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는 <금채봉납도>를 그렸으며


조선미술가협회의 주요 회원 심형구, 김은호, 김인승, 이상범, 박영선, 김기창(1914~) 등은 1920년 11월에 창간된 『회심會心』을 위해 삽화를 그렸다.
이 잡지는 산업금융의 관리를 통해 경제침탈을 자행한 식민화 정책의 주요기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의 기관지였다.
1943~44년에 발행된 『회심』 매호 첫 소표지에 한 점씩 소개된 삽화를 서울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화가들과 봉공奉公을 맹세하고 황국신민으로서 내선일체, 관민합작을 꾀한 조선미술가협회의 주요 회원들이 맡아 그렸다.
김인승이 1944년 1월호 『회심』에 실은 <간호병>의 경우 왼편 아랫부분에 ‘황기 2603’이라고 적혀 있어 황기皇紀라고 쓸 정도로 친일의식이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1940) 봉축기념전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영광을 노리기도 했다.
개성 부호 가정 출신으로 동경미술학교에서 타나베 이타루(1886~1968)와 고바야시 만고로부터 수학한 후 모범생으로 졸업한 김인승은 1936년 선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했고 1938년에 특선, 1940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는 해방 후 이대 교수,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미협 이사장을 엮임하면서 화단을 주도했으며 1968년에는 3·1문화상, 이듬해에는 문화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미술부 간사이기도 한 심형구는 학도병 지원을 선동하는 시국좌담과 강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용인 출신으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6년 선전에서 특선, 이듬해에는 총독부상을 수상, 1939년에 추천작가, 1942년에는 심사위원이 되었고 해방 후 이대 미대를 창설했다.
그는 54세로 타계했다.

김기창도 학도병 지원을 선동하는 삽화를 『회심』에 실었는데 이에 앞서 1943년 8월 6일자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를 게재했다.
그것은 부모를 좌우에 두고 입영의 영광을 안은 조선 청년의 자랑스러운 표정을 담은 수묵소묘였다.
그는 선전을 통해 유명해진 작가로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매해 특선에 올랐고 최고상인 창덕궁상과 총독상을 수상했으며 추천작가에 선정되었다.
해방 후에는 국전을 주도, 1962~74년에 수도사대 교수로 재직, 1971년에는 3·1문화상을 수상했고 1973년과 1977년에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김은호는 『회심』에 삽화를 게재하기 전 1937년에 금비녀 등 장신구를 모아 총독에게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장면 <금채봉납도>를 그렸으며 이 그림은 1937년 11월 20일에 총독부에 기증되었고 여러 잡지에 게재되면서 선전 자료로 널리 이용되었다.
1937년 8월 20일 친일 인사의 부인들이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권유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를 결성하면서 결성식 석상에서만도 금비녀 11점과 기타 장신구를 헌납했다.
금채 헌납은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운동에 대한 헌남열을 고취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인 부녀가 총독부에 금비녀를 헌상하는 구도였다.
애국금채회의 회장이 매국귀족인 자작 윤덕영 부인 김복원이었다.
애국금채회에서 김은호에게 청하여 조선총독 남차랑南次郞에게 헌납하는 실물적 정경의 <금채봉납도>를 그리게 하여 증정한 것이다.
김은호가 애국금채회의 청을 받아들인 것은 청년 때 윤덕영의 주선으로 고종의 어진을 그린 행운과 기타 일본 고관과 매국귀족의 초상화를 많이 그려 유명해진 데 대한 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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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보다 17살 많아

바사리는 세르 피에로가 어느날 베로키오에게로 가서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을 보여주었다면서 베로키오를 가리켜 피에로의 가까운 친구라고 적었다.
피에로는 돈만 아는 협량한 공증인이 아니었다.
1465년경 피에로는 상인 회사를 위해 일하면서 그 회사로부터 집을 세 얻었는데 그때 베로키오에게 오르 상 미셀레 외관의 벽감을 장식할 변호사들의 수호 성자 <성 토마스의 회의심 Incredulity of Saint Thomas>을 청동으로 제작해줄 것을 의뢰했다.
베로키오는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고 매사에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와 피에로가 어떤 우정을 나눴는지는 알 수 없다.
피렌체에는 많은 대가들이 있었지만 피에로는 레오나르도를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했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보다 17살 많아 레오나르도에게는 아저씨도 같았다.
그는 조각가이면서 화가이며 또한 쇠를 잘 다루었고 당시 이탈리아의 중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 금 세공을 배웠고 피올로 우첼로,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기를란다요 모두 금 세공을 배우면서 예술가가 되었다.
그의 별명은 '진정한 눈 true eye'이란 뜻으로 날카로운 시각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그 별명의 성직자의 수하에 있었기 때문에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도나텔로부터 수학했다고 했지만 그의 주요 재능은 금 세공에 있으며 섬세한 장인적 기교가 돌출한 그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적인 위대함으로 보면 도나텔로와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이상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 예술가였다.

