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무노ㅘ) 중에서 

뒤샹의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벌거벗겨진 신부>


뒤샹이 처음으로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이를 줄여서 큰 유리라고 하다)를 드로잉으로 그린 것은 1912년 7~8월이었다.
그는 뮌헨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그렸는데 향 레이몽을 위해 그린 <커피 분쇄기>와 유사한 모양으로 나타났다.
기계 이미지는 문명예찬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으며 뒤샹 외에도 레제, 피카비아, 레이몽 그리고 몇몇 예술가들이 기계 이미지를 탐험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계 이미지에 비해 뒤샹의 것은 덜 현대적으로, <커피 분쇄기>의 경우 손으로 갈아야 하는 구식 기계의 모습이다.
그는 <처녀>란 제목으로 기계의 몸체를 습작했으며, 젖가슴과 들어올린 무릎으로 여성을 상징했다.

1912년 7월 말에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그렸는데 그가 그릴 <큰 유리>의 부분적인 실험이었다.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은 제목이 시시하는 대로 처녀에서 신부로 변화하는 마음과 육체의 운동이다.
처녀로부터 신부로 변화하는 데 무든 운동이 필요할까?
문화사학자 제롤드 사이겔은 설명했다.
“처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여인 또는 아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신부가 되는 것은 처녀성을 상실하기 전의 준비상태이다.”
신부가 되는 것은 불확실한 육체적 축복을 기대하는 환희의 짧은 기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뒤샹은 누드의 운동을 묘사하면서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땅의 색들인 브라운색, 황토색, 노란색 그리고 검정색을 사용했다.
그의 작품에서 제목이 시사하는 신부의 미혼남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가는 선과 아주 가는 기다란 직사각형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그린 후 8월에는 <신부>를 그렸다.
그는 어느 날 술집에서 취하도록 맥주를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신부가 딱정벌레처럼 나타나 날개로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고 했다.
그의 꿈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이런 꿈을 꾼 후 그린 <신부>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더불어 매우 신비스러운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작품도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마찬가지로 입체주의 방법으로 운동을 묘사한 것이다.

뒤샹은 훗날 <신부>에 관해 말했다.
“<신부>에 관한 아이디어는 뮌헨에서 7, 8월 <처녀>와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드로잉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처녀 No. 1>을 먼저 연필로 드로잉했고, 다음에 <처녀 No. 2>를 드로잉한 후 수채를 조금 칠했다.
그런 뒤 이것을 캔버스에 옮겼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를 생각한 것은 그 후였다.
그때 그린 드로잉들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그린 것들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 시기에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작품과 무관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답게 시위한 부사적인 부사가 된 것이다.
의미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같은 ‘반감각적’ 언어는 문장의 관점에서 시적 차원으로서 내게 흥미로웠고 앙드레 브르통이 매우 좋아했다.
내게는 봉헌식과도 같았는데, 사실 그렇게 제목을 부칠 때 가치에 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영어로도 마찬가지이다.
‘조차’는 온전한 부사로 의미하는 바는 없다. 좀더 벌거벗길 수 있는 가능성들 모두란 뜻은 당치도 않다.“

<큰 유리>는 1923년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고 뒤샹은 완성시킬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뒤샹은 큐레이터 캐서린 쿠에게 말했다.
“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지 않으려고 했다.
‘완성’이란 말은 전통적인 방법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또한 전통주의에 따른 모든 장치를 수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큰 유리>를 더 이상 손대지 않은 채 센트럴 파크 서쪽에 있는 캐서린의 아파트로 운반했다.
그는 <큰 유리>에 대한 짐을 그런 방법으로 벗을 수 있었다.

현재 필라델피아 뮤지엄의 뒤샹 화랑에 소장되어 있는 <큰 유리>는 가로 175.8cm에 세로 272.5cm이다.
뒤샹은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두 개의 유리를 위아래 수직으로 세웠다.
그것은 너무 커서 한눈에 관람하기보다는 시선을 여기저기 옮기면서 보거나 또 뒤로 물러나서 보아야 한다.
그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묶어서 만든 <푸른 상자>에서 그것을 ‘지연’이라고 했다.
그는 <푸른 상자>에 적었다.
“그림이라고 하는 대신 ‘지연’이란 말을 사용한다. ...
그것이 그림이냐 하는 질문 자체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진행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지연을 만드는 것은 지연에 대한 다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유부단한 재결합에서 가능하다.”

