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회화의 창시자 고갱과 반 고흐
 

  잡지 <신세계>에 기고한 글입니다.


근대회화의 창시자 고갱과 반 고흐


물 같은 성격과 불 같은 성격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된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적이 있고, 회화에 관해 논쟁하다가 서로 미워한 적이 있으며, 쌀쌀맞은 고갱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고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신의 귓불을 잘라 창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해프닝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에 의해 회화가 전통과 단절하고 근대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에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최고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가 있었고, 명망 있는 대가의 문하생들도 많았지만, 가난하고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두 화가가 그들 모두를 제치고 근대회화를 보여준 것은 여간 통쾌한 일이 아닐뿐더러 두 사람의 노력이 피땀으로 얼룩져 있어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전율이 생긴다.
두 사람의 성격은 물과 불 같아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기질이다. 고흐보다 5살 많은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하며, 상대방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너무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다. 반면 고흐에게는 북유럽 특유의 거친 면이 있었지만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같은 사람이었으며, 우정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어줄 듯하지만 버림을 받게 되면 자신을 괴롭히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장 발장과 수도승의 자화상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자화상을 보면 성격과 화풍을 동시에 알 수 있다.(고흐1 54, 55) 고갱의 <자화상>을 보면 성난 모습으로 고뇌에 찬 순교자와도 같다. 그는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비유했다. 사회를 위해 헌신하지만 지명수배를 피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신세였던 장 발장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회화를 위해 헌신하지만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그는 분노했다. 그는 <자화상>에서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묘사하고자 했다”고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자화상>과 편지를 받고 고흐도 자신의 모습을 그려 고갱에게 답례로 보냈는데 <자화상(폴 고갱에게 바침)>이다. 고흐는 일본 판화에서 승려를 보고 자신의 머리를 깎았다. 그는 자신이 회화의 세계에서 도를 구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장 발장이었고 고흐는 회화를 위해 도를 구하는 수도승이었다. 근대회화는 장 발장과 수도승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을 때어내 화풍을 비교해보자.(고흐1 56)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한 데 비해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자국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에서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수수께끼 정물화

고갱과 고흐의 공통점은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혹독한 훈련을 통해 화가가 된 것이다. 고갱은 컵을 화면에 크게 부각시키며 테이블 너머의 사람들을 배경으로 정물화를 그렸고 고흐는 성경과 소설을 주제로 정물화를 그렸는데, 수수께끼 정물화는 두 사람의 미학을 비교하는 열쇠가 된다.(고흐1 46, 47) 여기에 나타난 회화적 경향은 이후 두 사람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둘 다 전통을 무시한 창작이었고, 상징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고흐의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에서 펼친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35장 ‘종의 노래’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은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성경 앞의 낡은 소설은 에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이다. 커다란 성경은 권위를 나타내는 데 비해 작은 소설은 그러하지 못하지만 밝게 빛난다. 고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과로로 목사관 앞에서 쓰려져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추모하며 그린 것이다. 고흐는 목사가 되어 집안의 대를 이으려고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그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신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없어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화하고 희망을 주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와 고갱의 그림을 상징주의로 분류하는 것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이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표현이 강렬해서 두 사람의 작품을 표현주의로 분류할 수도 있다. 소설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고흐의 정물화가 무엇을 상징 혹은 표현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삶의 기쁨>은 매우 진지한 철학적 의문을 내포한 책으로 저자는 전통 신앙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지 독자들에게 묻는다. 고흐는 신앙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고갱의 <정물이 있는 실내>는 매우 복잡하고 특이하게 구성되었다. 화면 하단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오브제들이 널려 있고 중앙에 가구가 어렴풋이 보이며 배경의 사람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그린 것을 인물화라 하고 사물을 그린 것을 정물화라고 하는데 그는 이 둘을 합쳐서 인물화와 정물화의 장르 구분을 없앴다. 사물이 화면에 더 크게 부각되었으므로 정물화라고 한 것이다. 공간에 대한 배분도 수수께끼인데 침대가 유난히 높고 카드놀이를 하는 테이블은 침대보다 낮으며 5명이 보이지만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짐작할 수 없다. 화면 앞 테이블에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나무로 제작된 커다란 컵 탱카드가 있는데 이 컵은 그의 그림에 종종 등장한다. 컵 너머로 문이 열린 방안의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테이블 뒤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정물의 전문적 요소와 개인적 주제가 혼합된 이 정물화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외로운 죽음

