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치는 시간과 공간의 내밀한 연관성



루카치는 인간의 감각적·인간적 주변 세계를 도식화하고 그럼으로써 경직되게 하는 일상생활에 침투된 물신화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키는 사고를 꼽았다.
그는 공간과 시간의 물신적·형이상학적 분리가 무엇보다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제기된 ‘선험적 미학’ 이래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칸트를 능가할 만큼 그런 분리를 물신화시켰지만 헤겔의 철학은 늘 정열적으로 그런 경향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면서 “헤겔 철학의 입장에서 특징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 전체가 보편적인 인식론상의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 칸트의 경우에는 그것이 인식론의 도입부로 남아 있다 - 자연철학의 보편적 일부분을 이룬다”21)고 했다.
그는 헤겔의 『대백과 Enzyklopadie』의 말을 인용22)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불가분의 연관성이 변증법적임을 지적했다.
그는 헤겔이 “공간의 과학, 즉 기하학에 대해 시간의 과학이 결코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23)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사태의 본질에 맞도록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루카치는 이런 식으로 헤겔 미학을 자신의 유물론주의 타당성에 관련 지웠다.
시간과 공간이 늘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명하고 명백하다고 본 루카치는 시간과 공간의 내밀한 연관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에 관한 생각들을 확장하게 해주는데 유사 공간이나 유사 시간과 같은 표현들을 예로 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마르크스의 정의24)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유사 시간에 대한 객관성과 주관성에 관해 예를 들어 설명한 후 유사 공간은 오직 주관적 특성만을 지닐 수 있다고 했다.
유사 공간Quasiraum을 시간이라는 동질적 표현매체를 통해 작용하는 예술적 구성에 반드시 동반되는, 수용체험을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결과로 보았다.
그는 음악과 문학에서의 유사 공간, 조형미술에서의 유사 시간은 예술세계 전체가 펼쳐지기 시작하는 초입에서부터 인간이 자신의 감각을 가지고 주위세계와 맺는 관계 및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주위세계의 영향과 맺는 관계의 미적 재생산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물신적 분리를 해체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경향과 운동경향으로 인해 그러한 물신적 분리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25)고 주장했다.
루카치는 음악의 유사 공간은 그것에 의해 창출된 병존관계가 오직 시간적 선후관계의 계기로서 작용할 때만 미적 의미를 획득하고 유사 공간의 영역에서 수행하는 물신성의 해체라는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시간의 불가역성의 작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의미가 있다고 했다.
마르크스를 좇아 시간을 인간발전의 공간으로 여긴 그는 시간에 내재하는 명백한 방향성이 비유기체적인 자연에 있어서도 특정한 사건경과의 불가역성을 내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유사 공간이 시간적 선후관계를 자체의 작용이 미치는 한도 안에서 시간적 병존관계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러한 유사 공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전망 사이의 비교가능성 내지 대비점들을 창출하게 되며, 그러한 대비를 통해 우리는 발전의 결과로 생겨난 새로운 것의 본질을 진정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그 자체로서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령 음악에서 어떤 모티프나 선율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의미의 반복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현상방식이 재현되는 것은 오로지 새롭게 창출된 상황 속에서 근본적으로 새롭고 변화된 것을 조금도 애매하지 않게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도약대와 같은 것이다.26)
그는 세계창조적 경향을 지닌 예술이 미적 체험의 환기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공간, 시간, 운동과 같은 기본적 범주들을 모든 가능한 효과의 불가결한 전제조건으로 고려할 것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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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에두아르 마네(1832~83)는 삶의 경험 자체가 변화하므로 예술이 변화해야 하며 화가는 현대생활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선구자이다.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평편한 표면이라는 회화의 물리적인 성질을 인식하기 시작한 마네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모더니스트 회화>(1960)에서 모더니스트 회화란 말을 사용했다.
1863년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를 그리기 얼마 전 마네는 친구이며 훗날 프랑스 문교부장관이 된 프루스트와 함께 센 강가에서 일광욕하는 여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도 누드를 그려야 할 것 같아. 음, 내가 저들에게 누드를 보여주겠어!”라고 했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스페인 의상을 한 두 중년 신사와 누드의 여인이 준비해온 점심식사를 풀밭 위에 펄쳐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주말이면 중산층이 센 강가로 피크닉 가서 오찬을 즐기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작품처럼 여인이 누드로 남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경우는 없었다. 피크닉 장소에 여인이 누드로 앉아 있다는 것은 아주 과격한 회화적 시도였으며 그런 모습을 본 관람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고전적인 누드가 아니라 벌거벗은 모습으로 평론가들은 고전적인 주제의 누드를 평범한 여인에게 적용한 데 놀랐다.