<큰 유리>의 아랫부분은 <독신자 기계>이다.
각 요소는 자위행위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그는 <푸른 상자>에서 이런 요소들은 자위행위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독신자는 스스로 자기의 초콜릿을 간다”고 적으며, 굳어진 가스의 번쩍번쩍 빛남은 “매우 자위행위적으로 환각에 빠뜨리게 한다”고 했다.
뒤샹의 <자전거 바퀴>와 둥근 형태들에 대한 강박관념은 <회전하는 유리판>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는데, 둥근 회전하는 물체는 남자의 성기처럼 앞으로 나왔다가 들어가곤 했다.
<로즈 셀라비>는 여성에 대한 궁극적인 그의 이기심을 나타낸 것이다.
<큰 유리>에서 불행한 독신자들은 의도는 갖고 있지만 거만하게 구는 신부를 벌거벗기지는 못한다.

카반느가 훗날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큰 유리>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뒤샹: 나도 모르네.
난 투명성 때문에 유리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겠지.
다음으로는 색이었어.
유리에 색을 사용하게 되면 뒤에서도 볼 수 있고, 색을 봉해버리게 되면 산화작용도 막을 수 있지.
색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한 오래 순수한 모습을 유지한다네.
이런 중요한 요소들은 기술적인 문제지. 원근법도 매우 중요하네.
<큰 유리>는 완전히 무시하고 업신여긴 원근법을 회복하네. 내게 원근법은 절대적으로 과학적이었어.

카반느: 사실주의 원근법이 아니란 말입니까?

뒤샹: 아닐세. 이는 수학적이고도 과학적인 원근법이었어.

카반느: 산술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뒤샹: 그래.
사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야.
이것들은 중요한 요소들이라네.
안에 내가 삽입한 것은 자네도 말할 수 있지 않겠나?
난 보통사람들이 그림에 사용하는 것 대신 덜 중요한 것을 시각적 요소에 부여하면서 일화를 좋은 의미로 시각적인 것들과 함께 섞었지.
이미 시각적 언어를 성취하기를 바라지 않았네.

카반느: 망막이었겠군요. (망막은 뒤샹이 먼저 사용한 말이다.)

뒤샹: 궁극적으로 망막으로 나타났지.
모든 것이 개념적으로 되었으며 망막보다는 재현한 것에 달린 문제가 되었네.

카반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개념 이전에 기술적인 문제가 먼저 대두되었을 겁니다.

뒤샹: 더러 그랬지.
근원적으로 몇 가지 개념들이 있었어.
대부분의 경우 기술적인 문제는 별로 없었고 유리니까 정교하게 작업해야 했어. ...
화가는 늘 장인과 같지.

카반느: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과학적인 문제들의 관계라든가 산술이라든가 더욱 문제가 되었을 것 같은데요.

뒤샹: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모든 그림은 반과학적이지.
쇠라의 그림도 마찬가지라네.
난 사람들이 별로 문제로 삼지 않고 시도하지도 않은 분명하고 정확한 과학의 관점을 소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네.
내가 과학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야.
반대로 과학을 신용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을 부드럽고 가볍게,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한 것이지.
하지만 아이러니가 내재했네.

카반느: 과학적인 점에서 말한다면 선생님은 과학에 많은 지식이 있었나요?

뒤샹: 아주 적었어. 난 과학자 타입이 아니지.

카반느: 아주 적었다구요? 선생님의 수학적 재능은 놀랄 만했는데 ...

뒤샹: 아냐, 천만에.
당시 우리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차원이었어.
<푸른 상자>에는 사차원에 관한 글이 많이 적혀 있네.
자네 포볼로우스키란 사람을 기억하나?
그는 보나파트에서 출판사를 운영했네.
그 사람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군.
그는 잡지에 글을 썼는데 사차원에 관한 것이었고 널리 알려졌다네.
그는 납작한 이차원의 동물이 있다고 주장했지.
놀라운 이야기였어.

카반느: <신부>를 선생님은 “우리 안에 있는 지연”이라고 했는데.