고흐에게는 간질병이 있었다. 간질 증세가 나타날 때 그는 소리를 듣고 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했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진주는 조개의 병의 결과이며 스타일은 대단한 고통의 산물이다”라고 했는데 고흐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발작하게 되면 공간이 보인다고 했는데 그 공간이 작품에서 노란색으로 나타났다. 노란색은 그가 즐겨 사용한 고흐의 색이다. 노란색의 상징적 의미를 알면 그의 회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격리되기 전 1888년 12월과 이듬해 초 그의 그림에서 노란색이 배경으로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고흐는 1년 동안 요양원에 격리되었고 병세가 호전되어 파리 근교 오베르로 갔다. 그는 10년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동생 테오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생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자 형을 보양하기 어려워졌다. 고흐는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는 데 대해 늘 괴로워했고 결국 동생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1890년 7월 27일 오베르 근교 성곽 뒤로 가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총알이 심장에 박혔다. 그가 어디에서 권총을 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37해 생을 쓸쓸히 마감했고 오베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고갱은 문명이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비판하면서 생의 후반을 프랑스 식민지 타히티 섬에서 지냈다. 말년에 걸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는데, 이 물음은 그가 평생 자신에게 그리고 관람자에게 물었던 화두였다. 그림에는 신생아로부터 늙은이까지 인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인생의 수수께끼를 상징하는 대작이다. 그는 1903년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럽고 경련을 이기지 못해 커다란 소리로 이웃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밤낮을 구별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지르다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섬의 공동묘지에 묻혔고 묘비도 세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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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주의


아카데미의 공식 미술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비자연적인 색채를 사용한 회화운동으로서의 야수주의는 당시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 가운데 가장 격렬했다.
1905년경부터 함께 작업하던 프랑스 화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던 마티스, 마르케, 망갱, 카무앵과 르아브르 출신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와 샤투 지방 출신 드랭, 블라맹크, 그리고 장 퓌와 네덜란드 출신의 반 동겐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폴 시냐크 및 신인상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하며 인상주의는 피상적인 회화이며, 빛과 대기를 포함하면서 시각적인 인상을 단순히 캔버스에 담는 데 그쳤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주로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채를 표현수단으로 삼았으며, 회화를 단순히 눈으로 본 현실을 옯기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로 인식하고 과거 화가들보다 색채를 자의적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순수한 색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거칠고 충격적인 부조화를 의도적으로 추구했다.

야수주의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905년 제3회 가을전을 통해서였다.
그해 10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열린 도톤(가을전)에는 앵그르, 마네, 르누아르 등 지난 30년 동안 프랑스 예술가들이 제작한 작품 1,636점이 소개된 대규모의 전시회였다.
따로 마련된 전시장에는 마티스를 중심으로 모이는 드랭, 블라맹크 등의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마티스의 밝은 색을 사용하여 그린 <모자를 쓴 여인>과 <선원>, 드랭의 경쾌한 그림 <콜리우르의 항구>, 블라맹크의 아름다운 신기루 같은 <말리의 세느 계곡>이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곳에는 망갱의 <시에스타>와 발타가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린 <선원>도 있었다.(뒤샹 26)
젊은 화가들은 나이 많은 마티스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주위에 모였다.

1887~88년 파리에서 법률가의 자격을 얻은 뒤 생캉탱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1890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앙리 마티스(1869~1954)는 처음에는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하다가 1892년 자신의 취향에 더 잘 맞는 귀스타브 모로의 지도를 받기 위해 에콜 데 보자르로 옮겼다.
모로는 고답파의 몇몇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사라진 문명과 신화 같은 낭만적 수단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고대 세계의 환영을 창조한 화가였다.
15세기 이탈리아 거장들을 연상시키는 정교하고 화려한 양식을 구사했으며,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문학적 관념을 중시한 모로의 회화는 당대 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모로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러하지 못했으나 교육자로서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마르케, 망갱, 카무앵, 루오 등과 함께 공부했다.