누드 여인은 마네가 아까던 모델 빅토린 뫼랑이다. 마네는 화실에서 누드를 그린 후 피크닉 장소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두 남자는 마네의 동생과 여동생의 미래의 남편이었다. 황제가 이 작품을 “뻔뻔스러운 그림”이라고 비난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문제의 작품을 보려고 주말이면 전시장 밖에 줄을 섰다. 평론가 아메르통은 황제의 말에 동조하면서 적었다.
“철면피 같은 프랑스 작가 마네의 그림은 조르조네의 <샴페르트 컨서트>를 프랑스의 사실주의로 해석한 것이다. 비록 여인들이 벌거벗었지만 조르조네의 작품은 아름다운 색상으로 용서받을 만했다. 그러나 마네의 작품에는 사내들의 복장이 아주 해괴망칙하고, 다른 여인은 스미즈차림으로 냇가에서 나오고 있으며, 두 사내는 바보같은 눈짓을 한다.”
마네는 이 작품의 제목을 <일광욕>이라고 하려 했는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꾀했다. 르네상스의 조르조네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도 바토, 부세, 코로 등에게 친근해진 고전적 주제를 마네는 현대화하여 나타내려고 했다. 이 작품에 쏟아질 비난을 마네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 작품에서 누드뿐 아니라 앞의 세 사람의 구성, 옆으로 쓰러진 바구니, 정물 등 부분들의 묘사가 뛰어나다. 마네는 이 작품을 88-116cm의 크기로 그렸다가 그로서는 처음으로 커다란 캔버스에 다시 그렸다. 야심을 갖고 그렸음을 알게 한다.
이 작품은 에밀 졸라가 호평한 후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이 무슨 외설이란 말인가! 장성한 두 남자 사이에 옷을 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라니! ... 사람들은 화가가 뚜렷한 화면공간의 배분과 가파른 대비의 효과를 위해 인물의 구성에서 외설적이고 음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말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풀밭에서의 오찬이 아니라, 강렬하고도 세련되게 표현한 전반적인 풍경이다. 전경은 대담하면서도 견고하며 배경은 부드럽고 경쾌하다. 커다란 빛을 듬뿍 받고 있는 것 같은 살색의 이미지, 여기에 표현된 모든 것은 단순하면서도 정확하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마르크 앙투안느의 <파리스의 심판>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것이다. 마네는 누드 여인으로 하여금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게 했다. 과거에 누드를 그린 화가들은 모델이 다른 곳을 응시하게 하여 관람자가 누드를 제삼자를 바라보듯 거리낌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했지만, 마네는 모델을 이인칭으로 그려서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게 했다. 이는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관람자와 그림이 더욱 친숙하게 되었으며, 또한 관람자가 주제를 자신들의 시대적 감각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것으로 작품감상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낙선하자 낙선전을 통해 파리 시민에게 소개되었다. 낙선전은 살롱전 개막 2주 후 5월 15일에 개최되었고 입장료는 1프랑이었는데 무려 7천 명이 관람했다. 낙선전은 큰 규모로 개최되었는데 12개의 화랑에 무려 1천 2백 점이 소개되었다. 마네는 낙선전의 스타로 부상했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젊은 세잔의 마음을 뒤흔들었는데 그는 1870~71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두 점을 그렸다. 세잔은 이 시기에 과격한 그림을 그렸으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느낌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서 나무 위로 곧게 솟은 것과 그 아래 세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세워진 포도주병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 마네와 달리 그는 환상의 누드 속에서 성적 욕구를 느끼는 남자의 모습을 묘사했다.
