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순화Sublimation


순화Sublimation는 오스트리아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가 제안한 것이다.
이는 고상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미술품을 통해서 숭고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미학에 관련된 에세이들을 많이 썼는데 특히 『문명과 이에 따른 불만들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에서 순화에 관해 논했다.
인생이 너무 많은 고통, 실망, 불가능한 업무들로 가득하다면서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그는 세 가지를 제안했다.
1 강력한 관심의 전환으로 우리의 불행에 대한 관심을 적게 해준다
2 대용이 되는 만족감으로 불행을 줄인다
3 도취하게 하는 물질들로 우리로 하여금 불행에 둔감하게 만든다.
프로이트는 이런 종류의 것들을 필요 불가결하다고 보았다.
그는 고통을 더는 데 자신이 창안한 리비도 전치the libido-displacements를 추가 방법으로 제안했다.
이는 우리의 정신적 장치가 허락하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많은 적응력이 생긴다고 보았다.
리비도 전치가 본능적인 목적들을 바깥 세계에 의해 좌절되지 않게 해준다고 믿었다.
본능의 순화가 이런 문제에 조력을 제공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46-3)
그것의 성공은 사람이 정신적 그리고 지성적 업무로부터 쾌를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증가시킬 수 있는지를 알 때 엄청나다.
이때 숙명은 그에게 조금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만족은, 자신의 환상을 구현하는 창작에서 예술가가 갖는 기쁨 혹은 과학자가 문제를 풀거나 진리를 발견하는 것과도 같이, 우리가 언젠가 분명히 초심리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특별한 성질을 지녔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더욱 고상하고 훌륭한” 것처럼 보인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지만, 전체의 원시적 본능들을 만족시키는 것과 비교해서 그것의 강도는 완화되고 흐트러진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우리를 압도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방법의 취약한 부분은 일반적으로 적용할 만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충분한 정도에서 매우 일반적으로 발견되지 않는 특별한 타고난 재능과 성질들을 미리 가정한다.
그리고 이런 소수에게조차 그것은 고통에 대항해서 완전한 보호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숙명의 화살들에 대항해 이겨낼 수 없는 갑옷을 주지는 않으며, 그것은 인간 자신의 육체가 그에게 고통의 근원이 될 때 늘 실패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