마티스가 인상주의를 처음 접한 것은 1897년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카유보트의 유작 전시회에서였으며, 이때부터 색채는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고갱, 반 고흐, 세잔의 작품을 접하면서 마티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진전시키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카리에르에서 작업 중이던 1899년 드랭을 알게 되었고, 드랭은 1901년 마티스를 블라맹크에게 소개했다.
후에 야수주의자로 불리게 되는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이미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던 마티스는 1903년 살롱 도톤의 창설에 참여했고, 다른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1905년 살롱 도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마티스를 비롯하여 드랭과 블라맹크는 자연주의에 바탕을 둔 인생과 느낌에 대한 재발견에 심취했는데,
이같은 경향은 자연주의 회화에서, 그리고 많은 작가의 문학작품에서 20세기 전부터 나타난 적이 있었다.
모리스 드 블롱드는 1895년에 발표한 <자연주의에 관한 에세이>에서 상징주의와 낭만적 퇴폐주의에 반발하면서 적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비실제의 문화, 꿈의 예술, 새 떨림의 탐구 등을 가르쳤다.
선조들은 맥이 있는 꽃, 암흑, 그리고 유령을 좋아했고, 그들은 논리에 맞지 않는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우리에게 그들의 거대한 범신론적 예술은 아무런 추진력을 주지 못한다.”
소설가 찰스 루이 필립은 189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만적이며 ... 사람들은 자연적 인생의 영상을 가져야만 한다. ... 오늘날은 열정의 시대이다.”

‘야수’라는 명칭은 1905년 <질 블라스 Gil Blas> 지에 실린 평론가 루이 보셀의 1905년 살롱 도톤에 대한 평문에서 비롯했다.
보셀은 야수주의 회화들 가운데에 함께 전시된 알베르 마르크의 조각 <어린이의 토르소>에 대해 적었다.
“이 흉상의 순수성은 순수한 색채의 소란 가운데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와 같다.”
이 명칭은 당시 평론가와 미술품 감식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던 견해, 즉 야수주의 회화는 유능하고 재능은 풍부하지만 균형 감각을 상실한 채 제멋대로 날뛰는 화가들의 그림이라는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909년에 이르러 이 운동은 종착점에 도달했다.
그룹의 화가들은 대부분 야수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야수주의는 한마디로 조직적으로 나타난 프랑스의 첫 표현주의였다.
20세기 회화의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야수주의는 그 영향력이 유럽 전역에까지 미쳤는데,
특히 독일에서는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는 야수주의의 새로운 기법이 드레스덴의 브뤼케(다리) 그룹 화가들과 바실리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한 뮌헨의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 그룹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브뤼케는 같은 해인 1905년에 결성된 그룹으로 독일의 첫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프랑스 표현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다른 점은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밝은 색을 선호했지만 라틴족과는 달리 원시적 요소가 물신 풍기는 튜튼족 특유의 그림을 그렸다.

야수주의자들은 회화의 표현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상의 형태를 왜곡하면서 의도적으로 기법상의 서투름과 부주의함을 추구했다.
그러나 야수주의는 독일 표현주의 정신과는 대비되는, 엄격한 고전적 프랑스 전통의 테두리 안에 늘 머물러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에서는 대개 대상과 이에 대한 화가의 반응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었지만, 야수주의자들은 균형적이고 통일성 있는 구도를 창출하려고 했다.

