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동굴 속의 마돈나
 

  1483년 4월 25일에 맺어진 계약서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암브로조와 이반젤리스타 데 프레디스와 계약을 맺고 근래 창설된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한 잉태 단체'를 위해 상 프란체스코 그랑데San Francesco Grande 교회 내의 예배당에 제단화를 그리기로 했다.
이 제단화는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세 쪽 제단화로 중앙 패널에 레오나르도가 유화로 그렸고 암브로조가 양쪽 날개 패널에 그렸으며 이반젤리스타는 금박을 입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업은 암브로조가 맡아 레오나르도에게 일부를 의뢰한 것으로 보인다.
반은 라틴어 반은 이탈리아어로 작성된 계약서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중앙 패널에 그린 그림은 양편에 두 예언자가 있고 두 사람 사이에 동정녀 마리아가 있는 모습으로 마리아의 가운을 그는 진한 파란색에 금실로 무늬를 넣고 초록색으로 선이 나타나게 했다.
마리아의 머리 위 하느님의 의상도 마찬가지로 파란색과 금색이며 금색 후광을 한 천사들을 그는 그리스인의 양식으로 그려졌다.
아기 예수를 금색 플랫폼 같은 것 위에 있게 하고 배경은 다양한 색으로 산과 바위를 그려 넣었다.

계약서에는 이 패널을 필히 '순결한 잉태의 축제의 날'인 12월 8일 이전까지 그려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세 쪽 제단화 전체의 값은 200두카트였다.
유화가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라서 계약서에는 그림을 10년 동안 보증해야 한다는 단서가 적혀 있다.
그리고 전문가들에 의해 작품을 심사한 후 좋은 평을 듣게 되면 보너스를 따로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시기에 <바위동굴 속의 마돈나 Madonna of the Rocks>를 그렸다.
<바위동굴 속의 마돈나>란 제목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고 레오나르도가 붙인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도상의 후광이 그려져 있지 않다.
그는 교회가 강요하는 교리에 무관심했으며 성서를 주제로 그릴 때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렸을 뿐 카톨릭의 신학적 해석에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후광 같은 고풍의 장식을 불필요한 요소로 보았다.
이 작품에 나타난 의상은 특별한 종류의 천도 아니고 수를 놓은 장식도 없다.
바위를 배경으로 중앙에 마리아, 오른편에 천사가 있고 날개가 그늘로 인해 잘 보이지 않으며 중앙 아래 아기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보인다.
마리아의 한때를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교회가 원하는 도상적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15세기 피렌체의 마돈나 그림이란 맥락에서 볼 때 <바위동굴 속의 마돈나>는 매우 독특하다.
마돈나는 무릎을 꿇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고 옆모습이 아니라 앞모습이다.
자기 오른편에서 몸을 앞으로 굽히고 아기 예수를 향해 기도하는 아기 요한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왼손은 따로 움직이는 중이라서 공중에 떠 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 예수는 축복의 제스처로 요한에 응답한다.
예수 옆에는 천사가 무릎을 꿇은 채 하느님의 아들을 보호하고 있다.
천사는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천사는 길 안내판처럼 오른손으로 요한을 가리키고 있다.
이상하게 생긴 배경의 바위 틈 사이로 바깥 세상의 빛이 환희 보인다.
주제가 새로울 뿐만 아니라 주제를 다룬 방법도 새롭다.
네 사람 모두 자유로운 동작을 하고 있으며 회화적인 빛의 효과로 어두운 배경을 통해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뵐플린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그림은 건축적 뼈대를 하고 있다. 이 말은 화가들이 보여준 단순한 좌우대칭과는 전혀 다름을 뜻한다. 자유가 더 많고 동시에 법칙도 더 많다. 개별적 요소들은 전체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것이야말로 16세기의 양식인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일찍이 16세기의 흔적을 선보였다.”

복음서에는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음을 알고 헤로드 대왕을 찾아 왔을 때 헤로드는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그 지역에서 태어난 남아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천사 가브리엘은 이 사실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주었고 두 사람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가 헤로드가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나 성 누가에서 기인한 외경과 14세기 도미니크회 소속 프라 피에트로 카발카Fra Pietro Cavalca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마리아는 피난 중 천사 유리엘Uriel의 보호를 받던 성 엘리자베스와 아기 요한을 만난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까지 광야에서 지냈다.

