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에게 미술이란

 

화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72)는 회화는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면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 눈앞에 데려다 주고, 이미 몇 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일지라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신적 능력forza divina을 가졌다”1)고 했고, 그림에서 대성한 화가는 “그가 남긴 작품이 찬탄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화가 자신도 또 하나의 신un altro iddio이라는 평판을 누리게”2) 된다고 했다.
1420년대의 세대는 미술을 새로운 정신에 입각해서 보기 시작했다.
회화의 우선적 목적은 인간이성의 원리에 따라 외부세계를 재현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주의나 물질세계의 과학적인 연구에 따르지 않는 예술론은 어떠한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알베르티 이전 첸니노 첸니니에게서 14세기에 이미 싹이 트기 시작한 새로운 자연주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로렌조 기베르티에게서는 고대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찾아볼 수 있지만 명확하고 완벽한 이론으로 정립된 것은 알베르티에 의해서였다.
알베르티는 1404년 제노바에서 피렌체 상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하고 권력 있는 가문 출신이었으며 알베르티 가는 그의 전 가문에 내려진 추방령에 따라 일찍이 제노바로 이주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북부지역 주로 볼로냐에서 법률공부를 하며 교육을 받았다.
알베르티 가에 내려진 추방령은 1428년에 해제되었다.
알베르티는 인생을 주로 피렌체 아니면 교황청에서 보냈는데 교황청에서는 1432년부터 1464년까지 서기관 직을 맡아보았다.
그는 철학, 과학, 고전, 예술 등 각 분야를 고루 연구하면서 윤리학, 종교, 사회학, 법률, 수학, 자연과학의 여러 분과에 관한 논문과 소책자들을 펴냈다.
그의 광범위한 지식수준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방법으로 미루어 볼 때 알베르티는 전형적인 초기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시를 짓기도 했고, 고전에 매우 능통했는데, 그가 루키아노스Lukianos(그리스의 풍자극 작가)의 방식대로 쓴 희극과 대화편의 두 작품은 새로 발견된 고대에 관한 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술에 관한 그의 이론적 사상은 주로 세 권의 저서에 수록되어 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이 1436년 아마도 라틴어로 썼다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위해 알베르티 자신이 직접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듯한 회화에 관한 논문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회화론 Della Pittura di Leon Battista Alberti Libri tre』이다.
두 번째 나온 것으로 그의 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론 De Re Aedificatoria』은 10권에 달하는 건축에 관한 전집으로, 알베르티가 1450년경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472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추가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하면서 펴낸 책이다.
마지막으로 1464년 바로 직전에 쓴 것으로 알려진 조각에 관한 소책자로 『조각론 De Statua』이 있다.2-1)
조각, 회화, 건축이라는 다양한 장르를 포괄한 그의 저작은 학문과 미술 그리고 시의 종합이며, 그의 예술론은 르네상스 미술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저작은 고대와 중세의 예술 표상들을 종합한 것으로 16~17세기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루카 델라 롭비아, 마사치오 등과 교분을 나눈 알베르티는 화가에게는 특별한 재능과 기술이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인문학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리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자연의 사건들과 인간의 행위들을 적절하게 재현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과학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화가가 구비해야 할 과학적 지식이란 기본적으로 수학에 관한 지식으로 레오나르도나 뒤러의 드로잉에서 볼 수 있는 비례와 원근법에 의한 선의 사용을 의미했다.
색채보다 선을 더 중요시하는 이런 경향은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에 두드러졌다.
수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정확하게 오브제를 묘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회화가 통일성을 결여하고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알베르티에게 미술이란 이성과 방법을 통해 습득되며 실천에 의해 숙달되는 것이며 이는 그의 사상의 중심이었다.
예술가는 이성으로서 예술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포착해야 하며 자기보다 앞선 다른 예술가들이 만든 걸작품들을 연구함으로써 예술 실천에 관한 교훈들을 산출해낼 수 있게 되는데 예술 실천은 항상 실질적인 경험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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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과 비례는 르네상스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드로잉은 한 마디로 대상을 명확하게 관찰한 후 원근법으로 정리하는 예술이다.
달리 말하면 대상의 부분들을 실질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먕확하게 각 부분들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원근법이란 말은 '앞을 바라본다'는 뜻의 라틴어 프로스펙투스prospectus에서 온 말이다.
소위 말하는 직선 원근법linear perspective은 미켈란젤로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예술가들에 의해서 이미 완성되었다.