표현주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각, 음악, 댄스, 영화 등 모든 시각예술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표현’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티스였다.
그는 1908년 선언문 형식의 에세이 <화가의 노트>에서 회화를 궁극적으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화가의 노트>에 적었다.
“나의 가장 큰 목적은 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내게 있어 표현은 그림의 총체적인 배열이다. 신체가 차지할 공간, 그 주변 공간, 그 비율 등의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구성은 화가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장식적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야수주의의 주요 화가 앙드레 드랭(1880~1954)은 1895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98년부터 아카데미 카미요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마티스를 만났다.
1900년에 블라맹크를 만나 그와 함께 작업실을 사용했다.
1901년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군복무를 마친 후 1904년 다시 붓을 잡았을 때 야수주의 양식을 채택했다.
그해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했고, 여름에는 콜리우르에서 마티스와 함께 그림을 그렸으며, 살롱 도톤에서 열린 유명한 야수주의 전시회에 참가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1876~1958)는 1893년부터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자전거 경주를 했고,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부모는 음악가였고 블라맹크도 생계를 위해 카페의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한편으로 부정부주의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포르노 소설을 썼다.
1900년 드랭을 만나 샤투에서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면서 어두운색을 사용하며 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1901년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어두운 색보다는 격렬함을 지닌 밝은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반 고흐의 표현적인 방식을 극단으로 몰아가며 표현적인 작품을 그렸다.
드랭을 통해 알게 된 마티스는 블라맹크를 설득하여 1905년 살롱 데 쟁데팡당과 도톤에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참여하도록 했다.
1906년 화상 볼라르는 그의 작품 전부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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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올덴버그의 선언문


1965년 3월 올덴버그는 맨해튼 14번가에 커다란 화실을 얻었다.
그 옆 13번가에는 드 쿠닝의 화실이 있었고 동아시아에서 온 보헤미안 예술가들도 근처에 살았다.
그들은 그리니치 빌리지의 시다 술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술집은 담배연기로 가득했고 사람들이 빽빽하게 차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친구 예술가들은 커다란 화실을 가진 올덴버그를 부러워했다.
커다란 작업실에서 거대한 크기의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한 그는 조각을 하기 전에 반드시 드로잉을 했다.
1961년에 발표한 선언문을 보면 그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예술은 정치적 호색적 신비적이며 뮤지엄 꽁무니에 앉아 있는 것 그 이상이다.
…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을 모방하고 필요하다면 코믹하고 과격하며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예술로 행위한다.
……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마치 담배연기와 신발냄새와도 같다.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입었다 벗은 바지와 같고 구멍 날 양말과 같고 먹어치울 파이 한 조각과도 같다.

1969년에 〈기하학적 쥐, 스케일 A〉(그림 79)를 제작했고 아이스바(Ice Bar)를 녹아흐르듯이 제작했다.
그의 작품들은 거대하기 때문에 수도 워싱턴, 미니애폴리스, 휴스턴 등의 거리에 세워지거나 뮤지엄의 정원에 건립되기 예사였다.
그는 “나의 사고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 비해 좀 더 실질적이고 좀 더 미국적이다.
… 나는 추상예술가가 아니다.
나는 사실주의 예술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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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 사람들의 우주론적 관념으로서의 자연
 

  분수 아래 둥근 부분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고 이곳에 올빼미가 앉아 있으며 주변에 새들이 있다.
올빼미가 앉아 있는 곳은 왼쪽 날개 대각선이 모이는 중앙 지점이다.
보스는 올빼미를 모든 악, 어리석음, 그리고 빛에 대한 회피를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했다.
천국의 결혼식에서조차 올빼미가 존재하는 건 적개심과 유혹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는 나중에 이 둘에 대해 관심이 커졌다.
주변에 모여든 새들은 올빼미의 유혹을 받는다.
올빼미 자체는 유혹의 상징으로 그 자체 악이 아니지만 자신에게 모여든 새들을 파멸로 이끈다.
어두운 구멍에 들어 있는 올빼미는 덕과 지혜의 빛을 회피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상징한다.
올빼미와 주변에 모여든 새의 모티프는 성적 유혹을 상징하는데, 보스 이후 화가들의 그림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올빼미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것을 예고해주는 동물로 원죄가 이 그림에 나타나 있다.