베로키오의 쇠 작품은 오직 한 점만 현존하는데, 1477~80년에 제작한 <목이 베어지는 세례 요한 Beheading of John the Baptist>이다.
이 작품은 피렌체 세례당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현재 대성당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조각가로 더욱 유명했으며 청동을 다루는 데 탁월했지만 대리석과 테라코타의 작품도 제작했다.
그가 1475년경에 제작한 <다윗>은 도나텔로의 것보다 더욱 더 풍치가 있지만 덜 사고적이다.
도나텔로의 것은 평온한 데 비해 베로키오의 것은 이제 막 움직일 수 있는 인물로 보여진다.
베로키오를 화가로 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데 그가 그렸다고 믿어지는 작품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그림은 아주 많으며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큰 작업장으로 많은 유명한 화가들이 그의 작업장에서 일했다.
그의 작업장은 피렌체에서 가장 다양한 작품을 제작해내는 곳이었고 제자들의 협력이 스승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회화와 조각을 결합시킨 일은 때마침 조각이 방법론적으로 자연을 철저히 탐색하려는 경향을 보이던 때라서 더욱 촉진되었다.
개인적 양식이 될 위험이 전혀 없었다.

베로키오는 젊었을 때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렸다.
그는 어느날 밤 친구들과 함께 포르타 말라 크로체와 포르타 아 핀티 사이에 있는 도시성곽 밖을 걸었다.
그와 친구들은 장난삼아 돌을 던지며 즐거워했는데, 불행하게도 그가 던진 돌이 14살의 모직제조공 안토니오 디 도메니코의 관자노리를 명중했고 그 소년은 그날 밤 죽었다.
그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지만 살의가 없는 살인이었으므로 곧 풀려났지만 그 날의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그해 베로키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세금 징수원이었던 그는 남긴 재산보다 빚이 더 많았다.
베로키오는 어머니 난니나와 다섯 형제 자매를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떠맡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그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하게 만들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는 형제 자매를 경제적으로 돕고 있었다.
베로키오는 결혼한 두 누이의 자녀들에게까지도 자발적으로 도왔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작업량이 많아서였는지 결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세금보고서에 자신과 동생들이 신발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고 적어 세금 징수원들의 동정을 사서 세금을 적게 낼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세금 징수원이었기 때문에 세금을 적게 내는 요령을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 같았다.
로렌초 디 크레디Lorenzo di Credi(1458년경~1537)가 1485년에 그린 그의 초상화를 보면 사각형의 얼굴에 볼이 통통하고 강렬한 시선을 느낄 수 있으며 넓은 코 아래 가는 입술에서는 감성을 느낄 수 없다.
그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을 느낄 수 없지만 턱이 작고 여성적이라서 이 부분에서는 부드러움이 엿보인다.
그는 오래 포즈를 취하는 데 힘이 드는지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놓고 긴장한 모습인데 빨리 끝내고 자신의 작업에 임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베로키오는 매우 부지런했다. 바시리는 그가 그칠줄 모르게 작업했으며 늘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어 "녹이 스는 것을 방지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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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승은 1943년 놋그릇을 바치는 광경을


1940년 9월 동경 우에노 미술관에서 문부성 주최로 열린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서는 서양화의 김인승과 조각부의 윤효중, 이국선, 조규봉(1916~?) 등이 입선했다.
일본에서는 조선 예술가들의 사기를 진작한다는 명분으로 주식회사 모던 일본사가 기금을 설정하여 1940년 조선예술상을 만든 후 미술계 심사위원으로 선전에서 영향력이 컸던 석정백정石井柏亭, 결성소명結成素明을 위촉했다.
제1회 수상자로 문학에 이광수, 제2회 문학에 이태준, 미술에 고희동이 수상했고, 1943년 3월 제4회 수상자로 문학에 이무영, 미술에 노수현, 제5회 수상자로 문학에 주요한, 미술에 이상범, 제6회 수상자로 문학에 박종화가 수상했다.

