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서는 궁정화가들의 영향이 컸다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예를 들면 프랑수아 부셰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1756)은 당시 보편적인 미적 취향이 되었으며 화가지망생들에게 규범이 되었다.
부셰의 작품은 로코코풍으로 이 양식의 특징은 쾌, 환상, 즐거움, 도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로코코는 바로크의 마지막을 장식한 양식이자 르네상스 최후에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로코코 양식이 프랑스에 소개된 것은 1700년경이었고 18세기에 유럽 전역에 성행했다.
로코코는 회화와 건축에 나타난 양식으로 그 특징은 밝고 우아하며, 우스꽝스럽거나 쾌활하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로코코는 바로크(Baroque, 포르투칼어 바로코Barocco에서 온 말로 '불규칙한 진주나 돌'을 의미) 양식에 반발하여 생긴 양식이지만 동시에 바로크로부터 진전된 양식이다.
로코코Rococo란 말은 바로코Barocco와 돌이란 뜻의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의 합성어이다.
로코코의 어원적 의미는 '비속하게 현란하거나 잘 꾸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경멸적인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로코코 예술가들은 바로크의 복잡한 구성은 받아들이면서도 화면의 복잡함, 칙칙한 색, 지나친 허식 대신 밝은 핑크색, 파란색, 초록색을 사용하면서 때로는 흰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의 지나치게 과대한 장식에 진력을 내고 우아하면서도 편리한 점을 요구했다.
로코코는 이런 요구에 부응해서 처음에는 주로 장식적이었다.
로코코의 대표적인 화가는 와토이고 로코코의 성숙된 낙천적 정신을 잘 표현한 화가들로는 부셰와 프라고나르를 꼽을 수 있다.

로코코 회화의 전형적인 모티프는 남신과 여신의 호색적인 기질에 관해 전래된 신화와 님프, 목자가 있는 목가적 장면들이었다.
신과 목자는 도자기 인형에도 사용될 만큼 흔한 주제였으며 파스텔 핑크,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등이 주로 사용되어 화사하게 나타났다.
로코코 회화는 사람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주었지만 정신적인 면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계몽주의 철학자와 작가들은 회화가 단지 장식적이거나 감각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디드로는 말했다.

"먼저 날 동요시켜라. 날 놀라게 하라. 날 공격하고 전율하게 하며 울게 만들고 조바심나게 하고 화 나게 하라. 그리고 나서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눈을 진정시켜라."

디드로의 말에서 로코코 회화가 무엇을 결여했는지 알 수 있다.
시각적으로만 요란한 로코코 회화에는 관람자의 정신 혹은 영혼에 호소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다.
미적으로 이런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던 시기에 다비드가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프아수아 부셰
로코코 화가로 알려진 부셰는 젊었을 때 와토를 좋아하여 그의 많은 작품을 판화로 제작했다.
그는 1727~31년 이탈리아로 가서 수학했고 파리로 돌아와서는 빠르게 화가로 성공했다.
1765년 앙립미술아카데미의 책임자, 루이 16세의 궁정 수석화가가 되었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퐁파두르는 화가들 가운데 부셰를 가장 좋아했다.
부셰는 그녀에게 그림 그리기를 지도했으며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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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프랑스의 최고 화가라는 사실을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프랑스의 최고 화가라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26살에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동시에 프랑스 국내 치안사령관이라는 막중한 권력을 가졌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불과 10년만에 그는 실질적으로 프랑스 군대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만난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다비드와 정식으로 교신한 것은 1797년 봄과 여름이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면서 다비드에게 자신과 함께 동행하여 전투장면을 그려줄 것을 청했지만 다비드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처음 만난 것은 1797년 12월 10일 파리에서였다.
전승하고 돌아온 나폴레옹을 정부가 공식 축하하는 축하연에서였다.
나폴레옹은 다비드를 꼭 만나기를 원했으므로 집정부 간사에게 다비드와 함게 식사하도록 자리 배정을 지시했다.
다비드 역시 나폴레옹을 만나기를 원했던 터라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대화했다.
식사 도중 다비드는 나폴레옹에게 초상을 그리겠다고 했고 나폴레옹은 쾌히 승낙했다.
이 날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사람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그를 가리켜 "프랑스 최고의 화가"라고 극찬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 30살에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 제1통령에 올랐고 35살에 황제에 즉위했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막강했고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비드는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또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황제와 황후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그린 것은 다비드가 프랑스 최고의 화가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21살 연상인 다비드를 다루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많은 장군들이 부를 축적했듯이 다비드도 부를 탐닉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 앞서 다비드에게 그날의 장면을 네 개의 캔버스에 그릴 것을 공식으로 청했으나 다비드가 요구하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고 다비드는 두 점만을 그렸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정치가로서 존경했지만 그를 통해 그림값을 터무니없이 올려 받으려고 했다.
나폴레옹도 다비드를 존경했지만 그림값을 지나치게 청구할 때는 다른 화가들에게 의뢰했다.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프랑스 화가가 그린 가장 큰 작품들 중 하나였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고나식에는 200여 명이 공원되었는데 다비드가 묘사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실제와 동일했다.
과연 다비드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1812년에 그린 <서재에서의 나폴레옹>은 혈기왕성하고 매끈하고 날렵한 몸매의 운동선수와도 같은 영웅이 아니라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모습의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작품을 보고 매우 만족해 하며 다비드에게 말했다.

