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오로지 피카소와 뒤샹 두 사람뿐이었다


브르통이 진정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꼽을 만한 예술가는 오로지 피카소와 뒤샹 두 사람뿐이었다.
그는 1928년에 발행한 『초현실주의와 회화』에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가 계속해서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피카소다”라고 적었다.
피카소는 1920년대 말에 괴물을 연속적으로 그렸는데 그것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합성입체주의와 신고전주의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피카소는 브르통을 중심으로 모이는 예술가들과 교류하지 않았는데 그는 브르통의 독선적인 행동을 못마땅해 했다.
뒤샹도 에른스트, 탕기, 달리, 그리고 그 밖의 예술가들과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누었지만 브르통의 그룹에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뒤샹이 일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을 받아들인 것은 그들이 새로운 기교를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림이 사람의 망막에서만 아니라 마음에도 들어와 박혔기 때문이었다.
잠재의식에 관한 그들의 탐험은 뒤샹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이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딜러의 입장에서 뒤샹은 초현실주의를 인정했다.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초현실주의 회화에 대한 선생님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뒤샹: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그들의 추상을 난 늘 좋아하지 않았네.
주요 화가들인 에른스트, 마그리트, 달리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닐세.
내가 말하는 예술가들이란 약 1940년경의 추종자들일세.
그때는 이미 초현실주의는 빛이 바랬지.
… 근본적으로 초현실주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회화학파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다른 것들처럼 그것은 시각예술의 학파가 아니었어.
그것이 보통 주의ism가 아닌 이유는 철학, 사회학, 문학 등을 다루었기 때문이지.

카반느: 마음의 상태였지요.

뒤샹: 실존주의와 같은 것이었어.
실존주의적인 그림은 없었더라도 말일세.

카반느: 행위의 문제였겠지요.

뒤샹: 그거야.

카반느: 초현실주의 화가들 중 누구를 좋아하십니까?

뒤샹: 모두 좋아.
미로, 에른스트, 그리고 데 키리코를 특히 좋아하네.

카반느: 이런 경우 그들의 그림보다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우정 때문입니까?

뒤샹: 아냐, 그림도 좋아하네.
난 이들 화가들의 그림을 매우 좋아하는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마음을 움직이며 …

카반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에 여전히 ‘망막적retinal’ 요소가 있었는데 그 점이 선생님에게 거슬리지는 않았습니까?

뒤샹: 아냐, 자네가 알아야 할 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이지.
그들의 궁극적인 의도는 그것을 넘어선 것이었고, 특별히 환상적인 것들에서 그랬네.

카반느: 시각적이기보다는 좀 더 개념적이었지요.

뒤샹: 바로 맞추었네.
충분히 개념적이지 않아도 내가 좋아할 수 있다는 점을 자네가 알기 바라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완전히 비개념적인 것들로 순전히 망막적인 그림들이라네.

카반느: 선생님은 늘 개념적이었지요.

뒤샹: 오! 그래.
늘 그랬어.
일반적인 것도 공리주의적인 것도 아닌 개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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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의 <베노이스 마돈나> 

 

남색사건으로 기소되었다가 중지된 지 몇 달 후 1477년 대가 베로키오가 조수들을 이끌고 피렌체에서 약 40km 떨어진 피스토이아로 왔다.
그는 추기경 니콜로 포르테구에리를 기념하는 대리석 조각을 제작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가 피스토이아에까지 오게 된 기회를 이용해서 지방 집정부는 그에게 제단화 <동정녀와 아이 Virgin and Child>를 의뢰했다.
레오나르도도 이 팀에 가세했는데 아마 불미스러운 사건이 종결되자 잠시 피렌체를 떠나고 싶어서 베로키오 팀에 가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얼마나 그곳에 머물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래 머문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작업에 참여한 것은 작업장에서 조그만 부분을 그린 것이 전부이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테라코타 모델이 레오나르도가 한 것으로 천사가 그리스도와 동정녀에게 문안드리는 장면이다.
이것은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에 기여한 마지막 작품이다.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은 것은 1478년 1월 1일로 그가 25살 때였다.
그는 서면으로 시그노리아(시위원회)로부터 성 베르나르드 예배당에 제단화를 그릴 것을 주문받았다.
그는 3월 16일 선불로 25플로린을 받았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이 작품에 대한 계약을 파기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피에로 폴라이우올로가 주문한 것인데, 레오나르도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기를란다요에게 주문했고 그도 약속을 지키지 않자 필리포 리피의 몫이 되었으며 그가 7년 후에 완성했다.