1863년 낙선전에서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를 본 모네는 마네의 작품에 버금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습작을 거듭한 끝에 1866년에 418-367cm의 크기로 완성했다. 25살의 모네의 야심이 담긴 작품이다. 그의 의도는 마네의 작품보다 자연스러운 장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모네의 작품도 화실에서 그린 모델을 풍경 속에 배치한 것이다. 그는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것 같은데 12명이 등장하는 피크닉 장면이다. 모네는 사람 하나하나를 습작으로 연구하면서 그림 전체에 대한 구성을 시도했는데 중앙에 왼팔을 내밀어 접시를 권하는 여인의 모습만이 예외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포즈를 취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피크닉을 위해 마련한 음식이 화면 중앙에 펼쳐진 것이 전부이다.
그림에는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빛이 그림을 과격하게 보이도록 한다. 빛이 나무 아래로 쏟아졌고, 따라서 명암이 분명하게 그림 전체에 나타났다. 모네의 관심은 모델들이 아니라 빛이 사람과 자연에 작용하는 데 있었다. 빛은 나뭇잎에 닿아 푸른색과 금빛으로 아롱진다. 그는 빛이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닿아 눈부시게 나타나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미완성으로 그쳤다.
쿠르베가 그림을 비평하고 돌아간 뒤 모네는 1866년 살롱전 출품을 포기한 것 같다. 쿠르베는 너무 크게 구도를 잡은 그림이라서 야외풍경화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림의 남자들 대부분은 바지유를 모델로 한 것이며 중앙에 앉아 있는 수염난 남자는 쿠르베로 보인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에 여인이 여러 명 등장하지만 모두 카미유 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다. 열여덟 살의 카미유는 모네의 애인으로 나중에 그의 첫 부인이 된다. 훗날 왜 단 두 명의 모델로 여러 사람을 묘사했느냐는 질문에 모네는 두 사람밖에 모델을 구할 수 없었고 돈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개개인의 인물에 대한 성격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족했던 것 같았다.
1920년 모네의 화실을 찍은 사진을 보면 <풀밭에서의 점심식사>가 벽에 걸려 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방치했으므로 왼쪽과 오른쪽 부분이 손상되어 그 부분들을 잘라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모네가 1926년 타계할 때 지베르니의 화실에 있었으며 크기가 248-244cm였다. 그는 이것을 1920년 80회 생일을 맞아 자신을 방문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마네의 그림을 따라서 그렸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난 야외에서 그림을 구성한 후 화실에서 완성했지. 난 이 작품을 좋아하는데 미완성이며 많이 상해 있네. 세 얻은 방의 보증금 대신 이 작품을 집주인에게 준 적이 있었는데 집주인은 캔버스를 둘둘 말아 지하실에 쳐박아 두었네. 돈이 생겼을 때 이 작품을 도로 찾아왔지만 작품이 조금 상한 상태였어.”
1866년 모네가 동일한 주제로 다시 그린 그림을 보면 원래 그림 중앙 부분을 그대로 보존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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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는 이런 루카치의 견해를
 

 

 헝가리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1885-1971)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을 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미학의 영역이 헤라클레이토스적 구조를 지녔다고 보았다.
미적 대상의 통일성이 결코 사실적 소여가 아니라고 본 그는 미술품은 단지 빈 형식, 즉 다수의 가능한 미적 체험들의 단순한 합류점일 뿐으로 보았다.
미적 대상은 이 미적 체험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가다머는 이런 루카치의 견해를 오스카 벡커Oskar Becker의 말로 규정했는데 벡커는 논문 『아름다움의 나약함과 예술가의 모험성 Die Hinfalligkeit des Schonen und die Abendteuerlichkeit des Kunstlers』에서 “시간적으로 보면 미술품은 단지 순간(즉 지금)에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지금’ 이 미술품으로 존재하며,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이 미술품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17-1)
루카치는 미술품의 절대적 순간성Punktualitat을 지적하면서 이 순간성이 미술품의 통일성을 해체시킬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정체성 및 이해자나 향유자의 정체성도 파괴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에 대한 탐구는 1920년대에 예술의 사회적 기초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들 가운데 두드러진 이들이 영국에 망명한 사람들로 독일에서 건너간 클링엔더Francis D. Klingender, 빈에서 막스 드보르작과 함께 예술사를 공부했던 안탈Friedrich Antal, 헝거리에서 영국으로 와서 곧 예술사회학의 지도적 대표자가 되었던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이다.
영국인 허버트 리드Herbert Read(1893-1968)가 1930년대에 이들과 어울린 적이 있다.
