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페루지노Pietro Perugino(Pietro Vannucci

페루지노Pietro Perugino(Pietro Vannucci, 1445/50~1523)는 주로 페루지아Perugia에서 활약했고 그래서 페루지노란 별명이 붙었다.
초기 활동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발견한 것 같다.
바사리는 그가 레오나르도와 함께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피렌체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로부터 수학하기도 했다.
그는 1472년 화가로서 피렌체의 성 누가 공제 조합에 들어갔는데 레오나르도도 이때 조합에 들어갔다.
그는 1475년에 페루지아로 돌아갔다.
1481년 그는 이미 유명해졌으며 새로 건립한 시스티나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으며 그 외에도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젤리도 함께 그곳에서 작업했다.
바사리는 그때 페루지노가 예술가들의 우두머리였다고 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보티첼리가 우두머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주요 작품은 <성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쇄를 주는 그리스도 Christ Delivering the Keys to St. Peter>이다.
작품을 의뢰하는 사람이 많아져 그는 이탈리아 중부지방을 여행했으며 1490년대에는 피렌체와 페루지아에 작업장을 갖고 있었다.
페루지노는 프레스코화에만 정통한 것이 아니라 초상화가로도 유명했으며 오늘날에는 그의 제단화의 빼어남도 인정받고 있다.
1505년 경쟁이 심한 피렌체에서 그의 작품은 유행이 지난 것으로 취급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남은 여생을 페루지아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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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동란 이전에 월북한 작가들은 자진해서


북한으로 간 작가들은 대체로 두 시기에 걸쳐 월북한 것으로 1948년 8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25동란 이전까지와 6·25동란 이후부터 9·28 서울 수복 사이이다.
6·25동란 이전에 월북한 작가들은 자진해서 북한으로 간 것으로 짐작되지만, 6·25동란 이후 월북한 작가들 중에는 강제로 연행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서양화가로는 배운성, 김주경, 길진섭, 정현웅, 김만형, 최재덕, 이쾌대, 이순종, 윤자선, 이해성, 임군홍, 한상익, 엄도만, 방덕찬, 정온녀, 박문원, 기웅, 김용준 등이고 조각가로는 조규봉, 김정수, 이국전 등이다.
그리고 동양화가로는 이석호, 정종여, 이팔찬, 이건영 등이 월북했다.

조규봉(1917~?)은 인천 태생으로 1941년 윤효중과 함께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했다.
그 해부터 선전에 인물상 조소작품으로 거듭 입선했으며 1943~44년에는 <머리>와 <부인 입상>이 특선에 올라 조각계에 신예로 부상했다.
해방 후 그는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조선조각가협회 조직에 참여했고 조선조형예술동맹에도 간부로 활약하다가 1947년 월북하여 많은 혁명기념물 조각상을 제작했다.
그 이전에 제작한 작품은 남한에 전혀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평양미술대학 조각 강좌장 및 조각학부 부장을 지냈다.

김정수(?~?)는 서울 태생으로 동경의 일본미술학교 조각과에서 수학했고, 1938년과 1944년 선전에 입선했으며, 해방 후 조선프로레타리아미술동맹에 핵심간부로 가담하는 등 급진적인 좌경색을 나타냈다.
그는 조규봉과 함께 조선조형예술동맹 조각부 간부위원을 지냈고 자진 월북했다.

이국전(?~?)도 일본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으로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선전 조각부에 계속 입선했고 <머리>, <소년>, <어느 음악가의 머리> 등이 특선에 올라 신예로 부상했다.
1949년 제1회 국전에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흉상>을 출품했다.
그가 월북한 시기와 경위는 불분명하다.
남한에 그의 작품은 전혀 현존하지 않는다.