<대홍수 Flood>와 <지상 쾌락의 동산>에서의 <천국>에 보이는 기린은 보스가 시리아쿠스 안코나Cyriacus d’Ancona의 <이집트 여행 Egyptian Voyage>에 있는 삽화를 보고 그린 것이다.
인문학자 시리아쿠스는 1440년대에 이집트를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그곳에서 보낸 편지에 그곳 동물들을 드로잉하여 이국의 동물들을 유럽에 소개했다.
코끼리와 물개는 실재 동물을 보고 그린 것 같다.
보스 당시 실재 코끼리가 스헤르토겐보스에 있었고, 물개는 식용으로 시장에서 고기를 달아 팔았으며, 털도 팔았다.
그리고 종종 시장에서 살아 있는 물개를 통째로 팔았다.
보스는 동물들을 책에서 보고 그렸으며 유니콘은 1485년에 목판화로 제작된 것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는 온갖 실재 사물들을 보고 그렸는데, <지상 쾌락의 동산>에서의 지옥에 보이는 악기들이 그러 하다.
그는 가정용품 나이프, 항아리, 주전자, 접시를 직접 보고 그린 것들을 그림에 삽입했다.
그는 상상의 생물을 창안해냈으며 이런 생물들은 이후 그의 작품에서 다양하고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생물은 가정용품을 응용한 것들도 있다.
이런 작업을 많은 화가들이 했음을 현존하는 <사다새 플래스크>, <바다 생물>, <바다 유니콘과 바다 수사> 등에서 본다.

중앙 패널화를 바라보는 우리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다양한 모티프가 전개되어 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데다 어느 한 부분도 이해가 되게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구성에 있어 파노라마적인 경관을 펼쳤기 때문에 관람자는 특별히 무엇을 보아야 할런지 당혹스럽다.
여기에 자연의 신비함이 식물과 과일들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자연은 인간과는 무관한 것으로 신이 창조할 때부터 이미 자연에 내재된 자연의 산물들이다.
그의 자연은 중세 후기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우주론적 관념으로서의 자연이다.

중앙 패널화는 보스 당시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일찍이 많은 화가들에 의해 모사되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당대의 이미지 혹은 도상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왼쪽 날개의 천국을 묘사한 것도 아니고 세속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보스는 의도적으로 수수께끼의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것일까?
우선 그림을 바라보면 열려 있는 넓은 들에 아름다운 누드의 젊은이들이 성적 유희로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연 안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자연의 일부가 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대화하고, 서로를 아끼며, 커다란 과일을 먹고, 동물과 식물을 껴안고 있다.
여기에는 늙은이와 어린이는 보이지 않고 젊음의 생기발랄함만 있다.
사랑과 육체적 욕망이 동물과 사람들로 의인화되는 실재이면서 신비적 자연에 대한 묘사는 15세기 태피스트리, 판화, 벽화, 릴리프 등에서도 발견된다.

중앙 둥근 연못 안에서는 여자들이 미역을 감으면서 말 탄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뒤로 배경에는 유기적인 구조물과 인위적인 구조물이 있고 가운데 연못 위에 분수가 있다.
이 연못의 물은 네 갈래로 흘러가며 네 강줄기가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흑인, 긴 머리의 야만인, 인어 남자, 인어 여자 등이 있다.
중세에 긴 머리를 한 사람은 신화와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야만인과 동의어로 사용되다시피 했다.
야만적인 행위는 15세기와 16세기 예술에서 이성 간의 사랑에 종종 등장했다.
원시시대 혹은 신화시대를 의미하는 야만적인 행위가 중세에 아직 남아 있음을 이런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흑인은 무어인Moors을 의미하며 아프리카 북서부에 사는 무어인은 8세기에 스페인을 점거한 적이 있다.
중세 네덜란드인은 악마를 닉커nikker라고 불렀는데, 니거niger에서 온 말로 검다black라는 뜻이다.
인어 남자mermen와 인어 여자mermaids는 15세기에 사랑과 관련지워 사용되었다.
인어 여자는 육감적인 유혹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그 자체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아니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인간을 부패하게 만들거나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인어 여자는 사회 밖에서 성적이며 열정적인 사랑의 행위를 즐기는 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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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지성적인 익살, 의도적인 우연, 레디메이드, 그리고 개념미술


개념미술은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뒤샹의 익살, 우연의 선택, 레디메이드의 선정에서 개념미술이 예견되었다.

