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onysus in a Boat

 
그리스의 도공들은 예술적으로 혹은 기술적으로 훈련을 받은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도자기에 사람의 모습들을 검정색으로 묘사했는데 기원전 540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직경 12인치되는 술잔에 그려진 '배를 탄 박카스 Dionysus in a Boat'를 보면 배와 박카스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를 검정색으로 묘사했으며 돛은 나무처럼 줄기로 하고 포도를 주렁주렁 매달아 박카스가 주신임을 나타냈다.
디오니소스Dionysus는 박카스의 또 다른 명칭이다.
철학자 니체가 디오니소스적 예술 어쩌구저쩌구 했는데 바로 박카스적 혹은 열광적 예술 어쩌구저쩌구란 뜻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니체는 아폴로적 예술 어쩌구저쩌구 했는데 아폴로는 태양의 신으로 조화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아폴로적 예술은 조화를 뜻하는 데 반해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반조화적 혹은 조화를 무시하고 열광을 나타내는 예술을 뜻한다.
박카스가 배를 탄 모습은 신화에서 가져온 주제로 호메루스에 의하면 박카스는 한때 해적들에게 유괴된 적이 있었고 그는 배 전체를 포도줄기로 채워 포도가 열리게 했으며 해적들은 공포에 질려 모두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그들은 고래가 되었다는 것이 신화가 전해주는 내용이다.
질그릇에 그려진 박카스가 탄 배 주변에 있는 고래들은 바로 해적들의 화신인 셈이다.
7마리의 고래와 7송이의 포도는 박카스의 항해에 행운을 비는 듯한 것들로 보이는데 7이란 숫자는 온전한 수를 상징한 것으로 성서에도 7은 온전수로 사용된다.
7이 온전수란 말은 7일 동안 기도했다고 할 때 꼭 일주일을 기도했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기간 동안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은 온전수의 마지막 수로 우리가 사용하는 10에 해당한다.
10 다음에 다시 11, 12 하고 사용하듯 7이 끝나면 다시 셈이 시작되는 것이다.
수의 개념에 이런 것도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40의 수가 있다.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를 헤맸다고 할 때 40일은 한 달 하고도 열흘이라기보다는 아주 오랫동안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광야를 40년 동안 헤맸다고 할 때 39년 하고도 1년을 더 헤맸다고 하기보다는 아주 아주 오랜 세월을 헤맸다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41년 혹은 49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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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작품들과 이론을 정확하게


미켈란젤로는 장수했기 때문에 그의 사고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하여 체계적으로 한 줄기로 정리하기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로마에서 제작한 초기의 작품들은 전성기 르네상스가 한창 꽃핀 상태의 양식을 보여주지만 사망하기 전인 1564년 그는 매너리즘 양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과 이론을 정확하게 구획지어서 나누기란 가능하지 않으나 대략 나누면 다음과 같다.

1530년경까지의 첫 번째 시기에 나타난 미켈란젤로의 예술관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Pieta> 그리고 초기에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은 이런 그의 예술관을 잘 말해주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회화의 과학적 전통을 고수했지만 네오플라톤주의에 접하면서부터 그 영향권 하에서 성장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바로 미 자체였다.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묘사된 인물상들의 웅대함은 자연현상의 단순한 모방 이상을 지니는데 그의 인체 이상화는 자연 형상을 면밀히 연구한 끝에 얻은 지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인체미에 대한 숭배의 요소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로마의 전성기 르네상스는 사상 면에서는 기독교와 이교라는 상반된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시스티나 성당 천정 프레스코는 도상학적 면에서 보면 가장 박식한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인물상들의 외양은 이교 신들의 모습을 띠고 있다.
네오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에게는 기독교와 이교 둘 다 소중했다.
그는 처음부터 말년의 신앙생활을 물들인 열정적인 자기 포기의 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보나롤라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아주 신실한 가톨릭교도가 되었다.
물질계의 미에 대한 그의 믿음은 대단했는데 그가 초기에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에는 네오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미와 가시적 미를 향한 진한 열정이 종종 육체적인 정열과 어우러진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그의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바자리와 콘디비 두 사람 모두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데 만족해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인체를 해부해 가면서 매우 열심히 해부학을 공부했음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믿지 않았다.
바자리에 의하면 그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의 연필소묘를 한 번 했을 뿐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한, 살아 있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초상화라는 것을 그리지 않았다”59-1)고 한다.
홀란다는 미켈란젤로가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폴랑드르 회화를 경멸한 것으로 보았다.
콘디비는 제우시스가 그린 크로톤의 <비너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미켈란젤로의 방법을 서술했다.

