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자연을 능가할 수 있다고 본 바자리


16세기 초의 이탈리아는 정치적 소요가 심해 각 지역들은 서로 상이한 양상으로 혼란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16세기 중엽의 피렌체 미술은 궁정미술이 전부였다.
도시의 체제가 너무 독재적이어서 율리우스 2세의 로마에서와 같은 인문주의적 예술이 꽃필 수 없었으며, 또한 너무 세속적이어서 미켈란젤로의 말년 작품이나 후기 로마 매너리즘 회화 같은 정신적인 작품들이 나올 수 없었다.
16세기 중엽의 피렌체 회화를 알기 위해선 바자리의 저서를 읽어야 한다.
그의 저서 외에도 첼리니가 쓴 금세공사와 조각가의 예술에 관한 논문이 있고, 베네데토 바르키가 쓴 『교훈집』 등 여러 권의 책이 있지만 이것들은 바자리의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을 보충해주고 확인해주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바자리의 『미술가 열전』만이 유일하게 이론적 관점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바자리는 『미술가 열전』 머리말에 적었다.
우리의 미술은 단지 모방일 뿐이다.
자연의 모방이 대부분이고, 그 다음으로 사람은 스스로 높이 오를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신보다 더 낫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이 제작한 작품을 모방하기도 한다.60-1)
이 말에 깔려 있는 바자리의 주장하는 바는 화가에게는 자연에 대한 묘사보다도 다른 화가의 작품을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바자리는 자신의 취향으로 볼 때 지나치게 자연적인 양식을 가진 티치아노에 관해 언급하면서 적었다.
고대와 현대의 걸작들을 그려보지도 않고 연구해보지도 않은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모사해 낸 것을 개선시키지도 못할 뿐더러 미술이 자연을 능가할 수 있도록 그것에 우미와 완벽함을 줄 수도 없다.60-2)
미술이 자연을 능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자리의 굳은 신념인 듯 『미술가 열전』 전편을 통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60-3)
따라서 화가의 유일한 희망이 가능한 한 자연을 충실히 따르는 데 있다는 레오나르도의 견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바자리는 도메니코 폴리고의 전기에서 미와 자연주의를 다음과 같이 대비시켰다.
화가가 실물 그대로 그렸다고 하는 얼굴이, 예를 들어 코는 휘고, 한 입술은 작고 또 다른 입술은 크며, 다른 부분들도 기형적인 모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가 대상 모델의 표정을 잘 잡았기 때문에 실물과 흡사한 얼굴 초상 몇몇을 본 적이 있다.
반면 많은 대가들은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과 자신들의 그림이 유사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예술을 한다는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완벽한 초상화와 그림들을 그려내기도 한다.
모름지기 초상화를 완벽한 인물상으로 나타내려면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림의 상이 실제 인물과 흡사하게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령 어떤 초상화가 아름답기도 하고 실물과 비슷하기도 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희귀한 작품이라 불릴 것이며, 그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진정으로 우수한 예술가라고 평가받을 것이다.60-4)
바자리가 자연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권한 주요 원인들 중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만 화가는 모델을 참고하지 않고 쉽게 기억으로부터 어떤 것이라도 그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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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닉 러브의 기원과 의미