1478년 12월 피렌체에는 홍수와 전염병의 재앙이 내려졌다.
레오나르도는 무슨 일이고 해야 했으며 그의 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두 점의 동정녀 마리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형식의 그림인지 또 누구를 위해 그렸는지에 관해서는 적지 않았다.
두 점 가운데 하나는 <베노이스 마돈나 Benois Madonna>인 것 같다.
당시의 전통은 대가가 역사와 전통을 좇아 그리게 되고 차세대 화가들은 대가의 작품을 보거나 의도를 파악하거나 책을 통해서 혹은 여행을 통해서 알고 역사와 범주 내에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 그런 점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마돈나가 아기 예수와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장면을 그린 화가가 과거에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보통 어머니가 아기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19세기 초 이탈리아 음악가가 타르타리의 아스트라칸에서 이 작품을 러시아인 사포지니코브에게 팔았는데 그가 어디서 이것을 구해 러시아인에게 팔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품을 사포지니코브의 손녀딸이 유증받았다.
그녀는 러시아 화가 레온 베노이스Leon Benois의 미망인이었고 그녀는 1914년에 세인트 페테르스부르그의 헤르미타지Hermitage 뮤지엄에 기증했다.
이 작품은 베노이스의 이름을 따서 <베노이스 마돈나>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것은 캔버스로 재현되었지만 레오나르도는 패널에 그렸다.
캔버스로 재현된 것은 아무래도 원화와는 같을 수 없는 데다 서툰 솜씨로 보수되어 원화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지게 되었다.
마돈나의 앞이마는 벗겨졌고 볼은 볼록하고 눈은 침침하며 목은 주름져 있다.
이빨은 색에 덮여 보이지 않고 피부도 보수하는 과정에서 매끈하지 않아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원화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레오나르도가 도상적 전통을 무시하고 그렸기 때문이다.
과거 마돈나의 그림은 그녀를 숭고한 모습으로 표현하느라 딱딱하고 몸을 꼿꼿하게 세운 모습으로 마치 사진을 찍을 때 긴장하고 몸을 유연하게 하지 않고 얼어붙은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것과 같았다.
후기 15세기 화가들도 그런 식으로 그렸기 때문에 레오나르도의 이 작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신비한 신성을 단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표현하면서 일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
아기 예수는 꽃에 매료되어 잡으려고 한다.
마돈나는 아기가 꽃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어머니와 아기 모두 관람자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두고 놀이를 하고 있다.
15세기 관람자들이 과연 이 작품을 만족해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베로키오의 수석 조수가 된 로렌초 디 크레디로부터 라파엘로까지 레오나르도의 마돈나는 새로운 이미지로 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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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달리는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되었다


1928년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와 회화Le Surrealisme st la Peinture』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다.
책에는 무의식에 관한 언급과 젊고 예쁜 정신장애자 소녀 나자에 관한 연구도 있었으며, 초현실주의와 회화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부누엘은 달리에게 “네가 나자를 아주 좋아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달리가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한 것은 1929년 여름이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파리에서 온 친구들의 방문을 받았다.
친구들 중에는 마그리트와 그의 아내 게오르게트, 그리고 엘뤼아르와 러시아 태생 아내 갈라가 포함되었다.
갈라는 달리의 낯설고 밉살스러운 태도를 발견했지만 곧 매력 있는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방문이 끝날 무렵 사건이 발생했는데 달리의 일대기를 쓴 플레우르 카우레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달리의 열정은 거의 치매의 한계에까지 다 달았고, 하루는 언덕에서 갈라를 밀어뜨리려고 했다.
갈라는 달리가 자신에게 그렇게 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달리는 그녀를 밀어뜨린 후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비열한 히스테리아로 떨어지면서 달리는 갈라에게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명령했다.
달리는 “나의 눈을 바라보면서 내게 천천히 말하라. 그리고 야만적이고 호색적인 말로 우리 두 사람 모두 대단히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라!”고 했으며, 갈라는 “네가 나를 죽이기 바란다!”고 대꾸했다.