"선생이 날 제대로 묘사했군요. 친애하는 다비드 선생, 난 밤에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낮에는 국민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그 밖에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청을 받고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앞서 혁명기간 중에 그린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다비드의 작품은 순수 미학적 동기에서 그린 것들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게 그려진 것들이다.
그래서 사실이 많이 왜곡되었다.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인 단순하고 명료함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칭찬을 받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는 것들이었다.
화가가 정치가와 유착되었을 때,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그 화가의 작품이 미학적으로는 파산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다비드의 일생을 통해 볼 수 있다.
결국 정치가와의 유착고리가 끊어졌을 때, 즉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 나폴레옹의 사람 다비드도 그와 더불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강제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고 다비드는 스스로 벨기에로 망명하여 그곳에 뼈를 붇었다.
미술과 정치의 관계는 이 책의 주요 내용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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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신고전주의 회화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호라티우스의 맹세>

 

다비드는 37살 때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렸는데, 신고전주의 회화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힌다.
아마 1640년 피에르 코르네유가 쓴 <호라티우스 가족>을 읽었거나 이 가족에 관한 연극을 보고 아이디어를 구한 것 같은데, 이 작품은 당시 발레로도 공연되는 등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호라티우스 삼형제를 삼각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영웅들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했다.
삼형제는 말없이 결연한 자세를 취하고 여인들은 슬퍼하면서도 소리내어 울지 않는데, 이는 결의에 찬 감정을 나타낸 것으로 빙켈만은 이런 감정의 억제를 예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성격으로 꼽았다.

맹세는 방에서 이루어졌지만 다비드는 텅빈 방에 불필요한 가구들을 두지 않음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이 딴 곳을 향하지 못하게 했다.
드로잉에는 있었던 계단이나 불필요한 인물들을 제거함으로써 구상을 더욱 간결하게 했다.

그는 작은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한 장면처럼 넓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형상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릴리프 조각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공간구성 방식을 터득하였다.


다비드가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릴 때만 해도 프랑스 대혁명(1789~93)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지만, 1790년대 초에는 이 작품이 새로 집권한 프랑스 공화당에 충성하는 제스처로 해석되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비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혁명이 일어난 이후 정치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정치 선전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비드는 1780년대에 이미 영웅주의와 조국에 충성을 표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1783년에 그린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도 그런 내용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헥토르(그리스의 장군 아킬레우스에 의해 죽은 트로이의 왕자)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비탄에 젖어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위대한 영웅 헥토르의 고결한 시신이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구성했다.
침상 아래에 검과 투구를 그려넣어 관람자로 하여금 전쟁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는 푸생과 개빈 해밀턴이 그린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들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한 장면을 그린 이 작품으로 다비드는 더욱 더 유명해졌고 왕립미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다비드는 정치와 인연을 맺으면서 부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 프랑스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주는 권력도 탐하게 되었다.
역사화를 그려서 명성을 얻은 후 그리스 역사에서 좀더 엄격한 주제를 선택하여 그렸는데 그것이 <소크라테의 죽음>이다.
마치 푸생이 그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이 작품에는 놀랍게도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그의 기교가 두드러진다.
이런 기교는 카라바조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성공하자 왕은 두 번째 작품을 의뢰했으며 그는 자신이 선택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을 그렸다.
최초의 집정관인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이 로마제국에 반하는 음모를 꾸민 사실을 알고 두 아들을 사형시킨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릭토르(집정관을 따라다니며 죄인을 잡던 관리)들이 집정관으로 하여금 장사지낼 수 있도록 시신들을 가져왔다.
브루투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 이전에 집정관으로서 공화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우선적인 가치라는 교훈을 주는 이 작품을 1790년대 햑명적 이상주의자들이 환호하며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극장을 자신들의 회의장으로 사용하면서 단두대로 목을 치는 사형제도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반혁명적인 인사들을 처형했으며 루이 16세와 왕후도 처형했다.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 공화국은 대의회장의 연단에 혁명의 과정에서 죽어간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다비드의 그림 두 점을 걸어놓았다.