레오나르도는 이 이야기에 근거해 그렸으며 마리아는 바위동굴 앞에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놀랍게도 산이 열리고 마리아 가족이 거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성서에는 훗날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적혀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역할이 반대가 되어 왼쪽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요한을 오른쪽 예수가 오른손을 들어 축복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으며 천사가 손가락으로 요한을 가리키고 있다.
배경의 바위 속 갈라진 틈으로 흐르는 물은 정결의식 세례를 암시한다.

바위와 동굴은 전통적으로 피렌체 미술에서 원시적 자연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레오나르도에게는 개인적인 기억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어렸을 적 캄캄한 동굴 속을 두려움을 갖고 바라보면서도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하고 호기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성화에 자신의 기억과 느낌을 삽입했다.
그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상을 행복에 젖어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오로지 아들의 행복과 안전만을 염려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거처와 놀이터를 마련해준다.
땅거미가 지고 있지만 어머니는 염려할 바가 전혀 없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대부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린 년대가 확실하지 않다.
왜 천사가 손가락으로 요한을 가리키고 있는지, 왜 관람자에게 이 장면을 부각시켰는지, '순결한 잉태'에 바친 예배당 제단에 왜 이런 그림을 걸려고 했는지 등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다.
각 도시마다 수호성인이 있는데, 요한은 피렌체를 보호하는 성인이다.
작품의 배경이 미완성의 <성 제롬>의 배경과 유사하고 베로키오의 양식이 아직 남아 있어 그가 밀라노로 오기 전 토스카니에서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가 이 작품을 예배당 제단을 위해 그리려고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그리고 있었고 밀라노에 와서야 완성시킨 것을 의미한다.
마돈나가 아기 예수와 요한과 함께 있는 장면은 당시로서는 별난 모티프였다.
계약서에는 그가 8개월 반만에 제단화를 그리기로 되어 있었고 이는 그에게는 매우 짧은 기간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충분한 기간이지만 무엇을 그릴까 하고 구상하는 데는 짧은 기간이다.
그는 누군가가 이미 창안한 구성을 따르지 않았으며 주제를 묘사하는 데 있어 완전한 습작을 거친 후에야 제작했으므로 비교적 짧은 기간에 그리기로 계약한 후 미리 구상했던 이것을 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레오나르도는 과격한 정신의 소유자였고 완벽주의자였다.

<바위동굴 속의 동정녀>는 두 점인데 한 점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으로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고 런던의 국립화랑National Gallery에 소장되어 있는 다른 한 점은 레오나르도가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협력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루브르의 것보다 나중에 그려진 이것에서 암브로조의 솜씨가 부분적으로 발견된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현존하지 않는 또 다른 유사 작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불완전하게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와 교회측은 20년 이상 소송으로 시비를 가렸다.
작품이 약속한 기간 내에 제작되지 않는 데다 세 사람이 완성시킨 작품을 교회측이 만족하지 못해 생긴 소송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추가로 100두카트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지만 25두카트만 받았을 뿐이다.
레오나르도만 계약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암브로조도 두 천사 음악가를 양쪽 날개 패널에 그리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한 천사만 그렸으며 후광도 금박도 넣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전통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는데, 공간을 약간이나마 고딕 양식으로 처리했고 바위 위에 식물을 묘사한 것은 전통 상징주의를 따른 것이다.
배경의 담쟁이덩굴은 충성과 지속을 의미하고 화면 앞의 종려와 붓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인류에게 평화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로부터 슬픔과 죽음의 꽃으로 알려진 아네모네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될 것을 예고해준다.
교회측은 레오나르도에게 예언자들에 에워싸인 동정녀를 그리라고 했지만 그는 예언적 표적과 상징적 요소들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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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에게 제시하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 갈 때 밀라노 최고 권력자 앞으로 쓴 편지를 소지했다.
긴 편지는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부탁해서 대신 쓰개 한 것이다.
문장력과 철자에 자신이 없어 스스로 쓰지 못했다.
편지는 11 혹은 12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탁월하신 군주님, 자칭 무기 발명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적을 충분히 검토한 결과 그들이 발명한 무기들은 보통 사용되는 것들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되었기에 어느 누구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는 가운데 저는 아래와 같은 간략하게 설명한 항목들을 실행하기 위해 군주님께 제 비밀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제가 고안한 다리bridge는 가볍지만 매우 강하며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나 적을 추격할 때 운반하기 아주 수월합니다. 그 밖의 고안품들도 있는데, 튼튼하고 공격뿐 아니라 화력에 있어서도 방어가 되며 장치와 분해가 용이한 것들입니다. 저는 또한 적의 무기들을 태워버리고 박살내는 방법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2. 저는 포위되었을 경우 해자moat(도시나 성곽 둘레의 외호)의 물을 말리는 방법과 무수한 다리, 도로 포장, 사다리 올리기, 그 밖의 이런 유형의 기구들을 제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3. 품목. 제방이 높고 장소나 지역이 험준해 폭격으로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요새 혹은 성채가 바위 위에 건립되었더라도 박살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4. 제게는 또한 매우 실용적이고 쉽게 운반할 수 있으며 돌들을 비처럼 쏟아지게 만드는 박격포에 대한 모델이 있습니다. 박격포에서 나오는 연기는 적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혼란스럽게 만들며 공포에 휩싸이게 합니다.