직선 원근법은 삼차원의 공간에 나타난 선이나 형태의 시각적 변화를 재현할 수 있게 해준다.
르네상스식 원근법은 대체로 서양인에게 공간의 사물을 투시하는 가장 적합했던 방법으로 평행선을 관찰자의 눈높이인 수평선의 소실점vanishing point으로 모이게 하고, 보는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형태를 점차 작게 그리는 것이다.
사실주의 회화는 이런 규칙을 반드시 따라야 했다.
이런 지각 시스템을 뒤러Alberecht Durer(1471-1528)가 말년에 시각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동판화 <여인의 투시도를 그리는 제도사>에서 시점을 수직선과 낮추게 하기 위해 화가로 하여금 자신의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고 세워진 격자 철망을 통해 투시하게 한다.
화가는 모델의 시각적 영상을 원근법으로 축소해서 볼 수 있는 시점에서 그 모델을 바라보게 된다. 모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중심축선이 화가의 시선과 일치하는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인 인물의 머리와 어깨는 실제 크기에 비해 작게 나타나고, 가까이 있는 무릎과 다리 부분은 보다 크게 나타난다.
뒤러의 제도사 앞 테이블 위에는 격자 철망과 동일한 크기의 격자가 표시된 종이가 놓여 있다.
화가는 철망을 통해 명확한 각도, 굴곡, 선의 길이 등을 수직, 수평선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지각한 바를 종이에 그린다.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그리면 원근법에 의한 모델의 단축된 형태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비례, 형태, 크기 등은 화가가 알고 있는 실제 인체의 비례, 형태, 크기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지각된 그대로, 즉 사실과 다른 비례로 그릴 경우에만 실제와 같아진다.
뒤러의 시스템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입체적 공간의 환영을 어떻게 평면에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즉 어떻게 가시적인 세계로 재창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었다.
사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은 복잡한 수학 시스템으로 전개되었는데 뒤러가 이 간단한 방법을 창안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의 화가들로 하여금 대상의 실제 모습에 시각적 변형과 사실주의 화법에 대한 그들의 정신적인 반발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직선 원근법에서는 고정된 시점을 요구하지만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머리를 확고부동하게 고정시키고 작업할까?
엄격하게 원근법의 규칙 내에서만 그릴 경우 아주 메마르고 굳어버린 그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이 눈앞에 어른거려 (예술가의) 심의력을 속박했다는 흔적을 보이는 일이 없어 그것이 자연인 것처럼 보이는 한에 있어 예술이다"는 칸트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기술은 창작의 수단일 뿐 화가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투명한 정신으로 작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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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드로잉은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해야 한다


인체 드로잉 테크네는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해야 한다.
인체를 사랑하는 행위 그 자체가 존엄성의 추구인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를 특징지우는 개념으로 철학적 배경은 인간의 영혼이 미beauty와 자연의 일치에 매개적인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이런 개념을 고취시켜 르네상스를 인본주의로 꽃피운 사람이 피치노Marsilius Ficinus(1433-99)이다.
'플라토닉 러브 amor Platonicus'란 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한데 조화시킨 장본인이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인간이 미와 자연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인체 드로잉에 전념했다.
오늘날 르네상스 대가들과 같은 훌륭한 드로잉이 미술에서 거의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드로잉은 오랜 경험을 통해 익혀지는 것이며 미와 자연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창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명상과 맑은 정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화가들은 이런 노력을 기피하기 때문에 훌륭한 드로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주 맑은 정신을 가진 모범적인 예술가가 있었다.
회화와 조각 그리고 드로잉 모두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이다.
그의 작품이 이탈리아인들에게 예술적으로 얼마나 놀랍게 받아들여졌든지 오늘날에도 믿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보게 되면 "오, 미켈란젤로!"라고 감탄한다.
그가 타계하고 60년이 지난 후 그의 편지 495통이 발견되었는데 편지에 쓴 많은 시에서 그가 또한 시인이었음이 알려졌다.
당대 그를 대적할 만한 사람으로는 연장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었다.
외적인 사실주의 묘사에 있어서는 해부학에 근거한 레오나르도의 완벽한 드로잉이 뛰어나지만, 내적으로 투명한 정신과 미적인 면에서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그는 미켈란젤로의 발끝에도 못미친다.
레오나르도 자신도 시인의 영혼을 가진 미켈란젤로에 대해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하루는 레오나르도가 길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단테에 관해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그 옆을 지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친구들에게 미켈란젤로가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단테를 잘 아는 사람이 저기 걸어가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빈정거렸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을 하고 그냥 지나쳤다.