그는 인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아름다운 사물을 모두 좋아한다. … 회화세계에서 자국을 남긴 모든 예술가가 그렇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벌꿀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자연 안에서 아름다운 것을 골라내 작품에 나타나게 한다. 저 나이든 스승은 비너스를 그리는 데 있어 한 처녀만을 보고 그리는 데 만족해 하지 않고, 많은 처녀를 보고 다각도로 연구하여 각자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특징들을 골라내 자신의 비너스로 만들어낸다.59-2)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내 영혼이 눈을 통해 처음으로 접한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동안
정신적인 영상은 커지지만 물질적인 영상은 움츠러든다.
마치 천하고 별 가치없는 사물인양.59-3)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예술가란 자연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기는 하지만 자연 안에서 보는 것을 그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의 가시적 미를 직접적으로 표상해내지 않은 대표적인 작품이 그가 1534년과 1541년 사이에 클레멘트 7세와 바오로 3세를 위해 그린 시스티나 성당 제단 위에 있는 프레스코 <최후의 만찬 The Last Judgment>이다.
그가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아담의 형상을 그릴 때만 해도 그는 실재보다 훨씬 이상화시켰지만 실제 생활에서 아름다운 인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형상을 묘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그의 목적이 달라졌다.
여기서의 인체는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며 사지는 두껍고 우아함이 결여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것처럼 미켈란젤로가 손을 떨기 시작해서 그렇게밖에는 그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더 이상 물질적인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기를 중단한 때문이다.
그는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또는 정신적인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물질적인 미를 이용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실제 세계의 공간이나 원근법, 전형적인 비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무시된 듯하다.
그가 물질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정신적인 것으로 향한 경향은 그가 늙어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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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감성의 문제로 본 아실 고르키

 
추상표현주의에서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본명은 보스다니그 마누그 아도이안Vosdanig Manoog Adoian인데 그는 아실 고르키란 예명을 사용했다.
아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스Achilles에서 유래된 말이고 고르키는 러시아말로 ‘냉혹한 사람 the bitter one‘이란 뜻이다.
그는 고르키란 이름을 러시아 작가 막심 고르키Maxim Gorky에서 따왔는데 종종 자신과 맥심 고르키와는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으로 맥심 고르키 또한 예명이다.
고르키는 폴록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으며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폴록과 함께 그로부터 수학한 필립 페이비어는 “고르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고르키로부터 수학한 휘트니 대로우는 “고르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고르키는 자신의 강의실에 헝가리아인 바이올린 연주자를 데리고 와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동안 연주하게 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감성을 작품에 이입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고르키는 1904년 아르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어머니는 고르키와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인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는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르키는 여동생을 데리고 난민 틈에 끼여 1920년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주의 수도 프로비던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르키는 프로비던스와 보스턴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21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그만두고 나중에 교사로 부임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중 한 사람으로 나중에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로부터 수학했는데 로드코의 말에 의하면 고르키는 엄격한 교사였다.
가르치지 않을 때는 그는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로드코의 개인전이 열렸을 때 화랑에 온 고르키는 그림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다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제자 한 사람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이 부분을 조금 엷게 하라”고 했다.
고르키는 처음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렸으며, 그의 별명은 ‘워싱톤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긴 후로는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로베르토 마타, 호앙 미로의 그림을 연구했다.
고르키는 동갑내기 드 쿠닝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드 쿠닝은 고르키를 가리켜서 자신이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고르키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는 인정받은 예술가였으며 휘트니 뮤지엄은 1937년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고 이듬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고르키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 카탈로그를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썼다.
고르키는 1944년에 제작한 <아티초크의 잎은 올빼미이다 The Leaf of the Artichoke Is an Owl>도 이때 소개했다.
브르통은 “고르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적었다.
그는 초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추구한 화가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한다면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를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 화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고르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다.
칠레 사람 마타의 본명은 로베르토 세바스찬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b. 1911)이었는데 사람들이 부르기 편하게 마타라고 했다.
마타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파리에 안주했고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건축을 수학한 후 1937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브르통은 마타의 그림 한 점을 사주면서 “자네는 초현실주의 화가이네”라고 했다.
마타는 그때 자신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자신이 찾고자 한 것은 “작은 거북이가 사막 한가운데서 알로부터 깨어 나와 바다를 향해 조금씩 기어가는 것이었다”고 했다.
마타는 1939년에 뉴욕으로 왔고 젊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해 이내 미국 예술가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미국 예술가들은 마타의 아파트에 모여 자동주의 드로잉을 배웠는데 예를 들면 불, 물, 대지, 공기를 주제로 무심한 상태에서 드로잉하는 것이었다.
로버트 머더웰과 폴록도 그의 아파트에서 드로잉을 배웠다.
고르키의 아내는 고르키와 마타 두 사람의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 화재가 나서 고르키의 그림 27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사라졌고, 이튿날 암이란 진단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1948년 6월 26일에는 교통사고로 목이 부러졌고,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르키는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의 자신의 화실에서 자살했다.
그는 자살하기 한 해 전에 <고통 Agony>을 그렸는데 피빛 붉은색과 어두운 색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 <고통>을 보면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상징들을 사용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왼쪽을 향한 것은 치과 의자를 의인화한 것이며 의인화한 기계 중앙에 발기한 자지처럼 생긴 것은 털이 달린 원시인들의 숭배물처럼 보인다.
동물의 내장과도 같은 그가 사용한 유기적 형태들은 아르프, 미로, 혹은 마티스의 것들과는 달랐는데 고르키는 식물에서 주로 형태들을 가져왔다.
초현실주의의 교황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고르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자신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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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와 디자인의 관계는 된장과 청국장의 관계이다