9. 그리고 저는 전투가 바다에서 벌어질 경우 공격과 방어 모두를 위한 매우 유용한 기구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 배들은 가장 강력한 대포, 발연, 화약조차 물리칠 수 있습니다.

5. 품목. 저는 소리를 내지 않는 가운데 통로와 비밀 지하터널을 파고 해자나 강 아래라도 통로와 터널을 파서 구불구불한 곳들을 따라 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6. 품목. 저는 위가 덮인 수송 수단을 만들 수 있으며 여기에는 안전하고 약점이 없으며 적의 포대를 관통하여 가장 강력한 군대를 섬멸시킬 수 있습니다. 보병대는 장애에 봉착하지 않고 손상을 받지 않는 가운데 이 수송 수단을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7. 품목. 필요하다면 저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것들과는 상이한 보기 좋고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커다란 사석포, 박격포, 불덩이를 투사하는 기구를 제작할 수도 있습니다.

8. 사석포에 문제가 생길 경우 투석기, 대형 투석기, 트라보키trabocchi 외에도 보통 사용하지 않는 놀라운 효과를 내는 비상한 기구들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라도 대처할 수 있는 공격과 방어용 무수한 다양한 종류의 기구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10. 평화로운 시기를 맞아서는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으며 누구라도 건축에 있어, 공용이나 개인용 건물 다자인에 있어, 또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물을 이동하는 법을 알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품목. 저는 대리석, 청동, 테라코타를 사용해 조각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물이라도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스포르차의 빛나는 가문과 군주님 어버이에 대한 자랑스러운 기억을 청동의 말로 불후의 영광과 영원한 영예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품목들을 제작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며 비현실적이겠지만 저는 군주님의 정원이나 군주님이 흡족해 하실 만한 어디에서라도 제가 몸소 제작할 수 있음을 겸허한 자세로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이 편지를 밀라노 최고 권력자에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과학에 근거해 새로운 무기와 공격과 방어를 겸용하는 기구들을 무수히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많은 시간을 군사용 기구들을 설계하는 데 쏟았다.
그의 노트북을 보면 이런 용도에 적합한 손에 들고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기구, 발사체, 화염투석기 등은 물론 가공할 파괴력의 기구와 요새화 등 이와 관련된 수없이 많은 드로잉을 볼 수 있다.
그가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에 언급한 품목들을 모두 디자인할 수 있었다.
피렌체가 로마, 나폴리, 그리고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한 방어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했으므로 요새화와 무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테고 레오나르도가 특히 군부 소속 공학가와도 같이 이런 일에 열중했다.
다양한 악기를 제작했듯이 그는 조립하고 기계화하며 체계화하는 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가 디자인한 군대용 북을 보면 톱니바퀴에 5개의 막대기를 달아 바퀴가 움직일 때 자동적으로 리듬이 있는 북소리가 나게 했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그는 총 사격 발사장치를 고안했는데, 바퀴에 달린 오르간 파이프 세트처럼 보였다. 이것은 11개의 포신이 장착되어 기관총처럼 연발로 발사할 수 있으며 일련의 원통들이 부착되어 있어 원하는 곳으로 신속한 이동이 가능했다.
그는 또 사다리로 성벽을 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한 번에 사다리 3개 혹은 4개를 밀쳐내는 기구도 디자인했다.
그는 7, 8개의 포신을 한 원통에 장착하기도 했는데 이는 기관총의 전신이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갔을 때 이탈리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전운이 감돌았다.
터키족은 아풀리아를 점령했으며 로마는 베네치아와 동맹관계를 맺었고 베네치아는 페라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계속해서 용병들을 고용해 아르젠타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에스테의 후작을 괴롭혔으며 롬바르디에 군대를 보냈다.
밀라노는 두 공화정 총독들 사이에서 외교적 중재를 벌이다가 이제 무장을 해야 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는 공화국이 필요로 하는 건 예술가보다는 군사전문 공학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편지를 공작에게 전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런 군사적 위기의 상황을 맞아 새로운 방향, 군사용 무기와 기구 디자인 전문가로 나아가려고 했음을 알게 된다.
군비산업은 오랫동안 밀라노의 주력 산업이었으므로 밀라노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밀라노의 비아 데글리 아르모라리 거리와 주변의 거리에는 수십 개의 무기판매점들이 있어 검을 제작하거나 장식했고, 창을 제작했으며, 도끼창, 헬멧, 방패 등을 제작했고 이것들은 국외로도 수출되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통적 무기들이다.
이탈리아는 북쪽의 이웃 나라들과 터키에 비하면 무기산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디자인한 것들이 생산에 들어갔더라면 무기산업은 한층 활기를 띠었을 것이며 이 분야에서 그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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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정신의 재창조


