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 다다
1947년 뉴욕의 모마에서 ‘환상적 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다다를 ‘환상적 미술’의 역사적 문맥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다루었다.
1922년경 다다가 붕괴되자 초현실주의가 그 뒤를 이었으며, 다다를 주도한 많은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를 주도했다.
대중에게 충격을 주고 도발하는 것을 통해 주목을 끌려고 한 다다의 바램은 미래주의 선언문에서 이미 나타난 적이 있었고, 조르조 데 키리코(1888~1978)의 환각적 그림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다.
그리스 볼로 태생 이탈리아 화가 키리코는 사물이 본래 지닌 정서적 의미를 없애기 위해 1914년부터 인간의 모습 대신 재봉용 마네킹을 그리고 그 밖에도 조상, 석고 두상, 고무장갑 등을 그렸다.
또 사물의 병치와 회화 공간의 형식적 특성을 이용하여 불안한 분위기를 창출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초현실주의의 한 특징을 예견했다.
다다가 남긴 긍정적 결과는 반예술 개념이다.
이 개념은 20세기 내내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이런 생명력이야말로 다다가 단순히 전통 예술 개념을 희화, 패러디, 조롱하며 거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통 미술의 전당이던 화랑, 미술관 등을 대신할 새로운 무엇을 창출했다는 증거이다.
다다의 이런 면은 미국에서는 주로 마르셀 뒤샹(1887~1968)에 의해 예견되었으며 만 레이와 프란시스 피카비아에게서도 어느 정도 나타났다.
또한 다다주의자들은 작품 구성에 있어 ‘우연’의 원리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작품 제작에 있어 자동주의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실험했다.
이후 자동주의 원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추상표현주의의 여러 화파에 의해 발전되었다.
1913년 초 피카비아가 아모리 쇼의 개막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아모리 쇼는 1913년 2월 17일부터 3월 15일까지 뉴욕 렉싱턴 애비뉴 25번가에 있는 제69 연대 무기고에서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과 미국의 현대미술을 모아 전시한 대규모 전시회였다.
그 뒤 이 전시회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보스턴에서 잇달아 열렸다.
전시회의 공식 명칭은 ‘국제 현대미술전’이었다.
통계상 1,600여 점이라는 많은 작품이 전시된 대규모 전시회이자 또 한편으로는 아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새로운 미술을 과감하게 선보인 전시회였다.
1915년 피카비아를 따라 뉴욕으로 간 뒤샹은 자신이 이미 유명해졌다는 점과, 미국에 다다를 일으킬 만한 토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뉴욕 다다는 뒤샹을 중심으로 1915년과 1923년 사이에 행해졌으며, 취리히 다다 예술가들과는 달리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조직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레디메이드 대량생산품을 미술품이라고 주장하는 뒤샹의 행위에서 다다의 요소는 이미 표출되었으며, 그와 피카비아의 기계주의 드로잉을 통해 미술에 대한 허무주의는 충분히 시위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시기적으로 뉴욕 다다가 취리히 다다보다 한 해 앞섰다.
유럽과 미국이라는 이질적인 토양이 다다를 달리 행위 하게 한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일간지 <뉴욕 트리뷴>은 다다주의자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1917년 5월 6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리처드 보익스는 1921년 뉴욕 다다를 익살스럽게 묘사했는데 그에게 뒤샹은 체스게임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는 사람으로 비춰졌다.
보익스는 알렉산더 아키펭코가 1920년에 제작한 <앉아 있는 사람>을 다다 미학에 근거하여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카반느가 훗날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다다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언제였습니까?
뒤샹: 차라의 저서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을 읽었을 때였는데, 그가 책을 보내주었고 나와 피카비아가 받은 것이 1917년이었어.
1916년 말이었는지도 모르겠군.
흥미 있었지만 난 다다가 무엇인지 몰랐고, 그런 말이 있는 줄도 몰랐어.