중국화의 경우 북송의 산수화가 묵의 농담으로써 자연의 모습과 대기의 변화를 섬세히 그리려는 데 반해,
남송의 문인화는 대상의 형태를 정밀하게 그리지 않고, 화가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도 텐느의 자연환경설이 적용된다고 조요한은 자신의 『예술철학』에서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환경조건이 북송의 산수화보다는 남송의 문인화에 더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화가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환상적인 요소가 우리에게 있음을 피터 스완은 『중국, 한국, 일본의 미술 Art of China, Korea and Japan』(1963)에서 지적했다.
한국은 중국, 일본과는 달리 서구적인 감동주의를 받아들인 것 같다.
한국이 18세기에 획득한 독자성을 다른 두 나라와 분리시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분명히 조선 회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작품과는 다르다.
정선의 <근강산도>와 김홍도의 <자정 紫頂>에는 중국의 화풍과는 다른 하나의 의식적인 과정이 있다.
그 외에도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 같은 그림은 독자적인 청아한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인은 심지어 중국인보다도 환상적인 풍경을 더 잘 구사한다.
형을 닮게 묘사하는 방법을 통해 전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형사적 전신론을 가장 강도 높게 주장한 인물이 이익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적었다.
소동파의 시에 “형사를 기준으로 그림을 논하면 소견이 어린이와 같고, 시를 지는데 대상물대로 읊는 것도 참으로 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네”란 구절이 있다.
후세의 화가들은 이를 종지宗旨로 받들어 담묵으로 거칠게 그려 실물과 다르게 되고 만다.
지금 만일 “형태를 닮지 않게 그리는 것을 논하고 대상물과 다르게 시를 짓는다”고 말한다면 이치에 맞겠는가.
우리 집에 소동파가 그린 묵죽 한 폭이 있는데, 가지와 잎 하나 하나가 100% 똑같은 이른바 사진寫眞이란 것이다.
신이란 형체 안에 있는 것인데, 형체가 같지 않으면 어떻게 신을 옮길 수 있겠는가.
소동파가 말한 것은 형사가 되어도 신이 결핍되면 비록 그 물체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본질이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이 정묘하게 되더라도 형체가 닮지 않았다면 어찌 같다고 할 수 있으며, 생명적 본질을 나타냈더라도 다른 물체처럼 되었다면 어찌 그 사물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겠다.
근대의 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 속편』에서 ‘근대의 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란 제목으로 적었다.
서양화가 동양으로 처음 전해진 것은 중국 명말에 예수회 신부가 북경에 들어가서 천주교를 선포하며 예수의 기적도와 성모상 그림을 내보인 데에서 비롯하였다.
조선인이 서양의 화풍을 알게 된 것도 그로 인해서다. 기록을 빌리면, 병자호란(1636) 직후 인질로 청국에 연행되었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서양인 신부 아담 샬Adam Schall과 친밀히 접촉하다가 1645년 초에 귀국하게 될 적에 그 신부에게서 천주교 교리책을 포함한 서학 서적과 함께 천주상 그림 한 폭을 얻어 갖고 왔는데, 아마 그것이 서양화가 조선에 들어온 처음일 듯하다.
또 당시 북경의 동서남북 네 곳에 세워져 있던 천주당 중의 서당은 특히 조선의 사신 일행이 즐겨 찾아가 서양식 창벽화(스테인드글라스) 등의 신기함에 놀라곤 하였다.
그러한 그림은 진작부터 여러 관람자의 기행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다가 1780년에 북경에 다녀온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 ‘양화’ 항목으로 그 천주당에서 본 희한한 실상이 소상히 기술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양화를 관심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북경에서 전래된 양화의 실물을 보는 일도 있게 되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양화의 유채 재료와 사실적 색상을 설명한 항목까지 보게 되었다.
서양화에 대한 반응을 실학자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 ‘양화’ 대목에 적힌 데서 알 수 있는데, 1780년에 경청사遣淸使를 따라 북경을 다녀 와서 쓴 기행문으로 북경의 천주교회에서 본 벽화와 천장화에 대한 소감이다.
그림에 나타난 원근법, 요철법, 음영법, 투시법이 말과 글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희한하며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고 극구 경탄한 기록이다.
박지원은 “터럭 끝만한 작은 치수라도 바로 잡혀 있으며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낸” 서양화를 보고 “보통의 언어와 문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의 감탄기 외에도 많은 입소문과 실제 그림의 유입으로 서양화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날로 늘어난 사실은 헌종(1834~49) 때에 간행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州衍文長箋散稿』에서도 확인된다.
이규경은 서양화란 거울에 비친 것처럼 그리는 것이라면서 그림이 생생하고 움직이는 것 같아 실물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렵다 적었다.
놀라운 색상과 생동감은 특이한 약물藥物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면서 그는 유채안료油彩顔料에 대한 과학적 규명을 시도했다.
궁중의 도화서화원圖畵暑畵員들의 그림에 주로 반영되었던 당대에 유행한 서양 양식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현존하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김두량(1696~1763)의 <견도 犬圖>와 작가미상의 <맹견도 猛犬圖>, 그리고 이희영의 1795년작 <견도> 등이다.
이 작품들은 서양 양식으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주제의 개들도 모두 서양종이다.
서양 개를 그린 그림들 외에도 입체적·사실적으로 그린 서양풍의 초상화도 몇 점 현존하는데 그중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작가미상의 <이재李縡의 초상>으로 이것은 18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구열은 『도입기의 양화』에서 “동물화나 인물화뿐 아니라 정선으로 대표되는 18세기 국화풍國畵風 실경산수화파의 등장도 서양화의 현실적 합리·실증 정신의 영향과 관련지울 수 있을 것이다”고 서양화의 영향을 확대해서 말한다.
이승훈은 1783년에 북경에 잠입하여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ont에게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영세를 받고, 다음해에 다시 밀입국하면서 갖고 온 천주교 선교용 물품 중에는 예수의 십자고상과 상본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상본화는 국내에서의 비밀 교우집회에 제시되었을 것이고, 또 더 많은 상본화의 필요에 따라 모사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
국내에서 천주상을 그린 확실한 기록의 천주교인 화가는 이희영(1756~1801)이다.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서울을 오가며 직업화가의 생활을 하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한 뒤 상본화도 그리게 되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이승훈 등에 뒤이어 참수를 당한 순교자였다.
그가 그린 천주상이나 상본화는 물론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희영은 천주상을 등을 그리게 되면서 서양식의 합리적인 현실감 표출에 익숙해질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런 관계에서 그는 자유로운 소재에서도 서양식 표현을 시도한 사실이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인 사실적 먹붓 소묘의 <견도>에서 여실히 엿볼 수 있다.
개 자체가 서양종이며 그 그림은 분명히 서양풍의 화법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이 작품을 1926년에 감식한 『근역서화징』의 편저자 오세창도 발문에 “서양화법을 본받아 그린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처음이다”라고 적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최순우는 “배경인 초목 묘사와 대조적인 동물(개)의 입체적 표현기교는 아마도 서구적 묘사기법, 이를테면 당시 중국 북경을 통해 들어온 서양화 기법을 이런 주제 속에서 시도해 본 자취라고 볼 수 있다”고 적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톨스토이는 예술의 전염력 수준이