18세기 후반 로코코는 신고전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고전주의의 이상은 명확한 윤곽선과 단순한 표현, 그리고 우아함보다는 간결하고 솔직함에 있었다.
사람들은 실내를 장식하는 달콤한 감상과 에로티시즘에 싫증을 느꼈다.
고대로의 복귀는 처음에 로마적인 것보다는 그리스적인 것을 지향했다.
그것은 남부 이탈리아 및 폼페이에서의 고고학적 발견과 독일의 미술사학자이자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이론과 그의 동료 콜렉터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빙켈만은 고전적 이상을 그리스 천재가 만들어낸 것으로 보았으며 그리스 미술과 로마에서의 모작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최초의 역사가가 되었다.
그의 저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하여>는 로마로 떠나기 바로 직전인 1755년 5월에 드레스덴에서 출판되었다.
“이상적 예술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고대의 모방”이라고 주장한 이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유럽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이론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빙켈만은 이 책을 출간한 후 이탈리아로 가서 1759~64년에 걸쳐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비안코니 서한>(사후 간행),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브륄 서한>(1762년 간행), <최근의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퓌슬리 보고>(1764년 간행) 등 세 편의 보고서를 집필했다.
헤르쿨라네움(현재 이탈리아 명칭으로 에르콜라노)은 나폴리 동남쪽 베수비우스 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로서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비우스 산 분화 때 폼페이와 함께 매몰되었지만 폼페이와 달리 용암이 응회암으로 변했으므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빙켈만은 <라오콘>을 고대의 걸작으로 꼽았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왕자이자 제사장으로, 그리스군 목마의 비밀을 트로이인에게 알려준 죄로 신으로부터 벌을 받고 두 아들과 함께 큰 뱀에 감겨 죽었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그리스군의 목마를 라오콘이 제단에 공물로 바치려 하는 순간 아폴로가 보낸 두 마리의 큰 뱀이 라오콘과 두 아이를 습격했다.
아버지와 작은 아들은 이미 뱀에 물려 숨이 끓어질 지경이고, 큰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뱀의 공격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빙켈만은 <라오콘>을 찬양해마지 않았다.

