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용transfigiration


단토로 하여금 예술의 종말을 감지하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시각예술에서의 변용의 미학이다.
평범한 것을 변용을 통해 아이콘으로 만들고 대중적인 미술과 고급 미술과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데 있다.
일차적으로는 변용을 통해 평범한 사물을 고급 미술의 미학적 사물로 격상시키고 결과적으로는 대중적인 미술과 고급 미술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음에 주목했다.
변용은 기독교의 개념으로 소위 말하는 ‘변화산 정상의 사건’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7:1~3에 적혀 있는 사건이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변용은 대상 자체인 예수의 모습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인식에 변화가 생기는 사건이다.

팝아트는 관람자의 인식을 문제 삼은 미술이다.
동일한 사물을 다르게 인식하는 사유의 문제를 제기한 미술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그토록 자극적일 수 있었던 원인으로 변용은 지적한다.
단토는 말한다.
“팝아트 자체는 미국 고유의 업적이며, 그것에 도처에서 그토록 전복적이었던 것은 기본 입장이 변용되기 때문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평범한 것들인 일상적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을 미술로 변용시킨다고 보았다.
추상 표현주의는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에 숨겨진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전제에 기초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그는 추상 표현주의자들이 원초적인 힘과 접촉하는 무당 노릇을 하려고 했음을 지적했다.
팝아트가 추상 표현주의에 반발하여 생겨난 운동이었으므로 그는 팝아트와 추상 표현주의의 상이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두 가지 상이한 점을 지적한다.

“추상 표현주의가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이었다면 팝아트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평범한 것들, 즉 콘틀레이크, 수프통조림, 비누, 인기 영화배우, 만화 따위를 찬양했다.
그리고 변용의 과정을 거쳐 팝아트는 이런 것들에게 거의 선험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분석철학자인 단토는 철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으로 1930년대에 성행한 분석철학을 꼽았다.
분석철학이 유지되어온 형이상학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음을 지적한 후 분석철학이 철학을 종말에 이르게 한 것처럼 팝아트가 예술의 종말을 재촉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둘 다 인식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해방적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파리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파리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말한 적이 있음을 예로 들어 분석철학과 팝아트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형화된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인식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미술은 이러저러하다든가 미술작품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던가 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것이 팝아티스트들의 성과임을 말한다.
그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우리를 억압한 과거의 인식 체계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과거의 철학과 미술을 총괄적으로 조망했음을 지적한다.
분석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철학 전체와 대립했으며 팝아트는 실제적 삶을 위해 미술 전체에 대립했다.

단토는 미래의 미술을 철학의 문제로 본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오래된 고정관념의 인식 체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며 둘 모두 인류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동반자라는 것이다.
그는 미학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원래 예술과 철학은 동반자의 관계였는데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플라톤이 예술을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해버렸으므로 철학과 거리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현재 철학과 예술의 관계가 회복 내지는 정상화되었다고 본 그는 말한다.

“1950년대 중반 철학과 예술 둘 다 당시의 인간의 심리 저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그것들로 하여금 미국 장면 밖에서는 그토록 대단한 해방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팝아트에 대한 그의 희망적 청사진은 대단했는데, “팝아트가 의식 속으로 끌어올린 것은 우리 모두 세상에 홀로 남겨져 살아간다는 것으로서, 이는 누구라도 원할 수 있는 훌륭한 삶이었다”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팝아트가 심대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고 예술 개념에 있어 심원한 철학적 변화를 성취한 대격변의 모멘트였다고 말한다.

변용을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뒤샹은 평범한 것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레디메이드를 팝아트와 구별했다.
하지만 뒤샹이 미적인 것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미술의 경계선을 실험한 공로는 인정하면서 미술사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없었음을 지적했다.
뒤샹과 팝아트 사이에 외적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팝아트의 성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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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주의