피카비아가 프랑스로 갔을 때 그가 보내준 편지에서 다다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네.
그때 차라가 취리히에서 피카비아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피카비아는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에 취리히에 들렀네.
피카비아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매우 복잡하더군.
그가 뉴욕에 도착한 건 1915년 말이었는데, 3, 4개월 머문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가서 그곳에서 잡지 <391>을 창간했네.
그가 취리히의 다다 예술가들과 교류한 것은 1918년이었어.
카반느: 미국에서의 첫 다다 선언문이 있었습니까?
뒤샹: 물론이지. 아주 과격한 내용이었네.
카반느: 얼만큼이나 과격했단 말입니까?
뒤샹: 반예술이었지. 본질적으로는 예술가의 행위에 대한 회의였다네.
카반느: 그것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아렌스버그와 로세의 도움을 받아 두 개의 작은 잡지 <장님>과 <롱롱>을 발간하게 한 것입니까?
뒤샹: 하지만 분명히 해둘 점은 다다를 알고 난 후에 발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오히려 피카비아도 참여한 1917년에 있었던 앙데팡당전 때 발간된 것들이지.
카반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의 정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뒤샹: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네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어.
피카비아가 취리히에서 다다 그룹 예술가들과 어울렸고, 취리히의 것과 같은 다다는 아니었지만 다다와도 같은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
인쇄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리 창작이지 못했어.
<장님>은 순전히 <샘-변기>에 관한 합리화였지.
우리는 두 차례 발간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발간할 무렵에 <롱롱>이 발간되었어.
그것은 상이한 종류였네. 두 잡지 모두 별거 아니었어.
놀라웠을 뿐이었지.
카반느: 잡지를 통해 <샘>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만큼이나 유명해진 것이지요?
뒤샹: 그래.
아렌스버그를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은 1916년에 ‘독립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파리의 앙데팡당전과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도 상도 없는 연례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연회비 5달러와 처음에 내는 1달러만 내면 누구라도 독립미술가협회에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전시회에 작품 두 점을 출품할 수 있었다.
독립미술가협회는 그룹을 결성한 지 두 주 만에 60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1917년의 독립미술가협회의 전시회는 규모에 있어 아모리 쇼의 두 배나 되었으며, 1,200명의 예술가들의 작품 2,125점이 소개되었다.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가 출품한 <타이탄적 기념물>은 높이가 18피트나 되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으며, 브랑쿠시의 <공주 보나파르트의 초상>(나중에 Princess X라고 했다)은 청동으로 제작된 거의 추상에 가까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전시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 아렌스버그, 화가친구 스텔라, 뒤샹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5번가 118번지에 있는 모토 아이론 웍스 상점에 들렀는데 그곳은 배관에 필요한 기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뒤샹은 그날 소변기 하나를 구입했다.
그는 그것을 작업실로 가지고 가서 거꾸로 세우고 검정물감으로 ‘R. Mutt 1917'라고 썼는데 변기제조자의 이름을 작품에 서명하듯 적고 <샘>(뒤샹 148)이란 제목을 붙였다.
전시회가 열리기 이틀 전 그는 그것을 들고 전시장으로 가서 6달러와 함께 제출했다.
그곳에 있던 비트리스 우드에 의하면 <샘>을 놓고 아렌스버그와 조지 벨로우스 사이에 논쟁이 오갔다.
벨로우스: 우리는 이것을 전시할 수 없소.
아렌스버그: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어요. 입장료가 지불되지 않았소.
벨로우스: 그것은 음란한 물건이잖소!
아렌스버그: 그야 보기에 따라서이지요.
벨로우스: 어떤 녀석이 장난으로 보낸 것이지.
'R. Mutt‘라고 서명했던데 내겐 수상쩍어 보이는군.
아렌스버그: 그것은 기능적 목적으로부터 사랑스러운 형태로 나타났어요.