그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전시킨 예술적 상부구조에 관한 명제와 사회의 생산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예술의 지위였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랄로Gebiet Charles Lalo(1877-1953)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48년에 에티엔느 수리오E. Soriau와 더불어 잡지 『미학 Revue d’esthetique』을 공동으로 창간했다.
하우저와 마찬가지로 랄로는 예술창작의 사회학적 맥락에 관한 연구였는데 작업의 성과가 『과학적 음악 미학 Equisse d’une esthetique musicale scientifique』(1908), 『미학입문』(1912), 『예술에 의한 삶의 표현』(1933), 『삶에서 멀어진 예술』, 『예술과 삶』(1946/47) 등에서 나타났다.
루카치의 이론은 대표적인 것으로 미학의 한 중요한 형태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그의 사상은 본래 칸트와 헤겔로부터 출발하여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의 생철학과 신칸트주의와 더불어 형성되었다.
루카치는 1912년에 출간한 초기 저작 『예술철학』에서 전통 미학에 관해 비판했다.18)
초기의 글에서 루카치가 피들러를 잘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쿨터만은 피들러와 관련해서 루카치 이론의 특징을 관념론적 미학에 대한 대항에서 내용의 기능만큼이나, 그와 반대되는 징후를 통해 더욱 진전된 관념론적 미학을 이해한 것으로 보았다.
한스 페터 투른Hans Peter Thurn은 이를 비판적 방식으로 보고 말했다.
프롤레타리아를 ‘새로운’ 예술의 담지자로서 인증하는 가운데 관념론적 입장의 새로운 정식화를 이론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루카치에 의한 사회의 문화적 혁명화는 소위 새로운 것의 실행을 단지 수정된 사회적 징후 아래 과거를 반복하는 것으로서만 열망하기 때문에, 구체제의 복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루카치는 후기 저작 특히 1963년에 출간한 『미적인 것의 고유성』에서 비로소 자신의 미학을 포괄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는 쿨터만의 말로 헤겔 및 마르크스주의적 예술 이해의 단초를 다시금 포착하여, 미적인 것의 특징들을 목록상으로 완전하게 제시하려고 했는데 그의 중요한 개념들로 현실성의 반영Wiederspiegelung der Wirklichkeit, 해소Ablosung, 환기력Evokative Krafte, 예술의 이중의미Doppelsinns der Kunst, 전형Typus, 비규정성Unbestimmtheit, 다원주의Pluralismus, 예술의 탈물신적 기능Defetischisierenden Funktion der Kunst 등이 있다.
루카치는 『미적인 것의 고유성』에서 인간의 자연적 환경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예술을 인간의 ‘자연적’ 환경을 그 환경이 인간과 맺고 있는 ‘자연적’ 관계로 보고 ‘자연적’이란 말을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예술의 그런 기능이 자연적 환경이나 일상생활의 관습이나 표상 따위와 갈등을 일으킬 수 있고 실제로 빈번히 일어나며, 철학이나 과학과의 관계에서도 그 같은 대립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19)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이 그 어떤 이상과의 합치라는 뜻을 내포한다면 미학이 플라톤주의로 퇴보하는 사태가 초래될 것이며,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데아론과 대결하면서 설득력있게 논박했던 그런 형식규정이 부활될 것이다. 즉 - 그런 특별한 의미가 아닌 -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은 그런 혼동과 애매모호함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어떤 의미를 지냐야만 한다.”
루카치는 그때그때의 사회역사적 가능성의 한도 내에서 진정한 예술실천에서는 자연발생적으로 탈물신적 경향이 표현된다면서 그런 경향이 오직 실재하는,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세계만을 인정하며 예술실천 속에 스며드는 물신적 표상을 해체시키고 외부세계를 실재하는 모습 그대로 표현하려는 지향성을 띤다고 보았다.
예술의 자연발생적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자연발생적·변증법적 성격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는 “사물을 직감적으로 그 연관성과 운동성 속에서 지각하는 일상생활의 소박한 ‘자연성’은 여기서 바로 이러한 연관성과 운동성을 구제하는 내용의 ‘세계관’으로까지 성장하기도 한다”20)고 했다.