상징주의는 1885~1910년경에 성행한 문학과 미술 운동으로 결속력은 크지 않았으나 직접적이면서 사실에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환기와 암시의 방법을 선호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폭넓은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 조류의 한 부분이었고, 특히 인상주의의 자연주의 목표에 대한 폭넓은 반동이었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감정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시인 장 모레아스가 1886년 9월 18일자 <르 피가로> 지에 기고한 ‘상징주의 선언’에서 밝혔듯이 “관념에 감각적인 형태의 옷을 입히려고 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자신들이 사용한 단어의 발음, 운율과 그 의미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상징주의 화가들도 색채와 선 자체만으로도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상징주의 평론가들은 예술 간의 유사성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는데, 예를 들면 오딜롱 르동의 회화는 샤를 보들레르 혹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에 비유되었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은 고향 보르도에서 지내다가 1870년부터 파리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50대가 될 때까지 색채를 사용하지 않고 거의 흑백으로만 석판화와 목탄화 작업을 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글에서 영향을 받아 기이한 아메바 같은 생물, 곤충, 그리고 인간의 머리를 한 식물 같은 독특한 주제를 발전시켰다.
1884년 J. K. 위스망스는 유명한 소설 <거꾸로 A Rebours>가 출판되기 전에는 사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데카당스 문학의 고전인 이 소설에서 내면의 기형적인 즐거움의 세계에서 깨어난 소설의 주인공은 르동의 소묘를 수집한다.
이 때문에 르동은 데카당스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90년대에 회화로 방향을 바꾸어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던 색채주의자로서의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유화와 파스텔화 양쪽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1900년 이후에는 수많은 장식작업을 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르동을 자신들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았다.

많은 화가들이 상징주의 작가와 같은 종류의 이미지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상징주의는 강렬하고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지만, 상징주의자들은 에로틱한 주제와 병적인 주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죽음, 질병, 죄는 그들이 즐겨 다룬 주제였다. 양식상으로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주제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 이국적인 세부 묘사를 보여주는 경우부터 원시적인 단순성을 강조하는 경우, 형태를 명확한 윤곽선으로 그리는 것에서부터 안개처럼 모호하게 묘사하는 경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후기 인상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여 평면화된 형태와 넓은 색면을 지향하는 경향을 보였다.

상징주의는 주로 프랑스를 기반으로 전개되었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퍼졌으며 호들러와 뭉크 등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이 넓은 의미에서 상징주의 화가로 간주된다.
베른 태생의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는 처음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풍경화를 그렸고, 1872년부터 제네바 에콜 데 보자르에서 코로와 친구인 바르텔르미 망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홀바인의 작품을 연구했다.
1890년대에는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종교적인 그림을 그렸고, 취리히 역사박물관의 벽화작품과 같이 과장된 역사화를 그렸다.
1904년 빈 분리파와 함께 개인전을 열었으며 제네바에 정착했다.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독일 표현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어린 시절 오슬로에서 수학한 후 1908년 심각한 정신병에 걸릴 때까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두루 여행했으며 여생을 노르웨이에서 보냈다.
뭉크는 현대 노르웨이 예술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며, 특히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에게 뭉크와 반 고흐는 표현주의 회화에 주요한 근거를 제공한 두 명의 예술가였다.
뭉크의 영향은 양식적인 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훨씬 포괄적인 것이었다.
작품에 표현된 현대 상황에 대한 환멸감과 인간의 소외감, 갈등과 신경증과 긴장을 강조하여 스스로 “현대의 영적인 삶”이라 지칭한 것의 도상을 그리려는 열망,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통해 정신적인 고뇌를 강렬하게 상징하고 전달한 점, 이 모든 것은 더욱 고통 받았던 독일 표현주의 주창자들의 원동력이 되었다.