 
'플라토닉 러브 Platonic Eros'와 '소크라테스 러브 Socrates Eros'란 말을 만든 사람은 피치노Marsilius Ficinus(1433-99)였다.
그는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이 말을 사용했고 그 밖의 글에서도 사용했다.
'플라토닉 러브'란 플라톤에 의해 설명된 에로스를 의미하며 피치노는 신성한 사랑의 뜻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창조주에 대한 사랑의 준비로 보고 이것이 인간의 욕망 가운데 있는 참된 내용이며 또한 실재 목표로 인식했으며 이러는 중 신성한 선과 아름다움의 광휘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는 참된 사랑이나 우정은 늘 상호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두 사람의 참된 관계는 인간의 본질적인 것에서 발견되는 교감으로 창조주에 대한 각자의 본래 사랑에 기초한다.
따라서 두 친구 사이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고 반드시 셋의 사랑인데 두 인간과 창조주의 사랑인 것이다.
이같은 플라토닉 러브는 16세기 이탈리아와 유럽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많은 서정시인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피치노가 말한 플라토닉 러브로 반영했으며 투스칸Tuscan의 시인들과 페트라르카F. Petrarch XII(1304-74)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로스의 개념은 17세기와 18세기에 와서 주로 심리적인 작용으로 인식되었으며 주로 소설과 시 그리고 격언에서 언급되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창조주에 대한 사랑은 문제가 없었지만 성적 사랑은 도덕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결혼 이전의 성적 사랑은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내친김에 에로스를 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한 플라톤에 관해 잠시 언급하려고 한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에 관해 장황하게 언급했는데 그에게 에로스는 미에 대한 사랑, 즉 이상적인 형상이었다.
플라톤은 철학적 훈련을 통해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상적인 것을 욕망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에게 미는 질료적 실재와 이상적 실재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성적 사랑 자체는 사랑의 형상들 중 가장 저급한 것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게 하는 것은 미로서의 이상적인 사랑의 씨앗이다.

사랑에 대한 개념은 르네상스 네오플라톤주의에 와서 다양하게 변했다.
이는 플라톤의 사유들을 총괄해 새로운 형식으로 가톨릭적 중세로 전달한 플로티누스Plotinus(203-270)에 의해서였다.
그는 사랑을 창조주, 마귀, 열정 세 가지 형상으로 분류한 후 창조주의 사랑을 천상의 아프로디테(에로스)와 지상의 아프로디테로 구분했다.
천상의 아프로디테는 이데아들의 사랑과 지성적 세계의 영혼에 대한 영감을 준다.
지상의 아프로디테는 결혼에 거하며 감관세계의 영혼이다.
마귀의 사랑은 개별적인 인간의 영혼으로 예증된다.
열정은 절도있는 사람에게 미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추한 물질계 안에 전적으로 거하는 자들에게는 성적 즐거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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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리는 미켈란젤로에 관해 적었다

바자리는 미켈란젤로에 관해 적었다.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상을 만드는 데 있어 자연이 제공해 줄 수 없는 전체로서의 조화로움, 우아함이 깃든 조화로움만을 추구할 결과 9등신, 10등신 심지어는 12등신까지의 비례법을 작용하곤 한다.”59-7)

이는 미켈란젤로가 나중에 가서 미의 어떤 일정한 기준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상상력과 개별적인 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준다.
건축에 관한 미켈란젤로의 사고 또한 이와 같았는데 바자리는 『미술가 열전』에 적었다.

비트루비우스와 고대인들이 해 놓은 일에 따라, 그리고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사람들이 그동안 완성시켰던 척도, 규칙이 좌우하는 일로부터 여하튼 그는 박차고 나왔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그에게 무한히 감사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장인들이 일할 때 늘 밟아야만 했던 상도의 굴레와 속박을 내팽겨쳤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15년 내지 20년 동안은 그의 예술과 사상 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여러 점에서 볼 때 1530년대 후반부와 1540년대 초에 보여준 예술과 사상의 특징들이 좀 더 강화된 양상으로 나타난 것뿐이다.

1545년경 이후 교황권의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이 극에 달해 라티스본 회의Diet of Ratisbon 이후부터는 타협이란 것은 말조차 꺼낼 수도 없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켈란젤로가 속해 있던 온건파는 점차 그 힘이 약해지게 되었다.
온건파의 신비주의는 날로 내성적인 성격을 더해 가게 되었다.
이런 격동기에 나온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조각한 군상조각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완성하지 못한 <론다니니 피에타 Pieta Rondanini>가 있다.
그는 이 조각을 통해 모든 육체적인 특성을 나타내주는 인체의 상징요소들을 박탈하여 끝내 순수한 정신적인 관념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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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 미켈란젤로