두 사람 모두 1793년에 반대파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다.
다비드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던 날 밤 대의회 의원이었던 미셀 르 펠레티에가 왕의 호위대에 속한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로부터 6개월 후에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장-폴 마라도 광신적인 반혁명파 여인 샬로트 코르데이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마라는 목욕하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마라가 이런 모습으로 살해된 상황은 품위가 있거나 웅장한 그림이 되기 어렵지만 다비드는 실제 현장을 세밀히 살펴본 후 순교자와도 같은 죽음을 맞이한 영웅의 모습으로 마라를 묘사해냈다.
다비는 <마라의 죽음>에서 영웅주의와 미덕의 이상을 표현했다.
다비드는 마라를 알고 있었고 그를 좋아했다.
그는 마라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사상가들에 견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린 소크라테스와도 비교할 만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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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뿐 아니라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뿐 아니라 유럽을 대표할 만한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를 말할 때면 우리는 신고전주의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신고전주의는 하나의 양식이었다.
1750년에 시작되어 1830년까지 유럽에 널리 유행된 신고전주의는 당대의 미술에 만족하지 못한 예술가들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양식으로, 고대의 미술 특히 그리스의 미술을 창조적 규범으로 삼아 새롭게 미술을 시작하려 했던 일련의 예술가들의 노력에 의한 성과물이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들을 재활시키려고 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회화, 조각, 건축뿐 아니라 도자기, 가구, 택스타일에서도 두드러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이 양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1830년 이후에는 확고한 주류 양식으로 미술사에 자리매김하였다.
유럽의 집, 교회, 뮤지엄, 은행, 상점들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다지아니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서면 의자, 침대, 주전자, 버클, 램프, 의상, 심지어는 헤어스타일까지도 그리스 양식이어서 고전 일색이었다.

황제 나폴레옹이 미술에서 신고전주의를 가장 좋아했던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고전주의의 특징은 단순한 형태와 색을 추구하면서 복잡한 구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꾸밈이 없고 기하적인 이 시기의 작품들에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거추장스러운 양식들인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한 의도적인 배제도 내재되어 있었다.

신고전주의는 이탈리아로의 대여행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는 고대 그리스의 걸작들을 모방한 미술품들이 많았고 고대 유물들이 발견되자 고전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더욱 더 활발해졌다.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고대 로마의 유물을 수집했고 그를 이은 클레멘트 12세는 1734년 고대 유물을 일반인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유럽에 처음으로 뮤지엄을 건립했다.
고고학자들이 1738년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작업을 폈으며 10년 후에는 폼페이에서 발굴잡업을 했다.

프랑스인 수도원장 베르나르 드 몽포콩이 1719년에 출간한 로마 미술에 관한 책 <형태로 설명되고 재현된 고대>는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훌륭한 자료가 되었다.
이후 고대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고대에 관한 서적들을 출간했고 고대의 문화들을 삽화로 재현해냈다.
이런 출간물과 삽화들은 과거 번성했던 문화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었지만 삽화를 보고 이탈리아를 여행한 사람들은 부서지고 낡은 유물들을 보고 실망하기도 했다. 이렇듯 유럽 전체가 고대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을 때 다비드가 화가로 활약했다.
그리고 그는 신고전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8살에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유럽에 명성이 자자한 조제프-마리 비엥으로부터 수학했다.
아직 파리 화단에는 로코코 양식이 건재할 때였는데 비엥은 그림을 아름답게 꾸미는 로코코 양식보다는 그리스 미술에 매료되어 거전을 주제로 그리고 있었다.

