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컬럼버스가 레오나르도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업이 없을 때는 대상을 관찰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드로잉했으며 고양이를 스케치한 종이에는 고양이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그가 고양이를 직접 관찰하면서 그렸음을 알게 해준다.
때로는 뒤에서 고양이를 그리면서 꼬리를 의문부호로 그리기도 했고 자신이 낚아챈 전리품을 움켜쥐고 웅크린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가운데에 작은 용을 그려 넣었는데 고양이처럼 생겨 언뜻 보면 알 수 없다.
그가 드로잉한 또 다른 종이에는 다양한 말의 모습을 그리면서 주제에서 벗어나 호랑이처럼 생긴 고양이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한 가지에 몰두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착상을 손이 가는 대로 그렸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보면 그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메모한 종이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의사이면서 철학자, 지리학자, 수학자인 파올로 델 포조 토스카넬리Paolo del Pozzo Toscanelli가 적혀 있고 피렌체에서 산수를 가르치는 베네데토Benedetto도 적혀 있다.
그가 이런 사람들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관심사가 다양했고 과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음은 틀림 없다.
그가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늙은 토스카넬리에 의해서였는데 토스카넬리는 브루넬레스키의 친구로서 베로키오와도 종종 만났다.
레오나르도가 토스카넬리를 만난 것은 대성당에 구체를 장식으로 올려 놓을 때였다.
당시 토스카넬리는 피렌체의 가장 유명한 천체학자였으며 지리학자였다.
그는 1474년에 배를 타고 서쪽으로 항해하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크리스토퍼 컬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그의 이론을 받아들여 대서양을 건넜다.
컬럼버스는 레오나르도보다 한 살 많았다.
레오나르도는 평생 천체와 지구에 관해 관심이 많았는데, 아마 토스카넬리의 강의를 들었을 것이며 그에게 질문도 하고 책과 도구를 빌리기도 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지도를 그렸는데 토스카넬리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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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는 말했다

서양화에 대한 논의는 18세기부터 있어 왔지만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일제시기에서였다.
신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소개되던 서양화는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논의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귀국한 1915년 이후 동경으로 유학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고 서화협회전(협전)과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통해 화단이 양적·질적으로 확대되는 1920년대 후반이 되어서는 사조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러나 서양미술에 대한 논의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단편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저술·번역본·단행본 등의 출간은 없었다.
서양미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일본 서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서양미술의 사조와 이론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창작활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므로 일본 근대미술을 통해서만이 우리나라의 근대미술이 이해되고 정리될 수 있다.

이 시기에 서양화에 대한 관심은 주로 인상주의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한 유럽의 여러 사조들이었지만 논의가 사조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포괄적으로 신흥미술. 전위미술, 현대미술 등의 개념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논의는 특히 일본 유학파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인상주의에 대한 특기할 만한 논의는 1930년대 중반 오지호(1905~82), 김주경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오지호는 동경미술학교의 후지시마 타케지의 제자로서 대상을 단순히 피사체가 아닌 대상 자체에서 발현되는 유기적 발광체로 간주함으로써 유럽 인상주의자들의 견해와 달리 했다.
그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리면서 주변의 자연을 눈부신 장면으로 묘사했다.
1938년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에 수록된 ‘순수회화론’에 의하면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인상주의 방법은 습기가 많고 비가 많이 오는 일본보다 건조하고 청명한 조선의 기후에 더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젤을 세우고 그리면서 <사과나무 밭>을 그릴 때는 1938년 5월 8일부터 사흥 동안 계속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렸으며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잎이 지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오지호는 1938년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에 수록한 ‘순수회화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회화는 빛의 예술이다.
태양에서 난 예술이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그것은 빛을 통하여 본 생명이요, 빛에 의하여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
태양은 생명에게 절대적인 환희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태양의 빛과 열에 의하여 길러진다.
태양을 흠뻑 받아들이는 것은 곧 생을 향수하는 일이요, 태양을 기뻐하는 것은 곧 생을 기뻐하는 일이다.
태양에의 환희의 표현이 곧 회화다.”

오지호는 색채가 빛이 그랬던 것처럼 열에너지가 되어 관람자의 눈을 통해 음악보다도 더 지속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한다고 믿었으므로 순수회화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해 인상주의가 왜곡되고 변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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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의 합작 <그리스도의 세례>

 

길드의 명단에 레오나르도의 이름이 올라있을 때인 1472년 그는 베로키오의 작업을 도왔다.
베로키오는 포르타 알라 크로체 근처 도시 성곽 밖에 있는 수도원 상 살비에 커다란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을 그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부분적으로 그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베로키오는 그리스도를 허리에 두르는 간단한 옷을 입고 요단 강가에 맨발로 서서 양손을 모아 가슴에 올리고 아래를 응시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동 그릇에 강물을 담아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붓는 세례식을 거행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스도의 머리 위로는 비둘기로 형상화한 성령이 임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스도를 패널 중앙에 구성한 베로키오는 회화적 구성을 위해 그리스도 왼쪽 강둑에 천사 두 명을 그려 넣기로 하고 그리스도 바로 옆에 있는 천사는 자신이 그리고 왼쪽의 천사는 레오나르도로 하여금 그리게 했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의 배경도 그렸다.