뒤샹: 그래, 내가 좋아하는 시적 관심에서의 말이야.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시적인 말로 ‘지연’이라고 부르고 싶었네.
‘유리 그림’, ‘유리 드로잉’, ‘유리에 그린 것’이란 말을 피하고 싶었어.
그때 ‘지연’이란 말이 발견한 말처럼 마음에 들었지. 정말 시적이었어.
말라르메의 시어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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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 스쿨의 별처럼 떠오른 재스퍼 존스


1963년 3월 내부를 개조하여 막 문을 연 유태인 뮤지엄(Jewish Museum)에서 라우센버그 회고전이 열렸다.
이 회고전은 그가 미국미술에서 정상을 달리고 있는 예술가임을 시위할 만했다.
이듬해 모마와 런던 화이트 채플(White Chapel) 화랑에서 그의 전람회가 열렸으며 그해 제3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바티칸 신문의 편집자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그의 수상에 발끈하여 이렇게 말했다.

“라우센버그가 완전히 그리고 일반적으로 문화를 파괴했다.”

그러나 38세의 라우센버그가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은 팝아트가 세계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였고 미국미술의 승리를 고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뉴욕 스쿨의 별처럼 떠오른 존스도 1960년 타티아나 그로스맨의 영향을 받아 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판화는 값이 싸 사람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어 이 무렵 화랑주인들은 예술가들에게 판화제작을 의뢰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러한 상업적 요구도 팝아트를 은근히 부채질했다.
1963년 존스의 석판화들을 묶은 책이 출판되었다.

1960년 그는 음료수 애일 캔을 청동으로 제작해 색을 칠했는데 실제 캔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그림 47).
존스는 두 개의 캔을 모방하면서 하나는 다 마신 빈 깡통으로, 다른 하나는 음료수가 들어있는 깡통으로 제작해 라우센버그와 자신을 가볍고 무거운 관계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1960년대 초 존스는 사람의 모습을 회화적인 요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피부를 위한 습작〉(1962), 〈다이빙 선수〉(그림 35), 〈땅끝〉(1963), 〈잠망경〉(1963)은 그렇게 해서 그린 그림들이다.
그는 캔버스에 자신의 손바닥과 발바닥을 찍거나 팔 전체를 찍기도 했고 얼굴 형태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피부를 회화적인 요소로 사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952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개최된 세잔 전시회에서 〈일광욕하는 사람〉을 보고 감명을 받은 존스가 1960년대에 그린 〈일광욕하는 사람〉은 변형한 것이지만 세잔의 영향이 현저하게 남아 있다.
〈다이빙 선수〉도 변형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세잔느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세잔 작품에 대한 심리적 분석을 처음 시도한 마이어 샤피로는 〈일광욕하는 사람〉을 ‘자아의 드라마’라고 기술했다.
레오나르도의 인체에 관한 드로잉과 세잔느의 〈일광욕하는 사람〉은 1960년대의 존스에게 주어진 숙제로 반드시 풀어야 할 내용이었다.

이 시기에 숟가락과 포크가 처음으로 그의 캔버스에 매달렸는데 그것들은 지성과 무관한 팝 물질들이다.
팝 이미지는 그가 선호하는 작품의 주요내용으로 캔버스에 빗자루와 컵이 등장했다.
〈바보의 집〉(그림 44)의 경우 빗자루는 물감을 칠하는 붓의 상징이다.
라우센버그가 팝 물질들을 병렬하면서 즉흥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듯이 존스도 사변적인 서투른 방법으로 팝 물질들을 즐겨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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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켈란젤로의 <켄타우로스의 전투>
 

  16살 미켈란젤로의 천부적 재능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 <켄타우로스의 전투 Battle of the Centaurs>이다.
이 작품 또한 <계단의 마돈나>와 마찬가지로 1492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둘 다 대리석을 릴리프로 제작한 것으로 회화적 구성이다.
그가 일찍이 회화에도 관심이 많았음을 알게 해준다.

두 점은 주문을 받고 제작한 것들이 아니라서 미켈란젤로 자신이 평생 소장하고 있었고 현재 피렌체의 카사 부오나르로티(미켈란젤로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조각가 도나텔로가 이런 릴리프 조각을 많이 제작했는데,
어린 미켈란젤로는 거장과 솜씨를 겨누기라도 하듯 일찍이 릴리프 조각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전투장면은 당시 흔한 주제로 베르톨도도 <기마병들의 전투 Battle of Horsemen>를 1475년경 제작했다.
베르톨도의 작품은 메디치 궁전에 있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늘 봤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주제가 되는 인물이 따로 없고 작게 묘사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베르톨도는 1491년 12월에 타계했다.