갈라는 남편 엘뤼아르와 함께 9월 초에 파리로 돌아갔다.
그해 1929년 11월 그를 위한 전시회가 파리에서 열렸는데 카탈로그 서문을 브르통이 썼다.
브르통은 다른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은 사지 않았지만 달리의 그림은 구입했다.
브르통을 감동시킨 그림은 <음침한 스포츠>였는데 그것을 비콤트 드 노아유가 구입해서 식당방에 걸었다.
노아유가 달리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었으므로 달리는 리가트 항구의 낚시꾼들의 오두막집을 구입하여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갈라와 동거할 수 있었다.
달리의 그림은 잘 팔렸고, 갈라의 기민한 재정 관리로 두 사람은 곧 저택을 사서 꿈같은 성으로 개조했다.

달리가 초현실주의에 가담하고부터 자동주의와 자발적인 행위보다는 환상적인 기교가 두드러진 그림이 사람들에게 더욱 알려졌다.
유령이 출몰하고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그의 사실주의 그림들을 달리 자신은 “손으로 그린 꿈의 사진들”이라고 했다.
초현실주의에 새로운 주제와 개인적인 환상을 더해 이성적으로 정교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그는 파리 미술계에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화법을 “편집광의 사고”라면서 “비평적이고 무아지경의 환상적이며 조직적인 객관성에 기초한 비이성적 지식의 자발적 동화작용”이라고 했다.
초기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선호한 자동주의의 꿈같은 열광적인 상태에 달리는 일그러진 영상의 원리와 미혹하게 하는 사고의 배양을 보태었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분석했듯이 그는 청순한 윌리엄 텔의 이야기를 자식으로서의 애착으로부터 근친상간적 다변의 추문적인 주제로 변경시키기도 했다.
그는 “나는 힘 있는 편집광적 사고의 과정에 의해 순간이 가까이 있음을 믿으며, 그것은 가능하고 … 조직적 혼돈과 실제 세계의 온전한 불신을 제공한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달리를 만난 후 다른 예술가들보다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프로이트는 달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는 너의 그림에서 무의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찾는다. 대가들인 레오나르도 혹은 앵그르의 그림이 내게 흥미를 유발시키고 그들의 그림들이 신비스러우며 내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림들 안에 특별히 숨어 있는 수수께끼, 무의식의 개념들을 내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달리가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한 시기는 브르통의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와 개인적인 독선으로 초현실주의가 막 붕괴될 즈음이었다.
달리의 영향이 커지자 브르통은 몹시 염려했고, 그는 달리의 회화경향에 우려를 표시했다.

브르통은 참다못해 1934년 2월에 달리를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여론재판에 회부했다.
“반혁명적인 행위”에 대한 심판 대상은 <윌리엄 텔의 수수께끼>에 나타난 반은 벗겨진 레닌의 모습과 다른 그림에 나타난 히틀러의 강박관념에 대한 묘사였다.
달리는 “나의 견해로는 히틀러의 고환은 네 개이고, 포피는 여섯 개다”라고 한 적이 있어 히틀러를 위대한 혁명가로 여긴 브르통과 그 밖의 예술가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여론재판이 있던 날 달리는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로 스웨터를 여러 개 껴입고 재판에 나가 답변을 하지 않으려고 체온계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는 브르통의 알려진 동성연애를 무례하게도 브르통과 자신이 항문에 성행위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서 초현실주의 예술가의 무한한 자유를 시위했다.
달리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의 적이 아님을 동료예술가들 앞에서 맹세했지만 결국 그는 1939년에 그룹에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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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의 혼을 가진 살바도르 달리


초현실주의는 다행스럽게도 정치에 무관한 예술가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그들은 에른스트, 마송, 탕기, 마그리트, 미로, 그리고 달리였으며, 특히 달리의 활약이 현저하게 눈에 띄었다.
달리는 그림으로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과 기괴한 행위, 옷차림, 코믹한 콧수염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브르통은 그를 가리켜서 “초현실주의 예술가의 혼을 가진 확실한 화가”라고 극찬했다.

달리는 1904년 5월 11일에 바르셀로나 근처 피구에라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자 공화당원이었고 무신론자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달리는 어려서 인상주의 예술가 라몬 피초트로부터 회화를 공부하고 피초트의 권유로 12살 때 학문주의 예술가이자 로마 상을 수상한 누네즈로부터 드로잉을 배웠는데 달리는 그의 가르침을 고마워했다.