상대를 하지 않은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며 명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일에만 정진했다.
그의 정신의 일면을 알게 해주는 시를 하나 소개한다.
그는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자신을 성 바르톨로메우스St. Bartholomeu에 의해 성난 구세주 발 아래 지옥으로 던져지는 죄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렇게 번역해보았다.
나의 허물을 당신의 순결한 귀로 듣지 마소서
Hear no my fault with thy chaste ear,
나를 향해 당신의 의로운 팔을 들지 마소서
nor raise toward me thy righteous arm
주여, 최후의 순간에 당신의 관대한 팔을 나를 향해 내미소서
Lord, in the hours stretch toward me thy forgiving arms
<최후의 심판>은 분명 미켈란젤로 자신의 영혼을 위한 관심을 나타낸 작품이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 이후 영혼을 위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낸 작품을 더이상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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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박물관


러시아와의 전쟁을 종결시킨 일본은 이토伊藤博文를 조선에 파견하여 식민지화작업을 추진했다.
이토는 1905년 11월 일본군을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을사5적 이완용(1858~1926),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형과 야합하여 을사조약을 체결시켰다.
통감부 설치와 조선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의 체결로 조선 정부는 대외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통감부의 통제를 받게 되어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민영환은 굴욕적인 조약에 항거하여 마침내 자결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잘 말해준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듬해 봄 그가 거처하던 사랑채 댓돌 밑에서 푸른 대나무 한 그루가 솟아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대나무가 만영환의 원통한 넋이 환생한 것이라고 떠들어댔고 마침내 그 대나무를 ‘혈죽血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소문을 들은 안중식이 현장으로 달려가 대나무를 그려서 민영환의 넋을 기렸다.
그러나 안중식의 <혈죽도>는 현존하지 않는다.
<혈죽도>를 그려 충신의 넋을 기린 안중식은 자신의 안일을 위해 나중에 친일파의 거두인 이완용에게 아부하면서 그에게 붕새를 그려 바치는 비열함을 보였다. 당대의 화단을 대표하는 그가 매국노와 손을 잡았으므로 훗날 젊은 김은호를 천거하여 궁중벽화와 어진을 그리게 할 수 있었다.

190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이 이왕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박물관은 1915년 일제 총독부에 의해서 설립된 박물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박물관의 양대 축을 이루었다.
이왕가 박물관은 창경궁 일관에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설립되었으며 명정전 일대를 전시실로 삼아 1909년 11월 1일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공식 기록 『이왕가 박물관 소장풍 사진첩』에 의하면 순종이 명하여 박물관을 일반에게 관람하게 했다.
박물관 제도는 개항기에 일본을 통해 주로 소개되었는데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알려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박정양의 글에서 박물관 제도에 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박정양 일행이 파견된 그 해 일본에서는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박정양은 내무성과 농상무성을 둘러보고 쓴 보고서 『일본국 내무성 직장사무부 농상무성』에서 박물관 제도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박물국은 박물관 사무를 관리하며 천산天産, 인조人造, 고기금물古器今物을 수집하여 견문을 넓히므로 박물국이라 한다”고 전제한 후 “각국 소산을 진열하지 않는 것이 없어 이로써 인민을 가르치는 자료로 삼는다”고 하여 박물관의 사회적 기능을 지적했다.
박물관을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이해한 예를 1888년 박영효가 올린 ‘박영효 건백서建白書’에서 알 수 있다.
박영효는 자신과 함께 소위 급진개화파로 불리운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김윤식(1835~1922) 등과 함께 무장 정변을 준비하여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 축하연 대 자체 무장력과 일본군을 동원해 민씨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3일만에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1888년에 올린 개혁 상소에서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와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가운데 교육 및 학술문화 정책의 하나로 박물관을 설립할 것을 들었다.
『승정원일기』 융희 2년(1908)에 의하면 1908년 3월 7일 시모고리야마 세이이치下郡山誠一를 주임대우로 박물관 조사사무를 맡긴 것이 박물관 사무의 시작이었다.
이어 5월 29일에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態彦를 주임대우로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서무 및 회계를 맡겼으며 6월 18일 유한용에게 판임대우로, 7월 15일에 야야베 시게루野野部茂에게 박물관 사무를 맡겼다.
『승정원일기』 융희 1년에 의하면 유한용은 1907년 9월 3일에 육군 부령으로서 무관직을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 직원의 고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 박물관 설립의 의의나 목적은 적혀 있지 않았다.