1941년 2월 22일 일제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내선일체 관민합작의 총력체제를 갖춘 조선미술가협회에 서양화부 이사로 심형구(1908~62)와 매일신보 학예부장 백철이 참여했고, 평의원 일본화부에 김은호,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과 일본인 3명, 서양화부에 김인승(1910~), 배운성(1901~78), 이종우, 장발과 일본인 8명, 조각부에 김경승, 공예부에 일본인 6명, 도안부에 일본인 2명 등이 참여했다.
이듬해 김은호, 고희동, 이상범, 김용진, 김기창, 이한복 등은 조선남화연맹의 회원전을 열고 작품판매 수익금을 모두 국방에 쓰라고 총독에게 바쳤다.
동양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용진은 1938년에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황군위문용이라는 이름으로 남화 부채그림 200개를 일일이 다른 주제로 그려 총독부를 감격하게 한 적이 있었다.
남화南畵란 남종화를 줄인 말로 일본인이 전통 일본 수묵화풍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영운 김용진(1882~1968)은 고종 때 영상을 지낸 김병국의 손자이며 당대에 멋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미국대사관 테니스클럽의 회원이기도 했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사교의 폭이 넓었다.
그는 일찍이 중국의 유명한 서화가 방면으로부터 수학했으며 만년에는 중국의 대가 오창석의 그림에 심취하여 화풍이 오창석을 닮았다.
그는 한때 서울미대의 초빙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1943년 2월에 결성된 조선인·일본인 합작의 서양화가 모임인 단광회丹光會에는 심형구, 김인승, 김만형, 박영선(1910~94), 손응성, 조병덕, 이봉상(1916~70)과 일본인 등 27명이 가담했다.
단광회는 1943년 8월에 징병제가 실시되자 ‘성전하에 미술보국에 매진한다’는 취지를 걸고 19명의 회원이 4개월에 걸친 합동제작으로 폭과 높이 6척의 대작 <조선징병제 시행기념>라는 기록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현존하지 않고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이 그림은 일본인 조선군 보도부장, 조선해군 무관부 대좌, 지원병 훈련소장, 총력연맹사무국장, 경기지사 고안안, 그리고 친일파 윤치황 등의 인물들을 실사하면서 조선인 징병소집자를 전송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조선의 젊은이를 사지로 내몬 이 그림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의 백화점 등 전국을 두루 순회했다. 이 그림을 그리는 데 참여한 조선 작가들은 김인승, 박영선, 김만형, 손응성, 심형구, 이봉상, 임응구 등이며 이들이 나중에 국전의 중추세력이 된다.
단광회 회원들은 선전 외에도 일제 말기에 조직된 성전聖戰 미술전(1940), 반도총후半島銃後 미술전(1942~44), 결전決戰 미술전(1944) 등에도 앞장서 활동했다.
김인승은 1943년 놋그릇을 바치는 광경을 그려 일본에서 열린 육군미술전에 출품했으며 심형구와 마찬가지로 종군작가로 친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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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피렌체 화가 마사초Masaccio(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피렌체 화가 마사초Masaccio(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1401~28)는 비록 스물일곱 살에 요절했지만 위상은 친구들 알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 그리고 도나텔로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마사초는 그의 별명으로 '칠칠치 못한 탐 Sloppy Tom'이란 뜻이다.
바사리는 그의 별명과 관련해서 마사초는 세상 것에 관심이 없다 보니 옷을 아무렇게나 남루하게 입고 다녀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적었다.
마사초가 피렌체의 길드 멤버가 된 것은 1422년으로 그가 누구로부터 어떻게 수학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현재 우피치에 소장되어 있는 상 조베날레 3부작San Giovenale Triptych으로 1422년에 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고딕의 우아함을 배척한 개성이 뚜렷해보이고 인물들의 체중과 부피를 묘사해내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대의 화가들에게 배우기보다는 조토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중력과 장려함을 나타내려고 했다.
조토가 공간에 인물을 배치한 것과는 달리 마사초는 삼차원적으로 묘사하려고 했으며 이는 유럽 회화의 근간이 되었다.
그와 공통점이 있는 예술가를 꼽는다면 도나텔로로서 두 사람 모두 감성적 표현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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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과 반도총후미술전