달리는 뮤지엄에 가서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그림을 발견하고 감동했으며, 엘 그레코, 뒤러, 레오나르도,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그림과 드로잉을 연구했다.
그는 1921년에 마드리드에 있는 아카데미에 입학했는데, 학교에서는 별로 배운 것이 없었지만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만났고, 훗날 영화감독이 된 루이스 부누엘을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는 1923년에 아카데미로부터 1년 동안 정학처분을 받았으며, 집권자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정치에 항거하는 무정부시위에 가담했다가 1달 동안 투옥된 적도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점묘주의 화법을 실험했는데, 가족들의 별장 카다쿠에즈에서 바닷가 장면을 그린 <라네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이 그림에는 쇠라의 영향 외에도 세잔과 드랭의 영향이 발견되는데 드랭의 영향이 더 뚜렷하다.

그는 같은 나라 사람 피카소의 입체주의 화법을 받아들여 실험하며 <왕 알폰서스의 초상>, <자화상>, 그리고 <피에로와 기타>를 제작했다.
그의 분석입체주의와 합성입체주의에 관한 관심은 1927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프랑스 전통주의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앵그르와 그의 스승 다비드의 그림을 연구하면서 앵그르의 화법으로 1925년에 <창가에 선 소녀>를 그렸다.

달리는 프로이트가 1900년에 발표한 『꿈의 해석』을 읽은 후 “이 책은 내 생애에 가장 큰 발견이었다.
이 책이 나로 하여금 꿈뿐만 아니라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자아 해석의 실제 부덕까지도 사로잡히게 했다”고 했다.
그는 1926년에 아카데미에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쫓겨났다.
졸업을 앞둔 구두시험에서 자신이 세 교수보다 아는 것이 더 많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828년에 파리로 가서 평소에 존경한 피카소를 방문하고 네덜란드로 가서 베르미어의 그림을 연구했다.
이 시기 그의 그림에서는 초현실주의 영향이 나타나며 탕기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그는 부누엘을 통해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생겼는데 그와 함께 놀랄 만한 야만적인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제작했다.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영화를 배척한 순수 미학적 영화로 영화 첫 17분 동안 사람의 눈을 면도칼로 긋는 등의 공포스러운 장면이 등장한다.
그 영화는 1928년 10월 1일부터 12월 23일까지 상영되다가 결국 사람들의 시위를 자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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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의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얼마 후 레오나르도는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Portrait of Ginevra de? Benci>를 그렸다.
이 작품을 1967년 미국 워싱턴의 국립화랑은 백만 달러 이상을 주고 구입했고 미국 내에 있는 레오나르도의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
패널에 그려진 이 작품은 아랫부분이 약 12~15cm 잘려나갔으므로 초상화로서 낯선 느낌을 준다.
잘려진 부분에는 그녀의 팔과 손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이 패널 뒤에는 종려와 월계수로 만든 화관에 에워싸인 로뎀나무 가지들이 그려져 있고 '아름다움은 덕을 꾸민다 Virtutem forma decorat'라고 적혀 있다.
화관의 아랫부분은 사라진 상태인데 전통적 사이즈라면 세로 가로 3cm 4cm였을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그가 습작한 드로잉이 핑크색 종에에 은색으로 그려져 있어 사라진 부분을 알 수 있다.
습작 드로잉을 보면 오른팔 손가락이 코르셋 레이스를 만지락거리는 걸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모나리자 Mona Lisa>를 예고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실재에 충실했으며 그는 "인물을 그릴 때는 성격이 겉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칭찬을 받을 수 없다"고 적었다.
지네브라Ginevra란 이름은 배경의 어두운 색의 로뎀나무 숲에서 알 수 있는데, 로뎀나무juniper는 이탈리아어로 지네프로ginepro이다.
로뎀나무는 지네브라의 고상한 인격을 나타내는 데 매우 적절했다.
지네브라는 1481년에 타계한 부유한 은행가 아메리고 데 벤치의 딸로 1474년 1월 15일 17살의 나이로 루이지 디 베르나르도 디 라포 니콜리니란 남자와 결혼했다.
시인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했으며 로렌초 데 메디치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소네트를 두 점 썼다.
시인들이 찬양한 그녀의 미모를 레오나르도는 손의 언어로 찬양했다.
지네브라는 1521년경에 타계했다.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예술의 심리학 La Psychologie de l'art』에서 레오나르도가 "과거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을 창조했으며 그것은 인물을 그려넣기 위한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특성과 관객 모두가 빠질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다"라고 적었다.
이런 공간은 <모나리자>에서 다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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