미켈란젤로는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약간 볼록한 우유빛 대리석에 제작하면서 전투에 참전한 사람들 모두를 누드로 묘사했는데,
고대 미술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보인다.
격렬한 전투에 주제가 되는 인물이 없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관람자에게 전하려고 했다기보다는 구성 자체에 관심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가 참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은 피렌체 화가 피에로 디 코지모가 묘사한 라피트족Lapiths의 공주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의 납치와 켄타우로스와 라피트족 사이의 전투이다.
페리토우스Perithous는 자신의 신부 히포다메이아를 구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테세우스Theseus는 격노한 켄타우로스에게 돌을 던지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인간과 켄타우로스 사이의 전투를 묘사한 이런 장면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현존하지 않고 문헌에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무기와 갑옷이 등장하는 전투장면을 그리지 않고 한가롭게 목욕을 즐기던 병사들이 경계신호를 듣고 허겁지겁 물에서 올라오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런 주제는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제작할 수 없다.
이런 장면이 기념비적인 벽화로 제작될 수 있었다는 데서 당시 피렌체인의 예술적 취향이 매우 다양하고 발달되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가파른 강둑을 병사들이 기어오르는 장면,
무릎을 꿇고 몸을 아래로 굽히는 장면,
용감하게 일어나 갑옷을 입는 장면,
앉은 채 서둘러 옷을 입는 장면,
외치거나 달려가는 장면 등
그는 다양한 병사들의 동작을 묘사하는 가운데 벌거벗은 신체들을 표현했다.

피렌체 예술가들 중 해부학에 능한 사람들은 즐겨 벌거벗은 남자들의 전투장면을 묘사했다.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는 이런 장면을 동판화로 두 점 제작했으며 베로키오는 집의 정면에 벌거벗은 전투자들을 장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의 작품과 비교하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는 모든 동작이 새롭게 창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토록 풍부한 움직임을 묘사할 수 있었던 건 그가 해부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최초로 해부학을 연구한 사람이 아니었고 레오나르도가 이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켄타우로스의 전투>는 <계단에서의 마돈나>보다 크다.
당시 대리석은 비쌌고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누군가가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그가 이런 크기의 대리석을 구했는지 궁금하다.
세로 84.5cm 가로 91cm라면 운반하기에 무거운 중량이다.
도나텔로의 많은 작품이 이보다 작다.
미켈란젤로는 <계단에서의 마돈나>에서와는 달리 공간의 깊이를 따로 창조하지 않고 사람들이 겹치는 가운데서 절로 공간의 깊이가 새겨나게 했다.
사람들을 가득 차게 새기면서 상단에는 빈 여백을 거친 대리석의 질로 그냥 남겨놓았다.
<계단에서의 마돈나>와 이 작품은 과거에도 그리고 미켈란젤로 동시대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은 고대 석관을 닮아서 그가 특히 피사 근처에 있는 많은 석관을 보고 연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상단에 일부러 거칠게 남긴 부분은 의도적인 것으로 건축에서 미완성으로 남기는 요소를 사용한 듯 보인다.
이 작품의 주제에 관해서는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쓴 콘디비와 바사리 모두 잘못 보았는데,
콘디비는 <데자니라의 강간 Rape of Dejanira>이라고 잘못 보았고 바사리는 <헤라클레스와 켄타우로스 Hercules and the Centaurs>라고 적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작품을 <켄타우로스의 전투>로 본다.

이런 제목이 타당한지 아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이 릴리프는 사람들이 투쟁에 휩쓸려 혼잡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몸과 몸이 겹치고 겹쳐서 혼돈을 이룬다.
왼쪽 두 사람은 난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공세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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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첫 작품 계단의 마돈나
 

  <계단의 마돈나 Madonna of the Stairs (Madonna della Scala)>는 미켈란젤로가 처음 제작한 작품이다.
1492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아직은 독창적이지 못하고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이 분명하다.
일명 '밀어 넣은 릴리프 squashed relief'로 불리우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16살 혹은 그 이전에 제작했다는 데서 경이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6살의 소년이 제작했다는 데서 천부적 재능이 그에게 있었음을 시위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의 솜씨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는다.
훗날 보완했거나 아니면 15살 이전에 그가 이미 돌깍는 기술을 연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5살 이전에 기술을 익혔더라도 비싼 대리석을 마음대로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터인데 타고난 재능이 없고서야 이런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단의 마돈나>는 기술적 문제만이 아니라 구성에서도 놀라운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높이 55.9cm의 대리석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마돈나를 가득 차게 최대한으로 확대해서 구성시킨 것이다.
이런 점은 훗날 그의 조각에서 특허와도 같은 요소가 된다.
마돈나는 정방형 토대 위에 앉은 자세이고 그녀의 옷자락은 주름진 채 아름답게 돌 위에 흘러내린다.
옆모습은 가장 이상화된 고전의 모습으로 둥근 후광의 테두리 안에 있고,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주름진 천의 선이 코의 선과 평행을 이루어 후광을 더욱 강조한다.
우미하게 주름진 옷자락은 작은 폭포처럼 어깨로부터 흘러내려 팔을 감고 다리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 가장자리 프래임에 살짝 닿는다.