이것을 가져온 사람은 분명히 미학적인 점을 보여준 것이오.
벨로우스: 우리는 이것을 전시할 수가 없소.
그게 전부요.
아렌스버그: 이것이 전시회의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오.
예술가는 자신이 선택한 어떤 것이든 전시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술가 자신이 무엇이 미술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전시회의 목적이 아닌가요?
벨로우스: 당신 말대로라면 어떤 녀석이 말똥으로 만든 비료를 캔버스에 붙여갖고 와도 전시해야 하다는 거요?
아렌스버그: 그래야 할 게요.
<샘>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못한 채 그곳에 방치되었다가 4월 9일 위원회 열 명의 의제로 떠올랐다.
<뉴욕 헤럴드>의 보도에 의하면 투표에 붙인 결과 근소한 차이로 <샘>이 전시회에서 제외되었다.
독립미술가협회의 회장 윌리엄 글랙큰스는 “그것은 전혀 미술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아렌스버그와 뒤샹은 그의 결정에 반발하는 표시로 위원직을 사임했다.
뒤샹은 <샘>을 사진작가 스티글리츠의 291 화랑으로 가져갔다.
스티글리츠가 뒤샹의 요청으로 <샘>을 사진으로 찍었다.
뒤샹은 수잔느에게 보낸 4월 11일자 편지에 <샘>에 관해 거짓말을 적었다.
“내 여자친구 중 하나가 가짜이름 리처드 머트란 이름을 사용하여 사기로 제작된 소변기를 조각품으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단다.
난 (위원직을) 사임했는데 그 조각은 뉴욕에서 약간 가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뒤샹이 동생에게 왜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아렌스버그와 스텔라와 함께 <샘>에 관해 그렇게 행동하기로 사점에 모의한 것으로 보인다.
세 사람은 소변기가 위원회에서 배척당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벨로우스와 글랙큰스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그들이 그런 일을 조장할 수 있었고,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그런 방법으로 새롭게 시도했다.
뒤샹은 <샘>이 배척당한 데 대한 글을 써 잡지 <장님>에 기고했다.
<장님>은 첫 회를 8페이지로 발간했는데 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장님> 5월호 겉표지에 뒤샹의 <초콜릿 분쇄기>가 소개되었고, 본문에는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 <샘>이 소개되었으며, 편집자는 ‘리처드 머트 사건’이란 제목을 붙였다.
<샘>의 사진과 뒤샹의 글이 게재되자 사람들이 잡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뒤샹의 글은 영어로는 어색했다.
리처드 머트 사건
그들은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고 했다.
리처드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전시되지 못하고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샘>이 거부당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1.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비도덕적이며 저속하다고 말한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표절주의라고 한다.
단순히 하나의 화장실 설비, 목욕통이 비도덕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머트 씨의 <샘>은 비도덕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 매일 배관공들의 진열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저 생활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사물을 발견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제목과 견해 아래 그것의 용도는 사라졌다.
이것은 배관을 위해서 불합리하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화장실 설비를 표절했다는 말은 부당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유일한 예술품은 바로 이 화장실 설비와 교량뿐이기 때문이다.
<샘>은 스티글리츠 화랑에서 사라졌는데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와 마찬가지로 쓰레기로 취급된 것 같다.
무명예술가들의 사회의 전시회는 뉴욕의 첫 아방가르드 전시회란 의미를 남겼으며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뒤샹은 생전에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업적만큼이나 삶을 통해서도 다른 어떤 미술가보다 미술의 개념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그는 자신이 인정했듯이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심미안의 신화를 깨뜨리고 미학적 아름다움의 개념을 무너뜨리고자 노력했다.
1962년 그는 네오다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레디메이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미학을 타파하려고 생각했다.
반면 네오다다 예술가들은 나의 레디메이드를 취하면서 거기에서 미학적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병걸이와 소변기를 던졌으나, 지금 그들은 그것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