호들러의 종교화와 뭉크의 작품에 나타난 정신분석적 주제들은 표현적이면서 동시에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에 근거했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상징주의로도 분류된다.
상징주의 조각가로는 벨기에의 게오르흐 미네와 노르웨이의 구스타브 비겔란이 있다. 겐트 아카데미에서 건축을 공부하다가 회화와 조각으로 전공을 바꾼 게오르흐 미네Georg Minne(1866~1941)는 처음에는 아카데미적인 자연주의 양식으로 작업했으나 1880년대 후반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후기 고딕 양식과 라파엘 전파의 중세주의 경향을 보여주는 양식으로 상징주의 시의 삽화를 그렸다.
미네는 점차 조각으로 관심을 돌려 조각에서 상징주의와 유사한 양식을 찾으려고 했다.
종교적 성향이 주를 이루면서 고딕적인 동시에 아르 누보의 특징을 보이던 이 시기의 미네의 조각은 독일 조각가 빌헬름 렘브루크Wilhelm Lehmbruck(1881~1919)를 포함한 후배 조각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미네는 관람자가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동일한 인물을 반복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이는 같은 사상을 여러 시각으로 조명해보는 상징주의 방식과 유사했다.
이미 상징주의적인 세계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던 때인 1908년경 미네는 같은 나라 예술가 콩스탕탱 뫼니에Constantin Meunier(1831~1904)와 유사하고 이전보다 자연주의적이며 사회적인 양식으로 전환했다.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하는 사회-사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작업한 조각가이며 화가 뫼니에는 낭만적인 아카데미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젊은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와 코펜하겐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1892~95년 파리와 이탈리아에서도 공부한 구스타브 비겔란Gustav Vigeland(1869~1943)은 로댕과 함께 몇 달 동안 작업하면서 영향을 받았고, 청동과 화강암, 두 재료에서 뛰어난 기술을 발휘하여 기념비적 리얼리즘을 실현했다.
노르웨이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겔란은 40여 년 이상 오슬로의 프롱네르 공원에 있는 분수의 군상 조각에 전념했다.
150개 이상의 인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부속건물 비겔란 미술관과 함께 시의 재정 후원을 받은 프로젝트였다.
혼란스럽고 불명확한 상징주의로 표현된 이 은유적 인물들은 거대한 크기로 감각을 강요하고, 부적절한 리얼리즘이 주는 단조로운 무미건조함으로 감각을 압도한다.

조지 허드 해밀턴은 말했다.
“상징주의자들은 고갱이 말한 ‘개연성이라는 굴레’로부터 회화를 해방시켰으며, 더욱 20세기 회화다운 실질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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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전매특허 실크스크린


재니스 화랑에서의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전과 모마에서 개최된 ‘팝 아트 심포지엄’은 뉴욕 미술계를 활기차게 했다.
이듬해 봄부터 뮤지엄과 화랑들이 저마다 팝 아트 예술가들의 전람회를 열려고 했는데 1963년 3월 솔로몬 구겐하임 뮤지엄이 6명의 팝 아트 예술가들을 초대한 전람회는 특기할 만하다.
‘여섯 명의 화가와 오브제 Six Painters and the Objects’라고 명명한 이 전시의 주인공들은 라우센버그, 존스, 다인,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그리고 워홀이다.
전람회를 기획한 구겐하임의 큐레이터 로렌스 알로웨이는 워홀로 하여금 만화그림 〈딕 트레이시〉(그림 67), 〈전과 후 3〉(그림 70),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마를린 먼로와 리즈 테일러의 초상화, 신문표지의 자동차 사고 그림을 출품하도록 했다.
알로웨이는 카탈로그에 6명의 예술가들은 개인적인 주제가 아닌 이미 잘 알려진 보편적인 주제들로 작품을 제작했다고 기술했다.
주간지 《타임》이 전람회를 보도하면서 팝아트란 말을 사용했으며, 워홀의 그림에 대해 언급했다.

예술적 재료가 아닌 것을 예술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이따금 그러한 물질을 변형시킨다.
예술가는 수프 통조림을 크게 확대하여 그리거나 반복해서 그리지만 통조림은 여전히 켐벨사의 통조림 그대로다.

평론가 바바라 로즈는 이렇게 인용했다.

난 팝아트가 하나의 예술 스타일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예술가들은 단지 주제로 통일되었을 뿐 유사한 스타일로 통일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바로크나 입체주의처럼 하나의 스타일이 아니다.


아무튼 워홀의 실크스크린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받아들여졌으며 워홀의 특허처럼 알려지기 시작했다.
잡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워홀은 “그림은 너무 딱딱하다.
난 기계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계는 문제가 적다. 난 기계가 되고 싶은데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또한 《아트 뉴스》의 편집자이자 평론가 스웬슨과의 인터뷰에서는 “내가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기계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지 기계처럼 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별로 논리적이지 못한 말로 기계문명을 극찬했다.
그를 가장 잘 이해한 조수 제라드 말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앤디는 예술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완전히 없애려고 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실크스크린뿐 아니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동적으로 재생하려고 했다.