마돈나가 계단 위의 아이들과 가까이 있어 관람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는데,
원근을 회화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품에 안긴 아이는 젖 빨기를 그만두고 어머니의 젖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약간 떨어뜨린 상태다.
아이의 우람한 손이 옷자락 위에 올려져 있다.
근육으로 봐서 아이는 갓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성장했다.
마돈나의 오른발이 왼쪽 다리 안으로 비스듬히 빠져나와 미켈란젤로가 사변적으로 구성했음을 알게 해준다.

계단에 앉아 있는 마돈나의 주제는 생소한 것으로 도나텔로의 <해로드의 향연 Feast of Herod>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계단을 그가 인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며 또한 도나텔로의 <마돈나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를 보고 둘을 합성해서 제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두 작품은 메디치의 소장품이었던 걸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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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 다다

1947년 뉴욕의 모마에서 ‘환상적 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다다를 ‘환상적 미술’의 역사적 문맥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다루었다.
1922년경 다다가 붕괴되자 초현실주의가 그 뒤를 이었으며, 다다를 주도한 많은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를 주도했다.
대중에게 충격을 주고 도발하는 것을 통해 주목을 끌려고 한 다다의 바램은 미래주의 선언문에서 이미 나타난 적이 있었고, 조르조 데 키리코(1888~1978)의 환각적 그림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다.
그리스 볼로 태생 이탈리아 화가 키리코는 사물이 본래 지닌 정서적 의미를 없애기 위해 1914년부터 인간의 모습 대신 재봉용 마네킹을 그리고 그 밖에도 조상, 석고 두상, 고무장갑 등을 그렸다.
또 사물의 병치와 회화 공간의 형식적 특성을 이용하여 불안한 분위기를 창출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초현실주의의 한 특징을 예견했다.

다다가 남긴 긍정적 결과는 반예술 개념이다.
이 개념은 20세기 내내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이런 생명력이야말로 다다가 단순히 전통 예술 개념을 희화, 패러디, 조롱하며 거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통 미술의 전당이던 화랑, 미술관 등을 대신할 새로운 무엇을 창출했다는 증거이다.
다다의 이런 면은 미국에서는 주로 마르셀 뒤샹(1887~1968)에 의해 예견되었으며 만 레이와 프란시스 피카비아에게서도 어느 정도 나타났다.
또한 다다주의자들은 작품 구성에 있어 ‘우연’의 원리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작품 제작에 있어 자동주의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실험했다.
이후 자동주의 원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추상표현주의의 여러 화파에 의해 발전되었다.

1913년 초 피카비아가 아모리 쇼의 개막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아모리 쇼는 1913년 2월 17일부터 3월 15일까지 뉴욕 렉싱턴 애비뉴 25번가에 있는 제69 연대 무기고에서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과 미국의 현대미술을 모아 전시한 대규모 전시회였다.
그 뒤 이 전시회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보스턴에서 잇달아 열렸다.
전시회의 공식 명칭은 ‘국제 현대미술전’이었다.
통계상 1,600여 점이라는 많은 작품이 전시된 대규모 전시회이자 또 한편으로는 아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새로운 미술을 과감하게 선보인 전시회였다.
1915년 피카비아를 따라 뉴욕으로 간 뒤샹은 자신이 이미 유명해졌다는 점과, 미국에 다다를 일으킬 만한 토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뉴욕 다다는 뒤샹을 중심으로 1915년과 1923년 사이에 행해졌으며, 취리히 다다 예술가들과는 달리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조직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레디메이드 대량생산품을 미술품이라고 주장하는 뒤샹의 행위에서 다다의 요소는 이미 표출되었으며, 그와 피카비아의 기계주의 드로잉을 통해 미술에 대한 허무주의는 충분히 시위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시기적으로 뉴욕 다다가 취리히 다다보다 한 해 앞섰다.
유럽과 미국이라는 이질적인 토양이 다다를 달리 행위 하게 한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일간지 <뉴욕 트리뷴>은 다다주의자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1917년 5월 6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리처드 보익스는 1921년 뉴욕 다다를 익살스럽게 묘사했는데 그에게 뒤샹은 체스게임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는 사람으로 비춰졌다.
보익스는 알렉산더 아키펭코가 1920년에 제작한 <앉아 있는 사람>을 다다 미학에 근거하여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카반느가 훗날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다다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언제였습니까? 
 