자연발생적이란 개념은 그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데 그가 미적 반영 자체의 의미와 관련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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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의 선구자 히에로니무스 보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르네상스의 주요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친와 동갑이거나 두 살 연하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레오나르도는 르네상스 중심지인 이탈리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반면 보스는 르네상스의 영향이 직접 미치지 못한 변방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환경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화가로 활약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작품에서 이질적인 미학이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인문학이 발달하고 과학에 관심이 많은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중세적인 성격이 여전히 농후했던 네덜란드의 환경에서 태어난 보스에게는 자연히 그런 영향 하에서 작품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같은 시기의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그의 작품을 비교해볼 때 보스의 작품은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과거지향적인 색채가 현저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보스는 중세에 속한 화가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근대와 중세 사이에서 활약한 그의 작품에는 중세적인 요소가 다분하지만 자유분방한 창의력으로 근대를 예고하는 개성적인 표현 또한 현저하다. 중세적인 요소는 당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어두운 면을 반영할 때 나타났으며 개성적인 표현은 비판적이고 심리적이며 창작의 요소를 정밀사실주의 양식으로 한껏 드러난 데서 나타났다. 서양미술사에서 그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회화에서는 전례가 없던 개인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표현주의 양식을 선보였으며 풍경을 단지 배경으로 사용하지 않고 풍경 자체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각시켜 풍경화의 장르가 가능함을 시위했기 때문이다. 풍경화의 장르가 가능함을 시위한 화가로 레오나르도를 함께 꼽을 수 있지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표현주의 양식에서는 보스가 두드러진다. 표현주의가 시와 문학에서는 이미 나타났지만 회화에서는 보스가 처음 시도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보스가 타계하고 그의 작품이 4백여 년 동안 플랑드르와 에스파냐 회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지만 19세기 미술사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인간의 잠재의식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고부터 보스의 독특한 상상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보스가 남겨놓은 기록이 없는 데다 작품에 제작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학자들마다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과 언제 제작했는지에 대한 추정이 다르다. 작품을 심리적인 측면에서 프로이트의 말로 잠재의식의 표출로 보더라도 그의 잠재의식은 그가 생존했던 당시의 네덜란드 고유문화와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의 작품을 해석할 수 없다. 잠재의식은 은유적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므로 상징으로 사용된 각 요소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티프와 관련된 문화적, 종교적, 회화적 선례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더라도 그의 환영 혹은 악몽의 세계와도 같은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며 이를 놓고 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한다. 그의 작품은 워낙 독특하고 기괴해서 미술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인문학자와 심리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문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 심지어 소설가들까지도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일부 학자들은 심리적 분석을 통해 그의 작품을 잠재의식의 분출로 보고 때 이른 15세기의 초현실주의라고 말하고 있으며, 혹자는 연금술, 점성술, 마술과 같은 중세의 비의적 행위들을 반영한 것으로 보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아 설득력이 부족하다.
좀더 설득력을 갖춘 논문으로 빌헬름 프랭거가 보스의 작품을 중세에 존재했던 이단 종교와의 관련성을 지적한 것이 있다. 프랭거는 보스가 자유정신형제회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하는 바 13세기에 출현한 이래 수백 년 동안 유럽에 성행한 이 이교 단체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종교의식으로 성적 난교를 도입해 타락 이전의 아담과도 같은 상태로 회귀하기를 원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사람들은 형제회 멤버들을 “아담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프랭거는 보스가 <지상 쾌락의 동산>(벨팅 55, 56)을 자신이 살던 도시 스헤르토겐보스의 자유정신형제회를 위해 그렸다면서 중앙 패널의 에로틱한 장면은 성적 타락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이 종파가 추구한 종교적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보스의 그 밖의 작품들도 형제회의 신념과 관련지었다.
프랭거의 분석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은 1920년대의 시대적 불안, 그리고 희망과 관련이 있다. 보스의 작품이 워낙 기이하고 선정적이며 난해하기 때문에 개방적인 성에 대한 표현으로 볼 경우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점근은 현대인들이 성적 자유를 심리적, 사회적 억압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치료의 방법으로 성의 자유를 주장한 노먼 브라운은 저서 <사랑의 육체>(1966)에서 <지상 쾌락의 동산>을 자신의 논증의 예로 꼽았다. 그러나 보스가 자유정신형제회 회원이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프랭거의 주장은 신빙성을 결여한다.