워홀은 비감상주의를 조장했으며 개인적인 것들로 대중과 교통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일레노 와드는 워홀의 자동차 사고 그림은 너무 끔찍해서 그녀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소개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망설였는데, 때마침 일레나 소나벤드가 파리에 있는 그녀의 화랑에서 워홀의 전람회를 개최하겠다고 제의했다.
워홀은 자동차 사고에 관한 작품들을 파리에서 소개하기로 했으며 전람회 주제는 ‘미국에서의 죽음 Death in America’이었다(1984. 1~2월).

죽음과 자살은 으시시하지만 워홀이 선호하는 주제였다.
친구들은 죽음과 관련된 사진을 발견하면 모아두었다가 워홀에게 갖다 주곤 했다.
1947년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86층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젊은 모델의 몸이 자동차 위로 떨어져 있는 장면이 그해 4월 12일 《라이프》 잡지에 보도되었다.
1963년 1월 18일 《라이프》 잡지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관한 기사에서 그때의 장면을 다시 게재했고 워홀은 그 기사를 다시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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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lfflin(1864~1945)


그는 회화가 선적인 것으로부터 회화적인 것으로 발전했다고 했는데,
회화를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혹은 채색적인painterly 혹은 색면적인colour-field 것으로 양분했지만 그가 타계한 후 유행한 모노크롬 회화의 경우 이는 선적이지도 회화적이지도 않아 그의 이분법적 분류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고, 이를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지적했습니다.

그가 회화적인 것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추상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이해됩니다.
뵐플린의 제자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1881~1965)는 박사논문 <추상과 감정이입>을 뵐플린에게 제출했는데, 보링거는 추상의 필연성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보링거가 논문을 쓸 당시 칸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이 뮌헨을 중심으로 추상 미술을 추구하고 있었고, 파리에서는 입체주의자들이 사물을 면으로 잘라 분석하는 반추상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주변의 변화 속에서 쓴 논문이라서 시대정신에 부합되었으며 따라서 보링거의 논문은 책으로 발간되어 재판을 거듭거듭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제자의 이런 논문을 심사한 것으로 보더라도 뵐플린이 회화적으로의 발달을 주장한 것은 추상화되는 당시의 미술세계를 잘 알고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뵐플린의 순수가시성의 다섯 도식은 유명하고 그의 이름은 빈 미술사 학파를 정초한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보다 더 유명하지만,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는 <History of Art Criticism>(1936)에서 뵐플린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뵐플린의 사상은 리글보다는 훨씬 더 고도로 세련되어 있지만 독창성을 뒤떨어진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취미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에 한정되어 있고, 리글의 장점인 폭넓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뵐플린은 프리미티브 파 화가들의 미술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미술에 관해 논할 때 그 미술의 딱딱함, 비긴밀성, 통일성의 결여 등에 관해 말하고 있다."

르네상스에 정통한 벤투리가 뵐플린을 이렇게 비판한 이유는 다음의 이유에서 입니다.

"부르크하르트가 그에게 문화사를 가르쳤고, 힐데브란트는 시각상의 역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뵐플린은 문화사의 필요성과 미술에 있어서의 심리학적인 전통을 특히 민감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갖가지 역사적인 방법들을 병치한 결과, 그 방법들은 혼란스러워졌으며 여전히 불완전한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벤투리가 <History of Art Criticism>을 쓴 것은 미국에서였습니다.
이 책을 쓴 후 Johns Hopkins University의 객원교수로 초대되었습니다.
1955년에는 Columbia University에서 강의하기도 했는데,
벤투리의 시각은 다분히 미국적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스위스 미술사학자로 독일에서 활동한 뵐플린의 사상과는 다르며, 단토도 뵐플린을 비판했지만 미국식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뵐플린에 대한 이런 비판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그의 저서를 읽은 것이 유익할까 해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나중 사람의 비판에 설득력이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뵐플린의 다섯 개의 도식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다섯 가지 관점으로 벤투리뿐 아니라 몇몇 사람들이 그의 도식 사용에 문제점을 지적하자 뵐플린은 불가피하게 수정했으며,
벤투리의 말을 빌면,
"뵐플린은 보다 신중하게 형식과 내용간의 날카로운 구별을 회피하면서 각각의 새로운 시각 양식 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구체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르게 볼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있다. ...
여기에서 뵐플린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일체의 미술작품의 본원은 생명에 있는 것이지, 이전 시대의 미술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벤투리와 단토 외에도 뵐플린의 이론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읽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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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전래