미술품을 해석함에 있어 어떤 기본규정을 정하지 않으면 해석할 수 없다.
기본규정들 가운데 고립주의Isolationism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미술품을 감상할 때 오직 예술가의 일대기와 역사적 배경만을 염두에 두고 그 밖의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방법이다.
다음으로 맥락주의Contextualism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미술품을 그것의 배경 안에서만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추상화를 감상할 때도 적용된다.
고립주의는 음악의 경우 더 적합하고, 예술가의 주관적 작품을 해석할 때 적합한 반면 맥락주의는 역사화와 종교화를 해석하는 데 적당하다.
두 가지 이론을 병행할 수도 있다.
맥락주의가 고립주의보다 광범위에 걸쳐 미술품 해석에 적합해 보인다.
미술품의 의미는 예술가의 의도가 성공적으로 표현될 때 고스란히 나타나지만 제대로 표현되지 못할 때는 그 의미가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은유 혹은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며, 문학의 경우 사용된 언어를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할 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또한 예술가의 의도가 부분적으로 드러날 경우 혹은 그 의도가 불분명하게 나타날 경우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평론가가 예술가의 의도보다는 자신의 의도를 더욱 드러내려고 할 때 미술품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평론가의 몫이 된다.
평론가는 아니지만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1828-1910)에 의해 미술품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제안된 주정주의Emotionalism가 있다.
미학에 관심이 많은 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What Is Art?』에서 예술을 쾌를 위한 수단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면서 인간 삶의 조건들 중 하나로 간주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46-1)
톨스토이는 예술의 역할들 가운데 하나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제의 수단으로 보면서 웅변이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전달하는 것으로 인간들 사이의 합일의 수단에 기여하듯 예술도 유사한 목적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웅변이 사고를 전달하는 데 비해 예술은 느낌을 전달한다고 보았다.
미술품을 통해서 관람자가 작가의 느낌의 표현을 전달받는데 이는 작가의 감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적었다.46-2)
“예술은 형이상학자들이 말한 어떤 신비로운 미의 개념이나 신의 표명이 아니다;
그것은 미적 생리학자가 말한 인간이 자기의 저장된 에너지의 여분을 발사하는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외적 표적들에 의해 인간의 감성들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을 제공하는 오브제들의 생산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쾌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일한 느낌들 안에서 인간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하나가 되게 하는 수단이며, 개인과 인류의 복지를 향한 삶과 발전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예술의 전염력 수준이 세 가지 조건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1 전달한 느낌의 크고 작은 특성에 달렸다.
2 느낌이 전달한 것과 더불어 크고 작은 명확성에 달렸다.
3 예술가의 성실, 즉 예술가 자신이 전달하려는 감성에 대한 느낌과 함께 크고 작은 힘에 달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니발과 시저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로마 공화국에서의 남자들의 군인 복무기간은 길었는데 16년 동안의 보병생활과 10년 동안의 기병생활을 해야 했다.
남자 모두 직업군인이나 다름 없었다.
전쟁에 임해서는 군인 5천 명이 기다란 창 모양으로 정렬한 후 전투에 임했다.
로마군은 서쪽에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2백 년 동안 서서히 인근 국가들을 점령해나갔다.
처음으로 그들은 해군을 대규모로 결성해 기원전 264~41년에 시실리와 싸웠으며 시실리를 정복한 후에는 사르디니아Sardinia와 코르시카Corsica에 총독을 두었다.