뒤샹: 차라의 저서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을 읽었을 때였는데, 그가 책을 보내주었고 나와 피카비아가 받은 것이 1917년이었어.
1916년 말이었는지도 모르겠군.
흥미 있었지만 난 다다가 무엇인지 몰랐고, 그런 말이 있는 줄도 몰랐어.
피카비아가 프랑스로 갔을 때 그가 보내준 편지에서 다다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네.
그때 차라가 취리히에서 피카비아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피카비아는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에 취리히에 들렀네.
피카비아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매우 복잡하더군.
그가 뉴욕에 도착한 건 1915년 말이었는데, 3, 4개월 머문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가서 그곳에서 잡지 <391>을 창간했네.
그가 취리히의 다다 예술가들과 교류한 것은 1918년이었어.

카반느: 미국에서의 첫 다다 선언문이 있었습니까?

뒤샹: 물론이지. 아주 과격한 내용이었네.

카반느: 얼만큼이나 과격했단 말입니까?

뒤샹: 반예술이었지. 본질적으로는 예술가의 행위에 대한 회의였다네.

카반느: 그것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아렌스버그와 로세의 도움을 받아 두 개의 작은 잡지 <장님>과 <롱롱>을 발간하게 한 것입니까?

뒤샹: 하지만 분명히 해둘 점은 다다를 알고 난 후에 발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오히려 피카비아도 참여한 1917년에 있었던 앙데팡당전 때 발간된 것들이지.

카반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의 정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뒤샹: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네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어.
피카비아가 취리히에서 다다 그룹 예술가들과 어울렸고, 취리히의 것과 같은 다다는 아니었지만 다다와도 같은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
인쇄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리 창작이지 못했어.
<장님>은 순전히 <샘-변기>에 관한 합리화였지.
우리는 두 차례 발간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발간할 무렵에 <롱롱>이 발간되었어.
그것은 상이한 종류였네. 두 잡지 모두 별거 아니었어.
놀라웠을 뿐이었지.
카반느: 잡지를 통해 <샘>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만큼이나 유명해진 것이지요?

뒤샹: 그래.

아렌스버그를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은 1916년에 ‘독립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파리의 앙데팡당전과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도 상도 없는 연례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연회비 5달러와 처음에 내는 1달러만 내면 누구라도 독립미술가협회에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전시회에 작품 두 점을 출품할 수 있었다.
독립미술가협회는 그룹을 결성한 지 두 주 만에 60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1917년의 독립미술가협회의 전시회는 규모에 있어 아모리 쇼의 두 배나 되었으며, 1,200명의 예술가들의 작품 2,125점이 소개되었다.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가 출품한 <타이탄적 기념물>은 높이가 18피트나 되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으며, 브랑쿠시의 <공주 보나파르트의 초상>(나중에 Princess X라고 했다)은 청동으로 제작된 거의 추상에 가까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전시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 아렌스버그, 화가친구 스텔라, 뒤샹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5번가 118번지에 있는 모토 아이론 웍스 상점에 들렀는데 그곳은 배관에 필요한 기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뒤샹은 그날 소변기 하나를 구입했다.
그는 그것을 작업실로 가지고 가서 거꾸로 세우고 검정물감으로 ‘R. Mutt 1917'라고 썼는데 변기제조자의 이름을 작품에 서명하듯 적고 <샘>(뒤샹 148)이란 제목을 붙였다.
전시회가 열리기 이틀 전 그는 그것을 들고 전시장으로 가서 6달러와 함께 제출했다.
그곳에 있던 비트리스 우드에 의하면 <샘>을 놓고 아렌스버그와 조지 벨로우스 사이에 논쟁이 오갔다. 
 