이석호(1904~71)는 경기도 안성 태생으로 1930년 이전에 김은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스승의 영향으로 섬세한 사실주의의 꽃, 새, 인물 등을 주로 그렸다.
안국동의 단칸셋방에서 처자와 생활하며 그림과 글씨에 전념했다.
1929년부터 협전에 출품했으며 1934년부터 선전에 거듭 입선했고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선전에 계속해서 출품했다.
김은호 제자들이 1936년 후소회를 결성할 때 그도 김기창, 장우성, 백윤무, 한유동, 장덕, 조중현, 이유태(1916~) 등과 함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해방 후 사상적 좌·우 대립이 극심할 때 그는 좌익 편에 서서 조선조형예술동맹에 가입했으며 이어 정치적 좌익노선을 분명히 한 조선미술동맹에도 가담했지만 김기창, 정종여처럼 간부가 되지는 못했는데 두 사람에 비해 작가로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에 서울에서 이응로와 2인전을 가졌다.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한 그는 평양의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을 지냈고 화조화·산수화를 그리다가 1971년에 타계했다.
남한에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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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보티첼리가 자신의 작업장을 가지고 독립한 것은 


수세기 동안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1444/5~1510)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지만 현재 콰트로첸토의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다.
보티첼리란 이름의 뜻은 '작은 몸통 little barrel'인데 그의 형이 살이 쪄서 붙여진 별명으로 그에게도 사용되었다.
이 별명이 그의 성이 되었다.
보티첼리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오기 전에 필리포 리피로부터 수학했으며 그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양식은 15세기 후반 예술가들의 것들과 유사한 데가 있는데 마사초의 과학적 자연주의에 반하는 고딕 양식으로 감성적이고 여성적 우아함과 장식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보티첼리가 자신의 작업장을 가지고 독립한 것은 1465년경이었다.
그는 독립하고 곧 메디치가로부터 주문을 받아 일했는데, 로렌처의 어머니 루크레지아 토르나부오니를 위해 <유딧 Judith>를 그렸으며 그녀의 남편 피에로 고토소를 위해 <위대한 마돈나 Madonna of the Magnificat>와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를 그렸다.
그는 <위대한 마돈나>를 마돈나가 찬송가를 적고 있는 장면으로 묘사하면서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를 각각 열여섯 살과 열두 살의 소년들로 마리아가 쓰고 있는 책을 붙들고 있게 했다.
이런 아이디어는 그가 프라 리포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동방박사의 경배>에서는 코시모가 마돈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그렸으며, 그 아래 피에로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고, 열일곱 살의 로렌초가 칼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열일곱 살이면 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나이이다.
보티첼리는 메디치가의 세 세대를 그림에 삽입한 것이다.
피에로가 사망한 후 로렌초와 줄리아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티첼리를 후원했으며 보티첼리가 그린 유명한 초상화는 줄리아노와 줄리아노의 애인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를 그린 것이다.

보티첼리는 대부분의 생애를 피렌체에서 보냈고, 유일하게 피렌체를 떠난 기간은 1481~2년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는 그때 페루지노, 로젤리, 기를란다요와 함께 나란히 작업했다.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한 것만 봐도 당시 그가 유명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주문을 받고 <프리마베라 Primavera>,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Pallas and the Centaur> 세 점을 그렸으며 현재 모두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보티첼리는 종교적?신화적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초상화도 그렸고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을 위해 펜으로 드로잉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작업장을 운영했는데 그의 제자들 중 가장 유명한 화가는 필리포 리피Filippino Lippi(1457년경~150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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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는 이상범과 함께 친일미술전의 총화격인 반도총후미술전의 위원으로 