다비드는 비엥을 통해 신고전주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다비드는 1774년 로마대상을 수상했고 2년 후 비엥과 함께 이탈리아로 갔다.
다비드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고대에 관해 탐닉했으며 새로운 고전주의 재활에 앞장을 선 영국 화가 개빈 해밀턴을 만났다.
1780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는 신고전주의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는데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개념은 그의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미술평론가 드니 디드로는 다비드를 가리켜 '신푸생주의자'라고 불렀다.
영국의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는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또 보려고 살롱전이 열린 전시장을 무려 18차례나 방문한 후 그의 작품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극찬하면서 그 완벽함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에 견주었다.
레이놀즈는 다비드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이래 최고의 화가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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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피리님, 

<폴록과 친구들> 그리고 <워홀과 친구들>을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폴록과 친구들>은 뉴욕에 거주할 때 쓴 책으로 나의 처녀작입니다.
폴록이 살던 집에도 가보았고,
폴록의 무덤에도 갔었습니다.
그의 무덤이 있는 묘지는 예술가들의 정원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시인, 화가, 조각가, 영화제작자들이 묻혀 있는데,
묘비도 각기 다르고 묘비에 적힌 글도 생전의 뽐냄이 베어 있습니다.
폴록의 무덤 앞에는 친구들이 갖다놓은 커다란 바위가 있고 바위에 조그맣게 그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 앞에는 퍽 후에 타계한 아내 크래스너 리의 무덤에는 작은 돌이 있습니다.
묘비의 크기만큼 두 사람이 회화에 끼친 영향이 크고 작습니다.

<워홀과 친구들>을 쓰게 된 건,
미국 미술을 이해하는 가장 지름길은 폴록, 워홀, 뒤샹 세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후속편으로 쓴 것입니다.
워홀은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정받는 이유는 그가 가장 평범한 것을 미술품으로 변형시켰기 때문입니다.
비누상자에 불과한 <브릴로 상자>를 전시함으로써 그림이란 대상에 대한 모사가 아니라 대상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수퍼마켓에 진열된 가장 평범한 비누상자라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약 2300년에 걸친 서양사람들의 회화에 대한 관념을 단번에 휴지통 속에 챠넣고 새로운 미술의 지평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혁명이 한 사람의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미술사의 변혁이 워홀 한 사람의 행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술이 달라지는 건 그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에서 시가 달라지는 것 그리고 음악에서 곡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서 그 시대가 다른 시 다른 곡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늘 새로운 것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무엇일까?
나는 마술피리님이 한 말이 바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자유를 그리워하였으나
그 자유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들입니다.
창작이 바로 자유에 대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영화가 있었습니다.
장기수 한 사람이 있었는데, 
젊어서 감옥에 갇힌 후 늙었습니다.
그는 감옥생활에 아주 익숙해졌고,
그가 말한 대로 감옥 안에서는 불편을 못느꼈습니다.
그는 출소했습니다.
너무 오래 사회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사회는 두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수퍼마켓에서 허드래일을 하며 사회에 적용하려고 했지만 그는 포기하고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그는 자유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는 비전향장기수가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부인하는 각서를 쓰면 사회에 나올 수 있는데,
거부하고 감옥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사람들입니다.
역설로 들리겠지만 그들은 자유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를 선택한 것이지요.
공산주의를 부인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입니다.
물론 서슬퍼렇던 박정희 독재시절 때의 일로 그들이 보기에는 박정희 독재보다는 공산주의가 더 자유롭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리고 순순히 각서를 받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전두환 때 고문과 억압으로 억지각서를 받아내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유에 대한 그들의 선택은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분명 자유에 단계가 있습니다.
모짜르트는 성장한 후 자신에게 음악의 영향을 강요한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정신적인 구속에 대한 반발입니다.
예술가들은 최대한의 자유를 원합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육체적으로 편했던 장기수가 출소하여 모든 걸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이 얼마나 버거웠던지 자살한 영화처럼,
노예근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오히려 두려울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라고 주문하는 건 그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시키기만 한 사람에게 반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면 그 사람은 못견딜 것입니다.

예술가들은 사회에 대고 이래라 저래라 시키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찌 보면 굴레 벗은 망아지들인데,
망아지들의 자유를 굴레에 메인 망아지들은 부러워한답니다.
스스로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굴레 벗은 망아지가 매우 자유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자유의 단계를 한층 높이는 것은 스스로에게 무엇이 굴레인지를 알아서 하나씩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일종의 반항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그리고 머리를 써가며 반항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반항이라는 걸 상대가 느끼지 못하게 기술적으로 반항해야 합니다.
반항에 승복할 수밖에 없도록 지능적으로 반항해야 합니다.
성공한 예술가들은 이런 식으로 반항한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은 예술가들은 노골적으로 또는 반항을 위한 반항을 하다가 좌절합니다.

자유의 단계가 아주 높았던 원효대사는 중의 신분이지만 생선을 구워먹고 제 할 말 다하지 않았습니까?

마술피리님,
이 사이트에 많은 글을 남기시기 바람니다.
올리는 글을 꼭 챙겨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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