 

 

아트와 디자인의 관계는 된장과 청국장의 관계이다
내게는 미술과 디자인의 관계가 된장과 청국장의 관계처럼 보인다.
둘 다 장인데 맛이 다른 장일 뿐이다.
디자이너들 가운데 디자인이 미술에서의 하위를 점한다는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술이 모태가 되어 19세기 후반쯤 영국에서 미술공예art and craft로 프랑스에서 아르 누보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거슬러올라가면 그리스인의 도자기에 나타난 그림과 문양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디자인이 아니겠는가?
그리스인은 미술을 테크네란 말로 '기술'이란 뜻으로 사용했는데 디자인의 경우 고도의 기술을 요하므로 디자인이 보다 그리스인이 말하는 미술에 가깝고 또한 원류가 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과 조각 그리고 리처드 세라의 드로잉과 조각을 디자인으로 보아야 한다.
미술의 개념은 팽창의 개념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술이라면 회화와 조각이었지만 2차세계대전 이후 많은 새로운 장르들이 생겨났으므로 미술은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장르와 장르 사이의 구별이 사라졌다.
건축이 디자인으로 취급되고 있듯이 디자인 개념이 확장되었다.
따라서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컴플렉스를 가질 필요가 없고 미술과 같은 장인데 청국장의 맛을 낸다고 생각해야 한다.
디자인에 관해 생각해봤는데 고대 이집트인은 의도적으로 창의력을 피하고 전통을 좇아 반복되는 무늬와 패턴을 추구했다.
우리나라 무늬와 패턴에서도 이런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꼭 창의력이 드러나야만 하느냐 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즉 창의력이란 늘 좋은 것이냐 하는 말이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창의력을 무엇인가가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남의 작품을 약간 변형시키기도 하는데 다르기만 하면 가치가 있다든가 칭찬받을만 하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가치가 있고 칭찬받을 만한 창의력이 있고 그런 창의력 때문에 새로운 미의 질서가 생기므로 바람직하지만 오늘날 많은 디자인이 변형일 뿐이지 새로운 창조가 아니지 않는가?
반복의 미가 아쉽다
어렸을 때는 바흐와 헨델의 음악이 너무 단조로와 싫었는데 성장해서는 반복과 은근한 다양성이 편안하게 해준다는 걸 알았다.
텍스타일의 경우 이집트와 인도의 무늬와 패턴을 보면 현대의 거의 모든 무늬와 패턴이 고대 이집트인과 인도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두 민족의 고대 문양을 보면 거기에 동그라미, 타원, 정사각형, 직사각형, 정삼각형, 직삼각형, 점, 아라베스크 선 등등 장식적 요소가 거의 다 있다.
색상을 말하라면 오늘날 사용되는 원색은 물론 파스텔 컬러도 있다.
이런 요소들이 반복과 은근한 다양성으로 확장되었다.
반복의 미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지붕 처마에도 있고, 기둥에도 있으며, 문지방에도 있고, 담벼락에도 있으며,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다.
이런 장식의 미는 실증나지 않는게 특징이다.
오늘날 디자이너들이 하는 짓을 보면 실용성을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든 다르게만 하려고 안달이다.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들었다는 책 표지를 보면 시각적으로 피로하고 혼란스러움을 느끼는데 여백을 남겨 놓는 데 앨러지라도 있는지 선을 그어대거나 색상을 여기저기 다르게 장식하고, 목차를 찾아내는 데만도 시간이 걸릴 지경이다.
디자인 이전에 책은 독자가 편하게 읽혀지도록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실용성을 왜 무시하는지 그러면서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훌륭한 디자인은 누가 봐도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순해야 한다.
누구라도 이내 모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리고 컴퓨터 조작의 디자인에는 신물이 난다.
사람의 때가 묻은 디자인이었으면 좋겠다.
기계를 사용한 디자인은 디자인이 아니다.
그건 기술일 따름이다.
이름 모를 디자이너가 칭찬받아야 한다
유명 디자이너의 쇼를 TV에서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소수를 위한 디자인이 왜 칭찬을 받는지 이해가 안 된다.
칼빈 클라인이나 그 외 디자이너들의 옷은 매우 비싸고 소수만이 즐긴다.
나는 GAP에서 주로 옷을 사입는데 싸고 편하며 디자인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것치고 디자인이 안 된 것이 거의 없지 않은가!
책상, 의자, 그릇, 연필, 컴퓨터, 된장, 고추장 등 모든 것들이 디자인된 것들이다.
디자이너들이 말하는 그런 디자인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 사람들의 디자인 개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의도를 갖고 만든 건 모두 디자인인 것이다.
디자인이 바로 그런 뜻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의도에 있는데 소수를 충족시키기 위한 의도보다는 다수를 충족시키는 의도가 더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대중적인 옷이나 그 밖의 용품들을 만든 이름 모를 디자이너들이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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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