연경사신 이광정이 1603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 坤輿萬國全圖』(1602)를 들여오자 사람들은 천지의 중심이 중화中華가 아니라 지중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630년에는 정두원이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紅夷砲, 천리경千里鏡, 자명종自鳴鐘 등 서양 기계와 함께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한역된 『천문서 天文書』, 『직방외기 職方外紀』 등 서학 서적을 들여왔다.
『직방외기』는 한민족 외에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 민족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편술된 책이었다.

서양에 있어 민족, 즉 nation이란 현대어는 러틴어의 natio에서 유래하며 ‘태어나다 nascor’에서 파생했다.
Natio는 출생 조건이 비슷한 사람들의 집단이란 뜻이다.
보통 외국인 집단을 지칭했다.
로마인이라고 할 때 그들은 populus Romanus라고 칭했다.
그리스의 폴리스는 자유민으로 구성되고 비자유인은 ethnos라고 하여 이반 민족과 노예를 포함한 일반 민중을 가리켰다.
따라서 그리스어 ethnos와 라틴어 natio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제국에서 정복된 민족이나 국가는 처음부터 로마인이 되지 못했고 시민의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시민civitas으로 칭했다.
오늘 날의 의미로서의 민족국가가 태어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프랑스 혁명은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국가 구성원에게 불러 일으켰다.
루소는 국가가 독재 군주나 지배계급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는 국민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의 기본 이념을 제공했다.
루소 이전에는 군주 사이의 분규가 곧 국가의 전쟁이었고 일반 시민은 전쟁 당사자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서양 과학과 사상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 학자들은 종래와는 다른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정제두는 “오늘날에 와서 주자를 말하는 이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자에 가탁假託한 것이요, 주자에 가탁한 것이 아니라 주자에 부회附會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理보다는 기氣를 높이고 실천성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앞세웠다.
성리학은 성즉리性卽理, 곧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치라고 분 데 반해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 곧 마음이 바로 이치라는 입장이다.
이는 객관적 사물이 아니라 주관적 심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제두는 『하곡집 霞谷集』에 적었다.

이른바 진지眞至의 의리, 천리天理의 정正이 과연 말, 소, 닭, 개에 있다고 하여 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천지만물은 인사人事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 개개의 사물에 따라 하나하나를 결정하고, 그때그때에 사물을 처리하는 것이 내 마음에 있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을 위시하여 북학파라고 불리우는 학자들은 양명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양명학은 실생활과 유리된 공리 공론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존중하는 실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익과 정약용은 양지良知 양능良能, 즉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의 사유 능력과 실천 능력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조요한의 말로 하나의 높은 님을 존경하게 된다고 보았다.
류승국은 『철학사상의 제문제 II - 한국 철학의 근원탐구』(1984)에서 정하상의 『상재상서 上宰相書』도 이 양지 양능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 도입된 서학과 전통 유학의 관계를 양명학이 매개한 것으로 보았다.
당시 서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권에서 배제된 기호畿湖 남인南人 학자들이었다.
이 시기는 권력의 독점과 부패 그리고 신분 차별의 심화와 대중의 궁핍으로 민심이 집권층을 떠난 때였으므로 현실 개혁을 의도한 선비들에게 서양의 평등사상이 개혁의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서학이 도입되면서 성호 이익과 그의 학풍을 이은 성호학파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로 이어지는 북학파의 활동 속에서 서학연구가 정착되었다.
담헌 홍대용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개명을 괴한 청나라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연암 박지원은 담헌을 이어 지전설地轉設을 주장하며 오행에 대한 상생상극의 이론을 부정하고 그에 따르는 갖가지 미신적 사고에 젖어 있던 당시의 우주관과 인생관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생활방식을 지향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젊어서 『양반전』을 비롯한 9편의 소설을 통해 사회의 불합리한 측면을 풍자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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