16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미술에 조예가 깊은 월터 깁슨은 저서 <히에로니무스 보스>(1973)에서 보스가 자유정신형제회 멤버가 아니라 성모마리아형제회의 멤버였다면서 이 단체는 자유정신형제회와는 달리 성모 마리아에게 헌신하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길드로서 정통 교단이라고 주장했다. 깁슨은 보스가 성모 마리아 형제회로부터 주문받은 작품을 몇 점 제작한 적이 있으며 교회의 고위성직자와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음을 지적하여 <지상 쾌락의 동산>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의뢰받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필리프 2세의 소장품이 되었으며 그는 이 작품 외에도 보스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했다. 필리프 2세는 매우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였다. 당시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었고 이단 문제는 매우 심각했으며 종교재판을 통해 그 진위가 가려지던 때였다. 보스의 작품이 이교 종파와 관련이 있었다면 필리프 2세가 그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스가 이교 종파에 소속했는지 아니면 정통 종파에 소속했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의 작품에 중세의 비의적 행위들이 반영된 것만은 틀림없다. 이 점은 깁슨도 수긍한다. 다만 그의 작품을 20세기 초현실주의 논리로 설명하려고 한다든가 창작을 프로이트의 심리적 분석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중세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잠재의식은 중세 사람들에게는 확고한 믿음으로 신의 계시나 악마의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보스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 사람들의 신앙과 종교의식이 생활의 일부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의 작품이 동시대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알 수 있다. 보스는 20세기에나 가능했던 심리학자가 아니었으며 관람자의 잠재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교훈적이며 영적으로 교감하기 위해 그렸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그의 작품에 담긴 내용은 매우 명확하며 의도적이고 사고적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은유문학 작품과 같이 언어의 뉘앙스와 은유의 교훈으로 받아들이며 눈으로 읽어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중세 종교와 민간 설화에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마찬가지로 <지상 쾌락의 동산>과 그 밖의 보스 작품들은 몰락하는 중세의 희망과 공포를 반영한 것들이다.
보스의 작품에는 상징적인 동물, 인물, 행위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들에 대한 당시 통용된 보편적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작품 전체를 읽어낼 수 없다. 네덜란드인들의 전통 풍습과 그들의 생활화된 은유와 상징물들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작품의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보스가 처했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알고 작품에 표현된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에 대한 당시의 유머, 표현방식, 비판 등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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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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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의 정신과 물감 흘리기 기법


잭슨 폴록(1912~56)은 1912년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났고, 1925년부터 남부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는 동안 잠시 조각에 관심을 가졌지만 1930년 가을 열여덟 살 때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미국인의 삶의 특색을 그린 토머스 하트 벤턴으로부터 수학하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0년대 초 미국 예술가들에게 멕시코의 벽화예술가들의 영향이 대단했으며 폴록은 1936년 형을 통해 만난 적이 있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1896~1974)의 조수가 되어 드로잉 없이 물감을 직접 칠하며 그리는 대담한 기법을 영향 받았다. 시케이로스는 여러 각도를 고려하여 개선한 복합 원근법과 왜곡의 방법을 이용하여 환영적인 장치들을 만들고, 이를 포토몽타주 기법과 함께 벽화에 응용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메시지가 주는 충격을 확대했다. 서른아홉 살의 시케이로스는 1935년과 이듬해에 뉴욕에 실험 공방을 열고 새로운 합성 재료와 공업 재료들, 포토몽타주 및 물감 뿌리기 기법을 선보였다. 폴록은 자진해서 이 실험 공방에 조수로 일하면서 그의 회화방법을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시케이로스는 물감을 깡통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연히 나타나는 이미지를 창조했으며 이런 방법이 폴록을 감동시켰다. 그해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시케이로스의 방법으로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기법을 실험했다.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단계에 불과했던 폴록의 물감 흘리기 기법은 이런 기법으로 폴록이 유명해진 후 평론가들로 하여금 언제, 그리고 누가 먼저 사용했느냐 하는 문제를 삼아 다투어 글을 발표하게 했다. 폴록이 정확하게 이 기법을 언제 누구로부터 발견했는지는 그 자신만 알겠지만 부분적으로 시케이로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폴록은 피카소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는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를 보고 입체주의의 효과를 알았다. 폴록은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리기 시작했으며 <게르니카>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 <남자, 황소, 새>이다. 황소는 조국 스페인에서 투우 관람을 즐긴 피카소가 선호한 주제였다. 폴록은 피카소가 스물여섯 살 때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보고 “내게 지독하게 중요한 그림이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는 피카소의 작품에서 예술과 무의식세계의 직접적인 관계를 보았다. 폴록에게는 정신분열 증세가 있었으므로 더욱 그런 점에 매료되었다.