김은호는 이상범과 함께 친일미술전의 총화격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의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반도총후미술전은 1942년 11월에 첫 전람회를 열었는데,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했고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했으므로 선전보다 명실상부하게 중시된 전람회였다.
총후미술전은 말 그대로 총을 쏘는 전쟁을 지원하는 전람회였다.
따라서 작품은 일본군이 용감하게 싸우는 전쟁화와 전쟁을 총지휘하는 천황을 찬양하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선전을 통해 유명해진 작가들이 이 전람회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을 때 거절하기란 어려웠을 테지만 게중에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작가들도 있었다.
이 전람회에 김은호와 이상범이 위원으로 참여했고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장우성 등이 초대작가로 참여했다.
이 전람회는 1944년까지 3회 계속 되었다.
전람회는 11월 초순에 열렸으며 동양화부를 아예 일본화부로 지칭하여 출품작들의 명제도 ‘방공훈련’, ‘폐품회수반’, ‘총후의 백성’, ‘징병제도를 맞이하며’ 등으로 전람회의 성격에 맞춘 것들이었다.
이상범은 화필보국畵筆報國을 위해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기금으로 헌납한 1940년의 조선남화연맹전에 김은호, 김기창 등과 함께 참여했으며 예술보국한 공로로 1944년 제5회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이들 외에도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있었는데 지성열이 1939년에 중국 전장 사생전을 그렸고, 송정훈이 중일전쟁에 종군하여 그린 그림으로 전람회를 열었으며, 1940년 심형구는 <흥아興亞를 지킨다>라는 제목으로 보초를 서는 군인을 그린 유화를 제19회 선전에 출품하여 이런 종류의 작품으로 처음 입상했다.
심형구는 이어서 정세와 관련하여 미술이 취해야 할 바에 대해 논설을 스는 등 노골적으로 친일을 했으며 종군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은 자기반성 없이 해방 후에는 화단을 주도했으며 국전의 초대작가, 운영위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일제 때의 기득권을 계속해서 누렸다.
일찍 타계한 심형구를 제외하고 이상범, 김은호, 김인승, 박영선, 김기창 모두 3·1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서울시문화상, 예술원상, 문화훈장 등을 골고루 수상했다.

월간 『소국민少國民』 표지에 삽화를 그린 화가들도 있었다.
이것은 국민학생용 잡지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가 1943년 12월에 창간했다.
이 잡지는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민족말살책동에 따라 일본어로 발간되었는데 전시국가 총동원체제에 따라서 어린이마저 전쟁터로 내보내려는 저의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 잡지의 표지화와 삽화를 주로 일본인 화가들이 그렸지만 조선인 화가로는 정현웅, 이건영(1922~), 조병덕(1916~) 등이 그렸다.
정현웅은 『신시대』, 『소년』 , 『여성』 , 『조광』 , 『춘추』 등 일제시기에 발간된 여러 잡지에 표지화와 삽화를 그려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소국민』에도 게재했다.
그는 『소국민』에 <공정대空珽隊>, <하늘은 우리들이 정복할 곳이다>, <힘쓰는 어린 독수리 - 소년비행단>, <비행기의 정비> 등을 게재했고 연재소설 『불타는 십자성』에 삽화를 제공했다.
<공정대>는 도판의 설명대로 “하늘에서 낙하한 공정대원들이 버마의 한 적진 비행장에 난입한 뒤 귀대하기 위해 수송기에 올라타는” 장면이었다.
정현웅은 서울의 제2고보(현재 경복고)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서양화를 공부했으며 1927년 열여섯 살 때 제6회 선전에 출품하여 일찍 재능을 나타냈고 그 후 계속해서 선전에 출품했다.
1936년 『조선일보』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은 이상범과 함께 공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후 정현웅은 1945년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기장, 이듬해 조선미술동맹의 아동미술부 위원장, 1947년에 월간 『신천지』 발행인, 1950년에는 서울미술동맹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9월 26일 월북한 그는 1950~57년 물질문화보존연구회 제작부장을 지내면서 안악 3호분 등의 벽화보존과 모사작업에 몰두했으며 1957년부터 1966년까지 미술가동맹의 출판분과위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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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베로키오는 탁월한 사업가

