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승은 1943년 놋그릇을 바치는 광경을
1940년 9월 동경 우에노 미술관에서 문부성 주최로 열린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서는 서양화의 김인승과 조각부의 윤효중, 이국선, 조규봉(1916~?) 등이 입선했다.
일본에서는 조선 예술가들의 사기를 진작한다는 명분으로 주식회사 모던 일본사가 기금을 설정하여 1940년 조선예술상을 만든 후 미술계 심사위원으로 선전에서 영향력이 컸던 석정백정石井柏亭, 결성소명結成素明을 위촉했다.
제1회 수상자로 문학에 이광수, 제2회 문학에 이태준, 미술에 고희동이 수상했고, 1943년 3월 제4회 수상자로 문학에 이무영, 미술에 노수현, 제5회 수상자로 문학에 주요한, 미술에 이상범, 제6회 수상자로 문학에 박종화가 수상했다.
1941년 2월 22일 일제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내선일체 관민합작의 총력체제를 갖춘 조선미술가협회에 서양화부 이사로 심형구(1908~62)와 매일신보 학예부장 백철이 참여했고, 평의원 일본화부에 김은호,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과 일본인 3명, 서양화부에 김인승(1910~), 배운성(1901~78), 이종우, 장발과 일본인 8명, 조각부에 김경승, 공예부에 일본인 6명, 도안부에 일본인 2명 등이 참여했다.
이듬해 김은호, 고희동, 이상범, 김용진, 김기창, 이한복 등은 조선남화연맹의 회원전을 열고 작품판매 수익금을 모두 국방에 쓰라고 총독에게 바쳤다.
동양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용진은 1938년에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황군위문용이라는 이름으로 남화 부채그림 200개를 일일이 다른 주제로 그려 총독부를 감격하게 한 적이 있었다.
남화南畵란 남종화를 줄인 말로 일본인이 전통 일본 수묵화풍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영운 김용진(1882~1968)은 고종 때 영상을 지낸 김병국의 손자이며 당대에 멋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미국대사관 테니스클럽의 회원이기도 했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사교의 폭이 넓었다.
그는 일찍이 중국의 유명한 서화가 방면으로부터 수학했으며 만년에는 중국의 대가 오창석의 그림에 심취하여 화풍이 오창석을 닮았다.
그는 한때 서울미대의 초빙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1943년 2월에 결성된 조선인·일본인 합작의 서양화가 모임인 단광회丹光會에는 심형구, 김인승, 김만형, 박영선(1910~94), 손응성, 조병덕, 이봉상(1916~70)과 일본인 등 27명이 가담했다.
단광회는 1943년 8월에 징병제가 실시되자 ‘성전하에 미술보국에 매진한다’는 취지를 걸고 19명의 회원이 4개월에 걸친 합동제작으로 폭과 높이 6척의 대작 <조선징병제 시행기념>라는 기록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현존하지 않고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이 그림은 일본인 조선군 보도부장, 조선해군 무관부 대좌, 지원병 훈련소장, 총력연맹사무국장, 경기지사 고안안, 그리고 친일파 윤치황 등의 인물들을 실사하면서 조선인 징병소집자를 전송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조선의 젊은이를 사지로 내몬 이 그림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의 백화점 등 전국을 두루 순회했다. 이 그림을 그리는 데 참여한 조선 작가들은 김인승, 박영선, 김만형, 손응성, 심형구, 이봉상, 임응구 등이며 이들이 나중에 국전의 중추세력이 된다.
단광회 회원들은 선전 외에도 일제 말기에 조직된 성전聖戰 미술전(1940), 반도총후半島銃後 미술전(1942~44), 결전決戰 미술전(1944) 등에도 앞장서 활동했다.
김인승은 1943년 놋그릇을 바치는 광경을 그려 일본에서 열린 육군미술전에 출품했으며 심형구와 마찬가지로 종군작가로 친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