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 이전에 월북한 작가들은 자진해서
북한으로 간 작가들은 대체로 두 시기에 걸쳐 월북한 것으로 1948년 8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25동란 이전까지와 6·25동란 이후부터 9·28 서울 수복 사이이다.
6·25동란 이전에 월북한 작가들은 자진해서 북한으로 간 것으로 짐작되지만, 6·25동란 이후 월북한 작가들 중에는 강제로 연행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서양화가로는 배운성, 김주경, 길진섭, 정현웅, 김만형, 최재덕, 이쾌대, 이순종, 윤자선, 이해성, 임군홍, 한상익, 엄도만, 방덕찬, 정온녀, 박문원, 기웅, 김용준 등이고 조각가로는 조규봉, 김정수, 이국전 등이다.
그리고 동양화가로는 이석호, 정종여, 이팔찬, 이건영 등이 월북했다.
조규봉(1917~?)은 인천 태생으로 1941년 윤효중과 함께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했다.
그 해부터 선전에 인물상 조소작품으로 거듭 입선했으며 1943~44년에는 <머리>와 <부인 입상>이 특선에 올라 조각계에 신예로 부상했다.
해방 후 그는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조선조각가협회 조직에 참여했고 조선조형예술동맹에도 간부로 활약하다가 1947년 월북하여 많은 혁명기념물 조각상을 제작했다.
그 이전에 제작한 작품은 남한에 전혀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평양미술대학 조각 강좌장 및 조각학부 부장을 지냈다.
김정수(?~?)는 서울 태생으로 동경의 일본미술학교 조각과에서 수학했고, 1938년과 1944년 선전에 입선했으며, 해방 후 조선프로레타리아미술동맹에 핵심간부로 가담하는 등 급진적인 좌경색을 나타냈다.
그는 조규봉과 함께 조선조형예술동맹 조각부 간부위원을 지냈고 자진 월북했다.
이국전(?~?)도 일본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으로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선전 조각부에 계속 입선했고 <머리>, <소년>, <어느 음악가의 머리> 등이 특선에 올라 신예로 부상했다.
1949년 제1회 국전에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흉상>을 출품했다.
그가 월북한 시기와 경위는 불분명하다.
남한에 그의 작품은 전혀 현존하지 않는다.
이석호(1904~71)는 경기도 안성 태생으로 1930년 이전에 김은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스승의 영향으로 섬세한 사실주의의 꽃, 새, 인물 등을 주로 그렸다.
안국동의 단칸셋방에서 처자와 생활하며 그림과 글씨에 전념했다.
1929년부터 협전에 출품했으며 1934년부터 선전에 거듭 입선했고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선전에 계속해서 출품했다.
김은호 제자들이 1936년 후소회를 결성할 때 그도 김기창, 장우성, 백윤무, 한유동, 장덕, 조중현, 이유태(1916~) 등과 함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해방 후 사상적 좌·우 대립이 극심할 때 그는 좌익 편에 서서 조선조형예술동맹에 가입했으며 이어 정치적 좌익노선을 분명히 한 조선미술동맹에도 가담했지만 김기창, 정종여처럼 간부가 되지는 못했는데 두 사람에 비해 작가로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에 서울에서 이응로와 2인전을 가졌다.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한 그는 평양의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을 지냈고 화조화·산수화를 그리다가 1971년에 타계했다.
남한에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거의 없다.