge는 플로티누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플라톤주의는 부분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발기지 않고서는 플라톤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했다.
플로티누스 안에서 플라톤은 부활을 맞았다.

플로티누스는 중세 기독교 신학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가톨릭 신학에서 중요한 인물으로 인정받고 있다.
플로티누스가 설명한 이데아 세계는 아주 아름다운데 단테Dante가 낙원을 찬양한 것에 해당한다.
플로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가장 정련된 환상으로는 순수하게 응집된 거침없는 노래가 사파이어 색들로 아롱지는 왕좌에 앉아 있는 그분 앞에서 불려진다."

사파이어 광채가 아롱지는 왕좌 앞에서 노래하는 플로티누스에게 당시 군국주의의 부패 따위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럿셀은 플로티누스에 고나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주가 반사하는 것에 의해 수반되는 기쁨과 비탄만이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산출하며, 사람은 즐거워하는 절망주의자이거나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인데 플로티누스는 후자에 속한다."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 플로티누스는 유물론을 배척했으며 플라톤의 이론을 아주 선명하도록 재현했고 영혼과 몸에 관한 그의 이원론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욱 더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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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로코코Rococo라는 말은 프랑스어 로카이에Rocaille에서 연유했
다.
로카이에는 작은 동굴과 우물을 장식한 조개와 바위를 의미했다.
18세기 중반부터 이 말은 기괴한Grotesque, 아라비아식의 기이한
Arabesque, 그리고 중국식 방법Chinese manner이라는 말들과 함
께 바로크와 비슷한 말로 사용했으며 자유롭고, 불규칙하며, 유연
한 선으로 장식한 형상들을 그렇게 불렀다.

18세기 말에 와서 로코코와 바로크란 말은 다비드 제자들 사이에 혼
용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와서부터 로코코는 바로크 대신 사용
되기보다는 18세기의 예술에 국한시켜 사용했다.
오늘날 학자들이 로코코란 말을 사용할 때는 약 1700년부터 프랑스
혁명까지를 뜻하고 17세기를 바로크로 분류하면서 따로 구별한다.
일부 학자들은 로코코를 단지 바로크 후기의 프랑스 예술에 한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일부 학자들은 루이 15세 시대의 장식적 양식에 국
한시켜서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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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요람은 이탈리아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예술의 신장을 꾀했지만 16세기 말과 17세기
의 첫 10년까지 로마는 유럽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예술의 성지였
다.

바로크Baroque라는 말의 어원이 몇 가지 있다.
영어 Baroco라는 말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16세기의 반학문주의
학자들이 중세의 논리학자들의 삼단논법이 가소롭다고 빈정거린 데
서 찾을 수 있고, 이탈리아어 바로키오Barocchio에서 그 의미를 찾
는다면 떳떳지 못한 돈관리에서 찾을 수 있으며, 포루투칼어 바로코
Barocco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16세기부터 그들이 제멋대로 생
긴 진주를 그렇게 부른 데서 찾을 수 있다.

바로크란 말은 이처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18세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낯설거나 기괴한 것을 가리켜 이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18세기의 프랑스와 독일 작가들이 바로크적 감각에 관해 언
급할 때는 으례 나쁜 감각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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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 대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열정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에서는 프리메이슨Freemasons(중세 석공의 숙련공 조합원)과 건축가가 속속 배출되었다.
다비드의 아버지 루이 모리스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브레이드, 리본, 레이스, 주름장식 등을 제조하는 사업을 했다.
어머니 마리 제네비에브 부롱은 벽돌공이며 건축업자의 딸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사업이 번창하자 당시 새롭게 부상한 철 도매업에도 투자했다.
그는 돈을 주고 말단 공무원직을 샀는데 18세기 프랑스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이런 품위를 갖추는 생활에 매우 만족해 했다.
그는 1757년 12월 2일 칼바도스를 여행하던 중 피스톨 결투로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왜 결투를 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9살에 아버지를 여윈 다비드는 외삼촌 프랑수아 부롱과 이모부 자크-프랑수아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는데 보호자 두 사람 모두 목수, 건축가, 건설업자였다.
부롱가는 18세기 후반 파리의 급격한 건설붐을 타고 많은 돈을 벌었다.

다비드는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보내졌고 마지막 학년을 쾨트르-나시옹 대학에서 마쳤다.
학문적으로 명문인 이 대학은 라틴어를 완전하게 구사하도록 가르쳤고 그리스사와 로마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다비드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므로 고대사와 영웅들에 관해 충분히 배워 알고 있었지만 학자로서의 자질은 없었다.
훗날 그는 모교를 두 번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한 번은 1796년 죄인의 몸으로 갇힐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다음은 10년이 지난 후 영예로운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방문했는데 그 시기 이 대학은 프랑스 아카데미의 온상이었다.

어머니는 다비드가 군인이 되어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랐고 보호자인 외삼촌과 이모부는 건축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보통의 부르주아 출신 젊은이답지 않게 그는 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비드는 훗날 자신에 관해 적었는데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한 것이 흥미롭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드로잉에 열심이었다. ...
회화에 대한 열정은 가족들의 반대에 비례해서 더욱 더 커졌는데 가족들은 화가가 되는 걸 반대했지만 그는 드로잉을 마스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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