유명한 전쟁은 기원전 218~20`년에 있었다.
당시 그리스 일부 도시국가들은 로마로부터 보호받을 것을 약속받았고 카르타지나인Carthaginians이 스페인에 안주하면서 장군 하니발Hannibal이 그리스 도시국가 하나를 점령했으므로 로마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유명한 전쟁에서 하니발은 코끼리부대를 앞세워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으며, 트라시메네Trasimene와 카내Cannae에서 로마군을 기원전 217년과 216년에 섬멸했고, 이탈리아의 로마 식민지 도시국가들은 로마에 등을 돌리고 새로 부상한 영웅 하니발에게 아첨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중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하니발의 수중에 들어갔다.
하니발이 없는 동안 로마군은 카르타지Cartage와 스페인을 무차별하게 공격해 기원전 209년에 점령할 수 있었으며, 하니발의 동생은 대항했지만 기원전 207년에 로마군에 패하고 말았다.
기승이 당당해진 로마군은 아프리카로 진격했고 하니발은 그들을 자마Zama에서 맞아 싸웠는데 승리는 로마에게로 돌아갔으며 전쟁은 기원전 202년에 종료되었다.
하니발을 지지한 시실리에 대한 보복으로 로마는 그들의 주권을 빼앗았으며 시실리는 그때부터 로마에 속하게 되었다.

전쟁은 그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기원전 59년에 젊은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시저는 7년 동안 인근 국가들을 점령하게 되자 그의 사납고 얼음같은 냉혹한 성질은 더욱 나빠졌는데,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의하면,
시저가 해적들에게 잡혔을 때 시저는 해적들과 함께 주사위를 던지는 놀이를 하면서 농담으로 자신이 자유로워지면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처형하겠다고 말했고, 해적들은 그의 말을 농담으로 듣고 웃어넘겼는데 시저가 나중에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그는 해적들을 나무에 달아 처형했다고 한다.

시저가 가울Gaul을 점령한 후 군사령관으로 그곳에 계속 주둔하자 원로원은 그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행위에 반발한 사람들이 시저의 불법행위들을 고발하자 시저는 화를 내며 군대를 이끌고 루비콩Rubicon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 공화국은 종말을 고할 처지에 이르렀으며 시저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적들로부터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변명했다.
그때가 기원전 49년 1월이었으며 그후 오늘날까지 "루비콩을 넘었다"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 말의 뜻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이다.