1938년 폴록의 정신분열이 정기적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폭음했으므로 증세는 돌발적이었으며 위험했다. 학문적 성과를 위해 폴록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려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었는데 조셉 헨더슨으로 그는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였다. 9년 동안 유럽에서 유학하고 1938년에 귀국한 그는 1939년 5월부터 폴록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폴록을 만난 후 헨더슨은 폴록이 네 가지 개성인 직관, 느낌, 감각, 사고의 기능이 통합적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그의 본능적 경향들이 집합적 무의식 안에서 어떤 경향으로 나타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의 개성들의 재통합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을 보고 그의 무의식세계를 탐험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서 들소가 여인을 공격하는 장면이 에로틱하게 묘사된 것을 보았으며, 들소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사람이 들소로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말은 뱀으로 둔갑했고 뱀은 몸을 둘둘 감은 모양으로 여자의 자궁 안에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헨더슨은 폴록의 창작과정을 거꾸로 연역하여 그의 드로잉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무의식세계에서 분출하는 이미지들에 그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가치등급을 정하는가를 살폈다. 폴록이 헨더슨의 치료를 받은 기간은 18개월이었다. 폴록은 그에게 82점의 드로잉을 주었으며 과슈로 그린 그림 한 점은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이 작품들은 훗날 ‘정신분석적 드로잉’으로 불리면서 학자들 사이에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대 중반까지 폴록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4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세 점을 그렸는데 <속기술적 모습>, <달 여인>, <남성과 여성>이었다. 이것들은 좀더 복잡하고 고유한 작품이다. <속기술적 모습>은 반추상의 이미지로 비스듬히 기댄 누드화였다. 몇몇 평론가들은 그 작품이 실제로는 남자와 여자 두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견해에도 타당성이 있었다. 이것은 피카소와 미로의 영향과 생리적 현상들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작품이다. 폴록의 작품은 나중에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들었다. 원래 추상표현주의란 말은 모마의 관장 알프레드 바가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화에 붙인 말이었고 이 말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중반부터였다.
폴록은 1943년에 <암이리>를 그렸다. 암이리는 로마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로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 키운 로마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이리이다. <암이리>는 이런 신화를 참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두 동물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왼쪽 동물은 황소로서 피카소의 황소 그림을 연상하게 하며, 오른쪽의 것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미국의 5센트짜리 동전에 그려져 있는 들소처럼 보인다. 두 동물은 두툼한 붉은 화살로 황소의 심장으로부터 들소의 머리까지 수평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화살은 인디언 회화에서 발견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암이리>는 유럽의 황소와 미국 들소의 만남이었고 두 놈은 인디언의 화살 같은 것에 맞아 폴록의 전리품이 되었다.
폴록을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물감 흘리기 기법은 1946년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1946년에 여러 가지 물감을 실험했다. 유채 외에도 상업용 에나멜 페인트, 배관공이 사용하는 알루미늄 페인트, 그리고 가정용 페인트도 사용했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마치 무대에서 행위를 하듯 그렸으므로 그의 그림을 액션 페인팅이란 명칭으로 부른 것은 잘 어울렸다. 그는 유채물감을 묽게 타서 깡통에 담고 막대기로 물감을 젓다가 허공에 휘휘 저으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지게 했다. 그러면 캔버스에는 아주 가는 선들이 나타났으며 물감이 막대기에서 거의 흘러내렸을 때는 더욱 가는 선들이 나타났다. 이런 방법으로 그린 작품을 소개하자 평론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949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폴록은 말했다.
“난 회화기법에 관해 어떤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기법은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 절로 생기지만 기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폴록 작품의 특징은 올오버 회화이다. 이는 전체 화면 내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을 두지 않으며 따라서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전통적 의미의 구성을 포기한 양식이다. 폴록의 그림은 캔버스의 형태나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려져 있다. 이후 이런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파들이 캔버스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올오버 양식의 영향이었다. 또한 폴록은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했다. 서체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를 창출하며, 움직임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를 가로질러 중앙을 향한다. 이런 모든 특징들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개화한 새로운 미국 회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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