벨로우스: 우리는 이것을 전시할 수 없소.

아렌스버그: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어요. 입장료가 지불되지 않았소.

벨로우스: 그것은 음란한 물건이잖소!

아렌스버그: 그야 보기에 따라서이지요.

벨로우스: 어떤 녀석이 장난으로 보낸 것이지.
'R. Mutt‘라고 서명했던데 내겐 수상쩍어 보이는군.

아렌스버그: 그것은 기능적 목적으로부터 사랑스러운 형태로 나타났어요.
이것을 가져온 사람은 분명히 미학적인 점을 보여준 것이오.

벨로우스: 우리는 이것을 전시할 수가 없소.
그게 전부요.

아렌스버그: 이것이 전시회의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오.
예술가는 자신이 선택한 어떤 것이든 전시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술가 자신이 무엇이 미술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전시회의 목적이 아닌가요?

벨로우스: 당신 말대로라면 어떤 녀석이 말똥으로 만든 비료를 캔버스에 붙여갖고 와도 전시해야 하다는 거요?

아렌스버그: 그래야 할 게요.

<샘>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못한 채 그곳에 방치되었다가 4월 9일 위원회 열 명의 의제로 떠올랐다.
<뉴욕 헤럴드>의 보도에 의하면 투표에 붙인 결과 근소한 차이로 <샘>이 전시회에서 제외되었다.
독립미술가협회의 회장 윌리엄 글랙큰스는 “그것은 전혀 미술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아렌스버그와 뒤샹은 그의 결정에 반발하는 표시로 위원직을 사임했다.
뒤샹은 <샘>을 사진작가 스티글리츠의 291 화랑으로 가져갔다.
스티글리츠가 뒤샹의 요청으로 <샘>을 사진으로 찍었다.

뒤샹은 수잔느에게 보낸 4월 11일자 편지에 <샘>에 관해 거짓말을 적었다.
“내 여자친구 중 하나가 가짜이름 리처드 머트란 이름을 사용하여 사기로 제작된 소변기를 조각품으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단다.
난 (위원직을) 사임했는데 그 조각은 뉴욕에서 약간 가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뒤샹이 동생에게 왜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아렌스버그와 스텔라와 함께 <샘>에 관해 그렇게 행동하기로 사점에 모의한 것으로 보인다.
세 사람은 소변기가 위원회에서 배척당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벨로우스와 글랙큰스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그들이 그런 일을 조장할 수 있었고,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그런 방법으로 새롭게 시도했다.

뒤샹은 <샘>이 배척당한 데 대한 글을 써 잡지 <장님>에 기고했다.
<장님>은 첫 회를 8페이지로 발간했는데 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장님> 5월호 겉표지에 뒤샹의 <초콜릿 분쇄기>가 소개되었고, 본문에는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 <샘>이 소개되었으며, 편집자는 ‘리처드 머트 사건’이란 제목을 붙였다.
<샘>의 사진과 뒤샹의 글이 게재되자 사람들이 잡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뒤샹의 글은 영어로는 어색했다.

리처드 머트 사건
그들은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고 했다.
리처드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전시되지 못하고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샘>이 거부당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1.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비도덕적이며 저속하다고 말한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표절주의라고 한다.

단순히 하나의 화장실 설비, 목욕통이 비도덕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머트 씨의 <샘>은 비도덕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 매일 배관공들의 진열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저 생활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사물을 발견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제목과 견해 아래 그것의 용도는 사라졌다.
이것은 배관을 위해서 불합리하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화장실 설비를 표절했다는 말은 부당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유일한 예술품은 바로 이 화장실 설비와 교량뿐이기 때문이다.

<샘>은 스티글리츠 화랑에서 사라졌는데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와 마찬가지로 쓰레기로 취급된 것 같다.
무명예술가들의 사회의 전시회는 뉴욕의 첫 아방가르드 전시회란 의미를 남겼으며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뒤샹은 생전에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업적만큼이나 삶을 통해서도 다른 어떤 미술가보다 미술의 개념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그는 자신이 인정했듯이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심미안의 신화를 깨뜨리고 미학적 아름다움의 개념을 무너뜨리고자 노력했다.
1962년 그는 네오다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레디메이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미학을 타파하려고 생각했다.
반면 네오다다 예술가들은 나의 레디메이드를 취하면서 거기에서 미학적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병걸이와 소변기를 던졌으나, 지금 그들은 그것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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