시저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폼페이에 충성했던 자들을 모두 쓸어버리기 위해 스페인으로 진격했으며 그는 이집트로 달아난 폼페이를 끝네 추격해 그곳에서 사살한 후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잘생긴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사랑에 빠졌다.
시저는 클레오파트라를 나중에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빼앗겼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이들 부부는 기원전 31년에 자살하는 비운을 맞았다.
로마로 돌아온 시저는 자신에 반대하는 로마 군대를 아프리카로 가서 무찔러 없앴다.
그는 스페인에서 다시 군대를 강화하던 폼페이의 아들들을 살해했는데 이때가 기원전 45년으로 그가 루비콩을 넘은 지 4년 후의 일이었다.

시저는 절대권력을 장악했으므로 자연히 절대부패를 빚어냈는데 일인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천체학자가 그에게 1년을 365일로 그리고 매4년마다 하루를 보태는 달력을 소개했고 시저는 그것을 율리안 달력Julian Calendar이라고 명명한 후 유럽에 선포했다.
이것은 로마의 복잡한 전통주의 달려과 달랐으며 시저는 천체학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원전 45년 1월 1일부터 그가 제정한 달력을 사용하도록 선포했다.
15개월 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시저는 저승으로 떠나야 할 차비를 해야 했는데 자객들이 원로원에 있던 그를 살해했다.
자객들이 그를 살해한 동기는 매우 복잡했다.
시저의 업적에 관한 로마 시민들의 인식은 2년 동안 분분했지만 나중에 시민들은 그를 신으로 선언했다.
그후 로마인은 시저의 업적을 낭만적으로 회상하면서 전설의 주인공으로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시저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라고 부르면서 새 역사가 그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기원후 10년경에 오닉스를 깍아 신화의 인물처럼 제작한 시저의 흉상을 보면 로마 여신들에 에워싸여 있고 왼쪽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막 돌아오는 티베리우스Tiberius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으며 하단에는 군인들이 그를 위해 트로피를 세우고 있다.

루브르 뮤지엄에 대리석으로 제작된 주바 1세Juba I의 흉상이 있는데 주바는 시적에 대적해 폼페이와 연합전선을 폈던 누미디아Numidia의 왕이었다.
시저가 폼페이를 살해하고 기원전 46년에 승리하자 주바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비운의 그의 흉상을 아들 주바 2세가 제작하도록 했는데 조각가는 주바의 얼굴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
주바의 머리카락이 곱슬이었던지 조각가는 파마한 머리카락처럼 그의 머리를 온통 포도주 병마개처럼 만들었으며 수염을 덥수룩하게 했고 주바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심기가 편치 않은 표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풍속화가 김홍도


강세환은 노년에 “근일에는 그대(김홍도)의 그림을 얻은 사람이 곧 나에게 와서 한두 마디의 평어評語를 써주기를 요구하였고 궁중에 들어간 병풍과 권축에도 내 글씨가 뒤에 붙은 것이 더러 있다.
‘그대와 나는 나이와 지위를 무시하는 친구’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여, 두 사람이 일생 제자이자 동료,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화단의 지기로 지냈다.

김홍도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8세기 후반은 중인 세력이 안정되어가던 시기였고, 정조는 등극하면서 규장각을 세워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박제가(1750~1815)와 같은 서얼 출신의 학자를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하는 등 중인층의 신분상승을 통한 정계진출을 용인했다.
문헌상으로 중인中人의 칭호가 나타난 것은 인조(1623~49) 때였고, 신분변동은 18세기에 이루어졌지만, 화원의 경우 안경이 호군직에 최경이 당상관에 임명되어 예외적으로 사족士族의 관직을 받은 사례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인 출신 김홍도는 어려서 표암 강세황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은 김홍도와의 관계를 훗날 말했다.