“그리스 걸작들의 일반적이며 탁월한 특징은 결국 자세와 표현에서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이다.
바다의 수면이 사납게 날뛰어도 그 심해는 늘 평온한 것처럼 그리스 조상들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영혼을 나타냈다.
이 영혼은 격렬한 고통 속에 있는 <라오콘> 군상의 얼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고통은 얼굴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근육과 힘줄에도 나타나 있어서, 우리는 얼굴이나 육체의 다른 부분을 보지 않고 고통으로 움츠러든 하복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얼굴이나 전체 자세에서는 전혀 고통에 찬 격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고통은 우리의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위대한 이처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고대를 모방하라고 권한 빙켈만은 자신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생명력 없는 모방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정신의 재창조를 원했으며, 종종 인용되는 그리스 미술의 특징에 관해 그가 언급한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는 미적 요소와 더불어 윤리적 요소에도 적용되었다.
빙켈만은 1768년 트리에스테에서 살해되었는데, 여인숙에 같이 묵은 손님에게 금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하다.

빙켈만이 그리스 정신의 재창조를 역설하기 250년 전에 미켈란젤로는 이미 <다윗>을 통해 시위했다.
현재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는 그리스 정신이 좀더 강조된 작품들이다.
일반적으로 고대에 대한 관심이 15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그에 대한 관심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14세기 중반 피렌체의 유명한 시인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는 고대의 문헌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보통 사람들도 고대에 대한 동경과 고대 문물에 대한 존경으로 값비싼 골동품을 구입하고 싶어 했다.
고대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신분계급을 표시하는 메달을 가자로 만들어 고대 유물이라고 파는 상인이 생길 정도였고 작은 고대 조각품과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고대 조각품들이 발굴되고 알려지면서부터 고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고 미켈란젤로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현재 바티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가 이 시기에 발굴되었고 얼마 후 1506년 1월 <라오콘>이 에스퀼리누스의 티투스 우물가에서 발견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라오콘>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의 줄리아노와 로렌초의 무덤을 장식할 때 <라오콘>의 트로이 제사장의 얼굴을 상기하면서 벽에 그 얼굴을 드로잉했다.
그는 벽에 많은 드로잉을 남겼고 이는 그가 작품을 제작할 때 고전의 요소를 규범으로 삼았음을 알게 해준다.

<라오콘>은 엘 그레코에게도 영감을 주어 그로하여금 1610년경에 <라오콘>을 그리게 했다.
엘 그레코는 뱀에 감겨 죽어가는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묘사하면서 오른편에 세 인물을 삽입했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짐작컨대 세 사람의 운명을 상징하거나 아니면 그리스에 호의를 베풀어 트로이가 파괴될 수 있도록 도운 세 여신인 것 같다.
하늘에 일기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세 여신의 전능한 힘에 의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등장인물들은 엘 그레코 특유의 가늘고 기다란 모습이다.

에스파냐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로 주로 톨레도에서 활동한 그는 그리스인을 뜻하는 엘 그레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다.
그는 작품에 서명할 때 늘 그리스 문자로 표기했고, 종종 크레타인을 뜻하는 크레스Kres를 덧붙이가도 했다.
티치아노의 제자였던 그는 틴토렌토와 바사노 등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그의 양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지만 신화적 주제를 다룬 <라오콘>은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또 다른 이례적 작품으로 만년에 그린 <톨레도 풍경>이 있는데, 이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순수 풍경화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화가로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많은 대가들이 따뜻한 적색과 갈색 계통의 색채를 선호하던 당시에 차갑고 푸른 색채와 은회색조를 선택한 데 있다.
차가운 색조, 거친 광선 효과, 자유분방한 붓질, 전통 규범에 대한 경시와 고통을 겪는 인물상의 정신성을 작품 속에 나타낸 엘 그레코의 천재성은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엘 그레코의 회화에 대한 관심이 부활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그의 극도로 반자연주의적인 양식은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매너리즘적인 비례 관계의 불균형화(가늘고 길게 늘인 인체, 형태의 데포르메)는 화가가 의도적으로 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스스로 물려받은 다양한 예술적 전통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정신적 표현에 더할 나위 없는 효과적 도구가 되는, 자신만의 개인적 미학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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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뒤샹과 만 레이는 결함을 보완한 후


1920년 뉴욕에 있는 뒤샹의 아파트에서 만 레이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만 레이는 뒤샹이 발명한 〈회전하는 유리판〉(그림 22)의 제작을 돕고 있었는데 모터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산산이 흩어진 유리조각이 하마터면 만 레이의 목을 스칠 뻔했다.
뒤샹과 만 레이는 결함을 보완한 후 작품을 완성했다.
그것은 다른 크기의 직사각 형태의 유리판 다섯 개가 각각 회전하는 것으로 유리판 양끝에 검정색으로 칠한 부분이 모터에 의해 빠르게 회전할 때 광학적 효과를 내는 작품이었다.