뒤샹은 1911년 10월에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그리기 시작했다.이는 그의 자화상으로 가족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부터 루엥으로 가는 기차를 탄 모습이다.
뒤샹은 이 작품에서 젊은이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고 슬픔 또한 충분히 묘사되지 않은 채 입체주의의 영향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했다.
제목을 슬픈 젊은이라고 한 것은 사랑하는 수잔이 8월에 결혼한 후 처음 가족을 만나기 위해 12월에 루엥으로 향하면서 자신을 슬픈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뒤샹은 재담가였다. 그에게는 지성적인 익살이 있었으며, 삽화를 그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학적인 요소를 그림에 삽입할 줄 알았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런 요소가 발견된다.
그는 말했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미 유머를 그림에 삽입하려는 나의 의도가 드러났다.
아폴리네르가 그것을 ‘기차에 있는 우울함’이라고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다.”

뒤샹은 곧이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렸는데 마찬가지로 유머가 삽입된 작품이다.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순수미술에서는 가당치 않은 발상이었다.
뒤샹은 코믹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유머를 순수미술에 도입하며 이런 점이 문제를 야기했다.
그가 1912년에 그린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훗날 <큰 유리>로 완성시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 관한 드로잉도 유머를 삽입한 것들이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뒤샹은 훗날 응답했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 시기에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 even’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무관하다.”
그는 ‘반감각적 antisense’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시적인 문장이 되게 한 것이며 특별히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뒤샹은 1914년에 <정지들의 네트워크>를 그렸다.
그는 많은 사람이 우연을 좀더 조직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가 우연을 사용했음을 본다.
그는 우연을 개인적인 것으로 말했다. “너의 우연은 나의 우연과 같지 않지 않느냐? 내가 던진 주사위와 네가 던진 주사위는 같지 않다.
그래서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는 너의 잠재의식을 표현하는 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 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개념미술을 가능하게 했다.
레디메이드ready-made는 뒤샹이 대량생산된 기성품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미술품으로 소개한 데서 비롯한 명칭이다.
기성품은 그의 선정에 의해 주변 환경으로부터 격리되고 동일한 종류의 대량생산품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그 기능을 박탈당함으로써 일종의 실존적 개성과 물신 숭배적 특질, 그리고 혼란스러운 위엄을 얻게 된다.
뒤샹이 처음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1913년과 이듬해 제작된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이다.
그가 선정한 오브제는 놀랍게도 불안한 위엄, 대담한 고독을 지니게 되어 관람자는 두려움과 분노 혹은 웃음으로 반응하게 된다.

몇몇 팝아트 예술가와 누보 레알리즘 예술가들이 훗날 아상블라주에 사용한 기계 생산물과 폐기된 기계의 일부를 사용했는데, 이는 뒤샹의 레디메이드와는 그 미학이 다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갖는 충격 효과는 그것들이 격리되었다는 점과 기능적으로 제작된 오브제에서 완벽하게 그 기능을 박탈했다는 점에서 생긴 것이다.