구로다가 파리를 떠나기 3년 전 모네는 이미 로댕과의 2인전을 통해 조각에서는 로댕 회화에서는 모네라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지고 있을 때였다.
모네는 1890년 늦여름부터 건초더미를 모티프로 그리기 시작했다.
늦여름부터 겨울 한철에 이르는 계절의 변화에 의해 달라지는 인상을 포착했는데 건초더미의 그림자 모양과 길이가 언제 어디에서 그렸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시인 말라르메는 건초더미 그림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네는 그림을 그릴 때 과학자와도 같은 태도로 일기와 시각에 따라 변하는 빛을 관찰했으며 그것이 거의 과장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로 분류하더라도 쿠르베와 휘슬러의 작품에 비하면 덜 사실주의적이었다.
모네가 1891년 봄부터 가을까지 그린 포플러 시리즈도 마찬가지로 과장되어 나타났다.
인상주의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일본 화가들이 그린 인상주의 그림에서는 이런 요소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양식만 나타나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구로다가 친구들과 함께 동경미술학교에 교수로 초빙되면서 바야흐로 일본에서의 본격적인 서양화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에 의해서 서양화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본고장 유럽과 직결되는 존재로 부상되기 시작했다.
구로다에 의해 인상주의에 근거한 아카데미즘으로 대변되는 이 학교의 화풍은 일본 관전의 지배적인 풍조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수학한 조선 유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아카데미즘이란 말은 예술에 관해 사용할 때 부정적인 이미지로 예를 들면 매너리즘화된 형식주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말은 19세기에 미술학교라는 제도 특히 프랑스 아카데미 데 보자르를 통해 그곳에서 공부한 예비화가에게 전수된 회화기법이며 또한 회화의 이념이기도 했다.
감각에 호소하는 색채보다도 명암이나 선을 지적으로 간주하여 중시하고, 기법적으로는 연필 자국이 보이지 않게 표면을 정성들여 마무리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주제에 관해서는 역사화, 신화화를 정점으로 한 장르의 위계가 존재했다.
여기에 대립한 것이 아방가르드로서 쿠르베, 마네로 시작하여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를 거쳐 야수주의, 입체주의로 발전해 간 진영이다.
일본 미술학교에서의 아카데미즘은 인상주의 양식을 가장 뛰어난 기법으로 가르친 것을 말한다.
당시 아방가르드는 선善, 아카데미즘은 악惡이라고 하는 도식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아카데미

아카데미academy는 학문이나 예술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나 학습의 장소 또는 단체를 말한다.
아카데미란 말은 플라톤이 제자들에게 철학을 가르친 아테네 교외의 작은 올리브 숲의 명칭에서 유래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아카데미란 용어는 철학, 문학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학자 단체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16세기에 아카데미는 운영의 규칙이 확립되고 제도화되면서 좀더 광범위한 활동까지도 포함했다.