뒤샹은 어려서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한 기질이 기계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레제는 브랑쿠시, 뒤샹과 함께 살롱 도톤을 관람하고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뒤샹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마르셀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는 말없이 기계와 프로펠러들 사이를 걸어 다녔는데 갑자기 브랑쿠시에게 ‘회화는 끝났다! 무엇이 이 프로펠러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넌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미술계는 그가 예술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뒤샹은 1946년부터 20년 동안 〈주어졌을 때 : 1. 폭포 2. 조명용 가스〉(그림 23)를 자신의 마지막 대작으로 제작했다.
1960년대에 뒤샹의 이름이 다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네오다다 행위와,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등의 팝아트 경향이 뒤샹의 미학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오다다와 팝아트 예술가들에게 별로 호감을 보이지 않았던 뒤샹은 취리히 다다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한스 리히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네오다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이라고 부르면서 팝아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의 쉬운 방법으로 다다처럼 행위한다.
내가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사용한 것은 미학을 낙담시키기 위해서였다.
네오다다 예술가들은 나의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거기서 미학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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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성 제롬>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는 마돈나를 그린 후 <성 제롬 St. Jeorme>을 그렸다.
광야에서 제롬의 모습은 148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게 언제 그렸다는 기록은 없다.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제롬은 로마와 가울에서 살다가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안디옥 근처 샬시스 광야로 가 수행자의 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베들레헴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주석을 달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어준 후 사자의 친구가 되었다.
제롬을 그린 화가들이 있는데, 비토레 카르파치오Vittore Carpaccio(1450/60?~1525/6)와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방에 있는 학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그렸으며 코시모 투라Cosimo Tura(1430년경~95)는 은둔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투리와 마찬가지로 제롬을 학자보다는 참회하며 고행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는 제롬을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바싹 마른 체구에 움푹들어간 눈으로 표현했다.
제롬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구주를 바라보듯 어디엔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의 앞에는 사자가 앉아 있고 제롬의 오른손에는 돌이 들려 있는데, 자신의 가슴을 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실재 사자가 서양화에 그려진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으며 레오나르도는 실재 사자의 모습을 여기에 삽입했다.
메디치가와 몇몇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에서는 야생동물을 길렀고 사자 외에도 기린 등을 길렀다.
레오나르도가 누구를 위해 패널에 그리기 시작했으며 왜 미완성으로 남겼는지 알 수 없다.
머리 부분의 패널은 훼손된 채 18세기까지 남아 있다가 19세기에 와서야 보수되었다.
<베노이스 마돈나>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게 남아 있다가 19세기 초에야 우연한 기회에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저씨가 되는 추기경 페슈는 어느 날 로마의 거리를 걷다가 고물상 뒤켠에서 훌륭한 그림이 문에 그려진 작은 찬장을 발견했다.
그는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는 그것이 르네상스 대가의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찬장 문은 다름 아닌 <성 제롬>의 머리 부분이었다.
그것을 누군가가 찬장의 문으로 단 것이다.
페슈는 머리 부분을 떼어 낸 나머지 패널이 로마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알고는 여러 달을 수소문한 끝에 구두점에서 발견했는데, 구두수선공이 그것을 의자에 못을 박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 부분을 부착하여 유악을 발라 보수했으며 페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1845년 바티칸이 소장하게 되었다.
이 그림에서 레오나르도가 인물을 묘사할 때 얼마나 해부학적 정확함을 추구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성 제롬의 목과 앙상한 갈비뼈가 실재 인체를 묘사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작품은 절망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가를 알게 해준다.
이 그림을 그릴 때 그는 29살이었거나 30살이었을 성 싶으며 더욱 더 외로움을 느낄 때였다.
그는 비탄의 글을 많이 적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글에서 "며칠 전에 말했듯이 난 완전히 의욕을 잃었고 ..."라고 적었다.
그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가 적은 노트를 보면 단어를 갖고 발음으로 뜻이 되게 했음을 보며 증조할아버지의 이름 디 세르 피에로di ser Piero를 di. s. p. ero로 적어 dispero라고 읽어 그 뜻이 '나는 절망한다'가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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