뒤샹 자신도 레디메이드와 발견된 오브제를 구별하면서, 발견된 오브제가 미적 특질이나 아름다움, 독특함으로 인해 선택되거나 발견된 데 비해 레디메이드는 개성이나 독특함이 없는 대량생산품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발견된 오브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예술가의 취향이 개입되지만 레디메이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뒤샹의 지성적인 익살, 의도적인 우연, 그리고 레디메이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개념미술의 예견했다.
사상이나 개념을 미술품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간주하며 눈에 보이는 미술품이 아닌 기록의 형태를 우선적으로 완성품으로 보는 개념미술의 가능성은 뒤샹이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에 출품한 소변기 <샘>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는 작품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기록으로서 남겼다.
그가 선택한 오브제 소변기는 그의 해석을 통해 작품으로 변용되었다.
작품에 자기 지시성이 있어 평론가의 식견이 이를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판단의 요소로 삼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샘>은 개념적인 작품이었다.
과거에는 작품을 성립하는 판단기준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미리 존재했지만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통해서 작품을 규정하는 기준을 예술가 스스로 제시할 수 있음을 시위했다.
<샘>은 최초의 개념미술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로베르타 스미스는 1974년에 발간된 <현대미술의 개념>에 기고한 ‘개념미술’에 관한 글에서 적었다.
“뒤샹은 창조적인 행위를 여러 가지 오브제나 활동에 ‘미술’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극히 기본적인 행위로 바꾸어놓았다.
그에게 있어 창작은 단순하고 지적이며 많은 부분 임의적인 ‘결정’의 결과이다.
뒤샹은 다양한 방식의 언어적, 시각적 장난과 의도적인 우연, 평범하고 하찮은 사물, 타인과 자신의 미술을 겨냥한 도발적인 제스처,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작품의 수단과 주제로 사용했다.”

인습 타파의 태도로 활약한 뒤샹을 따른 예술가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두드러졌다.
그들은 자신의 배설물을 담은 양철통을 미술품으로 전환시킨 피에로 만초니, 1958년 파리의 화랑에서 텅 빈 전시장을 소개한 이브 클랭 등이 있다.
그러나 개념미술이 인식 가능한 운동이 되어 그 명칭을 얻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1961년 반예술을 표방한 미국인 헨리 플린트(1940~)가 개념미술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이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아트포럼>에 솔 르윗의 ‘개념미술에 대한 단평’이 발표된 후부터였다.
르윗은 적었다.

“개념미술에서 아이디어나 개념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
모든 계획과 결정이 사전에 행해지며 작품의 제작은 형식적인 것이다.
아이디어는 미술을 제작하는 기계가 된다.”

개념미술의 첫 주요 전시회는 1969~70년 런던, 뉴욕 등지에서 열렸고, 1970년대 초에 당시 유행하던 아르테 포베라, 신체미술, 대지미술, 퍼포먼스 등의 미술운동과 종종 부분적으로 겹치면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경향들은 모두 미니멀아트의 형식주의와 상업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일부로서 등장한 것이다.
미국인 로버트 배리(1936~)의 <텔레파시에 의한 작품>(1969)은 “전시하는 동안 나는 언어 혹은 이미지로는 불가능한 일련의 사고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을 텔레파시에 의해 전달하려고 한다”는 진술로 이루어졌다.
배리는 적었다.

“세계는 흥미로운 오브제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오브제를 추가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순히 시간이나 공간에 의한 사물의 존재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어떤 개념미술은 독일인 한스 하케(1936~)의 작품처럼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많은 경우 개념미술작품은 언어에 대한 난해한 분석이나 로버트 배리의 작품처럼 예술가의 사적인 기이한 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개념미술의 대표자와 찬미자들은 이런 행위를 미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시와 그 경계를 도발적으로 확장하려는 것으로 간주한다.
로버트 모리스는 1970년에 “지루한 오브제 생산기술로부터 미술의 힘을 분리하는 것은 ... 인식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서의 미술에 다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키스 본은 1972년에 이런 인식에 반발하며 말했다.

“개념미술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단지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현실화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후기-개념적인 Post-Conceptual’이란 용어가 등장함으로써 개념미술의 절정이 지나갔다.
1974년 혹은 1975년에 절정의 시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개념미술은 1980년대 중반 네오-지오의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개념미술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날 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네오-지오Neo-Geo는 신기하적 개념주의Neo-Geometric Conceptualism를 줄인 말로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사용하여 신표현주의의 주정주의에 반발한 미국 예술가 그룹의 작품을 말한다.
제프 쿤스가 이 그룹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0년대 중반의 새로운 관심에 대하여 ‘네오-개념’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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