미술과 관련해서 아카데미는 르네상스 시대에 실용적인 문제를 토의하는 예술가들의 집단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로 보면 1500년경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의 작업장도 아카데미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아카데미는 1562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1519~1574) 대공이 피렌체에 설립한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였다.

코시모 1세는 피렌체에서 후기 르네상스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예술가들 특히 폰토르모, 브론치노, 암마나티, 첼리니, 조반니 볼로냐, 그리고 바사리 등을 자신의 주변에 모이게 하는 한편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코시모 1세가 불러모은 예술가들의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를 주도인 인물이 최초의 서양미술사를 쓴 바사리였다.
그의 목적은 종래의 길드의 지배로부터 예술가들을 해방시키고 이전 100년 동안 그들이 획득한 사회적 지위를 굳히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와 코시모 1세 대공이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36명의 예술가가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아마추어 예술가와 이론가들도 회원이 되었다.
기하학과 해부학 강의도 계획되었지만 작업장의 실기 지도에 대신 할 만한 의무적인 실기 훈련은 없었다.

미술 아카데미는 17세기 중반부터 말까지 독일과 스페인 등에도 설립되었다.
그리고 1720년에는 유럽에 약 19개의 아카데미가 개설되었다.
큰 변화가 18세기 중반에 있어났고 1790년까지 유렵에는 100개가 넘는 미술 아카데미가 존재했다.
영국 왕립미술원도 그 하나로 1768년 런던에 설립되었다.
이들 아카데미의 대부분은 새로운 의식으로서의 사회생활에 예술이 지닌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라는 인식에서 생겨났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기운 속에서 아카데미 회원이 누리던 귀족주의적인 특권은 신랄한 비판을 받았고 자크 루이 다비드를 지도자로 한 많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해산을 요구했다.
결국 프랑스 아카데미는 1816년 아카데미 데 보자르로 재출발했다.
실질적으로 아카데미를 위협한 것은 예술가를 천재로 본 낭마주의 작가의 개념이었다.
즉 예술가는 가르칠 수도 없고 규범에 종속될 수도 없는 영감의 빛으로 걸작을 창조하는 천재라는 관점이었다.
예술가가 곧 천재라는 개념은 18세기 영국의 저술가들 사이에서 처음 생겨났으며, 칸트가 이를 공식화했고, 괴테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촉진되었다.
사실 19세기의 모든 뛰어난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에 소속되지 않고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모색했다.

19세기 미술이 재평가되어 인상주의가 최종적으로 인정되었을 때, 예술가들과 부르주아 시만 사이의 이런 대비는 더욱 두드러졌다.
아카데미는 기존의 관습에 얽매여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권위를 유지했지만 진보적인 사람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았다.
아카데미의 자율화와 아카데미의 독점권을 타파한 미술학교의 증가로 양측 사이에 점차 타협이 이루어졌다.
아카데미는 어떤 예술가라도 개성적 시각으로 자신만의 순수한 재능을 드러낼 수 있는 수준의 장인 정신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 이런 변화의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1896년 동경미술학교에 서양화과가 개설되고 처음 서양미술사를 가르친 사람은 모리 오가이森鷗外였다.
오가이가 강의한 내용이 학생들의 필기 노트로 전해지는데 그의 강의가 덴신의 것과 다른 점은 그리스 이전 이집트와 앗시리아 미술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면서 17~19세기 미술에 중점을 둔 것이다.
서양화는 르네상스라는 고전에 바탕을 둔 원근법, 명암법, 그리고 인체의 완벽한 비례의 풍성한 수확을 거둔 후 17~19세기에 걸쳐 다양하게 유럽의 곳곳에서 꽃을 피웠으므로 3세기에 걸친 이 시기의 서양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은 근대로의 이행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당연하고 또한 필수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이와무라 유키岩村透가 1899년에 서양미술사를 담당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유키가 고대를 다루지 않은 것은 동경미술학교에서는 고대보다도 르네상스 이후 동시대 서양미술과 관련되는 작품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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