“내가 사능과 사귄 것이 전후 대개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사능이 어린 나이에 우리 집에 드나들어 혹은 그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고 혹은 그림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중간에는 한 관청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서로 대했으며,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서 노닐어 지기의 느낌이 있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道釋, 영모, 화조, 어해, 사군자, 누각 등 모든 화두에 능했으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났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작품 전반에는 그가 살았던 세상의 태평한 기상이 스며 있으며 자기 문화를 존중하던 시대의 자긍심이 깃들어 있다.
우리나라는 자연 중심의 예술을 추구했으므로 인물화보다는 산수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인물화의 경우에는 종교화, 초상화, 기록화 등에서와 같이 부처, 도인, 성현, 군자, 충신, 열부 등 이상적인 인물과 역사적·교육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는 권계주의적勸戒主義的 인물들이다.
종종 미인도와 사녀도仕女圖가 그려졌지만 지배층에 국한된 취향의 반영이었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서 권계주의는 사라지고 서민들이 그림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홍도의 영모화는 매우 다양했는데 개, 고양이, 호랑이, 소, 말, 사슴, 다람쥐, 양, 박쥐, 까치, 백로, 학, 메추리, 구욕새, 참새, 꿩, 꾀꼬리, 매, 닭, 오리 등 20여 종에 달한다.
그의 그림 밑바탕에는 서법이 깔려 있는데 늘 중봉中鋒의 원리를 지켰으며 어느 경우에도 편봉偏鋒을 쓰지 않았다.
그의 필선은 획에서 나온 것이므로 필선에 처음과 끝이 있다.
따라서 준법에도 선과 관련이 있는 피마준과 하엽준 같은 선묘에 치중하고 있다.

스승 강세황은 『표암고豹菴稿』에 김홍도에 관해 적었다.

찰방 김홍도는 자가 사능士能이다.
어릴 적에 내 집에 드나들었는데 눈매가 맑고 용모가 빼어나서 익힌 음식 먹는 세속사람 같지 않고 (신선 같은) 기운이 있었다.
이제 사능의 사람됨을 보면 얼굴이 준수하고 마음가짐은 깨끗하여 보는 이는 모두 (사능이) 고상하게 속세를 넘어섰으며 시중 거리에 흔한 자잘한 무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
품성이 또 거문고와 젓대의 전아한 음악을 좋아하니 매번 꽃피고 달밝은 저녁이면 때때로 한두 곡조를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
그 기예가 막바로 옛사람을 좇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풍채와 정신이 우뚝하니 멀리 빼어나서 진·송의 훌륭한 선비 중에나 (그 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능은 음률에 두루 밝았고 거문고, 젓대며 시와 문장도 그 묘를 다하였으며 풍류가 호탕하였다.
매번 무딘 칼날을 치며 슬피 노래하는 마음이 들 때면 북받쳐서 혹은 몇 줄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으니 사능의 마음은 스스로 아는 이만 알 것이다.
들으니 그 거처는 책상이 바르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으며 계단과 뜨락이 그윽하여 집안에 있으면서도 곧 세속을 벗어난 듯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세상의 용렬하고 옹졸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사능과 더불어 비록 어깨를 치고 네나거리를 하지마는 또한 사능이 어떠한 인물인지 어찌 알 수 있으랴.


김홍도는 진경산수를 종종 그렸는데 1788년 정조의 명령을 받고 영동의 사군을 여행하고 <영동사군첩 嶺東四郡帖>을 그렸다.
이때의 여행을 통해 금강산의 명소들을 화폭에 담게 되었다.
그가 금강산을 여행한 지 7년 후인 1795년에 그린 것이 <총석정도 叢石亭圖>이다.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환경에 따라 각 나라 그리고 각 지역의 회화가 다르다는 점을 일찍이 히폴리트 텐느가 『예술철학 Philosophie de l’art』(1882)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건조한 나라에서는 선이 주조가 되고 그것이 사람의 주의를 끈다.
산에는 웅대한 몇 층의 건물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모든 대상이 투명한 공기 속에 선명하게 부조된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평탄한 눈에는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지 못하고, 거기에는 언제나 공기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떠있다.
주가 되는 것은 색조뿐이다.
풀을 뜯고 있는 암소, 목장 속에 있는 지붕, 난간에 기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다른 모습의 일부로서 보일 따름이다. 대상은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고, 갑자기 주위에서 뛰쳐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체의 가감과 농담에 감동할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