1912년에 발간된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에 당시 이왕직 차관이었던 고미야 사보마쯔小宮三保松가 쓴 서문에 박물관의 설립 의도가 기술되어 있다.
명치 40년의 겨울, 한국 황제 즉 현금 이왕 전하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별거하는 준비를 할 때 창덕궁 수선공사를 하면서 나는 그 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11월 4일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씨 및 궁내부대신 이윤용씨가 “황제께서 무료해하실 것을 달래 드릴 오락이 없겠는가” 하고 물어서, 동·식물원과 박물관 창설을 제의하고 계획의 대략을 설명하니 크게 기뻐하면서 찬성하여 건물의 설계, 물건의 수집에 착수해서 41년 9월 관장할 부국이 되는 어원사무국도 신설하였다.
그러나 고미야의 회고와는 달리 어원사무국 관제는 1908년 8월 13일에 반포되었다.
고미야의 회고에 의하면 박물관은 순종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한 오락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발의자는 바로 고미야 자신이었다.
순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여파로 강제 양위당한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등극했지만 일본 통감부의 의도대로 고종과 격리되도록 그 해 11월 13일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고미야의 글에서 확인되듯 동·식물원과 박물관의 설립은 창덕궁 수선공사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되었다.
11월 4일에 논의를 받고 이틀 후 계획을 제의한 것이다.
일본이 근대 국가 체제 구축의 한 제도로 박물관을 설립한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실세를 잃은 황제의 위안거리로 설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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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 로젠버그와 클레멘트 그린버그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유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예술 전반에 걸쳐 낙후해 있었다.
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의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탄압을 피해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뉴욕으로 피신했으며 그들에 의해 미국 미술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예술가들만 뉴욕으로 피신한 것이 아니라 평론가들도 피신해왔으므로 미술비평도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시인이나 문인이 평론에 종사했지만 대전 후 전문 평론가들이 출현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대전 후 뉴욕 미술세계에서의 미술비평에는 그린버그와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1906-78) 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로젠버그가 미술품에 대한 해석으로 중요하게 여긴 것은 예술가의 창조행위였다.
그는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 특히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 그의 창조행위에 역점을 두고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는 예술가에게 있어 캔버스를 창조행위를 위한 투기장으로 보았으며 캔버스에서 발생하는 것을 허구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건으로 보았다.
그가 폴록의 작품을 사건으로 해석한 것은 적중했는데 그 밖에 달리 설명할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조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그는 회화에서 필수적인 요소들로 여겨온 형태, 색채, 구성, 드로잉 심지어 캔버스마저 없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미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으로 유럽 모더니즘 회화의 전통과 단절하고 새 모습으로 회화가 탄생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영국 평론가 허버트 리드는 말했다.
로젠버그의 비평은 화가들이 자기 자신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비평의 최고 기능이며 창조과정에 대한 강력한 공헌이다.
로젠버그와 달리 그린버그는 유럽 전통 미학 이론에 근거하여 추상표현주의를 해석하려고 했다.
그는 창조행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작품의 완성도에 중점을 두었다.
그가 로젠버그보다 더 위상이 높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 회화의 우위성을 역사의 필연으로 강조한 때문이다.
그는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미술사에 대한 그의 인식은 하인리히 뵐플린의 가시적 전개로서의 양식사였다.
뵐플린의 미술사에 대한 ‘선적’(혹은 조소적, 고전적) 그리고 ‘회화적’(혹은 바로크적)인 개념들이 르네상스 이래 현대에까지 주기적으로 교체되어 왔다고 그린버그는 생각했으며 상응하는 두 원리의 변증법적 전개로서의 회화사를 생각했다.
선적, 회화적 어느 쪽의 주기적 교차의 국면에서도 회화는 보다 순수하게 회화적인 것이 되어 왔다고 주장했는데 그가 말한 ‘순수’는 칸트의 ‘순수이성’을 ‘순수회화’로 바꾼 개념이었다.
그에게 칸트는 최초의 모더니스트였다.
그린버그는 선적인 지향도 궁극적으로는 이전보다 더욱 회화적인 것이 되어 이의 가능성을 확대했다고 주장했다.
컬러필드 페인팅Color Field Painting에 대한 그의 옹호는 이 같은 이론에 근거했으며, 회화의 고유한 이차원성 즉 평면성을 자각적으로 행해진 자기순화로서의 근대주의적 환원으로 간주했다.
그는 선적 그리고 회화적 두 원리가 컬러필드 페인팅에서 마침내 지양되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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