도나텔로로부터 수학한 후에도 베로키오는 그의 작업에 협력했으며 도나텔로가 늙어서 작업을 할 수 없을 때는 구매자들을 젊은 베로키오에게 소개해주었다.
베로키오는 1464년에 '국부 father of the state;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묘비를 의뢰받아 제작했다.
이 중요한 작업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묘비를 제작한 후 그에게는 일감이 쏟아져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조각가와 금 세공가일 뿐 아니라 화가이며 장식가임을 널리 광고했다.
비아 데 아그놀로에 있는 그의 작업장에서는 온갖 작품들을 제작해냈다.
그의 작업장은 오늘 날 상점과도 같았는데, 아래층이 거리에 있어 상품을 진열하듯 작품을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했고 사람들이 아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고 개, 닭, 돼지들도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바사리의 말로는 베로키오가 싼 것과 비싼 것을 가리지 않고 모든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문하생과 조수들은 같은 지붕 아래서 스승과 함께 기숙하면서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그들은 스승의 말에 복종해야 했다.
스승은 어버이와도 같았으므로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는 제자들에게 매질을 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배우고 조수로 활동한 기간은 12, 13년이나 되었다.
화가이면서 작가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1370년경~1440)는 13년의 기간이면 도제discepolo의 단계에서 수습기간을 마치고 제구실을 하는 장색garzone의 단계를 거쳐 숙련공maestro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도제기간에 견습생은 첫 6년 동안 그림 그리는 데 사용하는 붓 만들기, 겉칠하기, 참피나무나 버드나무 페널에 캔버스를 잡아당겨 붙이기, 알료를 알아보고 준비하기 등을 배우게 되며 매일 알료를 섞어서 원하는 색을 내는 일을 배우게 된다.
이후 6년 동안은 색을 사용하는 방법, '착색료로 장식하기 decorate with mordants', 금실로 천에 수놓기, 벽에 직접 그리기 이 모든 일을 주말에도 휴일에도 쉬지 않고 하게 된다.
첸니니는 1430년대에 쓴 무려 189장에 이르는 『회화에 관한 논문』이란 제목의 책에서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예술이 기술적인 사업임을 지적하려고 했다.
그는 기교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기술했는데, 고급 피지 패널에 어둡게 착색하는 방법, 늙은 남자의 얼굴 묘사, 동정녀 마리아의 파란색 겉옷 그리기, 물고기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강물 그리기 등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남자의 몸을 사용해서 인체의 비례에 관해 기술했는데 매우 정확했다.

베로키오는 1467년에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묘비를 완성하여 상 로렌초 교회에 장식했다.
이 시기에 그는 거대한 크기의 구체를 청동으로 제작하여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Duomo 제등 위에 놓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업을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보았다.
대성당은 수세기에 걸쳐 건립되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1302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가 1300년 이전에 산타 마리아 교회 부지에 건립하기 시작했다가 중단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조토가 종탑을 디자인했으며, 그후 안드레아 피사노, 프란체스코 탈렌티, 기베르티, 브루넬레스키가 작업해 완성했다.
브루넬레스키는 고대 이래 가장 큰 둥근 지붕을 올려놓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는데 이런 무거운 지붕을 올려놓으려면 부축벽이나 이에 상응하는 힘을 지탱하게 하는 구조물이 필요한 데도 그런 것 없이 기하적으로 디자인했다. 브루넬레스키가 1446년에 타계했을 때 둥근 지붕은 올려졌지만 그 위에 장식물이 없었다.
대리석으로 제등을 막 만들 때였으므로 그것을 완성시켜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로서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했던 디자인이 모두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제등 위에 구체와 십자가를 올려놓아야 비로소 완성된다.
이 일이 베로키오에게 주어졌다. 그는 쇠로 제작했는데 폭이 6m에 높이가 107m로 무게가 2톤에 이르렀다.
이것을 제등 위에 올려놓은 후에야 대성당은 완공되었다.
1471년 5월 27일 모든 피렌체 사람들이 구체와 십자가를 높이 얼려 제등 위에 세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튿날 오후 3시 트럼펫의 팡파르가 울려퍼졌고 역사학자들은 이 날을 기념했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가자마자 공학부터 배우게 되었고 이 날 예술가이면서 공학가의 작품이 영광을 받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수학한 사람은 물론 레오나르도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페루지노, 로렌초 디 크레디, 보티첼리, 그리고 145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예술가들이 그로부터 수학했으며 기를란다요와 루카 시그노렐리도 그로부터 수학한 것 같다.
작가 우골리노 베리노Ugolino Verino는 1490년에 "베로키오의 제자들 거의 모두가 지금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갔을 때 그곳은 마치 피렌체 젊은 예술가들의 회합장소와도 같았을 것이다.
바사리에 의하면 베로키오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를 포함해서 젊은 예술가들은 그로부터 음악도 배웠을 것이다.
산드로 보티첼리는 레오나르도보다 일곱 살 혹은 여덟 살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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