이 작품은 베로키오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조화와 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는 두 수도자의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장려하게 표현했다.
그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방법을 응용해 강물에 잠긴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다리를 그리면서 투명한 강물을 잘 묘사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투명한 물을 묘사하는 데 자신이 없어 마른 땅에서 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그리기 보통이었지만 베로키오는 자신감을 갖고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스승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를 그렸을 때 베로키오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자기는 더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뵐플린이 지적했듯이 레오나르도와 베로키오 사이에는 내적 연결성이 존재했다.
바사리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이 매우 가까웠으며 베로키오가 창안해낸 것들을 레오나르도가 아주 많이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레오나르도의 초기 그림들을 보면 놀랍기만 한데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에 그려진 레오나르도의 천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온 음성처럼 관람자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천사 그림은 "종교적 그리고 전체적 구성에서 볼 때 베로키오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 회화적으로는 훨씬 뛰어났다"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천사의 매우 어려운 제스처를 묘사했는데, 천사가 관람자쪽으로 등을 삼분의 이쯤 돌린 채 옆얼굴을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이런 각도로 그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딱딱하고 오래된 양식의 그림에 레오나르도의 천사가 삽입되어 작품이 한결 부드럽고 정취가 있으며 부피와 공간이 생겼다.

기교에 있어서도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에 비해 우수함이 증명되었는데 X-레이를 투시한 결과 베로키오의 채색은 릴리프처럼 두터운 데다 붓자국이 생겼지만 레오나르도는 흰색을 섞지 않고 물감을 오일에 섞어 투명하게 칠했기 때문에 붓자국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템페라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늘 밑칠을 투명하게 했으므로 X-레이를 투시할 경우 나무 패널이 보인다고 한다.
그는 가장 엷고 밝은색으로 코팅을 한 후 점점 어둡게 해서 인체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교를 사용했다.
그래서 빛이 착색유리에 비쳐 투명하듯 그의 그림에 빛을 비추게 되면 투명함을 보게 된다.
레오나르도가 마지막 그림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에 사용한 유상액emulsion은 너무 엷어서 X-레이를 통해 보게 되면 한결 같이 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에 관한 논문』에 "대상을 릴리프로 표현하기를 바라는 화가들은 표면에 색의 농담을 반쯤 칠한 후 가장 어두운 그늘을 칠하고 다음에 주된 빛을 칠해야 한다"고 적었다.
이 말은 그의 회화방법을 잘 말해준다.
그는 명암과 관해 언급하면서 릴리프가 회화의 가장 주된 요소라고 했다.
그의 말은 이차원의 평면에 삼차원의 오브제를 재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릴리프의 본질과 기능 그리고 다양한 기교적 표현에 관해 언급했는데, 릴리프를 회화의 혼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회화는 일종의 정밀한 자연과학이며 또한 모든 학문 위에 군림하는데 그 이유는 학문이 "모방되어질 수 있는 것", 즉 비인격적인 것인 데 반해 예술은 개인 및 개인의 타고난 재능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화가에게는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시인의 천재성에 필적할 만한 재능까지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원전 6~5세기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의 말로 전해온 "회화는 말 없는 시이고 말하는 회화"라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예술간의 서열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레오나르도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회화의 결점이라면 동일한 의미에서 시 역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점이 있다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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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거미집이 된 전시장

뒤샹은 파리에서 만난 적이 있는 알렉산더 칼더를 만났는데 칼더는 그때 브르통의 그룹에 속한 유럽 예술가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칼더를 위한 전시회가 1932년 파리의 비용 화랑에서 열렸을 때 뒤샹은 화랑에서 움직이는 그의 조각을 관람한 후 “원동력 가공물”이라고 불렀다.
뒤샹이 그렇게 부른 이유는 운동과 동기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였다.
그때 다른 평론가들은 “자동미술” 혹은 “기아변속”이라고 불렀다.
칼더는 모두 30점을 소개했는데 15점에 작은 모터를 부착했으므로 조각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쇳조각들에 밝은 색을 칠한 후 균형 있게 철사에 매달았다.
그는 조각에 운동을 더했다.

