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


중국화의 경우 북송의 산수화가 묵의 농담으로써 자연의 모습과 대기의 변화를 섬세히 그리려는 데 반해,
남송의 문인화는 대상의 형태를 정밀하게 그리지 않고, 화가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도 텐느의 자연환경설이 적용된다고 조요한은 자신의 『예술철학』에서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환경조건이 북송의 산수화보다는 남송의 문인화에 더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화가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환상적인 요소가 우리에게 있음을 피터 스완은 『중국, 한국, 일본의 미술 Art of China, Korea and Japan』(1963)에서 지적했다.
한국은 중국, 일본과는 달리 서구적인 감동주의를 받아들인 것 같다.
한국이 18세기에 획득한 독자성을 다른 두 나라와 분리시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분명히 조선 회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작품과는 다르다.
정선의 <근강산도>와 김홍도의 <자정 紫頂>에는 중국의 화풍과는 다른 하나의 의식적인 과정이 있다.
그 외에도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 같은 그림은 독자적인 청아한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인은 심지어 중국인보다도 환상적인 풍경을 더 잘 구사한다.
형을 닮게 묘사하는 방법을 통해 전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형사적 전신론을 가장 강도 높게 주장한 인물이 이익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적었다.
소동파의 시에 “형사를 기준으로 그림을 논하면 소견이 어린이와 같고, 시를 지는데 대상물대로 읊는 것도 참으로 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네”란 구절이 있다.
후세의 화가들은 이를 종지宗旨로 받들어 담묵으로 거칠게 그려 실물과 다르게 되고 만다.
지금 만일 “형태를 닮지 않게 그리는 것을 논하고 대상물과 다르게 시를 짓는다”고 말한다면 이치에 맞겠는가.
우리 집에 소동파가 그린 묵죽 한 폭이 있는데, 가지와 잎 하나 하나가 100% 똑같은 이른바 사진寫眞이란 것이다.
신이란 형체 안에 있는 것인데, 형체가 같지 않으면 어떻게 신을 옮길 수 있겠는가.
소동파가 말한 것은 형사가 되어도 신이 결핍되면 비록 그 물체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본질이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이 정묘하게 되더라도 형체가 닮지 않았다면 어찌 같다고 할 수 있으며, 생명적 본질을 나타냈더라도 다른 물체처럼 되었다면 어찌 그 사물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겠다.
근대의 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 속편』에서 ‘근대의 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란 제목으로 적었다.
서양화가 동양으로 처음 전해진 것은 중국 명말에 예수회 신부가 북경에 들어가서 천주교를 선포하며 예수의 기적도와 성모상 그림을 내보인 데에서 비롯하였다.
조선인이 서양의 화풍을 알게 된 것도 그로 인해서다. 기록을 빌리면, 병자호란(1636) 직후 인질로 청국에 연행되었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서양인 신부 아담 샬Adam Schall과 친밀히 접촉하다가 1645년 초에 귀국하게 될 적에 그 신부에게서 천주교 교리책을 포함한 서학 서적과 함께 천주상 그림 한 폭을 얻어 갖고 왔는데, 아마 그것이 서양화가 조선에 들어온 처음일 듯하다.
또 당시 북경의 동서남북 네 곳에 세워져 있던 천주당 중의 서당은 특히 조선의 사신 일행이 즐겨 찾아가 서양식 창벽화(스테인드글라스) 등의 신기함에 놀라곤 하였다.
그러한 그림은 진작부터 여러 관람자의 기행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다가 1780년에 북경에 다녀온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 ‘양화’ 항목으로 그 천주당에서 본 희한한 실상이 소상히 기술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양화를 관심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북경에서 전래된 양화의 실물을 보는 일도 있게 되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양화의 유채 재료와 사실적 색상을 설명한 항목까지 보게 되었다.
서양화에 대한 반응을 실학자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 ‘양화’ 대목에 적힌 데서 알 수 있는데, 1780년에 경청사遣淸使를 따라 북경을 다녀 와서 쓴 기행문으로 북경의 천주교회에서 본 벽화와 천장화에 대한 소감이다.
그림에 나타난 원근법, 요철법, 음영법, 투시법이 말과 글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희한하며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고 극구 경탄한 기록이다.
박지원은 “터럭 끝만한 작은 치수라도 바로 잡혀 있으며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낸” 서양화를 보고 “보통의 언어와 문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의 감탄기 외에도 많은 입소문과 실제 그림의 유입으로 서양화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날로 늘어난 사실은 헌종(1834~49) 때에 간행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州衍文長箋散稿』에서도 확인된다.
이규경은 서양화란 거울에 비친 것처럼 그리는 것이라면서 그림이 생생하고 움직이는 것 같아 실물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렵다 적었다.
놀라운 색상과 생동감은 특이한 약물藥物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면서 그는 유채안료油彩顔料에 대한 과학적 규명을 시도했다.
궁중의 도화서화원圖畵暑畵員들의 그림에 주로 반영되었던 당대에 유행한 서양 양식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현존하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김두량(1696~1763)의 <견도 犬圖>와 작가미상의 <맹견도 猛犬圖>, 그리고 이희영의 1795년작 <견도> 등이다.
이 작품들은 서양 양식으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주제의 개들도 모두 서양종이다.
서양 개를 그린 그림들 외에도 입체적·사실적으로 그린 서양풍의 초상화도 몇 점 현존하는데 그중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작가미상의 <이재李縡의 초상>으로 이것은 18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구열은 『도입기의 양화』에서 “동물화나 인물화뿐 아니라 정선으로 대표되는 18세기 국화풍國畵風 실경산수화파의 등장도 서양화의 현실적 합리·실증 정신의 영향과 관련지울 수 있을 것이다”고 서양화의 영향을 확대해서 말한다.
이승훈은 1783년에 북경에 잠입하여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ont에게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영세를 받고, 다음해에 다시 밀입국하면서 갖고 온 천주교 선교용 물품 중에는 예수의 십자고상과 상본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상본화는 국내에서의 비밀 교우집회에 제시되었을 것이고, 또 더 많은 상본화의 필요에 따라 모사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
국내에서 천주상을 그린 확실한 기록의 천주교인 화가는 이희영(1756~1801)이다.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서울을 오가며 직업화가의 생활을 하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한 뒤 상본화도 그리게 되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이승훈 등에 뒤이어 참수를 당한 순교자였다.
그가 그린 천주상이나 상본화는 물론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희영은 천주상을 등을 그리게 되면서 서양식의 합리적인 현실감 표출에 익숙해질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런 관계에서 그는 자유로운 소재에서도 서양식 표현을 시도한 사실이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인 사실적 먹붓 소묘의 <견도>에서 여실히 엿볼 수 있다.
개 자체가 서양종이며 그 그림은 분명히 서양풍의 화법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이 작품을 1926년에 감식한 『근역서화징』의 편저자 오세창도 발문에 “서양화법을 본받아 그린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처음이다”라고 적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최순우는 “배경인 초목 묘사와 대조적인 동물(개)의 입체적 표현기교는 아마도 서구적 묘사기법, 이를테면 당시 중국 북경을 통해 들어온 서양화 기법을 이런 주제 속에서 시도해 본 자취라고 볼 수 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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