당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교황의 위치는 매우 약화되었다.
게다가 경제적 혼란까지 가중되었으며, 1527년에는 로마가 약탈당하는 일이 벌어져 클레멘트 7세는 더욱 무력해졌다.
가톨릭뿐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존폐가 위협당하는 사건들로 사람들이 동요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신비주의 사상은 이렇듯 이탈리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운 나머지 선택한 하나의 강구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59-4)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종교적 기능에 대해 무엇보다도 명백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종교적인 화가는 예술에 있어서도 능숙할 뿐더러 매우 경건한 인생을 살아감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종교적인 화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는데, 홀란다는 그가 말한 내용을 적었다.
하나님의 장엄한 모습을 어느 정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가인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위대하고 능숙한 거장이어야 한다.
생각컨대 그 사람의 인생은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그의 이해력이 높아질 수 있도록, 성인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흠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 그려진 하나님의 모습은 신자의 마음을 분산시키며, 가뜩이나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심마저 잃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신앙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 움직여 신앙심을 일게 하여 명상에 잠기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 모습에서 나오는 참된 아름다움으로 인해 신에 대한 외경심과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59-5)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음속에 품은 관념들을 손이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가 제작해 놓은 작품에 대해 늘 만족해하지 않고 낮게 평가했다”59-6)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신을 모든 미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늘에 살고 있는 이 신적 존재는
다른 존재들을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더욱 더 아름다워진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을 예술가가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로 보았다.
… 만약 예술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을 수만 있다면
예술은 자연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의 선물을 통해 예술가는 조각상을 새기기 위한 돌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게 된다.
어떤 이가 얼굴과 행동거지에
예술가로서의 신적인 기운이 서려 있다면
비록 하찮고 보잘 것 없는 모델을 놓고서라도
그는 정신과 손으로 돌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다.
그에게는 물질의 부분인 돌 자체는 상상력이 거기에 작용하지 않는 한 쓸모없는 죽은 상태이다.
펜과 잉크에서
숭고한 양식·하찮은 양식·평범한 양식이 나오듯이
대리석에서도 조각가의 재능 여하에 따라
훌륭한 형태와 보잘 것 없는 형태가 생겨난다.
이상과 같이 미켈란젤로의 예술론은 그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그의 조각이론은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대리석 덩어리 안에 어떤 관념이 잠재해 있어야
손의 힘으로 정신에 따라
그 관념을 돌로부터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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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테 문화를 전한 시인

 
크레테의 미노스 문화는 기원전 1600년경 그리스 본토에 소개되었으며 기원전 900년경 본토에서 만연되었다.
그리스 본토에 상륙한 문화를 미세내Mycenae 문화라고 부르는데 이 문화는 구전으로만 전해온다.
그리스인은 선사시대 이전의 크레테 문화를 늘 동경하고 있었음을 기원전 500년에 제작한 도자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미노타우르Minotaur(사람의 몸에 소 머리가 달린 괴물)를 퇴치하기 위해 영웅 테세우스Theseus가 칼을 들고 서 있고 미노타우르는 둥근 바위를 들고 테세우스를 공격하려는 자체를 취하는 그림이다.
크레테 문화는 호메로스Homer에 의해 그리스인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저서 <일리아드 Illiad>와 <오디세이 Odysey>는 그리스 문화의 최초의 상징이 되었다.
버트란드 럿셀Bertrand Russell은 저서 <서양철학 역사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에서 호메로스의 저서들은 그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기원전 750년경부터 550년까지 약 200년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학자는 호메로스의 작품 년대를 기원전 8세기로 어림한다.
호메루스의 시가 아테네에 유입된 것은 기원전 550년부터 527년까지 아테네를 통치한 페이시스트라투스Peisistratus에 의해서였으며 아테내의 젊은이들은 호메루스의 시를 암송하며 즐겼다.
호메로스의 시에는 올림피아에 거주하는 신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리스인들이 섬긴 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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