칼더는 조각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조각가였으며 그는 필라델피아의 스티븐스 공대를 1919년에 졸업했다.
그 학교는 우수한 학교였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 존 슬론으로부터 회화를 공부했는데, 정치적으로 과격한 태도를 취한 슬론은 제자들에게 선의 중요함을 누누히 강조하면서 “선은 온전히 표적이 되며 정신적 창조가 된다”고 가르쳤다.
슬론의 가르침은 칼더의 조각에서 역력하게 나타났다.
칼더는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하면서 로댕, 마티스, 피카소의 미학을 배웠으며, 피카소가 1918년에 종이에서 연필을 한 번도 떼지 않고 드로잉한 <광대>를 보고 철사를 가지고 그 같은 방법으로 실험하기도 했다.
그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26년 6월이었다.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만 레이를 만났고, 만 레이를 통해 뒤샹을 만났다.
그는 몬드리안의 화실을 방문하여 그가 단순한 구성에 기본색인 빨강, 노랑, 파랑으로 한정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대단히 감동했으며, 검정색과 흰색을 함께 사용하는 것에 매료되었다.
그는 몬드리안으로부터 조형주의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그는 화실을 나오면서 “내가 움직이는 몬드리안을 만들겠다”고 했다.
“움직이는 몬드리안”은 1932년의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었고, 뒤샹은 그의 조각이 마음에 들었다.

브르통은 뉴욕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뒤샹에게 자문을 구했다.
전시회의 타이틀은 ‘초현실주의의 첫 서류들’이었는데 그것은 미국 시민권을 이민국에 신청하는 서류를 의미했다.
전시회는 1942년 가을 매디슨 애비뉴 451번지에 있는 와잇로 라이드의 저택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뒤샹은 전시회를 위한 카탈로그를 디자인했다.
전시회를 후원한 엘사 시아파렐리가 전시회를 위해 가능한 한 최소한의 돈을 사용하고자 함을 알고 뒤샹은 16마일에 달하는 긴 로프를 구입했다.
브르통과 그의 아내 재클린, 에른스트, 칼더, 그리고 젊은 미국 조각가 데이비드 헤어의 협조를 받아 뒤샹은 라이드의 저택 내부를 거미집처럼 만들었다.
그는 작품들을 제대로 관람할 수 없을 정도로 로프로 가렸는데 마치 현대미술의 모호한 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뒤샹은 로프를 전구 가까이 감았다가 불이 나자 다시 설치했는데 그가 사용한 로프는 1~2마일 정도였다.
그는 봉제공장으로 성공하여 미술계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시드니 재니스의 11살 난 아들 캐롤에게 전시회 첫날 10여 명의 친구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전시회 첫날 초대 손님들이 정장을 하고 저택으로 왔을 때 10여 명의 소년·소녀들은 그곳에서 공을 차고 줄넘기를 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누구든지 아이들이 노는 것에 불평하면 아이들은 “뒤샹씨께서 우리들더러 여기서 놀라고 하셨어요”라고 말하도록 시켰다.
뒤샹은 자신의 방침대로 그날 그곳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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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오일물감 이야기

레오나르도는 알레소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도 갔다.
그는 발도비네티의 풍경화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마 물감 비법에 더욱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는 아궁이가 있었고 그는 계란 노른자위와 송진을 섞어 만들어 유역의 효과를 냈는데, 이것을 사용해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되면 유화처럼 신선하고 밝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회화사에 혁명과도 같은 오일물감이 피렌체에 소개된 것은 폴랑드르 화가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1441년에 사망)에 의해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사리에 의하면 플랑드르 대가들의 그림이 1530년대에 나폴리와 우르비노에 소개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화면이 매끈하고 빛났으며 색상과 투명한 효과는 전통적인 방법의 채색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이런 북유럽 화가들의 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시실리 사람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가 비법에 대한 실험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한 끝에 플랑드르로 가서 반 아이크로부터 방법을 알아냈다고 한다.
안토넬로는 베네치아에 안주한 후 친구들에게 이 비법을 가르쳤으며 도메니코 베네치아노가 이를 배워 피렌체의 작업장에서 소개했다.
베네치아노가 산타 마리아 누오바의 앱스(반원형 부분)들의 삼분의 일에 그림을 그릴 때 나머지 삼분의 이에 발도비네티와 안드레아 델 카스타그노Andrea del Castagno가 그렸다.
발도비네티와 카스타그노는 도메니코로부터 비법을 배우기를 원했지만 가르쳐주지 않자 카스타그노가 도메니코에게 다정한 척 대하면서 매일 밤 그와 함께 어울리면서 루트를 연주하고 예쁜 여자들에게 세레나데를 들려주는 등 노력을 다 하자 도메니코가 오일에 관해 조금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카스타그노는 비법을 완전히 안 후에는 쇠몽둥이로 도메니코를 살해했다.
그는 살인을 숨겼으므로 아무도 누가 도메니코를 죽였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카스타그노가 죽기 전에 이 사실을 고백했다.
바시리는 카스타그노가 자신이 범인임을 고백한 시기에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을 예수를 배반한 유다모습으로 그렸다고 적었다.
이 이야기는 소설처럼 꾸며진 것이다.
안토넬로가 처음 베네치아로 간 것은 도메니코가 죽은 지 14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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