1937년 이후 일제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을 추진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호를 내걸었는데 조선 민중에게 천황숭배사상을 주입시켜 정신적으로 일본인으로 만들어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천황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서의 맹세를 아침저녁으로 외는 이른바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시행했으며 민중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내선일체의 상징으로 부여신궁을 건설하는 한편 일면일신사一面一神社의 원칙을 세워 산간벽지에까지 신사를 짓고 각 가정에는 신붕神朋을 설치하게 하여 참배를 강요했다.
또한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라는 것을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외우도록 강요했으며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
1942년에는 조선어 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까지 강제로 해산하고 관계자를 투옥·학살했다.
또 1940년에는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한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친일파가 대거 이용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친일파는 강제합병 이후 대개 총독부 관료가 되거나 중추원 등에 편입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에 동조하며 참정권 청원을 주장한 민원식 등 친일지주·매판자본가들이 친일파로 전락했다.
그런가 하면 자치운동 등 타협적 경향을 보인 민족개량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친일적 경향이 확산되었다.
1930년대 전반기에 민중운동이 고양되고 주일전쟁 이후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강화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민족개량주의자의 상당수가 친일파로 전락했으며 전향하는 사회주의자도 많았다.
수양동우회사건을 계기로 이광수와 주요한 등이 친일을 서약했으며 뒤이어 청구구락부의 윤치호와 장덕수, 흥업구락부의 신흥우 등도 전향했다.
이들은 민중에게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며 조선인은 일본을 맹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에 참가하여 정치적 지위를 향상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김성수, 윤치호, 최린, 김활란 등이 이사로 활동했고 문화위원으로 백철, 유진오, 홍난파 등이, 여성부위원으로 송금선, 이숙종 등이 활동했다.
전선사상보국연맹에는 유억겸, 박영희, 장덕수, 김한경 등이 참여했으며 종교계에서는 양주삼(감리교), 홍택기(장로회) 등이 대표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문학 분야에서는 내선일체를 겨냥한 일본어 국민문학이 제창되었으며 그 활동단체로 1939년 조선문인협회 등이 결성되었다.
여기에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유진오, 박희도, 김동환, 최재서 등이 참여하여 활발한 친일문학 활동을 벌였다.
미술에서도 친일행각이 이루어졌는데 1940년에 결성된 문인서도연구회에는 화필보국畵筆報國, 내선유지의 단합이라는 명목으로 한규복, 김용진, 고희동, 정병조, 안종원 등이 출품했으며, 1942년 10월에는 조선남화연맹전을 열어 전람회 수익금을 전부 국방에 헌납했다.
여기에 참가한 작가들은 윤희순, 노수현, 백윤문, 배렴(1911~68), 박승무(1893~1980), 이상범, 이용우(1902~52), 이한복(1897~1940), 이응로, 이승만, 고희동, 허백련, 김은호, 허건, 김용진, 김기창 등이었다.
조선남화연맹전이 열리고 불과 한 달 후인 11월에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고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소위 반도총후미술전이라는 강요된 전람회가 열렸고 선전 심사위원 김은호, 이상범은 위원에 추대되었으며 선전의 추천작가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도 초대작가로 지목되어 출품해야 했다.
반도총후미술전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3회 계속되었다.
전람회기는 해마다 11월 초순이었고, 장소는 신세계백화점 전신인 삼월오복점, 충무로 입구의 삼중정, 그리고 화신백화점이었다.

장우성은 자신도 반도총후미술전에 출품하라는 통지를 받았는데, 유난히 시국색을 강조하는 작품을 요구했으므로 화가들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삼수화를 그려도 군인이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모습을 삽입해야 하고 농가의 사립문에도 일장기를 꽂아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장우성은 그런 식으로 그리는 것이 싫어 <부동명성왕 상>(화단 풍상 112)을 모작했는데, 부동명왕이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일체의 악마,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해 정의의 화신으로 오른손에 항마降魔의 검, 왼손에는 오라를 쥔 채 큰 불꽃 속에서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약 60호의 이 작품을 트럭의 일반 화물 위에 싣고 서울로 가는 도중 소나기가 쏟아져 작품이 망가졌다.
그는 이런 사유를 글로 서서 반도총후미술전 사무국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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